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진산인 우암산 자락의 먹바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 서답골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조용한 산골마을 안덕벌!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평화로운 안덕벌의 변화는 아마도 일제로부터 벗어난 광복 이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복 직후 미군정기와 1948년 우리나라 정부 수립 후 취해진 귀속재산의 특혜적 불하, 원조물자의 특권적 배정, 그리고 은행의 특혜적 융자는 1950년대 재벌형성의 물적 기초로 작용하였으며 특히 1950년대 그 원재료와 자본재를 원조에 의존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던 제분, 제당, 방직 공업의 3백(三白)산업은 우리나라 재벌들이 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청주 지역은 전통적인 농업사회로 근대화된 생산시설이 없어 조용한 교육의 도시로 불리었는데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전쟁 후의 극심한 식량난 해소와 폐허 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정부의 지원으로 기업체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주방직과 신흥제분 그리고 연초제조창이다. 청주방직은 1954년 현 청원구청과 청원경찰서 자리에 설립되어 전후의 극심한 물자부족 상황에서 전후 복구 사업의 호기를 맞으며 크게 성장하였고,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충북 지역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신흥제분 또한 전후의 식량난 해결이라는 국가 사업에 따라 설립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창업주인 고 민철기 사장이 운영하던 신흥 정미소가 정부로부터 밀 제분 공장으로 지정되면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1958년 신흥제분이 탄생하게 되었다. 신흥제분은 이후 월남 파병군을 위한 야전용 진중식품을 납품하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였고 속리산관광호텔을 비롯한 석유, 목장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한때는 개인종합소득 전국 2위에 오르기도 했던 것이다. 청주방직은 청주산업단지가 조성된 후 1974년에 공단으로 이주해감으로써 제일 먼저 안덕벌을 떠나갔으며 이어서 신흥제분이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흥제분 건물은 헐리어 테니스코트가 되었다가 최근에는 골프연습장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육영사업으로서 1977년에 개교한 신흥고등학교는 오늘날까지 청주의 인문계 명문 고등학교로 남아 있다. 청주방직과 신흥제분이 전후 복구라는 특별한 과정에서 갑자기 성장한 기업이었다면 청주와 충북 도민의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연초제조창이었다. 연초제조창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 경성전매국 청주연초제조창으로 개설되었으며 전국 담배의 30%를 생산하였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고용인원이 많을 때는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60년대의 청주 인구가 12만여 명이었으니 연초제조창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 청주 시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따라서 산업시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교육 도시 청주에 들어선 청주연초제조창은 청주 산업화의 상징이자 청주의 자랑거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충북의 산업화의 주역들이 안덕벌을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안덕벌은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 방직공장과 밀가루 공장, 그리고 연초제조창이 들어섬으로써 충북 도민의 농업 형태는 벼농사 위주의 자급자족 형태에서 담배와 밀과 누에고치를 생산하여 가공공장으로 팔아서 목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공산품을 비롯한 필요한 물건을 사게 되니 경제가 활성화되고 소비생활도 왕성해짐으로써 생활 환경이 급속하게 변해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옛날에는 벼농사가 주된 농사이고 밭농사는 부식을 마련하기 위한 부차적 농사였지만 이제 논에는 옛날처럼 벼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면서 밭에는 담배와 뽕나무를 심어 목돈을 마련하게 되니 밭농사도 담배와 누에고치 생산을 위해 벼농사 못지않게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벼농사와 밭농사는 우리 충청북도민 모두의 생활이요,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우리 가족이 먹고 사는데 그치는 농사가 아니라 돈을 더 벌어서 더 잘 살아보기 위해, 그리고 자식 교육을 위해 농한기도 없이 그야말로 뼈 빠지게 일함으로써 생활은 조금 나아졌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들의 끝없는 희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말이 소보다 헤엄을 두 배나 잘 치지만 홍수에 떠밀리면 소는 살고 말은 죽는다는 의미이다. 말은 자신이 헤엄을 잘 치는 것을 믿고 강한 물살을 이기려고 물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다가 지쳐서 죽지만 소는 절대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그냥 물살에 몸을 맡기고 같이 떠내려가다가 강가의 얕은 모래밭에 발이 닿게 되면 마침내 엉금엉금 살아 걸어 나오는 것이다. 거스르지 말고 순리(順理)를 따르는 것이 삶의 지혜임을 알려주는 말인 것이다. 우리말 '소'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계림유사》(12세기)에 기록된 "牛曰燒(去聲)"이다. 한글로는 훈민정음해례(1446)에 '쇼爲牛'란 기록이 있다. 이것이 19세기 음운 변화로 인해 '소'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소는 오랜 옛날부터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가축이었다. 아니 가축이라기 보다는 사람과 같이 한 가족이요, 집안의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그 이미지도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우리 조상들이 언제나 소와 함께 살아왔기에 우리 주변의 지형지물을 가리키는 지명에도 소와 연관된 이름들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 지역에서만 보더라도 청주의 우암산(와우산)을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의 쇠태고개, 상당구 가덕면 국전리의 소목골(牛項), 청원구 내수읍 우산리의 우산과 쇠머리, 청원구 오창읍 각리,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의 '소죽골',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의 소매밭골(소가 앉아 있는 모양의 골짜기), 상당구 미원면 어암리의 '쇠바우(小岩)',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의 '소눈골(소가 누운 형국)',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의 '소터골, 소징이',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의 '소바위',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의 '소토골(소의 형국)', 상당구 문의면 남계리의 쇠죽골(소가 죽었던 곳), 상당구 문의면 마구리의 '황소밭때기',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의 '황소배', 상당구 문의면 상장리의 '소목골(牛項谷)',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의 '소먹이고개' 등 소와 관련된 지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면 지명에서 '소(牛)'는 어떤 의미로 쓰였을까? 서울시 성북구의 우이동(牛耳洞)은 도봉산의 여러 봉우리 중에 소의 귀같이 보이는 봉우리인 쇠귀봉(牛耳峰)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 가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고 하는 소섬 즉 우도(牛島)가 있으며, ·애월읍에 소길리(牛路里)가 있는데 옛 이름은 '쉐질(소길)'이며, 소가 걸었던 길을 의미하고 현재 올레길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쉐질을 걷는 코스를 선호하고 있다. 음성군 대소면 삼호리에는 '쇠머리(牛頭)'라는 마을이 있는데 전국에 같은 이름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의 '우두마을(쇠머리)'을 비롯하여 충남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금지리의 '쇠머리',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의 '쇠머리산',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장흥리의 '쇠머리음달골',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리의 '쇠머리들',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의 '쇠머리들'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쇠머리'라는 이름을 한자로 '우두(牛頭)'라 표기하지만 '소의 머리'의 의미가 아니라 '솟아있는 마루'라는 의미로서 낮은 언덕처럼 솟아있는 지형에 있는 마을을 '쇠머리'라고 불렀다. 