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수시로 변화되는데 어학적으로 본다면 언어의 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언어의 변이는 지명의 변이와는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즉 언어의 변화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휘의 의미가 변하고 상실되면서 저절로 변해가는데 비해서 지명의 변화는 좋은 의미를 가진 말로 변이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고 하겠다. 언어의 변이는 주로 유사한 소리값을 가진 말로 변이해 가기 때문에 일정한 언어학적 법칙이 존재하게 되고 이에 따라 언어의 변화 과정을 거꾸로 재구하기가 비교적 쉬우며, 언어는 자의성(恣意性)과 사회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개인이 의도적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명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지명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바꾸고자 하는 지명의 전설, 유래를 그럴듯하게 지어내면 합리화가 가능하며, 이러한 변이는 지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경우 의도하지 아니한 이름으로 변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명의 변화는 주민이 의도한 대로 바꿀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주민들이 좋아하는 의미를 가진 지명, 즉 보다 나은 지명으로 변이해 가는 특성으로 본다면 지명의 변화는 변이라고 하기 보다는 진화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적합할 것이다. 예를 들어본다면 산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들판으로 벋어 있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벋은 내'라는 지명은 내(川)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이 지역에 생기는 마을도 '버드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버드내'는 버드나무를 연상하게 되어 한자로 '유천리(柳川里)'로 진화한다.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전북 부안군 보안면,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전남 신안군 자은면, 전남 함평군 신광면, 전남 화순군 동복면, 전남 화순군 화순읍, 경남 사천시 사남면 등지에 '유천리(柳川里)'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으며, '내'가 아니고 '마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천(川)'을 '촌(村)'으로 바꾸어 '유촌리(柳村里)'로 진화한 지역이 충북 금왕읍 유촌리라고 하겠다. 이렇게 보면 유촌리(柳村里)는 유천리(柳川里)보다 좀더 진화된 지명인 것이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의 '호계(虎溪)'는 '범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는 '벋내'가 '범'과 연관지어 '범내'로 진화하고 한자로 표기하여 '호계(虎溪), 호천(虎川)'이 되는 것이다. 청주시 흥덕구의 봉명동에는 '봉명'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근거가 되는 '봉계(鳳溪)'라는 지명이 있었고 자연지명으로 '범골'이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벋내'가 '범내, 봉내'로 진화하여 한자로 '봉계(鳳溪)'로 표기하고 '벋골'이 '범골'로 진화하여 한동안 불리어온 것으로 보인다. 지형의 형세를 나타내는 이 '벋(버드)'이라는 지명 요소는 바위와 연결되면 '벋바위'가 되고 '벋바위'는 '범바위'로 진화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충주시의 호암동을 들 수 있겠지만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금지산 정상에 있는 바위도 호암(虎岩)이고 서초구 우면동 뒷산에 있는 바위도 '범바위, 호암(虎岩)'이라 부른다.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의 호암(虎巖)마을은 호랑이와 연관된 관광 시설물을 만들고 축제를 만들어 유명한 관광지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 지역에는 '범내, 범천, 호계' 등 진화 과정의 흔적들이 고스란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벋바위'라는 지명의 진화의 압권은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봉황(鳳凰)'으로 진화한 것이라 하겠다. '벋바위'가 '범바위'로 되는 것은 음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어느 지역에서나 유사한 변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 '범바위'의 음이 '봉바위'에서 '부엉바위'로 진화하면서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부엉이바위'가 생겨나고 한자로 '휴암(·岩)'으로 표기하는 지명이 나타나게 되며 '봉바위'는 한자로 '봉암(鳳岩)'으로 표기하면서 결국 인간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새인 상서로운 '봉황(鳳凰)'으로까지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음성군 금왕읍 본대리에 '버니'라는 마을이 있는데 자연지명으로 보기에는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떤 말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본대리는 본래 충주군 법왕면의 지역인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리(本里), 응대리(鷹岱里), 후평리(後坪里)와 금목면 장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본리와 응대의 이름을 따서 본대리라 하고 금왕면에 편입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응대리(鷹岱里)는 자연 지명인 '매터골'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며, 후평리(後坪里)는 자연지명 '뒤뜰'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본리(本里)'는 자연 지명 '버니'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자어로 '본리(本里)'라 표기한 것을 구전으로 전해지다 보니 발음하기 쉽도록 '버니'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리(本里)'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이름일까? 금왕읍 본대리의 '본리(本里)'는 충주군 법왕면의 면소재지였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면(面)이라는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면의 행정관서가 있는 마을 즉 면소재지인 마을을 가리켜 '면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본리(本里)'라는 행정명을 만들었다. 따라서 '본리(本里)'라는 지명에는 예로부터 불리어오던 유래가 있을 리 없으며, 고유의 마을 이름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리(本里)'로 불리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유의 이름을 잃어버렸으며, 일제에 의하여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면의 행정 중심지가 바뀌면서 '본리(本里)'라는 이름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니 '본리(本里)'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지역이 많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금왕읍 도청리의 '쇠누골'이라는 마을도 옛 금목면(金目面)의 면소재지로서 한때 '본리(本里)'라 불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음성군 대소면은 1914년 일제에 의한 군면 폐합에 따라 충주군의 대조곡면(大鳥谷面)과 충주군의 소탄면(所呑面)이 합해진 곳인데 소탄면(所呑面)의 면소재지 마을도 '본리(本里)'라 했다고 전해진다. 충주시 대소원면의 '본리'는 본래 충주군 이안면(利安面)의 지역으로서 자연지명이 '이안'이었는데 이안면의 면소재지가 되면서 '본리(本里)'라 하였으며, 1914년 군면폐합시에 독동, 당저리, 노옥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본리'라 하면서 '본리'라는 이름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보면 충남 당진시 순성면의 본리, 경북 예천군 호명면의 본리, 대구광역시 달서구의 본동 들이 면소재지로서 '본리(本里)'라는 이름을 명명하였던 지역으로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예라고 하겠다. 원래 '본(本)'이란 '본인(本人), 본교(本校), 본국(本國)' 등에서처럼 나를 중심으로 하는 무언가를 가라키는 말로 쓰인다. 따라서 지명에서 나타나는 '본리(本里)'는 조선시대에 '면(面)'이라는 행정구역을 획정하면서 '본마을'이라는 의미로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의 행정명을 일률적으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지명으로 전해오는 지명에서는 지명요소로서 '본(本)'의 예를 찾기가 어렵다. 