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덕리에 도로줌 마을이 있는데 도로줌 마을은 이 지역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자연 지명이 아니고 또한 이곳에 도로줌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도로줌 마을을 홍보하는 홈페이지에 "돌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가, 가뭄이 들면 머금은 물을 내보내어 농사가 잘 되게끔 도와줍니다. 이것을 '돌오줌'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을은 돌이 많습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서 돌에 이슬이 잘 맺히고, 연중 물이 끊이지 않아 농작물에 많은 이로움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일급수의 물이 자랑이기도 합니다. 또한 천혜의 자연이 준 오염되지 않은 우리 마을의 선물을 모든 이들에게 되돌려드린다는 중의적 표현으로 '도로줌'이라고 마을 이름을 명명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을 대덕숲과 함께 농촌 체험 휴양 마을로 개발하면서 새로 만들어낸 이름이라고 한다. 대덕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의 지역으로서 좌구산(座龜山) 밑의 큰 언덕이므로 큰덕골 또는 대덕동(大德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촌리(德村里)와 회곡동(灰谷洞)을 병합하여 대덕리라 해서 미원면에 편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언덕'을 의미하는 '덕'이 지명을 구성하는 요소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지역의 자연 지명을 살펴보면 '덕'이 '언덕'의 의미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돌'에서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대덕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 '돌팍골'인데 이를 한자로 '석전동(石田洞)'이라 표기한 것은 '돌팍골'이란 구전되면서 불리는 이름이고 실제로는 '돌밭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한자로 '덕촌(德村)'이라고 표기한 것은, '석전동(石田洞)' 이라 하면 이곳이 돌밭임을 금방 알 수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글자로서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명에서 '돌'이 '덕'으로 표기된 곳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는 '돌다리'를 '덕다리, 덕교(德橋)'로 표기하고 있으며, 보은군 회남면 사음리, 보은군 마로면 기대리, 보은군 수한면 거현리,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보은읍 학림리,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원남면 하당리 등에서는 '돌고개'를 '덕고개'로, 음성군 금왕읍 각회리, 쌍봉리, 용계리 등에서는 '돌골'이 '덕골'로 불리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돌'이 '덕'으로 변이되어 쓰이고 있었으므로 지명에서도 의미는 '돌(石)'이지만 한자로는 '덕(德)'으로 음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대덕리에는 아직도 '돌팍골, 큰덕골(대덕), 돌팍골 숲'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옛날에는 '돌골, 돌팍골'이 사용되다가 '돌골'이 '돌골 → 덕골 → 덕촌(德村)'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덕골'이라는 마을이 커지면서 '큰덕골'이라 불리는 지역이 생기게 되고 '돌팍골숲'은 '큰덕골숲'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여 대덕숲이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하여튼 대덕리는 돌이 많은 마을임을 알 수가 있는데 돌이 많은 지역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가 매우 힘들고 어렵다. 그리고 비가 오면 금방 배수가 되지만 돌밭이 오히려 가뭄을 덜 탄다고 한다. 왜냐하면 돌이 수분을 간직하고 있다가 천천히 방출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돌에서 스며나오는 물을 돌에서 나오는 오줌이라 표현한 것은 오줌이 농사를 짓는데 유용한 거름으로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줌 속의 요산이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암모니아로 바뀌게 되므로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을 때 비료로 사용해 왔다. 또한 암모니아에는 때를 없애주는 세정효과가 있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오줌으로 손을 씻는다는 내용이 있고 에는 오줌으로 세탁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중국의 양귀비도 피부 탄력을 위해 오줌 목욕을 애용했다고 한다. '오줌 누는 소리를 듣고 외상을 준다'라는 옛말처럼 오줌은 건강의 척도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으니 도로줌(돌오줌)이라는 지명은 도시인들이 휴양과 힐링을 위해 찾는 지명으로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도로줌이라는 이름이 지역의 특성과 농촌의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농촌의 특산물을 판매하는 사업 등과 잘 어울리면서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말이기에 농촌체험 휴양 사업장의 이름으로서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지명으로 영원히 자리잡기를 바란다.
옛 선조들은 여덟 가지 기준으로 물맛을 까다롭게 구별했는데 여덟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팔공덕수가 바로 충주의 달천수(達川水),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로서 조선 시대 3대 명수로 손꼽힌다. 충북의 지명을 산책하면서 가장 보람있고 뿌듯하게 생각됐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조선의 3대 명수 중 2개가 충북에 있다는 것이요, 그 중에 가장 좋은 물로 꼽는 것이 바로 충북을 굽이굽이 가로지르는 달천수라는 사실이다. 조선의 학자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고려 말 대제학을 지낸 이행(李行)의 말을 빌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이 좋은 물로 충주의 달천수를 꼽았고, 오대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우통수를 둘째로, 속리산에서 흐르는 삼타수를 셋째로 꼽았다. 그럼 왜 조선의 선비들은 달천수, 우통수, 삼타수를 3대 명수라고 했을까? 좋은 물이란 여덟 가지 공덕을 지닌 '팔공덕수(八功德水)'를 의미한다. 즉 가볍고(輕), 맑고(淸), 시원하고(冷), 부드럽고(軟), 아름답고(美), 냄새가 나지 않고(不臭), 비위에 맞고(調適), 먹어서 탈이 없는(無) 여덟 가지 물의 덕을 말하는데 달천수, 우통수, 삼타수는 이 여덟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춰 명수에 속한다는 것이다. 달천수는 충주 달래강의 물을 말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달래강은 보은군 내북면, 괴산군 청천면, 괴산읍, 충주시 달천동 일대를 지나 충주시 칠금동과 가금면 창동리 사이에서 남한강에 흘러든다. 달래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조선 최고의 물로 꼽는 데 손색이 없을 만큼 맑으며 그 맛 또한 청량하고 시원하다. 최근에도 전국에서 팔리는 생수 가운데 무려 90%를 바로 달래강 유역에서 취수한다. 달래강은 물맛이 좋다 해 '단냇물', '달냇물'로 불리웠으며 이 강에 수달이 많아 '달강'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현재에도 인근에 수달피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쪽 물가를 '물개달래'라고 부른다. 또 수달을 잡아 조정에 진상했다는 옛 기록도 있다. 또한 달래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남매가 이 강을 건너다가 소낙비에 젖은 누이의 여체(女體)에 욕정을 느낀 동생이 자신을 저주해 자결해버렸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누이가 "달래나 보지" 하고 슬퍼했으므로 '달래강'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서쪽의 수정암에서 발원한 우통수는 조선 시대에는 우중수로 불렸다. 우통수에 대한 내용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물 빛깔과 맛이 다른 물보다 훌륭하고 무거워 우중수라고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돼 바다로 들어간다.' 기록에 의하면 우통수는 한결같이 경수가 아닌 중수로 한강의 복판을 흐른다고 했다. 옛사람들은 이 물이 무겁기 때문에 다른 물과 섞이지 않고 한강 제일 깊은 곳으로 흐른다고 믿은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우통수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차를 달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속리산의 삼타수는 법주 약수로 불리는데 천왕봉 표지석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조선의 삼대 명수 삼타수, 달천수, 우통수 중 삼타수의 발원지입니다. 삼타수란 동으로 낙동강, 남으로 금강, 서로 남한강으로 흐르는 물을 말하며 이곳 천왕봉에서 나눠집니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는 상고암에는 어지간한 속병은 씻은 듯 낫는 신비한 약수가 하나 있는데, 이 팔공덕수가 바로 삼타수의 발원지다. 이곳에서 물줄기가 한강, 낙동강, 금강의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 해 삼타수 또는 삼파수라 한다. 속리산의 물이 좋다는 것은 수많은 암자의 이름이 물이 맑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수정동과 수정암을 비롯해 상류에 남산약수, 복천암, 탈골암, 상고암 등 물과 관련한 암자들이 자리한다. 문장대 입구에 위치한 내속리면 사내리 복천암은 조선 세조가 기도를 올렸다는 유서 깊은 암자다. 이곳 경내 큰 바위 밑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와 복천암이라고 불렀는데, 세조가 등창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지며 복천암 바로 아래에는 세심정(洗心亭)이 있어 마음까지도 맑게 씻어준다.