이와같이 지명에서 '소'나 '우(牛)'는 솟아있는 지형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제주시 우도면 연평리에 '쇠머리오름'이라는 산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우도'라는 지명은 소가 누워있는 모양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쇠머리' 라는 지명이 이곳에 먼저 생기면서 이를 바탕으로 섬의 이름도 우도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제주시 애월읍의 '쉐질(소길)'이 '소가 걸었던 길'이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짐을 운반하거나 밭을 갈기 위해 소가 늘 길을 가기 때문에 소가 걸어갔다고 하여 '소길'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은 글자에 따라 지어낸 말일 것으로 생각되며, '소길' 역시 '다른 길보다 솟아 있는 지형에 있는 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021년 소띠 해가 밝았다. 2020년 한해는 코로나 19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온 인류가 그야말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가 수시로 우리를 괴롭히더니 이제는 바이러스까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말이 생소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바이러스가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계속해서 메르스니 사스니 하는 바이러스 피해를 당해오면서 익숙해졌지만, 코로나처럼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이러스는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까지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최근에 구제역, 조류 독감 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소, 돼지, 닭, 오리들이 인간을 위하여 살처분이라는 이름으로 산 채로 죽어야 했는가? 그 중에서도 덩치는 크면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구제역과 광우병으로 졸지에 변을 당하던 소들, 차에 실려 흙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질 때 그 큰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소들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지친 때문일까, 소를 지켜주지 못한 안타까움과 연민일까? 이제 소띠해를 맞으면서 소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좋은 이미지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소는 사람에게 개 다음으로 일찍부터 가축화되어 경제적 가치가 높아 세계 각지에서 사육되고 있다. 소가 가축화된 것은 기원전 7000년 ~ 6000년경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사육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퍼지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유럽에서는 주로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하여 사육을 시작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쟁기를 끌어 밭을 갈거나 짐수레를 끄는 데 이용했으며 배설물로는 짚과 함께 퇴비를 만들어 비료로 쓰거나 집을 짓는 재료 또는 땔감으로 쓰이기도 한다. 인도와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종교 의식에서 신과 유사한 예우를 받으며 숭배의 대상이 되고, 고기를 먹지도 않는 등 대접을 받기도 한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십이지의 두 번째 동물로서 '丑(축)'이라 하는데 가축을 뜻하는 '畜(축')이 소를 뜻할 정도로 소가 중요한 가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국가인 부여에는 우가(牛加)라는 족장 명칭이 있었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에서 견우는 '소를 끄는 사람'을 의미하는 등 생활에서 소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소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두 마리 이상의 송아지를 낳은 사건이 에 종종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소의 도살을 금하기도 했으며 정월 첫 축일(丑日)을 '소의 날'이라 하여 소를 쉬게 하고 밥과 나물로 잘 먹였으며, 연장을 만지는 것도 금할 정도로 소를 귀하게 여겼다. 소를 사람과 같이 인격체로 대하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은 황희 정승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벼슬하기 전에 길을 가다가 농부가 두 마리의 소에 멍에를 씌워 밭 가는 것을 보고 묻기를, '두 소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농부가 대답하지 않고, 밭 갈기를 멈추고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작게 말하기를, '이 소가 낫습니다.' 하니 공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왜 귀에 대고 말하는가·' 농부가 말하기를 '비록 가축이지만, 그 마음은 사람이나 사실상 마찬가지요. 이 소가 나으면 저 소는 못한 것이니 소에게 이를 듣게 하면 어찌 불평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로부터 황희는 크게 깨닫고 다시는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영어에서 소를 뜻하는 Cattle은 라틴어 caput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머리, 움직이는 재산'을 뜻하며 오늘날 동산을 뜻하는 chattel, 경제학 용어로서의 capital과 매우 관련이 있는 말인 것처럼 우리 조상들에게도 소는 곧 재산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띠 해의 시작은 입춘부터라고 하지만 소가 주는 긍정적 의미를 생각하다보니 코로나로 일상을 빼앗겼던 2020년을 빨리 보내고 희망찬 소의 해를 서둘러 맞이하고 싶어진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은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서 10여 분이면 보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미원을 벗어나자마자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에서 구도로와 신도로가 갈라진다.구도로로 들어서면 왼쪽은 속리산 법주사에서 흘러오는 달천이 넓은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고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 옆을 지나게 된다. 봉황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 절벽에서 나온 것이다. 봉황이란 상상의 새이면서 임금의 권위와 성서로움의 상징인데 어떻게 해서 지명으로 쓰이게 되었을까? '봉황골'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에도 있고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도 있다. 그런데 '봉황산'이라는 지명이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봉황산'을 비롯하여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전북 군산시 임피면 미원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장산리, 충남 부여군 석성면 비당리,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종연리, 전남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경남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광주 서구 용두동, 전남 화순군 사평면 장전리, 전남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전북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황리,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용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으로 보아 '봉황'의 의미는 산의 지형과 관련이 있는 말임이 분명할 것이다. 보은군 내북면의 봉황 마을은 부엉바위가 있어서 봉황이라 했다고 전해지는 등 여러 지역에서 '봉황'과 '부엉바위'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다. 아마도 바위를 한자로 '암(岩)'으로 표기하여 '부엉암→봉암'으로 변이된 것으로 본다면 '봉암'이라는 지명이 존재할 것이므로 전국의 지명에서 찾아보니 경남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와 경북 예천군 개포면 갈마리의 '봉암골',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의 봉암동, 그리고 충남 청양군 남양면의 봉암리를 비롯하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경기 파주시 파주읍, 전북 고창군 부안면, 전북 진안군 부귀면, 전남 고흥군 도양읍, 경북 영주시 안정면, 경북 칠곡군 동명면, 경남 고성군 동해면, 경남 창녕군 영산면,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등의 '봉암리'에서 '부엉암'이 '봉황'으로 변이되는 과정에 존재하는 '봉암'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은 실제로 많이 존재할까? '부엉이바위'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의 '부엉이 바위'를 비롯하여, 충남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의 '부엉바위', 충남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의 '부엉바위', 충남 서산시 해미면 휴암리의 '부엉바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의 '부엉바위', 전남 담양군 용면 도림리의 '부엉바위산' 등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면 '부엉이바위'는 이러한 지명들에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부엉이가 많이 날아와서 만들어진 이름일까?