다만 '본리(本里)'로서가 아니고 '본(本)'이라는 요소가 다른 말과 함께 지명요소로 쓰이는 예가 있다면 금왕읍의 '본대리(本岱里)'의 예에서처럼 합성지명에 나타나게 되므로 이 때의 '본(本)'은 '본리(本里)'에서 온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금왕읍 본대리의 '버니'가 '본리(本里)'에서 온 말이고 '본리(本里)'는 법왕면의 면소재지의 의미로 지어진 말이라면 이 지역에 신설된 대금고등학교의 교명 작명 과정에 이러한 역사성을 반영하지 못한 데 대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원래 대소면과 금왕읍의 경계지역에 세워진 학교라서 대소금왕고등학교라 했다가 대금고등학교로 변경했지만 바람직한 교명이란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전통, 교육적 의미 등이 반영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법왕면 면소재지의 역사적 의미를 살려서 '대왕고등학교'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 '고태'라 불리는 자연지명이 있다. '괴터, 괴태, 괴테'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귀대(鬼垈), 귀곡(鬼谷)'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전해오는 자연지명을 음차와 훈차를 이용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 부근에 괴혈(鬼穴)의 명당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한자 표기된 지명에서 유추한 것으로 보인다. '괴'를 '귀(鬼)'로 보는 것은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의 '괴터골'과 상통한다고 하겠으며 강원도 동해시 이기동의 '귀터골', 경북 상주시 외서면 대전리의 '귀터골'과도 같은 예라고 하겠다.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를 이어주는 해발고도 810미터의 '이기령(耳基嶺)'은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이(耳)로 표기하였다고 전해지는 등 다른 의미의 지명도 있지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위치한 '괴밭산' 주변의 자연지명을 보면 '괴박산, 괴톨재, 무당봉, 무당골, 상여바위' 등으로 보아 모두가 '귀신(鬼)'과 연관이 있는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고태'는 한자로 표기하기 전의 자연지명으로서 언어의 변이 과정이나 지형으로 보아 '곶터'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이며 이의 흔적을 다른 지명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곶'의 원래의 의미는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내민 땅, 바다로 길게 뻗어 세 면이 바다로 둘려 있는 작은 육지'인데 지명에서는 바다가 아니라도 산줄기가 들판으로 길게 뻗은 지형을 '곶'이라 하였으며 우리 조상들이 만든 한국식 한자로 '곶(串)'으로 표기하였다.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의 고자마을은 '곶처럼 길게 뻗은 산줄기에 있는 마을'의 의미이며, 의왕시에서 수원시, 화성시 평택시를 흐르는 황구지천(黃口池川)은 '한(큰)+고지(곶)+천'으로서 '큰 곶(고지)이 있는 강'이라는 뜻으로서, '한'이 '황'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과 인천광역시 남동구 고잔동의 '고잔'은 '곶안(곶의 안쪽)'이라는 의미이다. '곶과 곶의 사이'이거나 '곶의 안쪽'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지형이므로 '곶안→고잔→고장'의 변이을 거쳐서 '마을'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 '고장'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의 '고장산'이라는 지명을 예로 들어볼 수가 있으며 제주도 방언에서는 고장을 고단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말에 '곳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을의 상여를 보관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곳'이란 어디에서 유래한 말일까? 한자 '고(庫)'의 훈(訓)은 '곳집 고'라고 한다. '곳집'은 순수한 우리말일 것이므로 '곳집'을 '고(庫-창고)가 있는 집'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을의 상여를 보관하는 집'을 '곳집'이라 했을까? 이는 '곳집'을 '곶집'으로 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즉 '곶집'이란 '곶(길게 뻗은 산줄기)'에 지은 집을 말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로 볼 때 길게 뻗은 산줄기의 끝에 위치하는 땅은 산줄기의 기가 모여 있는 명당의 자리에 해당하며, 이러한 위치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당(서낭당)이 있게 된다. 또한 마을(곶안)에서 가장 명당의 위치이기에 인간의 집이 아닌 '신(神)이나 귀(鬼)'의 집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상여를 보관하는 집'인 곳집은 귀신과 연관이 있기에 '곶'에 위치하는 것이며 '곶집'이 '곳집'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의 '곳집마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의 '곳집마을'들은 '곳집의 인근에 있는 마을'의 의미이며 지명으로서 많이 쓰여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북 구미시 도량동의 '고자터', 경남 산청군 오부면 대현리의 '고자터'는 '곶터'로서 '곶이 있던 터'의 의미인데 '곶'이라는 산줄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곶터'를 '곶집터(곶집이 있던 터)'의 의미로 본다면 '곶터'를 '괴터, 괴태, 귀터, 귀곡'이라 표기하여 귀신과 연관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옛 단양읍인 단성면 소재지에서 우화교(羽化橋)를 건너 단양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59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단양 팔경의 백미인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만나게 된다. 우화교는 1753년(영조 29년) 단양군수(丹陽郡守)였던 이기중(李箕重:1697~1761)이 단양천(丹陽川)에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크고 높아서인지 아니면 새의 날개 모양의 돌 장식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화교(羽化橋)'라 이름 짓고 다리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다리는 홍수에 떠내려가고 비석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 정말로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를 듯한 높고 큰 다리를 세우고 우화교라는 이름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조상님들께 조금은 면목이 서는 것 같다. 우화교 바로 위에는 '복도소(復道沼)'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라고 한다. 물이 맑고 깨끗하며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목욕을 하면 몸과 마음까지 깨끗해질 만큼 훌륭하여 이황이 이곳에서 별업(別業)을 이루었으므로 자연 암석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의 경치가 너무 빼어나다 보니 하선암 아래는 소선암이라 하여 관광 시설이 들어서고 상선암 위의 벌천리에는 특선암이라 부르는 경관이 있다. 벌천리는 본래 단양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단양천의 상류가 세 개의 내로 벌어져 있다고 하여 '벌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기동(宮基洞)'과 '산안(山安)'을 병합하여 '벌천리(伐川里)'라 하여 봉화면(단양면)에 편입되었다. 궁기동(宮基洞)은 궁터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공민왕의 피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무사들이 궁술(弓術)을 연마하던 곳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단양 지역의 명산으로 손꼽히는 도락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궁기동(궁터골)은 발만 담가도 더위가 싹 가실만큼 시원해 더위를 식히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곳으로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깊은 산골짜기의 험한 지형에 옛날에 임금이 사는 궁(宮)이 있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우므로 무사들이 활(弓)을 연마하던 곳이라는 유래가 다시 만들어진 것을 보면 '궁'은 '궁(宮)'과는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궁기리, 경북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의 궁터골, 충남 당진시 신평면 남산리의 궁터, 경북 영덕군 달산면 흥기리의 궁터, 강원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의 궁터,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의 궁터 등이 모두 '궁(宮)'과 연관짓고 있지만 모두가 궁 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궁'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벌천리에서 궁기동을 가기 위해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궁(대궐)'이 있었던 터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냥 깊은 골짜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골짜기를 의미하는 고어에 '굼'이라는 말이 있는데 '굼'은 '궁'과 유사한 음을 지닌 지명요소로 지명에서 '구만리(굼안이), 귀만리, 구안리, 굴안이, 구미' 등으로 변이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궁터라는 마을은 지형이 '활 궁(弓)'자처럼 되어있다고 하여 "궁터"라 하였는데, 그 뒤 '궁(弓)'보다는 '궁(宮)'이 좋다고 하여 궁터(宮垈)라 쓰게 되었으며 후에 "궐리(闕里)"라 바꾸어 부르면서 현재 행정명이 오산시 궐동(闕洞)이 되었다. 