음성군 대소면 내산리에 '방울미'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 '영산(鈴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산의 모양이 방울처럼 생긴 방울산이 있어서 이 방울산 아래 있는 마을을 방울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괴산군 문광면 유평리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방축리에도 '방울미'라는 마을이 있는데 역시 유래는 방울과 연관이 있었다. 방울은 소리를 내는 물건이기에 산에서 방울 소리가 나지 않고서는 산의 모양을 방울 모양으로 본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분명히 처음에는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었는데 음운이 변이되면서 비슷한 소리를 가진 방울을 연상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여러 지역의 '방울' 지명을 찾아보았다. 정지용의 향수 못지않은 짙은 향수로 고향의 산하를 노래한 시인이 있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를 고향으로 둔 문인수 시인인데 이 시인의 시에 고향의 '방올음산'이 많이 나온다. 해발 782m의 방올음산은 북쪽으로는 금오산, 남쪽으로는 선석산과 이어져 있으며 산 정상 주변에 바위가 많다 하여 방암산, 바우암산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고 한다. 방올음산에는 옛날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저녁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온 고을에 울려 퍼졌는데그 종소리가 널리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고 지친 몸을 한없이 추스르게 한다고 해서 '방울 音 나는 山' 이라는 의미를 '方兀音山'이라 이두식으로 표기했다고 전해온다. 이 고장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두식 표기를 좇아 방올음산 바우람산 바아람산 등으로 편하게 부르고 있다. 종을 왜 방울(방올)로 크기를 줄여 표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어원이 '방울'에서 비롯되었다면 방울의 모양이나 의미까지 연관지어야 할 것이나 '방울'의 소리를 가지고 '방울'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나타낸 것이기에 소리가 나는 것이면 뭐든지 해당되는 것이므로 종이나 방울의 구분이 필요지 않았으리라. 방올음산은 삼각형의 거대한 푸른 종 하나가 하늘에 걸린 듯한 그런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이 산의 이름을 현령산(懸鈴山), 혹은 영암산(鈴岩山)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의 방오리는 본래 황주군 구락면의 지역으로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오리(方午里)라 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역시 '방울, 방올'과 같은 어원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충남 금산군 부리면의 방우리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시장리의 방오골, 평안북도 태천군 태천읍의 방울골 등도 '방울'이라는 소리를 가지고 있으나 역시 '방울'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명에 쓰인 '방울'은 어떤 의미를 가진 말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늘날처럼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도시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농업이 주업이었기에 벼농사를 짓는 농토를 가리키는 '배미'라는 말이 정말로 흔하게 쓰이던 말이었다. 따라서 '배미'의 모양과 위치를 가지고 부르던 말이 그대로 지명이 된 곳이 많다. 수리 시설이 발달하여 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배미'가 많이 늘어난 시기에는 '배미'를 구분하여 부르기 위하여 '높은 배미, 낮은 배미, 큰배미, 작은 배미, 윗배미, 아랫배미' 등과 같이 '배미'의 앞에 '배미'의 모양이나 위치를 가리키는 수식어가 붙게 되지만 수리 시설이 발달하지 못하여 '배미'가 드물던 시절에는 '배미'가 그대로 지명이 되어 '배미골(배미가 있는 마을이나 골짜기)'과 같은 지명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명에서 '배미'는 '뱅이, 방이'로 변이되어 쓰이는 예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방울미'는 '배미골'의 변이 과정에서 볼 때 '배미골미(배미골에 있는 산)→배미울미산→뱅이울미→방울미'으로 추정할 수가 있지 않을까· 또한 주민들이 '방울미'를 '방올미'라고도 부르는 것은 '방울'의 옛말이 '방올'이기도 하지만 본래 '방올'이었는데 '방울'의 이미지를 내세우다 보니 '방울'로 변이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배미골→뱀골→밤골→방골→방올'의 변이 과정도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방울미'가 '배미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산'이라는 말로서 그 산 아래 생겨난 마을을 가리키는 의미로 본다면 이제 '방울미'에서 방울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되겠지만 아름답고 영롱한 이름은 영원히 이어가기를 바란다.