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의 부엉바위는 주민들도 어떤 바위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것으로 보아 부엉이 형상의 바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마도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단서는 서울 남산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위치한 남산 기슭에 부엉바위 약수가 있는데 주민들이 범바위약수라고도 부르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에 봉산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현재 봉산리는 기동과 화산의 두 개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삼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무봉과 화봉이라는 두 개의 마을이 더 있었으며 각각 아랫부엉이, 웃부엉이 혹은 아랫봉, 윗봉으로 불리웠고, 기동마을에서 무봉과 화봉마을로 통하는 고개 이름이 부엉이 고개였다고 한다(안성군지, 1990년). 그런데 양지군읍지(1899년)를 살펴보면 현재의 봉산리가 속해있던 옛 양지군 고동면(古東面)에는 봉황리(鳳凰里)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마을에 '벙바위'(부엉이 바위)가 있어 날이 궂으면 부엉이가 바위에 앉아서 울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부엉이바위는 벙바위에서 온말이며 '벙바위'는 '범바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봉황'이란 지명은 '봉암'에서 변이된 것이며 '봉암'은 '범바위→벙바위→부엉바위→봉바위'와 같이 변이 과정에서 '봉바위'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본다면 결국 '봉황'은 '범바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깃대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것대산의 어원을 찾아 과거로의 긴 여행을 하면서 것대산과 유사한 음을 가진 '깃대봉'도 것대산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어 전국의 지명에서 '깃대산'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충북의 옥천군 군서면 상지리와 영동군 심천면 길현리의 '깃대봉'을 비롯하여 충남 논산시 양촌면 산직리,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서울 관악구 신림동,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전북 장수군 장계면 오동리,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두밀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 농소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기산리, 전북 임실군 삼계면 죽계리, 경북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강원 춘천시 남산면 백양리, 전북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전북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전북 남원시 운봉읍 덕산리,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강원 춘천시 동면 월곡리의 '깃대봉' 등등 '것대산'과는 달리 그 예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데 위 지역의 깃대봉들은 한결같이 군사들이 깃대를 꽂은 산이라는 유래를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는 글자에서 생각나는 의미를 연관지어 만들어낸 유래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깃대란 평지에 꽂아야 멀리서 잘 보이므로 군사 작전에 표식이 되는 것이지, 그 높은 산에 깃대를 꽂으면 잘 보일 리도 없고 또 이렇게 많은 지역마다 산꼭대기에 깃대를 꽂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분명 산의 모양을 가리키는 의미의 말로서 예전에 산의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 말이 그 뿌리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충주의 하늘재는 많은 전설과 유래가 깃들여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다수의 고문헌과 자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고구려 온달장군 등의 전설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고개다. 그런데 이 고개는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 이름도 정말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鷄立嶺),마골참(麻骨站), 마목현(麻木峴)'이라 불렸으며, 고려시대에 계립령 북쪽에 대원사가 창건되면서 절의 이름에서 따와 대원령(大院嶺)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개 부근에 한훤령 산성이 있으므로 한훤령(寒喧嶺),한원령(限院嶺)이라고도 불렀으며, 고개가 하늘에 맞닿을 듯 높다하여 하늘재라 하였다. '하니재, 하닛재' 등으로 발음을 달리 하여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천치(天峙)'라 표기하였다. 또한 높은 고개라는 뜻에서 '한지'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이 많이 바뀌는 것은 역사가 오랜 이유도 있지만, 언어가 변화하면서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오랜 옛날에는 벼농사가 활발하지 않아서 '피(稷-기장, 조)'가 우리 조상들의 주식이었으므로 주변에 피농사를 위한 피밭이 많았으므로 오늘날 '피밭'과 관련된 지명(피아골, 피반령, 비하리)이 많이 남아있듯이 2천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주로 삼을 이용해서 의복(삼베옷)과 생활 도구를 만들었으므로 주변에 삼밭이 많아서 '삼골, 마곡(麻谷), 삼밭골, 삼생리(삼싱이)'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그 옛날의 집 안에서는 틈이 날 때마다 삼대를 벗겨 가공하는 일을 했을 것이므로 고개의 양쪽 암벽이 겨릅대(껍질을 벗긴 삼대)처럼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계립령(鷄立嶺),마골참(麻骨站)'이라 표기하게 된 원래의 이름인 '겨릅재(지릅재, 지름재)'는 당시에는 일반적인 산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깃대봉'은 '깃대를 꽂은 봉우리'가 아니라 원래 '겨릅대봉'으로서 '겨릅대처럼 생긴 암벽이 있는 산봉우리' 라는 의미인데 '겨릅대봉→겹대봉→것대봉'의 변이 과정을 거쳐, 한때는 '것대봉'이 널리 쓰이기도 하였으나 '것대'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자 '것대'에서 쉽게 연상되는 '깃대'로 모두 변이되었다. 청주 상당산성 인근의 '것대산'은 봉수대가 일찍 설치된 덕분에 '것대산'이라 쓰이던 시기에 한자로 기록되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옛날의 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예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의 '깃대봉'은 계립령과 그 거리가 멀지 않아서 겨릅재, 것대산, 깃대봉이라는 이름들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상당산성 옛길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산성 고개에 이르게 되는데 이 산성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접어들면 상당산성이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것대산 봉수터로 가게 된다. 것대산 봉수대를 가는 또 다른 길은 상당산성 남문을 따라 올라가다가 안부에 있는 암문으로 빠져 나와 왼쪽 능선으로 곧장 1.5Km 정도 산을 오르다 보면 것대산 봉수대가 나온다. '것대산 봉수대'는 상당산성의 남쪽에 위치한 것대산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것대산'이라는 지명을 오랜 세월 동안 변이되지 않도록 고착시킴으로써 지명의 어원을 찾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먼저 것대산 봉수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것대산은 해발 484m의 산으로 '거질대산', '상령산'(上嶺山)이라고도 하며 지리지나 옛 지도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 '것대산 봉수(唟大山烽燧)'라 하였으며 경상남도 남해의 금산봉수(錦山烽燧)에서 출발하여 서울의 남산에 이르는 중간 경유지에 해당되었다. 남쪽으로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所乙山) 봉수에 연결함으로써 지금의 통신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에 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났을 때 위급한 상황을 신속히 조정에 전달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거차대(居次大) 봉수'라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지에는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라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가 '것대, 것대산'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것대산 봉수대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 제도가 완비된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199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것대산 봉수는 육지의 봉오리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으며 이를 '봉(烽)'이라 했고, 낮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것을 '수(燧)'라 했다. 또한 연기나 불빛이 잘 전달되기 위해서 토끼나 노루 등 짐승의 배설물을 섞어 태웠다고 한다.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읍지에는 이 봉수대의 주둔군으로 별장(別將) 1인, 감관(監官) 5인,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하며, 근무는 감관 1인과 봉군 5인이 1조가 되어 교대 근무하였다고 한다. 