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창지개명의 청산을 위해 전혀 노력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전 국민의 호응으로 정부에서 적극 나선 것이 아니라 일부 단체에서 호소하거나 일회성에 그치고 말아서 그 결과가 아주 미미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울의 인왕산은 창지개명의 피해자다. 인왕산(仁王山)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서울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명산이므로 일제 강점기에, 가운데 있는 '왕(王)'자를 '일본(日)의 왕(王)'으로 교묘하게 바꿔치기하여 인왕산(仁旺山)으로 쓰다가, 창지개명의 청산을 위한 노력으로 1995년에 인왕산(仁王山)으로 본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도 그 최고봉이 장군봉인데 일제가 대정 일왕의 재위기간에 사용했던 연호인 대정(大正)을 사용하여 대정봉(大正峰)으로 변경하였으나 해방후 북한측에서 해석은 달리 했더라도 하여튼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구나 남대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남대문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고 본래의 이름은 '숭례문'이며 보물 제1호인 동대문도 마찬가지로 '흥인지문'이 본래의 이름이었다. 남대문, 동대문이 우리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일제가 사용하던 이름이므로 조선시대에 원래 사용하던 이름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1996년 11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재평가 작업의 하나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 두 이름을 바꾸려면 행정 기록 200여 가지를 변경해야 하므로 전면교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창지개명의 잔재 청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고 할 것이다. 충북에서도 창지개명의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이 있어 왔다.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본정통(本町通)'이라는 명칭이 일본식 지명이라는 자각과 함께 1990년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바른 지명 찾기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때 '본정통'을 대신하여 '성안길'로 바꾸게 되었다. 성안길이란 예전의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북문(北門) 자리에서 남문(南門) 자리에 이르는 큰길로 청주시(淸州市)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으며 청주읍성의 안에 있는 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성안길에서는 1995년부터 매년 성안길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찾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명소화하기 위해 '성안길 축제'가 열리고 있다. 청주읍성은 예로부터 청주의 사회, 경제, 군사,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임진왜란시 최초의 승전고를 올린 곳으로 유명하며 성안길 주변에는 중앙공원 내 유적과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을 비롯하여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일제 침략기인 1920년대에 도시계획이란 미명 아래 청주읍성을 완전히 파괴하였고 오랜 역사를 지닌 일명 남석교(南石橋) 또는 정진교(情盡橋)라 불리던 청주의 대교(大橋) 역시 이 때 땅속에 매몰시키고 그 위로 도로를 만들어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을 원상으로 되돌리는 일이 일제 청산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하지 않을까? 또한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의 '방아다리'라는 이름도 일제가 일본식 주소 체계인 '오정목'으로 명명한 이후 오랫동안 그렇게 불리어 왔으며 아직도 청주시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오정목'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고착화되어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지만 젊은이들이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방아다리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일제 잔재를 뿌리 뽑아 우리말 지명으로 바꾼 것은 '청주 문화사랑모임'이라는 민간단체의 피땀흘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00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 민간단체는 수개월 동안 1천여 명의 시민 설문조사와 전문가 심사 등을 통해 이름을 공모했고 결국 지금의 지명이 붙여지게 됐다고 하는 데 사실은 이곳의 옛 지명이 방아다리였으며 옛 지명을 다시 찾아 쓰게 된 것이다. 방아다리라는 이름 속에는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사용해온 디딜방아의 역사와 그 디딜방아의 형상으로 갈라진 길의 형태를 가리키는 아름다운 의미가 숨어 있다. 지금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길도 사통팔달 갈라져서 모양은 비록 변했지만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의 역사가 녹아있는 이름이므로 그 의미를 잘 간직하여 사용하다가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으레 행정 구역 개편과 함께 지명을 새로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바뀐 것도 식민지 지배를 위해 당연한 결과인 것을 공연히 견강부회하여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1914년 전국에 걸쳐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한 행정지명의 예를 보면 충북 음성군 삼성면의 경우 천기음면(川岐音面), 지내면(枝內面), 두의곡면(豆衣谷面) 등 3개의 면을 통폐합하여 삼성면(三成面)이라 이름지었다. '천기음면(川岐音面)'은 냇물이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자연지명이 '냇거름'이며 '川岐音面'이라 표기한 것은 '냇거름면'이라 읽어야 했기 때문에 '音'이 필요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지내면(枝內面)'은 '가래실면'이요, '두의곡면(豆衣谷面)'은 '두루실면'으로서 자연지명을 그대로 살린채 행정단위인 '면(面)'을 붙여 사용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러한 고유의 우리 이름을 말살하고 '삼성면(三成面)'이라 했던 것이다. 음성읍 용산리(龍山里)의 경우 수현리(壽峴里), 월곡리(月谷里), 중산리(中山里), 용추리(龍湫里), 사인동을 병합하여 용추와 중산의 이름을 따서 용산리라 해서 군내면에 편입시켰다. 새 이름을 짓는 방법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하던 방법으로 두 지역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드는 식으로 했으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큰 단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한 행정명의 변경이 아니라 굳이 자연 마을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최소 행정단위를 모두 개편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었다는데 있는 것이다. 