이와같이 '궁(弓)'이 '궁(宮)'으로 그리고 '대궐(闕)'로 그 의미가 변했다는 것은 옛날에 '궁(대궐)'이 있었을 정도로 이 지역이 명당임을 내세우고 싶은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굼(골짜기)'과 유사한 음을 지닌 '궁(宮)'을 연관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벌천리 지역에도 '안궁터골'이라는 자연지명이 있어 한자로 '내궁기동(內宮基洞)'이라 표기하는데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앞에 쓰이는 것으로 보아 '궁터'는 지형을 묘사하는 말이 분명하므로 그 어원을 '굼(골짜기)+터'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터'는 '덕'에서 온 말로 '언덕, 또는 집이나 마을이 들어설 수 있도록 약간 돋아 있는 땅'을 의미하므로 '궁터골'이란 '골짜기 인근의 약간 돋아 있는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양읍에서 신단양의 상징인 고수대교를 건너 고수재를 굽이굽이 넘어가면 가곡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절벽 위의 고갯길이었지만 오늘날은 59번 지방도가 개통되어 삼봉대교를 건너 도담터널을 지나 하덕천대교를 건너면 바로 가곡에 이르게 된다. 고수대교를 건너서 고수재를 올라가지 말고 직진하면 바로 고수동굴이 나오는데 이 지역의 행정구역이 대강면 고수리에서 단양읍 고수리로 바뀌었다. 그러면 '고수리, 고수재, 고수동굴'이라는 지명에 나타나는 '고수'는 한자로 '고수(古藪)'로 표기하는데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말일까? 고수동굴은 원래 '금마굴, 까치굴, 박쥐굴, 고습굴'이라 불리어 왔는데 '고수동굴'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고습굴'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고수재'를 주민들은 '고습재'라 부르고 있는데 '고수'라는 말은 '고습'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습'을 '숲'으로 보아 '수(藪)'라 했을 것이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에도 '고수리(高樹里)'가 있는데 고수부지(高水敷地)를 행정 명칭으로 표기하면서 숲을 형성하였다는 뜻으로 아름답게 쓰기 위해서 고수(高樹)라고 한자를 바꾸었다고 전해지지만 숲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예전에 '고습'이라는 음이 지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습'이란 무슨 의미일까? 두 지역의 지형과 이러한 지형을 묘사하기 위하여 지명에 쓰이는 고어를 살펴볼 때 '고습'은 '곶솝(곶의 안쪽)'이 '고솝, 고습'으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솝'은 '속(안쪽)'의 고어로서 이 지역의 자연지명에 '안고습(내고습)'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솝'이 '습'으로 변이되어 그 의미를 잃자 같은 의미인 '안(內)'를 중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고수동굴은 '산의 속에 뚫린 굴'이기에 당연히 '곶솝굴(산줄기의 속에 있는 굴)'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수재(고습재)는 '솔고개, 송현(松峴)'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의미와는 전혀 연관이 없고 다만 '솔'이 '작다, 가늘다'라는 의미의 고어이기에 '오솔길'처럼 '좁고 험한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사용되고 있다. 고수동굴(고습굴) 위에 있는 고수재(고습재)를 넘어 가곡(佳谷)으로 가 보자. 가곡(佳谷)은 본래 영춘군의 지역으로서 가야골의 이름을 따서 가야면(佳野面, 加也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곡면(大谷面)의 사평(沙坪), 대대(大大), 어의곡(於衣谷)의 3개 리와 군내면(郡內面)의 보발리(寶發里)를 병합하여 가야(佳野)와 대곡(大谷)의 이름을 따서 가곡면(佳谷面)이라 하였는데 1931년 차의곡면(車衣谷面)의 향산리(香山里)를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가곡(佳谷)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합성 지명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의미와 이미지이므로 그렇게 어색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옛 기록에 보면 '가야'라는 나라 이름을 '가라, 가량, 가락'이라고도 표기했으며, 고어의 '갈라진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하듯이 '가래산, 가래실, 가래들' 등 지명에서 많이 쓰이는 '가래'가 여러 지역에서 한자로 '가야'로 표기된 지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가야골'이라는 자연지명도 인근에 '가래산, 고내골, 가야나루' 등의 자연지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라진 지형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가곡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옛 우리말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지명들이 많다. 예전에 행정명으로 쓰이던 '차의곡면(車衣谷面)'이라는 지명은 '수릿골'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며 '어의곡(於衣谷)'은 '엉어실'을 표기한 것이다. '엉어'라는 고어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웃덩어실'에서 '덩어'로 소리나는 것은 아마도 '웃(L)'에서 연음된 소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백산 등산의 시발점으로 유명한 '새밭'은 언뜻 듣기에 '새가 날아다니는 밭'의 의미로 들리지만 '새로 된 마을'이란 의미라고 하며 이두식 한자로 '을전(乙田)'이라 표기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여천(麗川)라는 마을도 한자로는 '곱고 아름다운 냇물'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원래의 지명은 물이 말라서 늘 말라 있으므로 '여우내(여윈 내)' 또는 '건천(乾川)'이라 했는데 교활한 이미지의 '여우'가 연상되고, 농사에 도움이 되도록 물이 항상 많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천(麗川)'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옛 단양읍(현 단성면소재지)에서 풍기, 영주를 가려면 죽령을 넘어가야 하는데 죽령을 넘기 전에 단양의 대강면을 거쳐야 한다. 오늘날 대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대강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가 청와대 만찬주로 사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강 양조장에서 이 막걸리를 드시면서 앉은 자리에서 6잔을 드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2015년에는 대한민국 팔도 막걸리 미식 테스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정도로 맛을 인정받았다.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단양읍 이전을 계획할 때 처음에는 대강면 소재지가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면서 대강면이 단양군의 군청소재지가 되는 꿈에 부푼 적도 있었으나 후에 매포읍 별곡리로 이전 계획이 바뀌면서 현재의 신단양이 건설되었으니 참으로 무상하다 할 것이다. 그러면 대강(大崗)이라는 지명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듣기에 '대강 대강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의미처럼 들리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과 무분별한 합성 지명의 피해라고 할 것이다. 대강면은 본래 단양군의 동쪽이 되므로 동면(東面)이라 했으며, 1914년 금강면(金岡面)이라 하였는데, 1917년 대흥면(大興面)과 병합하여 대흥(大興)과 금강(金岡)의 이름을 따서 대강면이라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추풍령, 죽령, 조령 등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영주, 풍기, 안동 지역에서 과거를 보기 위하여, 또는 관리들이 업무차 한양을 가기 위해 넘는 고개가 바로 죽령이었는데 죽령을 넘으면 단양, 제천으로 가는 길목에 대강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곳에 장림역(長林驛)이 있었으며 장림역에 달린 원(院)이 용부원(龍夫院)이었기에 오늘날 용부원리(龍夫院里)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장림역이 있던 장림리(長林里)는 대강면의 면소재지가 되었다. 죽령(竹嶺)은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5년(158년)에 이 고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대나무숲을 이루었다 하여 대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죽령이라 부르지 않고 '죽령 대재'라 부르는 것은 '죽령(竹嶺)이라 쓰고, 대재라 읽는다'는 의미이고 예전에는 실제로 그랬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죽령(竹嶺)'은 기록에만 존재하는 한자 표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는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대나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지역은 대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추운 지역이지만 대나무는 종류가 매우 많아서 '조릿대'라 부르는 작은 대나무는 추운 지역에도 산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생활 도구를 만드는데 '조릿대'가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대'를 '큰 대(大)'로 보아 '큰 고개'의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대재'는 처음부터 '대나무가 많은 고개, 대나무를 채취하러 가는 고개'의 의미로 명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죽령의 길목에는 다자구할미집이 있는데 '죽령산신묘, 국사당'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인조 원년(1623년)에 죽령 일대에 도적떼가 웅거하여 죽령을 넘어다니는 행인들을 괴롭히므로 관군을 풀어 토벌하는데 어느 노파가 관군을 인도하여 도적을 섬멸케 하였으므로 다자구할미, 죽령산신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단양, 영춘, 풍기 군수가 모여 국사당에서 다자구할미에 대한 제를 지냈는데 일제 강점기에 흐지부지해지자 용부원리 주민들이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다자구할미집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내는 '국사당'인데 주민들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활용된 것으로 짐작되며 오늘날 장림리의 장터를 '다자구할매장터'라 부르고 용부원리에는 다자구할매비를 세워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전해오는 노래의 내용으로 볼 때 '다자구'란 '다 잔다(도적들이)'는 의미이고 '돌자구'란 '다 깨어 있다'는 의미의 신호로 추측이 되며 주민과 관군이 힘을 합쳐 도적을 물리치는 감동적인 모습이 노래에 담겨 이어져 온 것이다.