것대산 봉수에는 조선 시대인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이인좌의 난이란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난은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었으며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당시에 이인좌는 제일 먼저 이곳 것대산 봉수대를 손에 넣어 조정으로 알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 때 근처에 '목노인'이라는 봉화둑지기가 딸 '선이'와 그와 혼인을 언약한 '백룡'이라는 청년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청주로 돗자리를 팔러 간 백룡을 마중 가던 선이는 아버지의 비명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아버지는 반군들에 의하여 살해된 뒤였다. 이는 분명히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한 선이가 봉화대로 올라가 불을 당기려 했으나 뒤쫓아 온 반란군에게 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집에 온 백룡은 노인과 선이가 반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되자 분개하여 쇠스랑을 들고 봉화대로 올라가 반란군들을 격투 끝에 해치우고 봉수대에 불을 지피어 청주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을 조정에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목노인과 선이를 봉화에 화장하였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인 것이다.
망태기란 가는 새끼나 노끈으로 너비가 좁고 울이 깊도록 짠 네모꼴의 주머니로서 수천 년 겨레의 숨결을 담아내 온 우리 조상들의 생활의 필수품이었다. 양끝에는 끈을 달아 어깨에 메는데 지역에 따라 구럭이라고도 한다. 강원도의 산간지대에서는 주루막이라 하여 주둥이에 끈을 달아 두루주머니처럼 주둥이를 죌 수 있게 만들어 쓰기도 한다. 민간 설화에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말 안 들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다!' 어렸을 때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함께 자란 이들이라면 곧잘 들었을 말이다. 망태 할아버지의 위력은 엄청났다. 기다란 집게로 어린아이들을 집어 망태기에 넣고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아이들이 벌벌 떨었던 것이다. 다음 동요는 최병엽 작사, 한동찬 작곡의 '꼴망태기'라는 노래로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생활필수품으로 늘 곁에 두고 사용해왔던 망태기의 친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언제부터 걸려 있었나 잿간 흙벽에 외로이 매달린 작은 꼴망태기 하나 그 옛날 낫질 솜씨 뽐내셨을 할아버지의 거친 숨결이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찐득찐득 배어들어 누렇게 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무지겟짐 세워놓고 떡갈잎 물주걱 만들어 시원하게 목축이다 흘리신 바윗골 약수랑 싱그러운 들꽃 향기랑 소롯이 배어들어 바작바작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우리 겨레가 오랜 세월 써오던 망태기는 이제 플라스틱 바구니에 밀려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를 등에 메고 논밭으로 나가시던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또한 우리가 쓰는 말 중에 고주망태라는 말이 있는데 술에 몹시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고주망태'라고 한다. '고주'의 '주'를 '술 주(酒)'자로 생각하여 고주망태를 한자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고주망태는 '고주'와 '망태'가 합해진 순우리말이다. '고주'는 술이나 기름 따위를 짜서 밭는 틀을 뜻하며 옛 문헌에는 이 틀을 '고조'라고 했으나, 세월에 따라 지금의 '고주'로 변형되었다. '망태'는 새끼 등으로 엮어 만든 그릇으로, '망태기'와도 같은 말이다. 즉, 고주망태는 '술 거르는 틀 위에 올려놓은 망태'를 뜻한다. 술 거르는 데 사용한 고주와 망태는 당연히 술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기에 고주망태가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예로부터 술마시고 노래하고 즐기기를 좋아한 우리 민족이었기에 이렇게 술과 관련된 아름다운 우리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망태골'이라는 지명에서 말하는 '망태처럼 생긴 골짜기'란 어떤 모양을 말하는 것일까? 망태기는 주로 새끼로 만드는데, 얼기설기 짠 망태기는 작은 물건이 빠져 나가기 일쑤이며 올이 작게 짠 망태기라도 면이 곱지 않고 우툴두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황해도 사투리 가운데 얼굴 망태기라는 말이 있는데 얼굴 곰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망태기 모양의 특성이 울퉁불퉁하고 거친 것이라면 지형에서 망태기 모양은 당연히 평지가 아니고 오르락내리락, 울퉁불퉁해서 농토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한 땅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큰 산도 아니면서 농토로 사용하기에 불편한 울퉁불퉁한 땅은 그 모양이 망태를 닮았다고 해서 '망태골'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의 흥태동이라는 마을의 옛 이름이 '망태박골'이라면 '바위가 땅에 망태처럼 얼기설기 박혀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 흥태동(興泰洞)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원래는 충주군 천기면의 소재지인 냇거름의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 마을 앞으로 삼성에서 대소로 가는 신작로가 새로 만들어지고 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갑자기 교통이 좋아졌다. 또한 이 마을이 삼성과 대소의 중간에 위치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삼성과 대소를 관할하기 위한 경찰 주재소와 천평공립소학교를 이마을 인근에 설치하여 삼성과 대소지역의 학생들이 이곳으로 학교를 다니고 장터도 생겨나다보니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큰 마을이 되었다.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말로는 마을의 옛이름이 '망태동, 망태박골'이었는데 이 마을에 잘 되는 사람이 없고 항상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여 '망'자를 '흥'자로 변경하여 '흥태동'으로 고친후 온 마을이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누가 고쳤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망(亡)'자와 '흥(興)'자를 가지고 연상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했지만 '흥태동'이란 지명이 전국에 이곳 한 곳밖에 없고, 망태골이란 지명은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상해서 꾸며낸 지명이 아니라 원래의 지명이 망태동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흥태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북에서 '망태골'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니 괴산군 연풍면 적석리,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 등의 '망태골' 등을 들 수가 있는데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도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걸은리,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초곡리,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북리,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곡리, 충남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 충남 공주시 신풍면 백룡리,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무릉리,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북리, 경북 군위군 고로면 괴산리, 경북 영천시 화남면 용계리, 경북 울진군 북면 소곡리 등 아주 많이 분포되어 있다. 마을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전후 사정과 환경적 요인을 다음과 같이 추리해 보았다. 음성군 생극면 생리의 '망태골'이 한자로 '만대동(晩垈洞), 또는 마태동'이라 표기하듯이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망태골'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망태동'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교통이 좋아지고 행정기관들이 들어서자 마을이 번창하였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삼성면(천기면, 지내면, 두의곡면을 병합)과 대소면(대조곡면과 소탄면을 병합)이 생겨나게 되자 불과 10여년 후인 1920년대에 이르러 천평공립보통학교는 삼성공립보통학교와 대소공립보통학교로 옮겨가고 행정기관들도 모두 옮겨가니 갑자기 적막한 시골 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의 '흔터골', 세종시 전동면 송정리의 '흔터골',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의 '흔터골',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제령리의 '흔터골',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의 '흔터골' 들처럼 마을이 있다가 폐허가 된 곳을 '흔터골이라 부르듯이 이 마을도 자연스럽게 흔터골이라 부르다 보니 '망태골과 흥태골(흔터골), 망태동과 흥태동'이 혼용되고 그 의미가 대비가 되다보니 선택하는 과정에서 '망태동'보다는 '흥태동'을 선호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망태골이라는 지명은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을까?