농사를 짓는 농토를 가리키는 '배미'라는 말이 지명의 생성 요소로 많이 쓰이면서 '배미'의 변이음인 '뱀'이 지명에서 많은 유래와 지명을 만들어내었듯이 또 하나의 변이음인 '밤'이 쓰인 지명도 많이 보인다. '배미골'이 변이되어 만들어진 '밤골'이라는 지명이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영동군 학산면 도덕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밤이 많이 나는 마을에는 당연히 밤나무가 많을 것이므로 '밤골'은 자연스럽게 '밤나무골(밤나무가 많은 마을)'로 불리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밤나무골'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에 기암리, 계원리, 옥화리에 있는 것을 비롯하여 충주시 앙성면 목미리, 살미면 설운리, 금가면 월상리, 수안보면 화천리, 주덕읍 제내리, 노은면 수룡리,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봉양읍 장평리, 봉양읍 명암리, 한수면 서창리,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 수한면 차정리, 마로면 관기리, 속리산면 만수리,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음성군 대소면 태생리, 괴산군 칠성면 율지리, 청천면 후영리, 문광면 신기리, 칠성면 태성리, 단양군 단성면 두항리, 매포읍 도곡리, 영동군 용산면 한석리, 심천면 마곡리 등등 아주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친숙한 지명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어서 수확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중에는 실제로 밤나무가 유난히 많아서 밤나무골이라고 이름지은 지명도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대량 생산을 위하여 산을 온통 벌목을 한 후 밤나무를 대량 식재하여 밤나무 과수원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밤나무는 마을마다 가정집의 울타리 안이나 동네 주변의 곳곳에 흔하게 심는 나무이므로 밤나무가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지역과 차별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명이 생성되는 유연성으로 본다면 '배미골'에서 변이된 '밤골'을 밤나무와 연관지어 '밤나무골'이라고 부르게 된 지명이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밤'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면 '밤골'은 '방골'로 쉽게 변이되었을 터인데 굳이 '밤골'을 유지해 온 것은 아마도 '배미골'의 의미를 오래 간직해 왔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지명에서 '밤'의 활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옛 지명인 '방고개',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의 '방고개', 증평읍 율리의 '방고개' 등에서 한자로 '율(栗)'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밤고개'였음을 알 수가 있다.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방고개'는 예전에 '밤고개'라 불리는 자연 지명이 있었는데 한자로 '율봉(栗峰) 또는 율티(栗峙)'으로 표기하였으며 조선 시대에 이곳에 역을 세우고 '율봉역'이라 하였다. 이후 '율봉'을 근거로 하여 '율상(律上), 율중(栗中)'이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는 '율봉'과 인근에 있는 양지촌(陽地村)의 이름을 따서 '율양리'라 하여 청주군 사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청주시에 편입되면서 율량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명의 변천과정으로 본다면 율량동(栗陽洞)은 한글로 '율량동'이라 해서는 안되고 '율양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증평읍 율리의 '방고개(栗峙)'는 증평읍 율리 부점촌과 청원군 미원면 화원리 삼흥을 잇는 고개로 지금은 도로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승용차 통행이 가능하다. 원래는 '율치' 또는 '밤고개'라 불리었으며 고개 밑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김치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밤티'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에서 '밤고개'라는 지명이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 충주시 대소원면 완오리,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를 비롯하여 경기 안성시 삼죽면 율곡리, 경기 이천시 율현동, 경북 문경시 영순면 사근리, 경북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 전남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 충남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충남 청양군 정산면 광생리,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등에 분포되어 있고 한자로 '율티(栗峙)'로 표기한 곳도 옥천군 안내면 율티마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율티리의 '율티골' 등 여러 지역에 분포되었는 것으로 보아 '배미고개→밤고개→방고개'의 변이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배미로 가는 고개, 또는 배미 주변의 고개'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논 농사를 짓는 한 덩어리의 땅을 의미하는 '배미'라는 지명 구성요소가 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쓰이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불리면서 음이 변이되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바뀌는 예를 많이 볼 수가 있다. '배미'의 변이음인 '뱀'은 당연히 '뱀(巳'이 연상되므로 '뱀'과 연관지은 유래가 생겨나고 '뱀'의 의미를 가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양한 유래와 소리를 가진 지명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러면 '뱀'과 관련된 지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 2013년에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계사년(癸巳年) 뱀(巳)의 해를 맞이하여 뱀과 관련된 지명을 분석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150만여 개의 지명 중 208개가 뱀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뱀골'도 많이 있지만 '뱀골'을 한자로 표기한 '사동'을 비롯하여, '뱀재, 사도, 사포, 방사도, 배양, 뱀골고개, 뱀바위, 뱀산, 비사도, 사전' 등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배미골'이 자연스럽게 '뱀골'로 불리다보니 '뱀골'이라는 지명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뱀골'이라는 지명은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사리면 이곡리, 청천면 삼송리, 충주시 호암동, 연수동, 안림동, 소태면 오량리, 진천군 초평면 진암리, 덕산읍 산수리, 이월면 동성리, 청주시 흥덕구 상신동,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 음성군 금왕읍 백야리, 삼성면 용성리, 삼성면 상곡리, 소이면 비산리,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봉양읍 명도리, 금성면 사곡리,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안내면 서대리, 동이면 남곡리, 옥천읍 장야리, 보은군 보은읍 학림리, 마로면 송현리,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어상천면 덕문곡리, 대강면 장림리, 단성면 북상리 등 너무 많아서 예를 들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또한 고개 이름에도 '뱀고개, 뱀재, 배미재, 뱀티' 등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진천군 이월면 내촌리의 '뱀고개',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의 '뱀고개', 음성군 감곡면 단평리의 '뱀고개',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의 '뱀고개', 단양군 대강면 남천리의 '뱀재', 단양군 대강면 장림리의 '배미재',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의 '뱀고개골', 옥천군 청성면 소서리의 '작은뱀티(소사동)', 옥천군 청산면 대덕리의 '큰뱀티(대사동), 뱀티골, 뱀티재' 등의 지명들에서 고개가 뱀처럼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배미로 가는 고개'이거나 아니면 '배미 인근에 있는 고개'의 의미로 생겨난 지명으로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산이름에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의 '뱀산'을 비롯하여 충남 아산시 신창면 창암리의 '뱀산', 충남 서산시 운산면 팔중리의 '뱀산', 경북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의 '뱀산', 경북 의성군 가음면 현리리의 '뱀산' 등이 있다. 괴산군 문광면과 청천면에 걸쳐 있는 배미산(倍媚山)이 있는데 야미산(夜味山)이라고도 하며 등성이가 뱀 모양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제천시 수산면과 덕산면에 걸쳐 있는 '배미산'도 한자로는 야미산(夜味山)이라 표기한 것으로 '뱀'의 의미인 것이다. 지리산에서 널리 알려진 '뱀사골'도 '비암사'라는 절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있는 비암산도 '뱀'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경북 의성 구천면 용사리에 '뱀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비암개'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뱀'을 지역에 따라서는 '비암'이라고 발음하므로 비암산도 '뱀산'의 변이음이며 역시 뱀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얼마전 중국에 여행을 갔을 때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옌지시(延吉市)의 위성도시인 룽징시(龍井市)에 유명한 일송정(一松亭)이 있는 비암산(琵岩山)이 있다. 이 비암산의 이름은 '비파와 바위'를 의미하는 한자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런 맥락에서 남다른 감회와 반가움을 느꼈다. 