언제나 봄인 곳, 봄이 오래 머무르는 곳, 봄이 길어 늘 봄인 곳이 바로 영춘(永春)이다. 듣기만 해도 왠지 따뜻하고 새싹이 돋아나는 새롭고 힘찬 느낌이 든다. 영춘(永春)은 단양에서 남한강 상류 방향을 따라 59번 국도로 가다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서 군간교를 건너서 522번 지방도로 5㎞ 정도를 가서 영춘교를 다시 건너면 영춘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단양읍과 영월읍의 중간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강원도 영월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영춘은 오늘날 단양군의 한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영춘현, 영춘군이었다. 특히 영춘은 남한강 뱃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1894년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남긴 기행문 속에, 남한강 상류를 나룻배를 타고 이곳을 여행하면서 조선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아름다운 풍광을 기록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1755년에 태어나 1788년에 세상을 떠난 유만주라는 분이 흠영일기에서 영춘 북벽과, 남굴(온달동굴)에 대하여 묘사한 글이 전해온다. 삼국사기에 보면 온달이 아단성을 되찾아오겠다고 출전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온달 산성이 바로 아단성으로 추정되므로 오늘날 온달산성 아래에 드라마세트장과 온달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역사의 현장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쏘가리 낚시와 캠핑의 성지라고 하는 영춘 북벽에는 남한강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 온달동굴도 이곳에 위치한다. 1899년에 편찬한 영춘군읍지(永春郡邑誌)에 의하면 영춘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고, 이 지역을 백제가 차지하면서 아단성(阿旦城)이라 하였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점령한 후 한 단계 승격시켜서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 하였으며 551년에 신라에 점령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계립현(鷄立縣) 죽령(竹嶺) 서쪽 땅을 찾고자 출정하여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자춘현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영월)에 속하였으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는 영춘현으로 불렀다. 1399년 (조선 정종 1년)에 충청도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에 영춘군으로 승격된 후 1914년에 단양군에 병합된다. 영춘은 남한강이 휘돌아가는 지형이라서 단양처럼 자주 물난리를 겪는데다가 물 건너 외진 곳에 위치하여 행정이 매우 불편하므로 연산군 2년(1496년)에는 현 소재지를 어상천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공론이 일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니 영춘(永春)의 지명 덕이 아니겠는가? 단양군 영춘면의 별방리(別芳里)는 본래 영춘군(永春郡) 차의곡면(車衣谷面)의 지역으로서 '별왕골' 또는 '별방골'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각동(角洞)과 구미동(九味洞)을 병합하여 별방리라 해서 단양군 차의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차의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영춘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영춘면 인구가 2천139가구, 1만3천74명에 달하여 행정 업무를 분담하고자 1976년에 별방 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이 때 별방 출장소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가 1998년에 폐지되었다. 영춘면의 별방리는 고려말기 왕씨가 박씨를 가장하여 살다가 발각되어 끌려갔으므로 왕씨가 이별했다는 골로 '이별 별(別)'자와 왕을 뜻하는 '임금왕(王)'자를 써서 별왕(別王)이라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은 '벼랑(낭떠러지)'에서 온 말이다. 벼랑이라는 지형과 관련된 지명은 엄청나게 많다. '벼랑'이 지명에서 변이되어 '바랑골(벼랑골), 발왕산, 별왕골, 바랑미, 발산, 바람골, 벼락바위, 바리골, 족지곡(足芝谷), 파랑리, 비알산, 비하리, 낭골'로 심지어는 '비렁뱅이들'이라는 지명까지 생겨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발왕산도 이 산에 팔왕(八王 - 하늘, 대지, 구름, 별, 물, 바람, 해, 나무)의 묫자리가 있다 하여 팔왕산(八王山)으로 불리다가 발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임금 왕(王)' 자를 일본의 천황을 의미하는 '왕(旺)'으로 바꾸었는데 2002년에 제 이름을 찾았다. 또한 이 산이 임금의 기운을 가진 산이라 해서 발왕산이라 했다고도 전해지기도 하지만 그 어원은 '벼랑'인 것이며 현재 단양읍 소재지인 별곡리(별곡리)의 원래의 자연지명도 '벼랑골'이었으니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온 지명들인 것이다.
천년 고도인 옛 단양의 풍수를 보면 뒤로(북쪽) 남한강이 흐르고 앞으로(남쪽) 큰 산인 두악산이 가로 막고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이 아니므로 도시 형성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예상된다. 다만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잦은 국경 지역으로서 적성산은 천혜의 요새이기에 일찍부터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지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산성 마을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적성산에 남아있는 신라 적성비는 단양의 이러한 역할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사 도시인 단양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시설로 봉화대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봉산' 또는 '봉화대'라 부르는 산은 단성면 중방리에 있는 해발 443.9m의 산으로 강변에 우뚝 솟아서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수리산'이라 불리어 왔으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면서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라 하여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 죽령, 서쪽으로 청풍군 오현봉수(吾峴烽燧)에 응하였다고 한다. 단양의 진산 역할을 한 것은 아무래도 두악산(斗岳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악산은 단양의 남쪽에 있어서 '남산(南山)'이라 불리어 왔으며, 산의 지형이 불의 형상이어서 단양 읍내에 불이 많이 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읍내 북쪽에 큰 못을 파고 두악산 봉우리에 소금 항아리를 묻었다 하여 '소금무지산'으로도 불린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이 목욕 재계를 한 후 한강물과 소금을 이 항아리에 넣고 지성껏 빌면 아이를 낳는다 하여 매년 정월에는 수많은 부인들이 다투어가며 이 산을 올라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두악산 줄기가 남한강으로 뻗어가면서 적성산을 이루는데 그 안부를 넘는 고개를 놋재라 부른다. 놋재는 옛 단양(단성면)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험한 고개이므로 예전에 늙은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하여 '노호재(老虎재)'라 불렸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지만 이것은 유사한 음을 가지고 유추하여 만들어낸 민간어원설로 추정이 되며 한자로는 '노티(路峙), 노현(路峴)'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되자 민간 어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놋재'는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놋재는 단양에서 올라갈 때는 경사가 급하지만 북하리 방향으로 내려갈 때는 경사가 완만하여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개를 나타내는 지명은 '말티고개, 박달재, 감우재, 갱고개, 고모령' 등에서처럼 고개의 크기를 묘사하거나 '늘재, 느릅재, 노루목' 등에서처럼 고개의 험한 정도나 경사 정도를 묘사하게 되므로 놋재는 '느르재, 느릿재, 늘재'가 '놋재'로 변이된 것으로 그 어원을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단양에서 놋재를 넘어가면 북하리라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북하리는 본래 단양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뒷들의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뒷뜰, 하북평(下北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하리라 해서 봉화면(단양면)에 편입되었다. 