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의 '망태봉'은 망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강원도 양구읍 덕곡리의 짐만태골은 약 400여 년 전에 강릉김씨라는 한 선비가 이곳에 와보니 산세가 좋아 이곳에서 살기를 마음 먹고 이곳에 짐망태를 벗어 놓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김씨의 망태라 하여 짐망태골(김망태골)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청주시 상당구 남이면 문동리의 '망태골'은 망태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경북 울진군 울진읍 신림리의 '동망태골'은 '돌망태골'이 변이된 것이다. 여기에서 '망태, 망태기'라는 말과 '망태골'이라는 마을의 지형과의 연관성을 밝혀본다면 망태골이라 이름지은 조상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바래미에서 금왕읍 내송리의 비성거리라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숫돌고개라고 부르는데 이 숫돌고개라는 지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을까? 음성군 삼성면과 대소면, 그리고 옛 법왕면이었던 금왕읍의 일부 지역은 충주현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서촌(外西村)이라 불렀으며 충주현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다. 금목면(金目面지-지금의 무극리 인근 지역)에서 숫돌고개라는 험한 고개를 넘어서면 관리들도 가기를 꺼려하던 외서촌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소 지역은 삼성을 지나 십 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라서 오미라 불리어 왔는데 지금은 음성군 금왕읍 소재지인 무극에서 대소까지 대금로라는 4차선 도로가 새로 개설되어 중부고속도로와 연결되지만 옛날에는 무극에서 숫돌고개라는 큰 고개를 넘어 삼성으로 가고 삼성에서 다시 대소를 가야 했던 것이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삼성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는데 마차는 다니지 못하는 소로길이지만 대소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고개인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깎아내려 평지처럼 낮아지고 삼거리가 사거리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꽤 험한 고개였다. 이 숫돌고개라는 지명이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안타깝게도 숫돌고개라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해 기록된 도서도 없고 전해오는 지명의 유래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도 이러한 지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의 '숫돌고개'를 비롯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의 '숫돌고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의 '숫돌고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의 '숫돌고개',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 화천리의 '숫돌고개', 경남 사천시 곤양면 맥사리의 '숫돌고개',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출강리의 '숫돌고개', 경기도 의정부시 산곡동 수락산의 '숫돌고개' 등 비교적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숫돌고개라는 지명의 유래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의 '숫돌고개'는 고개 주위에서 숫돌이 난다고 해 붙은 지명이라고 하며,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의 '숫돌고개'는 천왕굴고개를 넘어 천왕굴로 들어서기 전의 등성이에 있던 고개로서, 숫돌을 캐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자연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는 음차나 훈차를 하게 되므로 본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숫돌고개라는 지명은 한자로 표기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서 '칼을 가는 숫돌'과 연관짓고 있으나 한자로 표기하기를 꺼린 것은 아마도 숫돌이 지명과의 유연성이 적은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숫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면 산이나 바위가 많은 곳일 것이고 그런 곳에 있는 돌이 숫돌로 적합해 숫돌을 캐내거나 채취해야 할 텐데 고개에서 숫돌을 줍거나 캐낸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숫돌이 나타내는 다른 의미가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지명에서 '숫'은 '수'의 관형형으로서 뒤에 있는 지형지물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즉 '숫골'이 한자로 '화곡(禾谷-벼농사를 짓는 골짜기나 마을)'으로 표기된 경우는 '수'의 어원이 '쉬(벼의 옛말)'이며, '숫골'이 한자로 '속리(俗離) 또는 이리(裡里)'로 표기된 경우는 '속에 있는 골짜기나 마을'을 의미하는 지명으로서 그 어원이 '솝골, 솝말'로 '수'가 '솝(속의 옛말)'인 것이다. 또한 지명에서 '달'은 아주 많이 쓰이는 말이다. '박달재(큰 산을 넘는 고개)', '달래강(산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냇물)', '달동네(산동네)'들에서 보듯이 '달'은 '산'의 옛말이다. 따라서 숫돌고개라는 이름은 솝달고개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금왕읍 내송리의 비성거리라는 마을을 '안쪽으로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해 내동(內洞)이라 부르는 것처럼 숫돌고개란 무극에서 '산의 속, 산의 안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란 의미인데 오늘날은 이 지역이 크게 발전해 산의 안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아니라 교통이 사통팔달하는 교통의 요지로 변화되었으니 옛 조상님들이 이 모습을 보면 아마도 상전벽해요 천지개벽이라며 크게 놀라시지 않을까?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에 황새말(황샛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황새가 많아서 황새말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도 황새울(黃石)과 황새말(鶴村)이라는 지명이 있다. 황새말은 양지면 양지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고 황새울은 백암면 석천리에 있는데 두 마을은 황새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황새말은 황새가 많이 날아와서 황새말이라고 하였고 황새울 또한 마을에 있던 큰 소나무에 황새가 항상 깃들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황새와 연관지은 유래를 가진 황새말이라는 지명은 보은군 내북면 상궁리의 '황새말'을 비롯하여 충남 공주시 송선동, 충남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충남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 충남 부여군 내산면 묘원리,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가야리,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경기 화성시 정남면 계향리,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경북 경산시 하양읍 대조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명에 나타나는 황새는 실제로 황새를 말하는 것일까? 오늘날은 황새가 멸종 위기에 있어 특별한 지역이 아니면 보기가 어렵지만 옛날에는 시골 어느 마을에서도 흔하게 황새를 볼 수가 있었다. 수시로 떼를 지어 이 마을 저 마을로 날아다니는 황새인데 어느 마을에 황새가 많이 날아왔다고 하여 그 마을을 황새말이라 부르고 다른 마을과 차별화할 수 있는 지명으로 삼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타당성이 적다고 하겠다. 또한 황새라고 하면 노란 색의 새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황새의 털은 주로 흰색이고 일부에 검은색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어학자들도 황새의 '황'이 '황(黃)이 아니라 '크다'는 의미의 고어인 '하다'에서 온 것으로 '한(크다) → 황'의 변이로 보고 있다. 음성군 대소면에 있었던 옛 지명인 '대조곡(大鳥谷)'에서 '조곡(鳥谷)'은 '샛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대조곡(大鳥谷)'이 '큰 산줄기의 사이에 있는 땅'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대조곡(大鳥谷)'을 한자로 표기하기 전의 자연 지명이 바로 황새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조곡면(大鳥谷面)' 지역에 황새말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옛 대조곡면의 중심 마을인 대소면 소석리(韶石里)의 주변 마을을 살펴 보았다. 