자연 지명들에는 우리의 역사, 지리, 풍속, 성씨, 종교, 언어 등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중요한 것인데 이런 이름을 일제는 교묘히 바꿔치기한 것이니 어느 왕조에서도 커다란 행정 단위의 명칭만 바꾸었을 뿐 이러한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를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더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의 명칭으로서 자연 지명을 살려나가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고개, 골짜기, 들판 등의 자연지명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앞으로 새로운 지명을 만들 때 사용한다면 영원히 보존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은 그 방법에서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지만 식민지 통치를 위해 필요했다고 치더라도 다음과 같은 창지개명은 일제의 풍수 침략이라는 잔인한 의도를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전국의 초등학교 교가를 보면 대부분 '○○산 정기 받아', '○○강, ○○천' 등의 구절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지맥이나 풍수사상이 우리 민족의 기층 사상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선정할 때, 이사 갈 때 등 생활 전반에 풍수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일제는 풍수 침략을 시도했던 것이다. 풍수 사상의 원조인 중국에도 '봉황산(鳳凰山)이라는 이름의 산이 많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봉황산'이 많이 있는 것은 봉황산이 풍수지리적으로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산세를 보이므로 인근의 마을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산은 주민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에 더 이상 인재가 나오지 않아 앞으로도 나라를 찾지 못하고 영원히 식민지로 지내야 한다는 믿음을 조선 민족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봉황산의 이름을 창지개명하였다. 우선 토지 조사 사업을 하면서 봉황산에 쇠말뚝을 박을 뿐만 아니라 산이름을 교묘하게 바뀌치기하였다. 즉 봉황산의 '황(凰)'자를 떼어내고 날아갈 '비(飛)'자를 넣어 '비봉산'으로 바꾼 지역이 경기도 안성시 이죽면의 비봉산 등 16 군데나 있으며 대전광역시에 있는 계족산(鷄足山)의 본래 이름도 봉황산이었다. 일제는 '용과 봉황'이란 말이 지명에 있으면 용과 봉황의 기운을 받아 기세가 세질 것을 우려하여 다른 언어로 바꾸거나 봉황을 닭(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경상북도의 명산인 주왕산에 있는 3개 폭포의 명칭도 본래 이름은 용추폭포, 중용추, 용연폭포이었는데 이를 제1폭포, 선녀탕, 제3폭포로 바꾼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풍수 체계를 송두리째 혼란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인 산경표를 없애고 산맥 개념으로 바꾸었는데도 우리는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도 한동안 산맥 개념의 지리 교육을 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완전한 청산을 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왔고 또 잘 알고 있지만 창지개명(創地改名) 이라고 하면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일제가 처음부터 창씨개명 정책을 쓴 것은 아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부 친일파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려고 하자, 민족의 차별화에 바탕을 둔 지배질서 유지를 통치목표로 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기 위해 을 시행하여 1939년까지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금지해 왔었다. 그러나 일제는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시 동원 체제에 조선인들의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내선일체가 강조되면서 급변하여 1939년 11월 10일 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도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940년 5월까지 창씨 신고 가구수가 7.6%에 불과하자,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조선인에게 각종 불이익을 주는 등 반강제적인 방법으로 창씨 개명의 비율을 79.3%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일제가 강제로 우리 민족이 수천년간 지켜 내려온 성을 바꾸고 일본식 이름으로 고치게 했다는 악랄함을 이야기하면서 치를 떨지만 사실은 이러한 창씨개명보다 더 악랄하고 무서운 것이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창씨개명은 일본 내에서도 조선인과의 차별화를 깨뜨린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지만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부득불 시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창지개명(創地改名)은 한일합방이전부터 민족 정기를 단절시켜서 조선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 의식, 애국심의 뿌리를 차단함으로써 조선을 원활히 지배하기 위하여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세워진 조선 식민지 지배 계획의 중요한 전략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명이란 살아가는 땅의 역사이며 그 땅에서 자손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혼이 깃들여 있는 위대한 정신적인 유산이다. 따라서 지명 속에는 우리의 역사, 지리, 풍속, 신앙, 언어를 비롯하여 수천년을 이 땅에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꿈과 이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우리의 지명을 교묘하게 바꿔치기한 창지개명(創地改名)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를 우리 국민들이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광복 7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일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인지를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은 어떻게 추진되었으며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까· 일제는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에 전국 8도를 23개 부로 재편성하고, 이듬해에 다시 전국을 23부제에서 다시 13도로 재편함으로써 1896년 행정구역은 총 13도 8부 1목 332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 두 행정구역 조정은 군현간 통폐합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강점 후 만3년 4개월만인 1913년 12월 29일 로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안을 공포하고 1914년 4월 1일부로 시행함으로써 조선의 행정구역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개편의 방향은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거점도시 12부를 두는 것과 더불어 전국의 군을 통폐합함으로써 면적, 인구, 경제력의 규모를 조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국의 군 수가 332읍에서 220읍으로 줄었다. 1914년 3월에 부. 군의 폐합을, 4월에는 면의 폐합을 통하여 역사성 있는 지명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명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이 1914년에 군은 97개, 30.6%가 폐합되었고, 면은 1,834개 42.2%, 리, 동은 34,233개, 54.7%가 폐합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36,134개, 53.8%의 행정구역 명칭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수천년간 내려온 이 땅의 역사와 아름다운 우리의 언어, 조상들의 삶이 녹아 있던 지명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목숨 바쳐 지켜온 고향 마을, 정다운 이웃 그리고 그를 통하여 얻어지던 애향심과 애국심이 여지없이 부서진 것이다. 이와같이 지명에 남아있는 민족혼과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기 위한 일련의 사업들이 이른바 창지개명(創地改名)인 것이다