북하리는 옛 단양에서 바라보면 두악산과 함께 남쪽이요 앞쪽이 되지만 지형상 단양에서 고개 넘어에 있기에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이름을 감당해야 했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죽령천을 '뒷내, 북천(北川)'이라 불러온 것을 보면 단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지명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명은 '뒷들(北坪)'이지만 죽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굳이 놋재를 넘어 단양을 들렀다가 되돌아올 필요가 없으므로 이곳이 단양을 대신하는 길목 역할을 하였다. 옛 단양 기차역도 북하리 들판에 있었으니 어쩌면 교통으로 보면 단양의 중심지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옛 단양읍은 두악산 아래 산줄기의 경사진 곳에 위치하여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적은데 비하여 이곳 북하리에는 '마들(앞들), 뒷들, 샛들(사이들)' 등과 같은 자연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어 단양의 곡창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단양역'이라는 이름의 기차역이 신단양으로 이전하고 마을 위의 하늘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되었으니 세월이 무상하기만 하다. 불이 잘 나던 마을이 이제 호수가 되어 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져 소금무지산(두악산)의 항아리에는 이제 더 이상 소금이 필요없게 되었으니 우리 조상들의 천년의 숨결이 머물던 아름다운 기억들과 흔적을 차곡차곡 모아서 소금 대신 묻어 보는 것은 어떨까?
단양은 남한강가에 위치하여 유난히 수해가 심하였다. 그 옛날에도 물난리가 얼마나 자주 있었으면 물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의 의미를 지닌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겠는가? '단양(丹陽)'이라는 지명 속에는 물의 피해를 막아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조상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간절한 염원이 배어 있다. 또한 옛 단양의 진산인 두악산을 소금무지산이라 부르는 것도 위대한 자연의 힘과 자연을 다스리는 신의 힘을 빌어 수해를 막고자 하는 안간힘으로 소금항아리를 묻었다는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다. 단양의 수해는 현대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가 불어 닥치면서 150년 만의 대홍수로 기록되고 있는 이때의 장마를 단양 사람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재민이 1만366명에 달했고 95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냈으며 거의 모든 도로와 하천이 유실된 당시의 참상은 기억하기조차 두려운 물난리였다. 단양군청 소재지가 있던 단양읍(현재 단성면) 시가지는 물속에 파묻혀 아예 흔적도 없었고 매포읍 시내 역시 물 위로 집채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6·25 사변 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았던 군청의 보존 자료가 대피할 겨를도 없이 떠내려갔으니 그 피해의 심각함이 오죽했으랴. 그 해의 단양 수해에는 잊지 못할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바로 증도리(甑島里)라 불리던 시루섬의 재난이다. 이 섬에는 당시에 44가구 2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강물이 점점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둠이 덮쳤으며 사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시루섬에서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순간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어렴풋이 보이는 물탱크를 향하여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물탱크 위로 올라갔다. 높이 6m 지름 5m의 시멘트로 된 물탱크 위에서 190여 명이 물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아 둥글게 울타리를 만들어 밤을 꼬박 새운 끝에 14시간만인 이튿날 아침에야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후 100일 된 아기가 압박을 못 이겨 숨을 거뒀지만, 아기의 어머니는 이웃들이 동요할까 봐 밤새 아기를 껴안은 채 슬픔을 삼켰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후 충주댐 공사로 수몰되기 전까지 단양에서 제천으로 가는 버스가 매일 이곳 시루섬을 통과하였는데 마을은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나무들만 외로이 서있는 모래섬일 뿐이었다. 수몰된 후에는 도로가 산 밑으로 이전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눈물겨운 사연을 다시 생각하고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지내다가 오늘날 단양이 수해를 벗어나고 전국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하게 되자 단양군에서 다시 그 때의 일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서양의 타이타닉 정신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시루섬의 정신이 있다. 시루섬의 기적으로 주민들이 보여준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잘 기록 보존해서 단양의 역사와 후대에 전하겠다"는 단양군의 포부가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전해져서 세계적인 명소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 나기를 기대해본다. 시루섬이라는 지명은 어떤 의미일까? 시루섬은 본래 단양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시루 모양의 섬이라서 '시루섬' 또는 한자로 '증도(甑島)'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증도리(甑島里)라 해서 봉화면(단양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시루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강변에 띠를 두른 듯한 모양이 생겨 시루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평시에는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언덕의 형태일 뿐이다. 지명에 보면 시루산, 시루봉이 많이 나타나는데 '시루'는 고대어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고대어인 '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어 '살'은 '살 > 술+(이) > 술이 > 수리'로 변이되었으며 장구한 세월동안 모음과 자음의 변화를 통하여 '수리, 시리, 시루, 수레, 솔, 술' 등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따라서 시루섬의 원래의 의미는 '큰 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명을 시루섬이라고 부른 우리 조상들의 꿈과 소망이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충청북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제천에서 국도 5호선으로 동쪽으로 30여 ㎞를 더 가야하는 천년 고도 단양(丹陽)으로 가 보자. 단양은 오늘날 관광지로 전국에 알려져 있으나 충청북도에서도 가장 오지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공무원들의 귀양지로 여겨 왔던 곳이다. 국도 5호선은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미륵도와 함경북도 자성군 중강면을 잇는 총 연장 1252㎞의 일반 국도로서 한반도 국도 중 거리가 가장 긴 노선인데, 그 중간에 해당하는 제천-단양 간의 도로는 지금은 많이 보수하여 나아졌지만 참으로 험한 길이었다. 단양을 가는 지름길로 충주에서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도로가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조금 가깝지만 강변을 따라 구비구비 곡예하듯 가야하는 길이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으로 경덕왕 때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고려사지리지』(양광도)에 '단산현(丹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赤城縣이라고도 함)으로 충숙왕 5년(1318)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에서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후의 고지도나 고문서에는 단양(丹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에는 읍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소야촌면, 조산촌면 등 7개 관할면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읍치는 읍내면 하방리에 있었으며, 하방리는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될 때까지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양군 읍내면과 서면을 합하여 봉화면으로 개칭되고, 북일면과 북이면이 병합하여 매포면으로, 소야촌면과 조산촌면을 병합하여 적성면으로, 대곡면과 가야면을 합하여 가곡면으로, 영춘군은 단양군에 통합되면서 영춘면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 대흥면과 금강면을 합하여 대강면이라 하고, 봉화면은 다시 단양면으로 고친 후 단양읍으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단양은 1980년대의 충주댐 건설로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하게 된다. 