그밖에도 옥천군 옥천읍 마암리의 '뱀바우'를 비롯하여 뱀과 관련된 지명은 엄청나게 많이 보인다. 그런데 뱀과 관련된 지명이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남부 지방에 특히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농경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뱀'과 연관된 지명은 실제로 '뱀을 가리키는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 '배미'가 어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뱀은 우리 조상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무섭고 힘센 대상이기에 오히려 집을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뱀과 관련된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의 김녕사굴(金寧蛇窟)은 자연 지명으로는 뱀굴이다. 이 뱀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어마어마하게 큰 뱀이 김녕 뱀굴이란 곳에 살았다. 이 뱀이 처녀를 바치지 않으면 굴 밖으로 나와서 밭의 담도 무너뜨리고 곡식들도 휘저어 버려 흉년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매년 처녀 한 명씩을 선정하여 희생으로 바쳐 이 재앙을 모면해 왔다. 어느 날 제주에 부임한 판관이 활을 쏘아 뱀을 죽여 버렸다. 그러고는 동원으로 돌아오는데 하늘에서 시뻘건 피가 비가 되어 내렸다. 판관은 미리 하인에게 동원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말을 하지 말라고 시켰는데, 하인이 피 비에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판관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천안시 적산읍 상덕리 덕령에도 뒷산에 굴이 있는데 옛날에 구렁이가 이곳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해를 많이 끼치는 것을 도승이 잡아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전설들에서는 뱀이 인간을 해치는 사악한 존재로 묘사되면서 뱀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뱀이 공포스럼고 힘센 존재인 만큼 오히려 신으로까지 숭배되기도 한다. 뱀을 보면 옴이 움츠러들고 공포를 느끼지만 꿈에 보는 뱀은 무척 상서로운 것으로 해몽을 한다. 뱀은 재(財)를 몰아오고 또 그것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오기 때문이다. 뱀꿈 가운데에서도 뱀을 만지는 꿈인 무사몽(撫蛇夢)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머슴이 이런 꿈을 꾸면 백석몽(百石夢)이라고 해서 난곡 백 가마가 생길 것이라며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어린애가 울면 '어비 온다, 어비, 어비...' 하면서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어비'는 '벌레'를 가리키는 말인 '업'에서 나온 말로 뱀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집집마다 '어비(업이, 業, 구렁이)'가 하나씩 있어서 가호신(家護神)처럼 여겨 왔다. 이 '어비'가 집 재물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업구렁이가 어쩌다 뜰이나 돌담 등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집안 아낙네는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껏 빌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업'은 복을 대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해서 복 있는 아이를 '업동이'라 하였다. 이처럼 뱀에 관련된 지명에 전해오는 유래나 전설이 반드시 뱀을 공포의 존재로만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고풍리의 '장사동'에는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는 뱀의 영생불사의 속성을 반영하여 이 지역의 주민은 장수한다는 유래를 만들어냄으로써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심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전의면 운주산의 '비암사(碑巖寺)'라는 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에 비암사에 젊은 청년이 매일 저녁 찾아와 밤이 깊도록 탑을 돌다가 아침이면 사라졌다. 스님이 궁금하여 물과 음식을 건네며 사연을 물어보아도 청년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더욱 궁금해진 스님은 탑돌이를 끝낸 청년의 뒤를 몰래 쫓아가니 그 청년은 바위굴로 들어갔다. 그 굴 속을 따라 들어가니 굴 속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그동안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를 해왔는데 그만 사람에게 들켜서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잘못된 호기심 때문에 구렁이의 환생을 막게 된 스님은 그날부터 구렁이를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후로 그 절을 뱀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전남 고흥군 동강면 한천리의 '뱀골고개(뱀골재)'는 고개를 넘을 때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큰 뱀을 만나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공포스러운 뱀의 존재를 이용하여 권선징악의 교훈을 실현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옛날에 대부분의 농토는 산을 개간하여 사용하는 밭이었을 것이고 특별히 물을 댈 여건이 되는 일부 지역에만 벼농사를 지었기에 벼농사를 짓는 '배미'는 드물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이 가진 농토이어서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벼농사란 손이 많이 가는 농사라서 자주 가보아야 하고 또한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하는 농사이기에 '배미'를 그 모양이나 위치에 따라 구분하여 부를 필요가 있으므로 이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 지명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높은 배미, 낮은배미, 큰배미, 작은배미, 긴배미, 배미가'를 비롯하여 '배미'의 인근에 있는 마을은 자연스럽게 '배미골'이라 불리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된다. 따라서 농촌 지역에서 지명으로서 가장 유연성을 가진 말로는 농토를 가리키는 말로 이루어진 '배미골'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배미골'은 벼농사를 짓는 논을 가리키는 '배미'가 있는 들이나 마을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천시 청풍면 대류리의 '배미골',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의 '배미골', 괴산군 문광면 흑석리의 '배미골',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의 '작은배미골',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의 '운봉배미골'을 비롯하여 타시도에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오추리의 '배미골', 경기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의 '배미골', 강원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의 '배미골', 충남 서산시 읍내동의 '배미골', 경기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의 '배미골', 전남 강진군 성전면 명산리의 '배미골', 경북 상주시 함창읍 대조리의 '배미골',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의 '썩은배미골' 등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배미'의 모양을 묘사하는 형식의 지명들은 주로 '( )+배미'와 같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형식의 지명을 충북에서 찾아보면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상야리의 '한배미' 는 '큰 배미(큰 논)'의 의미이고,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는 본래의 자연지명이 '대배미'였는데 한자로 '대야미(大夜味),대율(大栗)'로 표기하였다. 내수천 가에 큰 배미가 있어 대배미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처음에는 '한배미'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외에도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와 소이면 비산의 '장배미', 음성읍 평곡리의 '인배미',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의 '승배미들', 음성군 금왕읍 육령리의 '엄배미' 등을 들 수가 있다. 옥천군 동이면 지양리에는 '진배미'라는 지명이 있는데 논의 모양이 길어서 '긴배미'라 부르던 것이 구개음화라는 음운 변이에 의하여 '진배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경남 밀양군 산내면 원서리의 새보안이라는 마을에는 '질배미'라는 자연 지명이 있는데 논의 형상이 길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자로 '장야답(長夜畓)'이라 표기한 것을 보면 '긴배미→ 진배미→질배미'의 변이 과정을 유추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 천기리에도 '진배미'가 있지만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르면서 군사를 훈련했다는 장소도 진주시 수곡면에 있는 '진배미'였다. 사람들은 군사들이 진을 친 자리라 하여 진배미(陳배미)라고 한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억지로 결부시킨 것이며 사실은 '긴배미, 진배미'에서 온 말로 이러한 지명들이 한자로 '장사골, 장사동(長巳洞)'으로 표기되면서 힘센 장사들이 나온 마을로 둔갑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금왕에서 삼성으로 가는 583번 군도를 따라가다 보면 금왕읍 내곡리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 경사가 꽤 있는 고개가 있다.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높은 봉'이라 하고 한자로 '고봉(高峰)'이라 표기하고 있다. 높은 고개이니 자연스럽게 높은 봉우리와 연관지은 것으로 보이나 예로부터 주민들에게 전승되어온 지명은 '높은뱅이'였다. 