올해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미 독립 운동 만세를 부른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의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거의 죽고 없지만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고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리 오랜 과거라고 하기는 어렵다. 2019년이 밝아오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대대적인 행사들이 있었지만 3월이 지나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우리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다 잊혀져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을 싫어하고 배척하기만 할 뿐 진정으로 우리가 일제의 악랄한 민족혼 찬탈 전략을 파헤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해 본적이 있는가· 아직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태평양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의 청년들과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한 조선의 소녀들에 대하여 일말의 반성도 없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일본에 대항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과제 중에 하나가 창지개명(創地改名)일 것이다. 우리는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왔고 또한 잘 알고 있지만 창지개명(創地改名)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끊으려고 우리나라 주요 명산에 박았다는 쇠말뚝은 많은 사회 단체에서 앞장서서 뽑아내고,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 사용하던 이름은 광복 이후 일제가 떠나고 나니 너도나도 옛날의 한국식 이름으로 모두들 스스로 바꾸었는데 창지개명의 경우는 지적부나 지도를 비롯하여 등기부, 호적부, 주민등록부 등 다양한 공부에 기록되어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노력이나 국민의 관심이 없다보니 다시 되돌리지 못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창지개명(創地改名)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흐리게 하는 점에서 창씨개명(創氏改名)보다도 더 무서운 일인데 우리는 아직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 정말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일제는 수많은 밀정을 보내어 우리의 땅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들은 지형을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풍속과 생활, 토속 신앙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어떻게 하면 민족의 정기를 끊고 원활히 지배할 것인가를 다양하게 연구해왔던 것이다. 빈곤하게 살아가는 조선의 농민들이 농한기에 투전을 즐기는 것을 알고는 화투를 보급하여 패가망신하거나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일제 침략의 한 술수라는 주장이 황당하게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라 일제의 풍수 침략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쓸 때나 집을 지을 때 명당을 찾기 위해 필사적일 정도로 풍수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따라서 조선 민족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풍수 침략이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래서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의 명산의 지혈에 쇠말뚝을 박는 방법을 주로 많이 사용하였고, 조선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목침과 석침 묻기(1997년 5월5일 관할 구청의 허가를 받아 서울 창덕궁 인정전 뒷산 지하를 굴삭기로 파보니 지하 18m에서 석침 7개를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로나 철로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기, 지혈에 쇠물을 녹여 붓거나 산꼭대기에 구덩이를 파고 며칠간 불을 놓아 뜸을 뜨거나 숯을 묻기, 지역마다 명당 자리에 신사를 지어 조선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을 차단하는 일, 기를 끊기 위해 건물을 신축하는 일(경복궁 앞에 총독부 건물을 지었고, 창경궁에 장서각을 신축) 등 갖가지 수단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풍수 침략의 차원에서 일제는 한일합방을 하자마자 조선총독부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바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이었으니 지금이라도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악랄하고도 무서운 의도를 파헤쳐서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일을 시급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지역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산외일면(山外一面)과 북강내일면(北江內一面) 지역으로 청주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청주 읍내의 북쪽 지역을 북일면(北一面)과 북이면(北二面)으로 나누면서 내수 지역은 북일면이 되었다. 그후 북일면이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로 발전하면서 2000년 1월 1일 내수읍(內秀邑)으로 승격되고 2014년 7월 1일에는 청주 청원이 통합되면서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으로 행정 구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청원군이라는 이름은 자연지명을 근거로 만들어진 명칭이 아니라 원래 청주군이었는데 청주시가 승격되면서 청주시 외의 청주군 지역을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라 하여 청원군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청주와 청원의 통합은 통합이라기보다는 원래의 명칭으로 되돌린 것인데도 청주와 청원이 하나로 통합된 지 4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옛 청원군 지역이 청주시의 어느 구에 속하는지를 알기가 어려워 지도를 찾아 확인하게 되니 습관이란 참으로 고치기가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청주 지역은 고종(高宗) 33년(1896)에 지방 제도의 개정으로 전국을 13도(道)로 개편하면서 충청북도(忠淸北道) 청주군(淸州郡)이 되었다. 1946년에 청주읍(淸州邑)이 부(府)로 승격되고 1949년 8월에 지방자치법(地方自治法)에 의하여 청주읍(淸州邑)이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청주시 외의 지역은 청원군(淸原郡)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후에도 수차례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져 그 때마다 일부 지역이 청주시(淸州市)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내수(內秀)'라는 지명은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것일까· 내수라는 이름은 원래 '수재'의 안쪽이라 하여 '안수재'라 불려 왔으며 한자로 '내수성(內秀城)'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를 줄여서 '내수(內秀)'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내수의 서남쪽에 '외수(外秀-바깥수재)'라는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수'가 '수재의 안쪽'이라는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서 '수재'란 어떤 의미이며 한자로 '빼어날 수(秀)'를 쓴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지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국의 지명에서 '수재골'을 찾아보니 충남 공주시 사곡면 화월리의 수재골과,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의 수재골, 수재울을 비롯하여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경북 경주시 양북면 와읍리, 전남 고흥군 도화면 가화리,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등에 '수재골'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명칭도 '수재들'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에 덕유산(해발 1,614m) 산줄기와 덕유삼봉산(해발 1,254m - 전북과 경남의 경계)을 잇는 백두대간 상의 고개가 있는데 이정표에는 신풍령이라 표기하고 있다. 