단양군의 군청소재지인 단양읍 중심지의 80% 정도가 수몰되고 단양군 청사와 단양읍 주민들이 신단양(당시 매포읍 별곡리)으로 이전하면서 옛 단양 지역에는 구단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구단양은 1992년에 단성면으로 승격되지만 천년고도인 단양이 하루아침에 시골 면소재지로 바뀐 것을 단암(丹巖) 우탁(禹倬),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하여 옛 단양 군수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의 조상님들이 본다면 얼마나 놀라실까? 1985년 봄! 집집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붉은 꽃잎으로 뒤덮인 모습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단양(丹陽)이었다. 그러나 단양 주민들이 정든 고향, 정든 집을 남겨두고 눈물 흘리며 신단양으로, 대강면으로, 적성면으로, 충주·청주를 비롯한 타지역으로 이주해 간 후의 단양은 전쟁이 지나간 것처럼 폐허가 되었다. 단양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의 폭파를 시작으로 건물을 철거하는 중장비 소리만이 귀에 쟁쟁하더니 여름에 접어들기 전에 물에 잠기기 시작하며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남겨놓은 개성의 왕궁터는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만들어냈지만 천년고도 단양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연단(鍊丹)'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조양(調陽)은 빛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후에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사인암 등의 바위가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적산(赤山). 단산(丹山)'이라는 이름들이 공통적으로 '붉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지명의 유래로서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단양(丹陽)의 이러한 옛 이름들은,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단양군 어상천면에 있었던 단산고등학교(丹山高等學校), 적성비(赤城碑)에서 강 건너 내려다보이는 단양군 적성면(赤城面), 옛 단양읍터에 남아 천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단성중학교(丹城中學校)와 단성면(丹城面) 등에 남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
지명은 단순한 지형의 형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생겨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각종 이미지를 부여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개인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소망에서부터 주민의 안위와 행복, 나아가서는 국태민안을 염려하는 사상과 철학이 스며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지명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명 속에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함께 역사가 스쳐 가면서 전설과 유래가 점차 보완되고 다듬어져서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이 만들어지고 민족의 문화를 이루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지명이 이러한 변화를 거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언어의 마술사가 마술을 펼치는 듯 감탄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구렁'이라는 말은 '땅이 움푹하게 패인 곳'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지명에서는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에 생기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구렁골'이라는 지명이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를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 보은군 보은읍 산성리,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등지에 보인다. 그런데 '구렁'과 유사한 음으로 '구렁이'와 연관지은 지명도 있지만 많은 지역이 '구룡(九龍)'으로 변이시키면서 '구룡리, 구룡동'이 되었고 아홉 마리의 용과 관련된 근사한 유래나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또한 '구렁산'은 '구룡산'으로 변이된 지역도 많다.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남동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산의 형세가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九龍爭珠形)이라는 풍수지리와 관련한 유래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주민들은 '구렁봉'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고 '구렁'을 용이 아닌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구렁산이 원래의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과 지동동에 걸쳐 위치한 부모산(父母山)은 고려 시대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부모산의 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모두 무사하게 목숨을 건지게 되자 산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고 하여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학적인 어원 분석과 전국의 불무산의 분포와 그 유래로 보아 '붓(불어나다)+뫼(山)+산'이 '불무산'으로 변이된 후 '부모산'이 되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그리고 부모처럼 은혜로운 산으로 찬란하게 변모하게 된 것이다. 속리산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말티고개는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에 위치하는 고개이며 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구경 오면서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길을 닦도록 명하고 얇은 돌(박석)을 운반하여 깔았으므로 오랫동안 이 길을 '박석길, 박석고개'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속리산면 장재리에 있던 별궁(현 대궐터)에서 타고 왔던 가마를 말로 갈아탔다 하여 말티재, 말티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박석고개는 '박달고개'에서 온 말로 '큰 산을 넘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진 고어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티고개'는 '크다'는 의미의 고어인 '말'이라는 지명요소가 붙어서 '큰 고개'의 의미를 가진 이름일 뿐인데 이처럼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세조 임금까지 등장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만든 솜씨가 놀랍지 않은가?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에 있는 꽃동네는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꽃동네를 가려면 '꽃네미'라는 큰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꽃동네가 있는 위치에는 예로부터 '꽃님이'라는 동네가 있어 자연스럽게 시설의 이름을 '꽃동네'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꽃네미'는 원래 '곶너미'를 말하며 여기에서 '곶'이란 '평지에서 솟아나온 언덕'이라는 의미이고 '너미'란 '넘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개'라는 말보다 먼저 쓰인 순수한 우리말이다. '꽃'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곧(곧고 바르다)'의 교훈적 이미지로 변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화산(花山-곶미), 직티(直峙-고드너미), 행치(杏峙, 살구나무고개·사이곶고개), 고지리(古池里), 구지리(求芝里), 구지섬(九芝島)'으로, 나아가서는 '고잔(곶의 안쪽)', 고장(마을)'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음성과 진천의 지역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혁신도시에 올해 3월 1일 새로운 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행정 구역으로는 음성군 맹동면 동성리에 있고 2014년에 이미 동성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가 개교하였으므로 교명에 대한 논란이 없이 자연스럽게 동성고등학교라 한 듯하다. 그런데 동성고등학교의 교가 가사를 작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역의 지명과 지형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서 난감한 일을 겪게 되었다. 지금은 한자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기에 인터넷에서 학교명을 찾아보니 '東星高等學校'라 표기되어 있었다. 