소석리(韶石里)는 본래 충주군 대조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당리(韶堂里), 석격리(石格里), 삼한리(三閑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당(소댕이)과 석격(돌격골)의 이름을 따서 소석리라 해서 대소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소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 '참나무배기'인데 이 마을의 서쪽에 '황새붕터'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한자로는 '봉황대(鳳凰臺)'라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이 마을이 '황새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에서 변이가 된 것으로 본다면 '대조곡면(大鳥谷面)' 이라는 행정 지명은 이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우리나라는 주로 산지로 구성되어 있어 지형적으로 산줄기와 같은 두 지형지물의 사이에 위치한 지형이 많이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지역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꼭 필요한 물이 나는 샘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어 마을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므로 '샛골'이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샛골'이라는 지명이 너무 흔하다 보니 주변에 있는 '샛골'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크다, 작다'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다 보니 '큰 샛골'이라는 의미의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크다'는 의미의 옛말은 '하다, 감(곰)'이었으므로 '한샛골, 한샛말, 가마샛골, 가마샛말'을 재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에 있는 '황새말'의 지형을 보면 금왕읍 내곡리에서 흘러오는 물길과 삼성면 대정리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의 사이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곳이어서 큰 마을을 이루어 사는 마을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황새말이라는 지명은 황새와는 관련이 없고 '황(크다는 의미의 한)+샛말(사이에 있는 마을)'로서 산이나, 물 등 두 지형 지물의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음성군 대소면은 1914년 일제에 의한 군면 폐합에 따라 충주군 대조곡면(大鳥谷面)과 충주군 소탄면(所呑面)을 병합하여 대조곡(大鳥谷)과 소탄(所呑)의 이름을 따서 대소면(大所面)이라 한 것이다. '대조곡(大鳥谷)'이라는 자연 지명의 뿌리는 '큰+새(사이)+골'이라는 의미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본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소탄(所呑)'의 뿌리는 무엇일까? 조선 시대에 '소탄면(所呑面)'은 본리(本里), 성산(城山), 부윤(富潤), 상대(上台), 하대(下台), 신촌(新村)의 6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행정 지명을 보면 각 면(面)의 면소재지를 '본리(本里)'라 하였다. 그러므로 소탄면의 '본리(本里)'는 '소탄면(所呑面)'의 면소재지로서 이 마을의 자연 지명이 '소탄(所呑)'이었기 때문에 '소탄면(所呑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현재의 '소탄(所呑)'마을은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로서 남쪽으로는 최성미가 있고, 북쪽으로는 각골이 있다. 본래 충주군 소탄면(所呑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으나 1906년에 음성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본리와 성산리 등을 병합하여 성산리(최성미)의 '성'자와 본리의 '본'자 각 한 글자씩을 따서 '성본리'라 하고 대소면에 편입하였다. 일설에는 조선 시대에 연안김씨 문중의 소탄(所呑)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소탄이라는 음을 가지고 상상하여 만들어진 말로 추정되므로 실제로 지명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말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소탄'의 '소'는 지명에서 주로 산이나 언덕의 지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예가 많이 있으며 순우리말인 '솟다'에서 온 말로 추정이 되는데 '탄'이라는 음은 자연 지명에서 쓰인 예가 그리 많지 않 고 다만 한자로 표기된 지명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의 탄리는 한자로 '炭里'라 표기하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이전의 조세제도를 보면 현금 이외에 금은보화나 각종 곡물류와 소금, 명주나 무명 등 피륙과 숯이나 장작 등도 세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특별한 특산물이 없는 산간 지역에서는 세금(稅金)으로 숯을 내는 지역이 많이 있었을 것이며 숯을 만들기 위한 숯가마와 세금으로 받은 숯을 보관하는 숯 창고(倉庫)가 각지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숯가마가 있던 골짜기나 숯창고가 있는 인근의 마을은 자연스럽게 숯골이라 불리었을 것이며 숯골을 한자로 표기하면 '탄리(炭里)'가 되는 것이다. 한자 표기를 보면 지명으로서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서 두 지명을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합성 지명은 행정 지명이 만들어질 때 한자로 표기된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같은 이름이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하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전국의 지명에서 '소탄'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니 충남 서산시 수석동의 '소탄산', 충남 서산시 오남동의 '소탄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의 '소탄골, 바깥소탄골' 등이 있었다. 경남 양산시 동면 계석리의 금정산 자락에 있는 소탄바위는 옛날에 사람들이 이곳 동산에서 소를 방목하면서 일군들이 민가와 멀리 떨어져 주인이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부터 소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소의 등에 올라타기 위하여 이 바위를 이용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실제로 소를 타던 바위라고 하기는 어렵고 다만 '소탄'이라는 음으로 연상한 유래일 것으로 추정이 되며 주변에 '소탄'이라는 지명이 있거나 아니면 '소탄'이라는 지형의 인근에 있는 바위가 아닐까·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에도 '소탄'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지형을 보면 계곡에서 내려오는 여울이다. 이상에서 보면 '소탄'이라는 지명이 주로 '산이나 계곡, 계곡을 흐르는 여울' 등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곡의 여울은 일반적으로 깊게 파인 골짜기를 흐르지만 지형에 따라 주변의 지형보다 그리 낮지 않은 곳을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게 되는 경우에는 주변에서 볼 때 '솟아있는 지형을 흐르는 여울'의 의미를 가지는 지형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탄'이란 '소(솟다)+탄(여울)'으로서 '솟아 있는 지형에 흐르는 여울'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음성군 대소면의 옛 지명인 '대조곡(大鳥谷)'이 '큰 산줄기의 사이에 있는 땅'의 의미이며 여기에서 '조곡(鳥谷)'은 '샛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면 한자로 표기되기 전의 지명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면서 '샛골', 또는 '사이골'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니 보은군 내북면 화전리의 '샛골', 내북면 두평리의 '샛골', 회남면 광포리의 '샛골'을 비롯하여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경기 이천시 안흥동,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지구리,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학담리,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신대리,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등에 '샛골'이 있으며, '사이 ㅅ'이 없는 '새말'도 결국 같은 이름으로 볼 수 있으므로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삼산리, 청원구 외남동,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 등의 '새말'을 비롯하여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옥천군 안내면 동대리, 보은군 회인면 용촌리, 회남면 사음리, 수한면 노성리, 산외면 원평리, 보은읍 강신리, 산외면 장갑리, 탄부면 사직리의 '새말' 등 충북 지역만 찾아보아도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샛골'이라는 지명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말과 그 소리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결국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는 수모를 당한 예도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행정중심 복합도시로 건설하면서 그 이름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하여 결정된 것이다. 