신풍령이라는 이름이 옛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최근에 이 고개 아래 휴게소가 들어서면서 추풍령을 본따서 신풍령 휴게소라 한데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고개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지명은 '빼재'였으므로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표지석을 세울 때 고개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면서 '수령(秀嶺)'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의 요충지로서, 역사의 격동기마다 수많은 전투가 이곳에서 치뤄졌고, 그에 따라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또 숱한 국난 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맞서 싸울 때 이곳의 토착민들은 험준한 지형 속에서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고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고 불리었는데 후에 '빼재'로 바뀌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의 '빼재골', 충남 논산시 양촌면 임화리 '빼재, 빼재골', 전북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 '빼재, 빼재골'의 지명 예가 남아 있고, '수재'라는 지명들이 한자로 '빼어날 수(秀)'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재'의 자연지명은 '빼재'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빼'의 어원은 무엇일까·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에 '수성'이란 지명이 있어 '수잣골, 불당골'이라고도 불리는데 '불당골'이란 '땅이 솟아 있는 지역'을 의미하므로 '빼'란 고개의 지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빼재'는 '땅이 빼어난(솟아 나온) 모양의 고개'의 의미로 볼 수 있고 내수는 빼재의 안쪽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에서 가덕을 지나 시원하게 뻗은 4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두산리에서 큰 고개를 넘어 문의와 청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이 나타난다. 도로의 오른 쪽에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들어선 아늑한 마을이 있으니 이름도 고운 고은리란다. 고은리는 본래 청주군 남일상면(南一上面)의 지역으로서 '고분터, 고원티(高院峙)'라 불리어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기리(館基里), 임의리(林義里), 유관리(柳串里), 진목리(眞木里), 쌍수리(雙樹里) 일부와 남일하면(南一下面)의 관기리(館基里) 일부를 병합하여 고은리(高隱里)라 하여 남일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은리(高隱里)라는 지명은 '고분터, 고원티(高院峙)'라는 원래의 자연지명에서 음차에 의하여 한자로 미화하여 표기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음이 '곱다'의 활용형인 '고운'과 유사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고분터'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름에서 떠오르는 의미로만 보면 '옛무덤이 있는 터'라는 의미의 한자 '고분(古墳)터'로 볼 수 있겠지만 주변에서 '고분(古墳)'을 의미하는 자연 지명은 찾을 수가 없다.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는 한자의 음차와 의차를 이용하여 우리말로 된 자연 지명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고분기(古墳基)'라 표기하고 '옛무덤터'라는 자연지명이 전해 와야 할 것인데 '고분터'가 자영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고분'이 한자표기가 아닌 순수한 우리말의 변이음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 '고은리'를 찾아보자.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의 고은리는 고목마을과 은석마을에서 각각 한 글자씩 가져와서 고은리라는 지명이 만들어졌으므로 자연지명이라고 할 수가 없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의 구운리는 9명의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던 마을이었다는 전설에서 유래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는 자연지명이 곰실이므로 '곰실(큰 마을)→고음실 →고은실 →고은리'의 변이과정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또한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에도 '고은리'라는 지명이 있으나 그 어원을 알아내기가 어렵다. 충주시 수안보면의 고운리 마을은 1960년대에 형석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는데 지난해(1918년) 겨울에 그 곳에서 역고드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중산리 상촌에 속하는 마을인 법수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뒷산 중턱에 고운사(古云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부근에는 지금도 옛날 기와 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이 마을을 고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본래 연풍군(延豊郡) 수회면(水回面)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은과 시여골을 합하여 고운리라 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다.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풍읍지(延豊邑誌)』 방리(方里) 수회면조(水回面條)에 '현북거오십리고운리(縣北距五十里古云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고운'이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자연지명으로서 구전되어온 지명 요소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지형을 보면 동북쪽에는 살미면 공이리로 넘어가는 갑둥이재가 가로놓여 있고 동남쪽은 꼬부랑재를 넘어 한수면 송계리로 통해 있으며, 남서쪽은 온천리 관동마을과 직마리재를 경계로 하고 있고 서쪽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적보산으로 내려가며 한 줄기가 뻗어내려 중산리 법수와 경계를 이루는 산간 분지형 마을이다. 이곳에 '꼬부랑재'라는 자연 지명이 있는데 '꼬부랑재'를 다르게 표현하면 '굽은티'가 되며 '굽은티→구운티→고운티'의 변이 과정을 추정해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청주시 남일면의 고은리에 전해오는 지명 유래에도 지형이 굽고 휘어 있으므로 고분터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 '고분티, 고원티'라고도 불리우고 있으며 이곳 지형의 특징도 두산리에서 고개를 서서히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구부러져 내려가도록 되어 있어서 매우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따라서 고은리는 '굽은티 → 구븐티 → 고분티, 고원티, 고분터 → 고운티 →고운리'의 변이 과정으로 추정되며 '구부러진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낭성면 관정리에서 추정재라고 부르는 머구미고개를 넘어오면 도로 가에 큰 정자가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지는데 자연지명으로는 가래울이라 부른다.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서 '가래울'이라 하고 한자로는 '가래나무 추(楸)'자로 표기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널리 산재해 있는 '가래울, 가래실' 등의 지명들이 모두 '갈라지는 길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이곳 가래울도 아마 예전에 갈림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가래울을 지나 산정말을 가기 전에 도로 우측 산능선에 전원주택이 들어서서 새로 생겨난 마을이 있는데 이 골짜기를 마을 주민들은 '썩은배미'라 불러 왔다. 