아무 의심이 없이 그대로 믿고 '동녘의 샛별'이라는 문구를 교가 가사에 포함하였는데 확인차 행정관서에 문의를 해보니 여러 단계로 확인 검토를 거친 후에야 '東星'이 아니라 '洞城'이 맞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성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유래를 되짚어보니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시골 지역에 새로 신설되는 학교는 대부분 단위 행정 구역에 초중고가 하나 정도 있게 되므로 행정 지명을 따라서 학교 이름으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 지역적 위치를 알려주는 기능과 함께 지역의 대표성을 지니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서가 거꾸로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옛 단양읍 지역에는 단양중학교와 단양여자중학교, 단양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1985년 충주댐으로 수몰되면서 단양중학교와 단양고등학교가 신단양에 설립이 되고 옛 단양여중고 건물에는 이 지역에 남아있는 학생들로 재편된 남녀공학의 중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학교 이름도 이주한 학교에서 모두 그대로 가져 갔기에 구단양 지역의 학교 이름은 단양(丹陽)이라는 현재의 이름과 옛 이름인 적성(赤城)에서 한 자씩 따서 단성중학교(丹城中學校)라 지었는데, 이후 1992년 1월 구단양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면서 면의 이름을 학교 이름을 따라 단성면(丹城面)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가 동성리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음성군 맹동면 지역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옛 마을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자 인구가 부쩍 늘어나 학교 신설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도시 계획에 따라 맹동면 본성리 지역에 마련된 학교 부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짓고 행정구역명에 따라 임시 가명으로 본성초등학교, 본성중학교라 불렀는데 개교에 즈음하여 학교명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논란이 시작되었다. 맹동면 지역이니 맹동중학교라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과 본성중학교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팽팽하여 중재안으로 두 지역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드는 합성지명법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맹동면의 '동(洞)'과 본성리의 '성(城)'을 따서 '동성초등학교, 동성중학교'라 이름 짓게 된 것이다. 이후 인구가 점차 늘어나자 2014년 10월에 맹동면 본성리 지역에 대한 분구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때 새로 만들어지는 지역에 대한 행정 지명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동성리(洞城里)'라 하게 된 것이다. 맹동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맹골'이라는 큰 마을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맹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 유래를 어원학적으로 살펴보면 '막골'이 원래의 지명이었다. 어떠한 지형지물로 통행이 막힌 지역을 '막골'이라고 부르는데 '산으로 막힌 지형'은 '산막골', 큰 돌이나 바위로 막힌 지형은 '동막골'로 로 불리는데 이 지역은 '막골'로 불리던 지명이 '망골'로, '망골'이 맹골'로 발음하기 쉬운 방향으로 변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맹골'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이두식으로 우리말 소리를 한자로 적으려다 보니 '맏 맹(孟)'자로 표기하게 되었는데 그 음의 어감이 과히 좋은 것은 아니므로 우리 조상들은 '맹자의 학문을 숭상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미화하여 해석하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따라서 '맹골(맹동)'에서 의미 요소인 '맹'을 합성지명의 요소로 삼아야 하는데 '동(골)'은 '고을'이라는 지명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적합하지 않아서 인터넷상에서도 확인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냥 '동성(東星)'이라 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므로 우리 조상들처럼 또 한 번의 지혜를 발휘해본다면 '동성(洞城)'을 '고을의 성, 마을의 성'으로 보아 '현대식 주택인 아파트 마을'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행정 지명은 기록에 의해서 전해지기에 한자로 표기되며, 국가 정책의 변화나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지명은 주민의 구전(口傳)에 의하여 전해지기에 세월의 흐름에 따르는 언어의 변화와 와전 등으로 많은 변이를 겪게 마련이다. 옷을 자주 입으면 닳고 헤지듯이 지명은 주민들이 생활에서 늘 사용하기에 부르기 쉽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바뀔 수 밖에 없다. 특히 한자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귀에 들리는 음에 따라 제각기 연상되는 이미지를 언어유희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말로써 전해가기 때문에 원래의 의미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와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민간어원설에 따른 지명 유래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유희의 방법으로 유사한 음을 가진 다른 말로 교체하거나 꿈과 소망, 선호하는 내용과 억지로 결부짓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명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언어학적인 언어 변이, 그리고 유사한 지형에 나타나는 유사한 지명의 변화 과정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요구된다. 그런데 민간어원이나 언어유희에 의한 지명 유래가 너무나 그럴듯하게 꾸며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하게 뿌리 박혀서 이를 깨기가 어려운 때도 많다. 우리말에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민간어원설에 의한 유래를 예로 들어 볼 수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과 평양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도 의주로 피난을 가자 온 백성들은 나라를 잃는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권율장군의 군사가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과 싸울 때 주민들도 모두 합세하였다. 이 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허리에 두르고 돌멩이를 담아 날라서 석전을 함으로써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하여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참으로 감격적인 일화이므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으니 어느 누가 사실로 믿지 않겠는가? 하지만 행주대첩이 있었던 1593년보다 66년이나 이전인 1527년에 나온 라는 문헌에 '행ᄌᆞ쵸마'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쓰이던 말인데 '행주산성'이라는 지명과 '행ᄌᆞ쵸마'의 음의 유사성과 역사적인 사건, 국가에 대한 충성심, 애국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실로 인식하게끔 성화(聖化)시킨 것이다. 또한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황새말'은 지금은 황새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우리 땅에 황새가 많았으므로 '이 마을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 앉아서 황새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황새말이라 이름지었다'는 민간어원설에 의한 지명 유래를 의심의 여지도 없이 받아들여 왔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황새'는 '황(黃)새'가 아니라 우리말 고어에 '크다'는 의미의 '하다'가 쓰인 '큰 새'의 의미이다. 하지만 어느 지역에나 와서 앉았다가 날아가는 황새를 우리 마을에만 많이 있다고 하여 지명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지형적 특성이나 지명 명명의 유연성을 살펴볼 때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말'이 먼저 생겨나고. 이 마을이 점차 큰 마을이 되매 '한(크다)+새말'이 되었다가 음의 유사성과 누구나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이미지를 지닌 '황새'와 연관지음으로써 의미는 달라졌지만 부르기 쉽고 알아듣기 쉬운 지명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 것이다. 지명에서 언어유희에 의해 변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지명 요소 중의 하나는 '다리'일 것이다. 원래 고어에서 '산(山)'이라는 의미의 '달'과 '들(野, 坪)'이라는 의미의 '들. 