여기에서 '뱅이'란 '배미'에서 변이된 말로 지명에 많이 쓰인높은 배미, 낮은배미, 큰배미, 작은배미, 긴배미 등의 예에서 볼 때 '높은배미→높은뱅이'의 변이 과정을 쉽게 유추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묵은 배미'는 '묵은 배미→묵배미→묵뱅이→먹뱅이→묵방리(墨坊里)'의 변이를 보이듯이 '배미'가 '뱅이', '방이'로 변이하는 것도 지명에서 매우 빈번하게 볼 수가 있다.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에 '날근터'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낡은'을 연음하여 소리내면 '날근'이 되므로 '날근터'라고 하면 '오래 되어서 못쓰게 된 땅'이란 의미로 생각되어 마을의 이름으로 삼기에 좋은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마을은 한자로 '낙은동(樂隱洞)'이라 표기하고 있다. '날근'은 '낡은'이 연음된 것으로 보면 결국 같은 말이므로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의 '날근이', 괴산군 불정면 앵천리의 '날근터(捺根垈)',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의 '날근터', 전남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의 '날근터',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의 '날근터들', 보은군 수한면 오정리의 '날근터골',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의 '날근터골', 충주시 주덕읍 대곡리의 '날근터골', 보은군 속리산면 하판리의 '낡은텃골', 괴산군 청천면 여사왕리의 '낡은직골',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의 '낡은터들',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의 '낡은터들',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의 '낡은터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대서리의 '낡은터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의 '낡은절골', 충남 공주시 동현동의 '낡은터지', 영동군 심천면의 '날근 소나무 밭' 등의 지명들은 모두 '낡다'는 의미를 지닌 지명들인 것이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름의 지명이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의 날근이 마을은 한자로 '노은(老隱), 일근(日近)'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대전 유성구의 노은동(老隱洞)과 충주시 노은면(老隱面)의 '노은(老隱)'도 '날근'을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우리 말소리를 표기하는 향찰식 표기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6.25 전쟁 중에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사건으로 알려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老斤里)'도 같은 유형의 지명일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날근'에서 온 말로 추정할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지명으로 즐겨 쓰이고 있는 '날근'이라는 요소가 지명을 처음 만들 당시에는 좋지 않은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변화된 것이라고 한다면 원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쓰이는 '낡다'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 따위가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게 되다'이지만 그 어원을 살펴보면 '(품질이) 내려가다'의 의미라고 한다. '낡다'의 어원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괴산군 불정면 앵천리의 '날근터'라는 지명의 지형을 살펴보니 대곡산과 무등산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서 만든 대곡 저수지에서 한참 아래쪽에 음성천 가까이 낮고 넓은 들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따라서 '날근터'란 '내려간 터' 다시말하면 '내려가서 있는 낮은 지역의 땅'을 의미하는 말로 볼 수가 있다. 지역 주민들도 '날근터'를 '늘 응달이 지는 땅'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의미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낡다'라는 말이 현재 쓰이는 의미로 보면 품사가 형용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사로 분류되는 것은 '내려가다'라는 동사에서 의미가 변화된 말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은 품사의 혼란은 '늙다'의 품사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이는 '늙다'가 '늙는다'와 같이 동사의 활용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일반적으로 형용사는 '-었-'을 쓰면 과거의 의미를 나타내는 데에 반하여 '늙었다'는 동사처럼 현재의 상황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 등이 논란거리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낡다'와 '늙다'가 품사 분류에 혼란을 일으키는 상태가 같다는 것은 그 말이 형성되어온 과정이 비슷할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즉 '늙다'는 '늘어 가다(나이, 세월 등이)'라는 복합동사에서 온 말이고, '낡다'도 '나려 가다(내려 가다)'에서 온 말이 아닐까? 2017년에 국립국어원에서 3분기 표준국어대사전 정보 수정 내용을 공개하였는데 '잘생기다, 잘나다, 못나다, 못생기다, 낡다' 등을 그동안 형용사로 분류해왔는데 동사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국립국어원에서는 '늙다'라는 말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명에서 '날근-'은 지형적으로 '아래로 내려가 있는 땅'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현재의 '낡은'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명의 유연성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며 이 지명들이 생기게 된 이유와 의미가 또렷해지지 않는가?
2020년은 경자년(庚子年)으로 쥐띠의 해가 된다. 쥐는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서 예로부터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한 동물이었다. 시궁창이나 음식물 쓰레기가 있는 곳에서 서식하기에 늘 지저분하고, 앞니로 문틈이나 곡식 저장 용기를 갉아서 구멍을 내기 일쑤이며, 특히 옛날에 방에서 잠을 자노라면 천장에서 운동회라도 여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통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지라 쥐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그러나 쥐의 생태를 살펴보면 번식력이 매우 강하고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으로서 예민하고 부지런하다 못해 바지런하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쥐띠에 태어난 사람들의 성격도 감수성이 좋고 성격이 예민하며 경계심이 많아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띠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아진다. 수많은 동물 중 왜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 등의 열 두 동물만이 선택됐을까· 또 그 순서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지 못한 쥐가 수많은 동물들의 대표인 열 두 동물을 가리키는 십이지에서 왜 첫 번째가 되었을까· 십이지의 순서에 대해서는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착한 동물 순으로 정하기로 했는데 섣달 그믐날 밤 미리 출발한 소의 등에 타고 있던 쥐가 결승점에서 달려 나가 1등을 했다는 이야기 외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극락으로 통하는 12개 문을 지키는 수문장을 동물들 중에 선정하여 1년씩 돌아가면서 당직을 세우기 위하여 열 둘의 동물을 불렀다. 그 중 고양이는 동물들의 무술 스승이라 제일 앞자리에 앉혔는데 고양이가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공교롭게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착했다. 부처님이 왜 동물의 수가 하나가 부족하냐고 묻자 마침 고양이를 따라 구경 온 생쥐가 달려 나와 '저는 고양이 친구인데 고양이는 수문장의 일이 힘들고 번거로워서 수문장이 싫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쩔 수 없이 쥐에게 고양이 대신 수문장을 맡으라고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고양이는 간교한 쥐에게 원한을 품고 영원토록 쥐를 잡으러 다니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고양이와 쥐는 천적 사이가 됐다고 한다. 십이지의 개념은 중국의 은나라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중기에 이르러 방위나 시간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십이지의 순서에 대해 여러 설화가 생겨났다. 동물의 발가락 수를 기준으로 정했다는 설, 각 시(時)에 활동하는 동물 순으로 정했다는 설,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착한 동물 순으로 정했다는 설 등이다. 십이지가 방위나 시간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면 각 시(時)에 활동하는 동물 순으로 순서를 정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쥐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지명에서도 쥐와 관련된 지명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일부 지역에 쥐꼬리 명당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에서 '서미혈(鼠尾穴)'이라 하여 명당으로 인정하기에 이러한 지명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의 초평저수지 인근에 쥐꼬리 명당이라는 지명이 있고 전남 무안군 몽탄면 내2리 화산마을에도 쥐꼬리 명당이 있다. 