지도에는 '작은 배미'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어떤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썩은배미'라는 지명은 그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은데 다른 지역의 지명에도 많이 나타난다. 경기도 파주시 하지석동의 '썩은배미'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의 썩은배미들을 비롯하여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공북리의 '썩은다리' 들은 '썩다(腐)'라는 의미로 들리지만,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의 '사근다리',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의 '사근다리',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의 '사근절', 경북 문경시 영순면의 '사근리(沙斤里)', 경남 함양군 수동면의 옛이름인 '사근면(沙斤面)' 등에서는 '삭다(오래되어서 본바탕이 변해 썩은 것처럼 되다)'의 의미가 연상되며 한자로는 '사근(沙斤)'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서울 성동구 사근동은 사근절(沙斤寺)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로서 매우 낡았으므로 '삭은절'이라 불렀던 까닭에, 부근의 동네 이름을 사근동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의 사근절은 소리에서 연상되는 의미에 충실하다보니 옛날에 삭은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폐사되었다는 유래를 만들어내기도 하였지만 강내면 사인리의 사근절은 샘골 남쪽의 들을 말하고 강내면 석화리의 사근절(謝恩寺)은 오정 마올 앞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절'은 '들'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이 되며 '사근다리'의 '다리'가 '들(드르)'을 변이음인 것 처럼 '사근'은 농사짓는 농토인 '들'의 모양이나 크기를 나타내는 수식어인 것이다. 또 유사한 소리를 가진 지명에 경기 화성시 팔탄면 서근리와 천안시 병천면 봉황리에 있는 서근배미가 있는데 '썩은배미'의 원형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서근배미라고 하면 임 억준의 장편소설 '서근배미 사람들'이 생각난다. '서근배미 사람들'이라는 소설은 주인공 인수가 어린 나이에 겪은 6.25사변이라는 전쟁의 포화 속에 피난 길에서 겪었던 유년시절의 아픔과 이웃의 정을 찾아 아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간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있었던 옛 마을 '서근배미'의 피난시절 몸 담던 그 집과 그 이웃, 그 친구를 찾아 전쟁의 상처를 그리움과 추억으로 돌아보는 이야기를 잔잔히 그리고 있는 글이다. 여기에서 '서근'이란 무슨 의미일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栗洞)의 자연지명에 그 단서가 보인다. 이 마을에는 밤나무가 많았는데 한 그루에서 서 근(斤)이나 되는 밤이 생산돼 '삼근율(三斤栗)'이라 했으며 이 지역을 서근배미, 서근바미 또는 취율리(取栗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서근'은 글자 그대로 '서근(三斤)'의 의미로 볼 수가 있으며 '배미'는 원래 '벼농사를 짓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밤'으로 변이되어 '밤(栗)'과 연관된 유래가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짓는 한덩어리 땅'의 크기를 말할 때 그 땅에 심는 씨앗의 양을 가지고 표현하였다. 즉 한섬지기 땅은 볍씨 한 섬을 심을 수 있는 크기의 땅(옛 단위로 4000평 정도)을 말하며 한 마지기는 한 말의 볍씨를 뿌릴 수 있는 크기의 땅(옛 단위로 200평)을 말하는 것처럼 '서근배미'는 씨앗 서 근(3 근 - 3 되 정도)밖에 심지 못하는 작은 땅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서근배미'가 '썩은배미'로 변이되어 의미의 혼란을 만들었지만 '작은 배미'라고도 불리는 것은 '서근배미'의 원래의 의미가 이 속에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지명에 쓰인 '썩은, 사근, 서근'들은 모두 '서근(三斤)'에서 온 것으로 '땅의 크기가 작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낭성면 관정리의 자연지명으로 '활미'라는 곳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활뫼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로 활산(活山)으로 표기하는 것을 보면 '미, 뫼'는 '산(山)'의 의미임을 알 수가 있는데 산(山)을 수식하고 있는 '활'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한자로 표기할 당시에도 '활'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음차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활'의 음으로만 보면 사냥과 전쟁의 무기인 '궁(弓)'이 연상되므로 지명에서 '궁'을 '활(弓)'과 연관짓고 있는 곳을 많이 찾아 볼 수가 있다. 옥천군 청성면의 궁촌리(弓村里)는 마을 뒷산이 활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활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던 궁촌도 활터마을이라고 불리었으며 조선시대에 활을 쏘던 활터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충남 보령시 궁촌동(弓村洞),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강원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 등이 활처럼 굽은 지형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궁촌 이외에도 궁터(宮基)라는 지명도 많이 나타나는데 '궁터'는 '관터'와 마찬가지로 '관청, 궁(대궐), 왕' 등과 연관지어 '궁(弓)'이 아닌 '궁(宮)'으로 표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의 궁기동(宮基洞)은 궁터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공민왕의 피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무사들이 궁술(弓術)을 연마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보은군 수한면 장선리에는 궁터골, 활목재, 피난골이라는 자연지명이 있는데, 활목재는 궁터골에서 만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의병들이 이 고개에 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다고 하며 피난봉은 궁터골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임진왜란 때 조중봉 선생이 피난을 대비하여 가구를 아침이면 이 산으로 옮기게 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옮기도록 하였고 군사들이 활목재에서 왜적을 막아 싸웠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이 산에서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고 하여 피난봉이라 부른다고 전해지는 등 지명 유래가 상호 연계되어 있다. 그밖에도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궁기리, 경북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의 궁터골, 충남 당진시 신평면 남산리의 궁터, 경북 영덕군 달산면 흥기리의 궁터, 강원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의 궁터,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의 궁터 등이 모두 '궁(宮)'과 연관짓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궁터라는 마을은 지형이 활 궁(弓)자처럼 되어있다고 하여 "궁터"라 하였는데, 그 뒤 '궁(弓)'보다는 '궁(宮)'이 좋다고 하여 궁터(宮垈)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조 17대 정조 16년(1792년) 이곳에 살던 공서린의 위패를 봉인한 사당에 궐리사(闕里祠)라는 현액을 내린 일이 있는데, 그로부터 "궐리(闕里)"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 행정명이 오산시 궐동(闕洞)이 되는 등 '궁(弓)'이 '궁(宮)' 으로 그리고 '대궐(闕)'로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활'은 '궁(弓)'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한자의 동음이의 관계에 의하여 '궁'을 '활(弓)'이나 '대궐(弓)'로 해석하여 유래가 만들어진 예는 있지만 '궁'이 '활'로 변이된 지명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활'과 '궁'은 각각 그 어원을 달리하는 말에서 변이되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관터'와 '궁터'가 모두 그 음에서 연상되는 의미에 따라 '관청이나 대궐이 있던 터'로 유래가 만들어지듯이 그 어원도 동일할 것으로 짐작이 된다. 