드르, 다리'가 지명에서 '달동네, 다락골, 달기머리, 달기봉, 계족산, 계명산, 달맞이고개, 달래강, 배다리, 널다리, 광교(廣橋), 판교(板橋), 다릿재, 박달재' 등으로 변이되는 것을 보면 언어 유희에 의한 지명 변이는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와같이 언어의 의미적 근거가 없이 단순한 음의 유사성에 따른 언어 유희에 의하여 변이되는 지명들의 민간 어원설에 의한 지명 유래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주치마의 어원에 대한 유래는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나라를 지키려는 굳센 의지는 우리 조상들이 남겨주는 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지명의 생성은 주로 지형의 형태에 따라 만들어지는 자연 지명으로 시작이 되는데 역사적인 큰 사건의 현장인 경우 그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지명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명들은 듣기만 해도 그 이미지와 의미가 떠오르지만 세월이 흘러 언어가 변화하면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없게 되고 담겨 있는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변이가 시작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계속 변하다 보면 그 지명의 의미와 이미지가 전혀 엉뚱하게 변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이두식 표기를 활용해 자연지명의 음과 훈이 전해지는 일도 있지만 자연 지명의 음을 버리고 의미만을 가지고 한자로 표기하는 경우에는 원래의 음을 잃게 되고, 변이된 자연지명을 가지고 한자로 표기하게 되면 그 지명의 유래와 어원을 찾는데 커다란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자연지명의 경우에는 고어와 지역 사투리 등을 기반으로 그 지역의 지형과 주변의 자연지명들을 살펴보거나, 비슷한 지형을 지닌 다른 지역의 지명과, 다른 지역의 비슷한 지명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어원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행정지명들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 일정한 글자를 붙이거나, 행정 편의에 따라 관리들이 임의로 지명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그 지역의 고유한 의미나 이미지가 사라지거나 다른 이미지가 생겨나서 부르기에 어색한 지명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삼국통일 이후에 신라는 통일 후 넓혀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수도인 서라벌을 모방하여 만든 5소경(小京, 국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 서원소경, 남원소경)과 전국을 9주(양주, 강주, 상주, 명주, 무주, 전주, 웅주, 한주, 삭주)로 나누었다. 문무왕은 중앙정치 체제 확립에 관심이 많았으며 경덕왕은 새로운 관직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래서 경덕왕은 주·군·현의 명칭과 관호를 모두 중국식으로 개명하는데 있어 순수한 우리말로 이루어진 자연 지명을 속되다 생각하여 아무 기준도 없이 무분별하게 한자로 바꾸면서 많은 우리 고유의 지명들이 사라지게 됐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행정편의에 의한 만들어진 청주지역의 행정지명을 예로 들어본다면 '남일면(南一面), 남이면(南二面), 북일면(北一面), 북이면(北二面), 동주내면(東州內面), 서주내면(西州內面), 남주내면(南州內面), 북주내면(北州內面), 산외일면(山外一面), 산외이면(山外二面), 산내일면(山內一面),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 산내이하면(山內二下面), 서강내일면(西江內一面), 서강내이면(西江內二面), 서강외일면(西江外一面), 서강외이면(西江外二面)' 등을 보면 청주 읍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방향과, 숫자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지명은 더욱 심하여 '본정1, 2, 3, 4, 5, 6정목(本町 1, 2, 3, 4, 5, 6丁目), 욱정 1, 2, 3 정목(旭町 1, 2, 3 丁目)'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지명들은 마치 지리적 위치를 경도와 위도로 표기하거나, 교도소에서 죄수를 죄수 번호로 부르는 것처럼 구분하는 역할만 할 뿐 지역적 특성이나 지형적 특성은 전혀 고려되지 못한다. 또한 합성지명의 방법은 통합한 두 지역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드는 방법으로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방법이 사용되었지만 일부 지역에 한해서 마땅히 통합지명을 만들기가 어려운 경우에 한하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은 전국을 한꺼번에 대규모로 통폐합하면서 일률적으로 합성지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지명들의 우리말 음이나 또는 한자 훈(訓)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은 외래어를 받아들여 중국어로 만들 때 '코카콜라 → 可口可樂, 펩시콜라 → 百事可樂, 햄버거 → 漢堡 , 초콜릿 → 巧克力, 맥도날드→ 麥當勞' 등의 예에서처럼 그 음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만든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지명의 어원과 뿌리를 찾다가 벽에 부딪히면 우리의 조상님들이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음과 의미를 보존하기 위하여 좀더 고민하고 노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충북의 지명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충북 지역의 지명에 대하여 기고해온 것이 이제 10년째를 맞는다. 그동안 우리 조상들이 남겨놓은 귀중한 언어 유산이요, 조상들의 삶의 과정과 꿈과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지명 유산이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지명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 한편 조상님들께 대한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안간힘을 써 왔다. 지명의 연구는 우리보다 일본이 먼저 시작했으며 학문적으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해 옴으로써 독립된 학문으로까지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이 지명으로 인하여 그들의 북방 영토를 러시아에 빼앗긴 쓰라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오래전부터 영토 귀속문제로 분쟁이 계속되어 온 땅이 바로 사할린이다. '사할린'이라는 이름은 러시아 사람들이 아무르(Amur)강 동쪽 땅을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원래부터 고유한 러시아어가 아니라 아무르강 하류에 살아가는 소수 원주민들이 아무르강을 일컫던 '마무(mamu)'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무르강은 선사시대부터 원주민들이 살아가던 터전이었고 각 민족과 부족마다 강을 부르는 고유한 이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만주족은 아무르강을 '검은 강'이라는 뜻의 '사할리얀 울라(sahaliyan ula)'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만주어 뜻과 비슷한 흑룡강(黑龍江)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흑룡강은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이 붙인 한자식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 몽골인들도 검은 강이라는 뜻의 '카하라 무렌(khara muren)'이라고 부르는 등 검은색이 공통적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 나라의 한강, 압록강, 청천강 등을 가리키던 옛말이 '아리수'인데 '아리'는 '물'의 의미이므로 '물'을 중복하여 씀으로써 '큰 물'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르'란 '아(물)+무르(물)'로 볼 수 있다니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지명에 많이 있는 '검다'는 의미는 '크다'는 의미의 '금, 검, 감, 곰'의 의역적 표기로서 '금강, 금산, 감골(감나무골), 가막산(감악산), 거문거리, 곰나루(고마나루), 거문도' 등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사할린을 일본에서는 '북에조' 또는 '가라후토'라 불러왔는데 '북에조'란 에조의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북쪽 지방은 대륙의 문화를 수입하는 통로가 되었으므로 한국이나 중국 또는 외국을 의미하는 발달한 문명을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가라'라고 하였는데 아이누어로 '카무이 카라 푸토 야 모시르'라 하므로 이를 따서 가라후토(からふと)라 불렀으며 한자로는 '樺太(화태)'로 표기하였다. 1875년 러시아와 일본이 사할린-가라후토에 관한 국경 협상을 하였는데 이때 일본 정부의 대표는 '가라후토'가 당연히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사할린'이 러시아 영토라 주장하여 설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러시아 대표가 "일본은 이 섬을 무엇이라 부르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일본 대표가 '가라후토섬'이라 부른다고 답변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대표는 이미 '가라후토'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으므로, 일본대표에게 '가라'라는 말은 귀국에서 한국이나 외국을 뜻하는 것이니, 가라후토는 곧 '한국사람의 섬'이나 '외국 사람의 섬'을 뜻하므로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였다. 일본 대표는 이 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논리에 밀려 러시아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지시마(千島)는 일본 말이므로 지시마(쿠릴)열도는 전부 일본 땅이요, 가라후토는 어차피 일본 땅이 아니니 러시아 영토로 하자"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사할린(가라후토)을 지명 때문에 러시아에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이 러시아와 영토문제로 담판할 때 처음부터 '북에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더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가라후토'라는 이름을 사용한 탓에 일본 북방 영토의 귀속에 관하여 그 운명이 갈라지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지명에 대한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겪고 나서, 조선을 영원히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고 지명을 마음대로 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니 우리는 훼손된 지명의 시급한 원상 회복과 잊혀진 유래를 찾는데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