이 두 지역의 지명을 보면 화산리(花山里)에 있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즉 화산(花山)이란 '꽃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 '곶' 모양의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 '곶' 모양의 산이 바로 '쥐꼬리 명당(鼠尾穴)'의 지형과 일치하므로 이러한 지명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쥐는 앞발과 뒷발의 발가락 수가 다른 유일한 동물이다. 4개의 앞발가락은 오늘이고, 5개의 뒷발가락은 내일을 뜻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쥐띠 해를 맞이하면서 올 한해도 쥐처럼 부지런히 일하여 부자가 되는 한 해,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며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국토정보원이 발표한 새로운 산맥도와 우리 조상들이 만든 산경도에 의하면 우리 충북을 가로지르는 대표적인 산맥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이 아니라 한남금북 정맥이 된다. 한남금북 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하여 북으로는 한강과 남으로는 금강의 분수계를 이루며 충청북도를 북서방향으로 연결하고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까지 백두대간에서 남한의 정중앙을 잇는 큰 산줄기인 것이다. 속리산 천왕봉(1057.7m)에서 보은의 말티고개를 거쳐 시루산과 구봉산, 청주의 선도산과 상당산성, 괴산의 좌구산, 칠보산, 보광산, 음성의 보현산, 소속리산, 마이산을 지나 안성의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분기하게 된다. 이 정맥은 한강과 금강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산줄기의 동북쪽은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달천의 지류들이 괴산과 음성, 충주 지역의 젖줄이 되고 있고 남서쪽은 괴산, 보은, 음성, 진천, 청주 지역을 흐르는 미호천이 젖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충북의 대표적인 산맥이라 할만하다. 미호천은 그야말로 충북의 곡창이라 할 수 있는 중부 지역을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다. 미호천의 발원지는 음성군 삼성면의 마이산이다. 마이산 정상에서 솟은 물과 마이산 여러 골짜기에서 시작된 물이 양덕저수지와 모란 저수지로 모아져서 금왕 지역에서 흘러오는 도청천과 합해져서 대소에서 만나고, 광혜원에서 흐르는 칠장천과 이월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해져서 대소와 덕산에서 흘러오는 물과, 백곡의 계곡을 흘러 진천읍을 가로질러 내려온 백곡천, 음성의 원남과 맹동을 적시며 흘러온 물이 초평저수지로 모아져서 진천 농다리 인근에서 합해진다. 괴산의 사리에서 흘러온 물과 음성의 문암천, 청안의 문방천, 증평 율리에서 시작되는 삼기천이 모여 증평의 보강천을 이루고, 초정에서 흘러온 물과 넓은 오창들을 적시며 흘러온 물, 그리고 청주의 도심을 흘러온 무심천과 오창들에서 합류한다. 충남 병천에서 옥산을 적시며 흘러온 병천천이 미호천교 부근에서 합쳐지고, 조치원에서 내려오는 조천과 만나 금강으로 흘러가는 그야말로 우리 충북의 실핏줄과도 같은 하천이다. 또한 보은의 전 지역을 적시며 흘러온 하천이 대청호에 모여서 금강으로 흘러가고 청주의 전 지역에서 무심천으로 모여든 물은 미호천에 합쳐져서 금강으로 직접 흘러가게 된다. 그러면 한남금북정맥의 한남 수계인 달천의 지류들을 따라가 보자. 청주의 상당산성과 것대산, 선도산 들이 한남금북 정맥으로서 한강과 금강의 분수계가 되므로 이 산들의 동북 방향 능선에서 시작되는 물은 감천이라는 이름으로 낭성을 지나 미원천에 합쳐지고 미원천은 옥화대 인근에서 달천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간다. 청천을 지나면 뒤뜰(후평)에 물놀이와 야영을 즐길 수 있는 유원지를 만들어낸다. 내려가면서 화양동에서 흘러오는 물과 만나고 칠성댐에서 흘러오는 쌍천의 물과 만나는 동안 많은 물놀이장과 캠핑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괴산에서 흘러오는 물과 만나 제법 물줄기가 커지면서 제월대, 이탄유원지, 김시민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민사를 거쳐 목도를 지나면 음성읍과 소이면 지역을 흘러온 음성천과 합쳐져 충주시의 남쪽을 돌아서 충주시의 북쪽을 휘감아 내려온 남한강에 합쳐지면서 본격적인 강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충주를 흐르는 남한강은 저 멀리 강원도의 정선, 영월에서 시작된 물이 단양과 제천 지역을 거쳐 충주댐에 모여서 탄금대를 이르고 달천을 품고 경기도 여주를 거쳐 북한강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충북 지역의 물길은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로 나누어지는데 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하천이 달천이고 금강 수계의 대표적인 하천이 미호천이다. 한남금북 정맥이 두 물길의 분수령이 되는데 높은 산줄기는 당연히 물줄기가 나누어지지만 구릉지대로서 고도가 비교적 낮은 지역은 두 물줄기가 교차하는 것처럼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서 흥미롭게 생각이 된다. 이렇게 낮은 지역이 분수령이 되는 지역으로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의 추정재(머구미 고개)를 들 수가 있다. 또한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의 행치마을은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의 생가가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 있는 행치재는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라는 의미로 한금령이라 불리고 있기도 하다.
하늘에서 우리 한반도를 보면 산줄기가 어떻게 보일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도처럼 보일까, 아니면 우리 조상들이 350여년전에 만든 산경도에 가깝게 보일까? 많은 사람들이 산맥도처럼 보일 것이라 대답하겠지만 사실은 산경도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나라 국토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과 같은 외적 작용에 의해 오랜 기간 침식을 받아 산줄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수계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그린 산경도가 우리 땅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분수계에 의한 산줄기 인식 방법이 정확한 우리 지형을 파악하는데 적합하다. 일본은 화산과 지진 등 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땅이므로 지질구조선에 의해 산맥을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물리적으로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맥 지도는 지하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인 지질학자가 제작한 지도로서 단층선과 지질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산맥의 생성 원인, 지질 등 지형의 형성 과정과 지질 구조, 지하 자원의 분포, 토양 등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산경표를 지도로 표현한 산경도를 살펴보면 모든 산줄기가 이어진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형을 파악하기가 쉬우며, 하천의 유역과 생활권이 잘 구분되는 장점이 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과거에는 사람들이 높은 산을 넘어 왕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분수계 안에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문화, 언어, 음식 등이 비슷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산경도는 산지를 경계로 한 하천 중심의 전통 생활권을 파악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지역별 언어권과 주거 양식의 차이는 실재하는 산지를 경계로 구분되며, 5일장과 같은 정기 시장이 열리는 범위, 즉 사람들의 이동 범위에도 활용된다. 또한, 산지 분포는 등산과 여행에도 활용될 수 있으며, 지하의 물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수질 오염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경도의 중심을 이루는 분수계는 지역을 나누는 경계 역할도 하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지명을 어떻게 명명하고 한자로 어떻게 표기되어 왔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으며 지명의 어원을 밝히는 데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땅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강과 산, 하천, 고개, 골짜기 등의 모양(크다, 작다, 높다, 낮다, 길다, 짧다, 둥글다)이나 위치(위, 아래, 가운데)와 관련 지은 것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 또한 산경도를 그린 우리 조상들의 지리적 관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산의 이름에는 '백두산, 소백산, 함백산, 태백산, 소백산, 백마산, 백악산, 백운산, 백화산' 등에서처럼 높다는 의미의 '박, 백'이 수식하거나, '금수산, 금적산, 감악산, 거무산(현무산), 검단산, 오성산, 오두산' 등에서처럼 '크다'는 의미의 '금, 검, 감, 오(감-가마귀)'가 수식하는 경우가 많으며 '고개'의 지명에서도 '높고 큰 고개'라는 의미의 '박달재, 감우재, 말티고개, 박석고개' 등 단순히 산의 크기를 나타내는 이름도 있지만 생활에 관련된 수식어가 붙어 만들어지는 지명도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고개는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피반령(옛 사람들의 주식인 피밭이 있는 고개), 새재(이화령과 하늘재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고개), 방고개(밤고개, 율티-농사짓는 농토인 배미로 가는 배미 고개) 등을 들 수가 있으며, 그 밖의 지명들은 지형과 생활 관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지게 된다. 예를 들으면 잣고개는 '산을 넘는 고개'라는 의미이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없게 되자 한자로 '柏峙(백치), 梨峙(이티)'로 표기되어 그 음이 바뀌기도 했지만, 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농산물을 이고 지고 고개를 넘어서 5일 장을 갔다가 필요한 물건을 짊어지고 다시 고개를 힘들게 넘어오는 일이 잦아지자 고개 이름을 아예 장고개로 바꾸어 부르는 지역이 의외로 많다. 또한 길이 산으로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마을이 '산막골'이요 돌로 막히면 '동막골'이라 했으며, 산줄기가 양쪽에서 뻗어내린 사이에 있는 고개가 살구지재(사이고지 재)가 되고 이러한 지형에 놓인 다리가 살구지다리(사이고지 다리)가 되는 것이니 이 모두가 산경도에 따른 산줄기를 따라 만들어지는 이름이 아니던가·