즉 '관터'가 '굼안터→구안터→관터'와 같이 변이되었다고 본다면 '궁터'도 '굼터→궁터'로 변이된 것이 아닐까· 단양지역의 명산으로 손꼽히는 도락산 깊은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궁기동(궁터골)은 발만 담가도 더위가 싹 가실만큼 시원해 더위를 식히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곳으로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굼(골짜기)'이 있다면 '굼안(굼의 안쪽)이 있는 것은 언어 구성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단양의 궁터골에도 내궁기와 외궁기가 있는데 자연지명으로는 '굼안, 굼박'이라고 재구해볼 수 있을 것이므로 '궁'의 어원을 '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활미'에서 '활'의 어원은 무엇일까· '할미봉'이라는 지명이 '한(크다)+미(山)+봉(峰)'에서 변이된 것처럼 '한(크다)+미(山) → 할미 → 활미'의 과정을 추정할 수가 있는 것은 지명에서 '활'이 '미(山)'을 수식하는 예 이외에는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낭성면 관정리는 자연지명인 관터와 머구미(먹우물)를 한자로 표기한 '관기(官基)'와 '묵정(墨井)'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머구미는 산으로 막힌 지형을 가리키는 '막은 뫼(산)'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되며 관터는 활미 옆에 있는 마을인데 백제 시대에 낭비성(娘臂城)의 고을터라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관터라는 지명은 '관청이 있던 터'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남일면 고은리의 '관터'는 고은 삼거리의 북쪽 국도변에 있는데 옛적에 관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의 관터는 현(縣)의 현사(縣舍)가 있던 곳이라 한다. 그밖에도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를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충남 서산시 해미면 관유리,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경기도 아산시 둔포면 관대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 경북 상주시 낙동면 유곡리,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 강원 횡성군 안흥면 상안리 등에 널리 퍼져 있는 '관터'의 유래도 관청이 있던 터라는 데는 다름이 없다. 또한 관터와 같은 의미와 유래를 지니고 있는 '관골'이라는 지명도 너무나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시 흥덕구 원평동의 '관골'을 비롯하여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충남 공주시 신관동, 충남 천안시 동남구 구성동, 경북 문경시 농암면 화산리, 경북 문경시 농암면 화산리, 경북 문경시 가은읍 죽문리,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장안리 등지에 있는 '관골'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한결같이 관청이 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명의 대부분이 역사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유사 이전인 수 천년 전 삼국시대 초기나 아니면 그보다도 더 오래전인 부족국가 시대에 관청이 있었던 곳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온다는 궁색한 유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관터'를 한자로는 '관기(官基)'라 표기하고 있어 표기된 글자의 의미로 보면 누가 보더라도 '관청의 터'라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관청이 있었던 지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그 입지가 도시로 발전하기 좋은 지역이 아닌 산골짜기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다른 말에서 변이된 이름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지명에서 '관'이라는 음으로 변이될 수 있는 지명 구성 요소로 '구안'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음성군 원남면에 구안리(九安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이 늘 편안하고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로 구안리(九安里)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속칭으로는 '굴안이'인데 비슷한 음을 가진 한자로 표기하면서 좋은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해지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보면 고려시대 고종 23년(1236년) 거란이 침입하여 이곳에 주둔하였으므로 걸안, 글안이라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긴 골짜기 안쪽이 되어 굴안이라 하였다 한다. 모두가 지명의 소리에서 연상되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며 음운의 변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다. 괴산군 청천면 덕평리에 '구미'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의 앞에 '구미들'이 있으며, 충남 예산군 고덕면(古德面)의 '구만리(九萬里)'는 지형이 구미(후미) 안쪽이 되므로 '굼안' '구만이' 구만'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구만'은 '굼안(굼의 안쪽)'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굼이란 '구멍, 굴,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즉 '굼안'은 '골짜기의 안쪽'이라는 의미인데 '굼'의 의미를 잃어 의미 전달의 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굼이'가 '구미(九美)'로, '굼안이'가 소리 나는 대로 '구만이' '구만리'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의 '골안'은 '골짜기 안쪽이라는 의미로 '谷內'로 표기하고 있으나 원남면 구안리의 '굴안'은 '굴'이 동굴(窟)을 연상하게 되어 '골짜기'와 연관짓지 못하다보니 여러가지 혼란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며 '구만리'와 어원을 같이하는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구만리'라고 하면 아득히 멀리 있는 상상의 마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구안리, 굴안이'와 마찬가지로 '골짜기의 안쪽' 또는 '골짜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관터'는 '구안터(굼안터)'에서 변이된 것으로 '골짜기 안쪽의 터'의 의미이며 '관골'은 '골짜기 안쪽의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