사람의 이름으로 도시 명칭을 만든 것이 최초일 뿐 아니라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을 생각하여 행정구역의 이름도 고운동, 아름동, 어진동, 새롬동, 한솔동, 보람동, 다솜리, 누리리, 한별리, 산울리, 해밀리 등 순우리말로 예쁘고 아름다운 한글 이름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세종시의 다정동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자연 지명으로 '샛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2017년에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변경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여 '가온마을'로 변경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샛골'이라는 말의 어감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샛골은 듣기에 따라 색(色)을 밝히는 '색골'로 들리면서 동네 전체가 호색한(好色漢)이나 탕녀(婸女)들이 사는 곳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동명(洞名)이 어른들은 물론 자라나는 아이들이 동네 이름으로 인해 자칫 집단 따돌림이나 희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마을 이름 변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마을 이름을 변경해 달라는 민원을 올리게 되었다. 계속해서 민원이 제기되자 명칭제정자문위원회 심의와 입주 예정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지역 전래 명칭인 '가운데말'에서 유래한 '가온마을'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샛골' 또는 '샛말, 새말' 이외에도 '사이골, 사이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명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쪽 지역과 강원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새'를 '사이'로 발음하는 지역의 특성에 따른 사투리의 영향으로 보인다.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의 '사이골'을 비롯하여 경북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광주시 광산구 남산동, 경남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울산시 울주군 청량읍 중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등에 '사이골'이 있고,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의 '사이말'을 비롯하여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강원도 동해시 괴란동,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퇴곡리,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등에 '사이말'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의 '샛골'은 잔도리(棧道里)와 분계 두 마을 사이에 있다 하여 '사이골'이라 부르다가 간곡(間谷)이란 한자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와 '사이'의 의미를 가진 한자 '간(間)'으로 표기한 것을 볼 때 지명에서 '새'는 '사이(間'의 의미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말'은 '사이'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샛말'로 불리게 되었지만 '새말'의 경우에는'샛말'이 줄어서 '새말'로 변이된 경우와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에서처럼 '새로 생긴 마을'로서의 '신촌(新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지명의 어원을 찾기 위해서는 마을이 생성된 역사와 그 마을의 지형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음성군 대소면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고 인구가 적어 경제, 문화, 교육 등 각종 분야에 자립 능력이 부족한 충청북도의 오지였다. 그러나 경기도 하남시와 충청북도 청주시를 연결하는 중부고속도로가 1985년 5월에 착공하여 1987년 12월 3일에 개통하였는데 이 때 대소면에 음성나들목(2013년 7월 19일에 음성IC 명칭이 대소IC로 변경)이 생기게 되면서 이 지역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까지 가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릴 정도로 교통이 좋아지자 마치 수도권이라도 된 것처럼 공장이 들어서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머지않아 시로 승격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인근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인구의 쏠림 현상으로 인구 증가세가 주춤하였으나 아직도 음성군에서 금왕읍, 음성읍과 견줄만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대소면(大所面)이라는 행정 지명은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선견지명이 있어 이곳에 크게 발전할 도시가 들어설 장소라 예견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 지명이 생기게 된 역사적 유래는 다음과 같다. 대소면은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고려때 대조곡처(大鳥谷處)가 있었으므로 대조곡면(大鳥谷面)이라 하여 생동(生洞), 태티(泰峙), 소당(韶堂), 석격(石格), 삼한(三閑), 백금(白今), 오산(梧山), 정곡(井谷), 미곡(美谷), 각동(角洞)의 10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조선 시대에 고종 광무 10년(1906) 9월 24일 지방 행정 구역 정리에 의하여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일제에 의한 군면 폐합에 따라 충주군 소탄면(所呑面)의 본리(本里), 성산(城山), 부윤(富潤), 상대(上台), 하대(下台), 신촌(新村)의 6개 동리와 충주군 사다산면(沙多山面)의 오상(五上), 오중(五中), 오하(五下), 오삼(五三), 연호(宴湖), 소죽(小竹), 우두(牛頭), 영산(鈴山), 미산(美山), 대죽(大竹), 사산(沙山), 서당(書堂), 계두(鷄頭), 풍동(楓洞), 천곡(泉谷)의 15개 동리와 충주군 천기면(川岐面)의 법평리(法坪리)와 용산리(龍山里)의 각 일부와 진천군 만승면의 검성리(儉城里), 사산리(沙山里), 광동리(光東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조곡(大鳥谷)과 소탄(所呑)의 이름을 따서 대소면(大所面)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조곡면(大鳥谷面)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는 근거가 된 대조곡처(大鳥谷處)란 무엇인가· 처(處)의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지방호족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일부 촌락이 장(莊) 또는 처(處)라는 이름으로 왕실에 편입되었던 것이라 추측하고 있으며 단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지역적 행정구획의 하나로서 군현(郡縣)의 하부단위였다. 따라서 후에 군현(郡縣)으로 승격되거나 아니면 여러 지역과 병합되어 군현에 소속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처(處), 면(面)과 같은 행정구역 편제의 앞에 붙어 고유의 지명을 나타내고 있는 '대조곡(大鳥谷)'이란 분명 이 지역에 있던 고유의 지명일 것이다. 그러면 '대조곡(大鳥谷)'이란 지명의 어원은 무엇일까· 충남 논산군의 은진면의 옛 이름이 대조곡면(大鳥谷面)이었다. 본래 은진현이었는데 은진현 소재지에 한샛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 이름을 따서 한자로 표기한 것이 대조곡면(大鳥谷面)이었던 것이다. 충남 예산군 삽교읍 가리(駕里)는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大鳥旨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새, 가마시, 가산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룡이, 역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리(駕里)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마새'란 '큰 새'의 의미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대조(大鳥)'가 되므로 '대조지면(大鳥之面)'이라 했다가 '대조지면(大鳥旨面)'으로 쓰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지명에서 쓰인 '새'는 지형에서 '두 지형지물의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여 왔으므로 '큰 새'를 '대조(大鳥)'로 표기한 것은 구전되어 오면서 그 의미를 잘못 알고 그렇게 표기를 했을 뿐 실제로 지명에서 '큰 새'란 '큰 사이'이며 '대조곡(大鳥谷)'이란 '큰 산줄기나 강 등 지형지물의 사이에 있는 땅이나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1리에는 이 마을에서 보은군 내북면 염둔리를 넘는 살티라는 험한 고개가 있다. '살'이라는 글자는 '殺(죽이다. 살벌하다)'라는 말을 연상하게 되므로 매우 험한 고개라는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게 된다. 옛날부터 이 고개는 넘는데 3일이 걸리는 고개라 하여 사흘티라 했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으며 옛 지도인 , , , 등에 '三日峙'라 표기되었다. 아마도 '살'의 음이 '사흘'과 비슷하므로 '살티'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연관지어 꾸며낸 말로 보여진다. 또한 이 고개의 이름이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어 이 마을을 예전부터 살티(사흘티)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얼마나 험한 고개라서 살티라 했는지 궁금하여 이 고개를 넘어보려고 해 보았지만 요즈음은 이 고개를 사용하지 않아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길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청주와 미원을 연결하는 32번 지방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어 이 고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경북 김천시 조마면 대방리와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를 연결하는 '살티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살티는 화살과 관련된 이름으로 살치재 또는 전령(箭嶺)이라고 하고, 또 주음시라고도 한다. 