옛날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는 시험 공부를 위해 우리나라의 산맥 이름을 달달 외웠었는데 그 중에서도 차령산맥은 충북의 주된 산맥이라 하여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10여년 전에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 산맥이라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던 일이 생각나서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배웠던 산맥 개념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3년에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지질학자가 조선에 와서 불과 일 년 동안에 측정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지리학자인 양보경 교수는 "일제가 교묘하게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백두대간을 5조각으로 동강을 낸 다음 산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이를 한국 지리에 인입시켜 백두산이라는 우리 민족의 성산을 족보에도 없는 산으로 만들고 우리 민족이 신성시 여기던 범을 늑대와 결합시켜 호랑이로 만들어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像圖)를 토끼 모양으로 만들어 나약하고 힘없는 나라로 인식케 한 것이 별다른 의도없이 생긴 것일까"라며 일제의 의도적인 창지개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호랑이'라는 단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고 범 혹은 호(虎)라고 불렀다. 호랑이는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던 범을 우리 문화에서 없애는 작업과 병행하여, 광물을 파악하는 이런 지질 조사 작업과 산림과 토지를 빼앗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측량을 하는 과정에서 삼각점을 산꼭대기에 박아야 했는데 이 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범(虎)과 늑대(狼)였으므로 이를 없애기 위하여 사냥꾼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포획하고 사살하여 멸종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1980년 이우형 선생에 의해 산경표가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지리 인식과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후폭풍은 양산된 40대 이후의 실업자들을 대거 산으로 내몰았으며 백두대간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하면서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인해 그동안 전문 산악인들에 의한 등반 위주의 산행에서 누구나 도전하고 즐길 수 있는 일반인의 산행으로 산행의 패턴이 변화하면서 백두대간 종주라는 새로운 풍조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지난 2005년 국토연구원은 위성 영상 처리 및 지리정보시스템(GIS) 공간분석기법과 각종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한반도 지형을 3차원으로 재현한 산맥 지도를 발표하였다. 새로운 한반도 산맥은 현행 교과서에 수록된 산맥 체계와는 크게 다르지만 산경표의 백두대간 체계와 비슷하고 대동여지도의 산줄기 체계와는 매우 흡사했다고 국토연구원은 밝혔다. 특히 한반도 등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의 경우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이 추가령구조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끊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조사 결과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금강산, 설악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총길이 1494.3㎞가 끊임없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입증됨으로서 백두대간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동안 사용해 오던 일제가 만든 산맥도를 일제 청산이라는 맥락에서 폐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리고 하루빨리 초중등 교과서에서 산맥도를 새롭게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기존 지리학회의 반발과 학문적 논란이 계속되어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2009년 교육과정 개편 때 '조상들의 국토관'이라는 제하에 산경표가 지리교과서에 실리게 되었고, 우리의 산경표가 선조들의 지리 인식 정도로나마 소개된 것이 그동안 진정한 우리 국토의 산맥도를 찾고자 애써온 사람들이 노력한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분수계를 산맥의 기준으로 하는 산경표와 새로운 산맥도에 의하면 차령산맥(車嶺山脈)은 충주 부근에서 남한강의 횡단으로 분리되므로 산맥이 아님이 분명하므로 '차령산맥은 없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며 충북 지역에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되돌아 보는 데는 물론 충북의 지명을 연구하는 데 도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일제의 자원 침탈을 위한 지질구조도를 가지고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된지 7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가 만든 산맥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얼마나 한심하고 업신여길 대상으로 보이겠는가· 한일 갈등이 심해질 때는 일본을 욕하면서 일제 청산을 외치다가 슬그머니 사그러지는 우리 국민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서 일제 청산을 할 겨를이 없었다고 치더라도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산맥도가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작성한 지질구조도라는 의미에서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산경도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산경도가 산맥도보다 얼마나 정확하고 훌륭한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는 1980년에 인사동 한 고서책방에서 발견되어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2004년에는 를 들고 산하를 누비던 '박성태'라는 사람이 의 오류를 수정하고 자신의 견해를 추가하여 라는 책을 냈고 2010년에는 북한의 모든 산줄기를 포함한 완전한 산경표와 산경도를 작성하여 개정증보판을 내기도 했다. 2019년에 라는 책을 낸 전북산악연맹 김정길 부회장은 "를 들고 산하를 누비며 살펴보니 도로를 내거나 개발을 이유로 끊긴 산줄기가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왜곡되고 훼손된 곳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아렸습니다. 오늘날의 위성사진보다 가 더 정확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가 산악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으며 의 정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를 근간으로 만든 스마트폰 앱이 개발되어 산악인들은 물론 약초나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까지 애용할 정도로 가 얼마나 우리의 산하를 잘 표현하고 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는 우리 산을 할아버지 산부터 아버지 산, 아들 산 등 족보식으로 너무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이며 이를 지도로 그린 것이 이다. 산경표 안에는 주맥의 개념으로 1대간, 1정간, 13정맥의 15개 산줄기로 분류하고, 그 산줄기에 백두대간 등 이름과 대간, 정간, 정맥으로 격을 부여하였고 그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들의 흐름을 기록하여 나라의 골격을 완성하였으며, 산과 고개 이름, 분기된 산줄기의 분기점과 흐름, 산줄기의 방향, 행정구역, 주요 지방과의 거리, 지명 유래와 지형 설명 등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지명의 어원을 밝히기 위한 지명 명명 유연성을 알아보는데도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책인 것이다. 산경표에 분류되는 산줄기는 땅과 물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원리와 뜻을 담고 있다. 그 원리가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양쪽 물을 가르고 있다는 뜻이 포함된다. 산은 곧 양쪽 물줄기의 젖줄인 동시에 울타리이며 물줄기의 분수령인 것이다. 산에 올라서 볼 때 좌우 양쪽이 다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 바로 능선이며, 능선 중에 가장 높은 곳을 산봉우리라 부르고, 가장 낮은 곳을 안부, 사람이 넘어 다니는 안부를 고개, 재라고 한다. 이렇게 산봉우리- 안부 – 봉우리 – 재(고개) – 봉우리 - 안부와 같이 길게 뻗어나간 지형을 그냥 '능선'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규모가 클 때는 산줄기라고 한다. 계곡이 끝나고 개울이나 내가 시작되는 곳은 물이 있고 농경지로 사용할 수 있기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된다. 따라서 를 보면 이런 지형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길도 나 있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그 지형의 상태에 따라 지명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경도에 나타나는 지리적 사실에서 '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하며 물의 원천은 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계곡에서, 강에서 하루 종일 흘러 다니는 물방울 하나하나는 모두 산에서 스며 나온 것들이므로 산을 이해하려면 강을 보면 된다는 사실과 강줄기를 분류하고 나면 산줄기는 저절로 나뉜다는 지리의 기본 원리를 알게 되니 산경표가 얼마나 귀중한 조상의 유산인가?