미원에서 청주로 들어오는 길은 4차선 도로가 개통된 이후 교통량도 꽤 많아졌다. 미원의 먹골 고개를 넘자마자 낭성 가는 길과 갈라지는 관정삼거리가 나오고 이어서 만나는 첫 마을이 낭성면 관정리다. 4차선 도로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그대로 통과하지만 옛날 도로는 관정리 마을을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가을이면 도로변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조선시대 숙종 2년(1676)에 신 각(申覺)이라는 선비가 세상의 풍진을 피하여 지었다는 백석정(白石亭)이라는 정자가 감천(紺川) 개울가에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지나가는 길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관정리(官井里)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호산리(浩山里), 묵정리(墨井里), 관기리(官基里), 호동(浩洞) 일부, 감당리(甘棠里) 일부를 병합하여 관기와 묵정의 이름을 따서 관정리라 하여 낭성면에 편입되었다. 관정리를 지나면서 낭성면 추정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를 넘게 된다. 이 고개 이름이 추정리로 가는 고개라 하여 추정재라 하는데 원래의 자연 지명은 '머구미고개'였다고 한다. '머구미'라 하면 '먹다'라는 말이 연상되므로 현재 머구미고개에 머구미라는 식당이 성업 중인 것은 지명을 장사에 재치있게 잘 활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을 보존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관정리에는 머구미, 활미, 관터 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그 이름들이 아름다운 경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여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원래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머구미는 활미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먹우물로 불리다 보니 한자로 '묵정(墨井)'이라 표기하게 되었고 이곳의 우물 빛이 먹물처럼 검게 보인다는 지명 유래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활미에서 미원면 미원리 쌀안 장터로 넘어가는 고개를 '먹고개' 부르고 활미 북쪽에는 먹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으며 먹골 동남쪽에는 먹골 방죽이 있는 것으로 보아 '먹'이 지형의 특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미원면 내산리와 문의면 문덕리, 문의면 소전리, 내수읍 묵방리, 보은군 장안면 장안리, 충주시 앙성면 지당리 등에 있는 '먹뱅이'와 보은군 회인면 건천리의 '먹뱅이골', 보은군 수한면 광촌리의 '먹뱅이골' 들은 한자로 '묵방리(墨坊里)'라 표기하고 있으나 사실은 '묵은 배미(농경지)'라는 의미로서'먹'의 어원은 '묵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므로 '머그미'의 '먹'과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지명에서 '먹'과 유사한 음이 지형을 수식하는 의미로 쓰인 예를 찾아보면 문의면 마동리와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괴산군 칠성면 율지리, 보은군 수한면 광촌리 등에 있는 '동막골', 그리고 가덕면 삼항리, 미원면 성대리, 남이면 산막리, 괴산군 청천면 신도리, 보은군 산외면 아시리,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 등에 있는 '산막골'을 들 수 있는데 동막골은 '돌로 막힌 골짜기나 마을'의 의미이고 산막골은 '산으로 막힌 골짜기나 마을'의 의미이므로 여기에서 '막'의 어원은 '막다'에서 온 것이다. 음성군 맹동면은 두성리의 '맹골'의 이름을 따서 '맹동(孟洞)'이라 한 것인데 맹골은 '막골(막힌 골)→ 망골→맹골'의 변이를 거쳐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이 과정의 예는 청주시 용암동의 '망골'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막다'라는 의미의 '막'이 '먹'으로 변이된 지명으로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의 '먹티골'을 들 수가 있다. 먹티골은 '먹골(막골-막힌 골짜기)'이라는 지명이 먼저 생겨나고 후에 '먹골로 가는 고개'라는 의미의 '먹티'가 생겼으며 '먹티' 인근에 마을이 들어서자 '먹티골'로 명명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와 같이 '막다, 묵다'의 어원에서 파생된 '먹'이 쓰인 지명들은 '먹'을 한자로 '묵(墨)'으로 표기하면서 '검다'는 의미가 연상되어 '옛날에 먹을 만들어 파는 묵방(墨房)이 있었다, 고개가 높고 검은 구름이 항상 모여 비가 자주 왔었다,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숫돌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등 검은 것과 연관지은 유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낭성면 관정리의 '머구미, 먹골, 먹고개' 등에 쓰인 '먹'의 어원은 은 '막다'로서 산으로 막힌 지형을 가리키는 '막은 뫼(산)'에서 머그미로, 산으로 막힌 지형을 가리키는 '막골, 막고개'가 '먹골,먹고개'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미원(米院)은 청주에 가까이 있지만 우암산과 상당산성, 것대산, 선도산으로 가로 막힌 낭성을 지나야 하며 청주에서 보은을 가는 25번 국도가 피반령을 넘어 회인을 거쳐 가므로 사방의 교통로가 막힌 가깝고도 먼 지역이다. 그런데 가덕에서 미원까지 가는 32번 지방도를 4차선으로 확포장하면서 청주에서 미원을 거쳐 보은과 속리산을 갈 수 있게 되더니 미원에서 보은까지 19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었으며 상당 산성의 터널이 뚫리고 낭성을 거쳐 미원까지 4차선 도로 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등 이제 미원이 사통팔달의 교통도시로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다. 가을에 미원을 지나다 보면 쌀안 축제라 하여 면민 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보이고, 지역 주민들이 미원을 쌀안골이라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쌀이 많이 나는 평야 지대를 연상하게 되는데 사실은 산으로 둘러 싸인 산골마을이며 쌀이 많이 나지 않는 지역임을 알고는 쌀안골이라는 지명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미원면은 본래 상당산의 안쪽이 되므로 산내일면(山內一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산내이상면(山內二一面)과 보은군 주성면의 봉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중심지인 미원리(米院里)의 이름을 따서 미원면이라 한 것이다. 그러면 미원리라는 지명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미원이란 상당산의 안쪽에 있으므로 '산안'이라 하였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쌀안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에 율봉역(栗峯驛)에 딸린 원(院)이 있었는데 쌀원이라 부르고 한자로 미원(米院)이라 표기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미원리라 해서 미원면에 편입된 것이다. 따라서 미원 지역에서는 쌀을 강조하기보다는 미동산과 옥화구경 등 산수를 지역의 특색으로 내세우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때 미원을 자전거의 고장이라 홍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자전거를 타기에는 도로 사정이 너무 좋지 않다. 이참에 자전거 도로를 새로 만들어 청주 무심천에서 상당산성 옛길을 따라 올라가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면서 청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고는 낭성을 거쳐 미원의 미동산과 옥화대를 돌아 한남금북 정맥인 추정재를 넘어 다시 무심천으로 간다면 문의 청남대와 대청댐으로 연결되니 환상의 자전거 주행 코스가 될 것이다. 그러면 자전거의 고장이라는 옛 명성을 되찾는 한편 지역의 문화와 관광은 물론 경제의 활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미원에서 괴산 방향으로 가다가 미원면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면 초정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길로 들어서면 미원리 마을이 끝나면서 나타나는 마을이 내산리(內山里)다. 내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산리(牟山里), 화전리(花田里), 내곡리(內谷里), 묵방리(墨坊里), 율동(栗洞)과 대판리(大板里), 수곡리(壽谷里), 외삼곡리(外三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내곡과 모산의 이름을 따서 내산리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내곡리는 '안골'의 한자 표기이므로, 미원의 어원이 된 '쌀안골'이 '산의 안쪽 마을'의 의미인 '산안골'에서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곶처럼 돌출된 지형의 밭''이라는 의미의 화전리(花田里)와 '묵은 농경지(묵은 배미)'라는 의미의 묵방리(墨坊里), '농경지가 모여 있는 배미'라는 의미의 율동(栗洞) 등의 지명들을 보면 이 마을은 미원천 주변에 조그마한 농경지가 있는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 이어지는 마을이 수산리(壽山里)인데 1914년에 동판리(東板里), 송교리(松橋里), 원산리(院山里), 외삼곡리(外三谷里), 대판리(大板里), 수곡리(壽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곡과 원산의 이름을 따서 수산리라 하였다고 한다. '큰 너더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대판리(大板里), 돌너더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동판리(東板里), '작은 들(솔 다리)'라는 의미의 송교리(松橋里), '큰 산(온 산)'이라는 의미의 원산리(院山里) 등의 마을 이름들로 보면 산쪽에 있는 마을들일 것이다. 