주음시는 이곳에서 화살(矢)을 줍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살티재 아래 대방리에도 '궁항(弓項), 성궁, 활목, 활미기' 등 활과 관련된 지명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래는 소리에서 연상되는 의미를 가지고 유추해서 만들어낸 내용일 뿐 실제로는 다른 의미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명에서 '살'이란 '사이(샅)'의 의미로 쓰인 예를 많이 볼 수가 있다. 여러 지역에 '살고지다리' 또는 '살구지고개'가 많이 있는데 '살고지다리'는 '곶(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 땅)과 곶의 사이에 놓인 다리'의 의미이고 '살구지고개'는 '곶(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 땅)과 곶의 사이에 있는 고개'의 의미이며 다리와 고개는 지형적으로 곶과 곶의 사이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충분히 유연성이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살고지, 살구지'가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면서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자 이와 유사한 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집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살구, 살구나무'와 연관 지어 '살구골, 살구나무골, 살구나무징이'로 변이되고 이러한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행치(杏峙), 행촌(杏村), 행정(杏亭)' 등의 지명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의 생가 마을인 '행치말'을 비롯하여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간매리의 '행치말',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주암리의 '행치고개',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옥촌리의 '행치고개' 등이 있고,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의 '행정리', 진천군 진천읍의 '행정리',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행정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의 '행정리', 경북 칠곡군 기산면의 '행정리' 등을 들 수가 있다. 충주시 살미면(乷味面)은 본래 충주군 지역으로서 '사을미곡(沙乙味谷)'이라는 지명에서 '사(沙)'자와 '을(乙)'자를 합하여 살미면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한자로는 '살'로 표기하지 않고 굳이 '사을미(沙乙味)'라고 표기한 것은 '사이'의 의미인 고어 '샅'이 '고샅, 사태'에서처럼 원형이 보존된 예도 있지만 다른 음소와 결합할 때 '샅'의 음과 의미를 보존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사을(沙乙)'처럼 차별화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자 '샅을→사을→살'로 변이되는 과정을 '살미면'이라는 지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경북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의 '살고개',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의 '살고개골', 경남 하동군 북천면 사평리의 '살티재' 등은 '살'이 '사이'의 의미로 쓰인 지명이며, 이러한 의미의 '살고개'가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의 '아홉살이고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의 '아홉살이고개' 경북 경주시 내남면 안심리의 '아홉살이고개' 들에서는 '아홉'이라는 음을 덧붙여 험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보은군 내북면 화전리의 '사흘티'도 3일간 넘어야 하는 험한 고개가 아니고 '살티'에서 온 말로 '곶과 곶 사이에 있는 고개'의 의미일 것이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17번 국도는 청주에서 진천을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로 이용되어 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교통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주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4차선으로 시원하게 확포장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청주에서 진천과 광혜원, 대소, 이월로 가는 거리가 훨씬 가까워지고 편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17번 국도가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도로라는 단편적인 생각만 하고 있지만 사실 17번 국도는 남과 북을 연결하는 총연장 416.7 Km의 긴 도로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면 이 도로를 달리는 느낌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이 국도는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서 시작하여 죽산-진천-오창-청주-대전-전주-임실-남원-곡성-구례를 거쳐 여수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건너 돌산읍에 이르고 돌산도를 가로질러 77번 국도에 바톤을 넘겨주면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17번 국도에 연결된 77번 국도는 부산에서 개성까지 남해안과 서해안의 해안 도로를 연결하는 부산개성선을 말하는 것인데 화태대교를 건너서 화태도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17번 국도가 한반도의 남쪽끝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의미 있는 도로인가· 청주에서 17번 국도를 통하여 달리다가 진천을 지나면 대소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 길로 들어서서 낮은 고개를 넘자마자 '살천이'라는 마을을 만나게 된다. '살천이'라는 마을은 음성군 대소면 내산리에 속해 있으며 마을 뒤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모래가 많다 하여 사다산(沙多山)이라 부른다. 그래서 살천이라는 마을도 사다산의 이름을 따서 한자로 '사산(沙山)'이라 표기해 왔으며 조선 시대에는 충주군 사다산면(沙多山面)이었다. 사다산면(沙多山面)이라는 이름이 이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 이 마을 이름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거나 어떤 깊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살천이라는 마을 이름에는 어떠한 의미가 들어 있을까? 처음에 마을 이름을 지을 때는 어떻게 불리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에도 이러한 마을 이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음성군 생극면 차곡리에 살천이들이라는 자연 지명이 있을 뿐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은 데 다행히 지리산 자락에 있는 경남 산청군에서 살천이라는 말과 연관성을 지닌 시천면을 찾을 수 있었다. 시천의 옛 이름이 살천이였으며 '살천'을 한자로 '시천(矢川)'이라 표기한 것은 '시(矢)'가 '화살'의 의미이므로 의미를 한자로 옮긴데 불과하다. 위치는 지리산 천왕봉 동쪽 일대로서 중산천 계곡물과 내대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냇물을 살천이라 하였으며 살천이 흐르다가 외공리 끝자락 '음수 모퉁이'를 경계로 해서 그 위쪽을 물윗골, 아래쪽을 물아래라고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지형으로 보아 '살천'이란 두 지형지물의 사이를 흐르는 냇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지닌 '새내'라는 지명이 다음과 같이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 괴산군 청천면 상신리의 '새내'를 비롯하여 충남 당진시 신평면 금천리, 당진시 송악읍 영천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경북 의성군 다인면 가원리, 경북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 경남 창녕군 유어면 풍조리 등에 '새내'라는 지명이 있으며,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신천리와 충남 금산군 남일면 신천리의 '새내'는 한자로 '신천(新川)'으로 음차 표기함으로써 오늘날 그 의미에 혼란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는 '신대(新垈)'의 신(新)자와 '한천(寒泉)'의 천(泉)자를 써서 신천리(新泉里)라 한 것이므로 이와는 관련이 없다고 하겠으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신천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의 신천리,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의 신천리, 경기 화성시 송산면의 신천리, 경기 가평군 설악면의 신천리,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의 신천리 등은 '새내'라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새내'라는 지명이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원래 '사이(새)'의 옛말은 '샅'이었다. 따라서 지명에서 '샅(사이의 고어)+내(냇물)'가 '살내, 살천, 시천(矢川), 새내, 신천(新川),' 등으로 변이되어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두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냇물'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아름다운 이름이 바로 '살천'이라면 좀더 친근감이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