일제의 조선 식민지 수탈을 위한 창지개명의 시초이면서 가장 악랄한 것이 바로 산경도를 없애고 산맥도를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산맥도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19세기에 조선은 금이 많이 나는 미지의 땅으로 서양에 알려지면서 각국이 조선의 금광 채굴권을 얻기 위하여 광분하였다. 당시에는 서양의 강대국들이 앞다투어 무력으로 약소국을 차지하여 식민지로 만들어 부를 축적하던 때였으므로 일본은 서양의 강대국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조선에서 많이 생산되는 금을 비롯한 지하자원이었다. 그래서 1900년 가을에 고토분지로(小騰文次郞)라는 지질학자를 조선으로 파견하여 조랑말 4마리와 6명의 인부를 데리고 지질조사를 하였고, 1902년에 다시 조선으로 보내어 같은 방식으로 조사를 실시한 다음, 266일에 걸쳐 조사한 두 차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의 전통 산줄기인 백두대간 등 15개 산줄기를 36개로 분해하여 '산맥(山脈)'이란 임의의 이름을 부여한 "조선산악론 및 지질구조도"라는 논문을 1903년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하였고, 1908년에는 조선의 교과서에 싣도록 하는 등 조선 수탈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당시에 이를 눈치 채고 정연호라는 분이 1906년에 '최신 고등 대한 지지'라는 책에 우리 산줄기를 있는 그대로 실었으나 일제 통감부에 의거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최남선이 주도하고 장지연 등이 실무자로 있던 에서 위기 의식을 느껴 1913년에 를 영인본으로 편찬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는 대동여지도 같은 어려운 책은 없애지 않았는데 이 책은 민족정기 말살차원에서 공개를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출판 배경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되어 가는 우리 나라 산줄기의 갈래와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민족적 저항 의식이 깔려있다. 이 활자본의 책머리에 실린 서문 겸 해제에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의 지지는 산을 논한 것이 많으나 허물을 들추어 보면 산란하고 계통이 없다. 『여지고』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인데, 그 「산경(山經)」에 산의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높이 솟아 큰 산이 되고, 옆으로 달려가 고개가 되고, 산이 굽이돌아 안아서 읍치(邑治)를 만든 것 등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산의 근원을 알려주는 조종이 된다. 『산경표』는 「산경(山經)」을 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부기한 것을 목(目)으로 삼아 나열하여 놓았으니, 모든 구역의 지경과 경계가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탕으로 삼은 「산경」의 금상첨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이 될 만하다 하겠다." 고 하면서 『산경표』를 우리나라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낸 책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산맥도가 사용되면서 '산경표'에 실린 우리 전통적 산줄기 이름은 잊혀지고 "지질구조선 = 산맥"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 갔으며 그렇게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일제 학교교육을 통하여 인문지리와는 무관한 고토의 지질학적인 개념인 '산맥'을 전수 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그러면 란 어떤 것일까· 는 1769년 영조의 명을 받은 여암 신경준이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두대간을 그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서 파생된 산줄기 강줄기 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옛부터 발달해온 군현읍 지도와 지리서를 근간으로 하여 그 때까지 축적된 지리학적 지식과 정보를 학문적인 체계를 갖추어 족보형식으로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정보 종합서'라고 하겠다. 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의해 인문 지리적으로 쓰여졌으며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알기 쉽도록 만든 지리서이다. 그래서 한강 수계와 금강수계가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충북의 지형을 한남금북정맥으로 정확히 기술함으로써 지명을 연구하는데도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창지개명의 잔재를 청산하는 좋은 본보기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일대의 호미곶(虎尾串)을 들 수가 있다. 이곳은 한반도 지형에서 꼬리 부분으로 꼽히므로 16세기 이래 김정호, 최남선 등의 학자가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상이며, 백두산이 코라면 이곳은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지목한 땅이다. 그런데 일제는 한반도를 호랑이 상이 아닌 토끼 모양으로 왜곡하면서 땅 이름도 장기갑(長鬐岬)으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기(鬐)'란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의 의미를 지닌 말로 1995년부터는 장기곶으로 불리다가 2002년 들어 호미곶(虎尾串)으로 이름을 확정하여 오늘날 국민들에게 해맞이 장소로 유명한 호미곶(虎尾串)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와 미래의 기상을 지닌 훌륭한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창지개명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부딪치는 문제의 하나는 지명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가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행정 단위인 시, 군, 읍, 면, 동, 리의 이름인 행정 지명은 행정안전부, 하천과 도로명은 국토교통부,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나 지역에 붙여진 이름인 산과 고개, 골짜기, 들판 등의 이름인 자연지명은 해양수산부 국토지리정보원, 해양, 해협, 만, 포구, 수로 등의 이름과 해저지형의 지명은 국립해양조사원 소관이어서 지명의 변경을 일관되게 추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005년 녹색연합에서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22개 땅이름을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으며, 2006년 안전행정부에서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명칭, 왜곡 가능성은 적으나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명칭이 붙여져 고유 명칭으로의 복원이 필요한 명칭, 어감과 의미가 나빠 주민들이 변경을 희망하는 명칭, 단순히 방위를 나타내는 등 지역 특수성 표현이 부족해 정비가 필요한 명칭 등을 대상으로 조사 정비를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두 1회성으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특히 공부를 정리하는데 많은 예산이 소요되다보니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일제가 새로운 이름으로 인한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호감이 가는 한자를 사용함으로서 주민들이 변경을 희망하지 않거나, 이미 고착된 상태여서 창지개명된 지명을 되돌리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충북에서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지명 변경을 시도하다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2007년에 시민단체에서 국토지리정보원에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지명 정비 요청 민원을 제기하였다. 속리산 '천황봉(天皇峰)'이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보면 '천왕봉(天王峰)'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제에 의하여 '천왕(天王)'을 일본의 '천황(天皇)'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천황봉(天皇峰)'으로 바꾼 것이 분명하므로 다시 '천왕봉(天王峰)'으로 바꾸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단체들과 지역 주민들이 오랜동안 '천황봉(天皇峰)'으로 사용해 왔으므로 바꾸기가 어렵고, 조선 시대의 다른 문서에는 '천왕봉(天王峰)'으로 표기되어 있어 원래부터 혼용되어 쓰이던 것이므로 일제에 의하여 바뀐 지명이 아님을 주장하며 불가하다고 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보은군 지명위원회는 천황봉을 천왕봉으로의 개명을 의결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왜곡된 지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속리산 여러 봉들이 불교와 연관된 명칭이 많고 각종 고지도와 문헌집을 살펴 볼 때 '천황'보다는 '천왕'으로 불리었음이 정통성이 있다고 보아 본래 지명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개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지도를 보면 천왕봉과 천황봉이 혼용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와같이 부분적으로 일시적인 시도를 하다보면 오류를 범하거나 시행착오를 겪을 수가 있으므로 지역단위로 지명 변천 과정을 조사하고 지명의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며, 지명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언어 형태적 특성은 물론, 지명이 생성된 지역의 지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거쳐 바로잡아야 할 대상을 골라낸 후 전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예산을 마련하고 일시에 변경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국민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일제 청산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