그런데 수곡리(壽谷里)의 지명 유래가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 하여 한자로 수곡(壽谷)이라 하였다지만 자연 지명이 '숫골'이며 주변에 '쉿들'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벼'의 옛말인 '쉬'가 쓰인 '쉿들, 쉿골'로 볼 수 있으며 이 마을 역시 미원천 주변의 농경지였음을 이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오리나무는 오리목(五里木)이라 해 옛사람들의 거리 표시 나무로 알려져 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나무를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五里)마다 심었던 데서 오리나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의 기록에도 나오는 '유리목(楡理木)'에서 '오리목'으로 변이된 것이라 추정된다. 오리나무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나막신, 지게 작대기, 농기구의 자루 등 생활에 쓰이는 각종 도구를 만들고 염매제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의 염료로 쓰이며 귀한 약재로도 활용되는 등 옛사람들의 생활에 너무나 많이 활용되는 나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리목은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한 나무이고 누구나 잘 아는 나무였을 것이다. 동해안의 삼척, 속초 등 갯가 사람들은 용왕에게 제사지낼 때 오리나무로 성목(姓木)을 깎아 바쳤는데, 바다를 여신으로 봤기 때문에 심한 바람으로 거친 파도를 만들어 배의 운항을 어렵게 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앙칼진 여신을 달래는 것은 남자의 성기와 똑같은 신목(腎木)을 깎아 바다에 넣어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 가면 해신당 공원이 있는데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남근조각을 세워 놓아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그리고 전통혼례식 때 존안례(奠雁禮)를 위해 신랑이 가지고 가는 나무 기러기도 오리나무로 만든다.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달리며, 봄이 채 오기 전부터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이 있으니, 신랑 신부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라는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어서다. 또한 하회탈을 제작하는 데도 쓰이며, 1999년 4월 안동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도 오리나무로 만든 탈을 선물했다고 한다. 오리나무처럼 거리 표시목으로 알려진 나무가 또 있는데 바로 시무나무다. 시무나무는 지유(地楡) 또는 자유(紫楡)라고도 하는데 가시를 가진 느릅나무라는 뜻에서 자유(刺楡)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바퀴의 축으로 쓰여 축유(軸楡)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20리마다 심어 이정표로 삼았다 해 스무나무라 부르던 이름이 시무나무로 변했다는 속설이 있다. 시무나무와의 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스무나무와 연관 지어 거리 표시목으로 알려지는 언어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김삿갓은 시에서 시무나무를 비롯해 숫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우리말 음을 이용한 언어유희에 매우 능란했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시무나무(이십→스무→쉬는 나무) 아래, 서러운(삼십→서른→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사십→마흔→망할) 마을에서 쉰(오십→쉰) 밥을 주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이런)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설흔→설은) 밥을 먹으리.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淵, 1803~1863)으로 원래는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홍경래 난으로 인해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돼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살게 된다.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스무 살에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는데 그 과제가 조부를 규탄하는 글이었음을 알고 글공부를 포기하고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기구한 운명으로 일생을 문전걸식하며 전국을 방랑하면서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도 시를 쓰며 자신을 위로했다. 체제에 대한 반항과 불평이 가득했던 그가 지은 시는 한시에서 철저하게 지켜 내려온 압운을 무시하는 등 형식이 파격적이고 표현이나 기교가 새로운 것이었으며, 평이하면서도 유머가 있었다. 지명이 한문에 대한 지식이 적은 일반 주민들에 의해 전해오면서 변이되는 과정과 김삿갓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유희와는 많은 유사성이 있고 또한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지형과 지명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김삿갓의 시가 나의 지명 산책과는 너무 흡사해 언급해 본다.
'오리골'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지역에만 찾아보아도 내수읍 은곡리와 신평리, 그리고 낭성면 귀래리, 남일면 화당리, 남이면 척산리, 강내면 월곡리 등지에 있는데 모두가 그 유래를 오리가 많다거나 오리나무와 연관짓고 있으나 전국에 산재해있는 오리골의 어원을 찾아보면 '오리'나 '오리나무와는 상관이 없이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생겨난 지명들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오리나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리나무는 오리목(五里木)이라 하여 옛사람들의 거리 표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를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五里)마다 심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안내판이나 고속도로의 시발지나 종착지까지의 거리를 숫자로 표시한 표지판을 볼 수가 있다. 표지판이 없더라도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가 대략 50m라는 것으로 짧은 거리를 측정해 보기도 한다. 이처럼 먼 거리를 가려면 내가 얼마나 왔는지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매우 궁금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옛날에는 역참제도가 발달하여 역참이 설치되어 활용되다 보니 역참과 역참간의 거리인 30리에 5리마다 눈에 띄는 나무를 심어 거리 표시를 했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들리고 우리 조상들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모든 제도를 운영해 왔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옛 기록에 역참간의 거리에 오 리(五里)마다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을 아직 본적이 없으므로 이것은 '오리'라는 음의 유사성에서 추측하여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리나무는 특히 겨울에 금방 눈에 띈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 끝에 작은 아기 솔방울을 닮은 열매가 수없이 매달려 있는 키다리 나무를 찾으면 된다. 이 열매는 겨울을 지나 다음해에 잎이 나고도 한참을 그대로 매달려 있다. 속에 들어 있던 씨앗은 작은 날개를 달고 작년 가을에 멀리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은 걱정 많은 어미가 빈집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꼭 일부러 심어서가 아니라 햇빛을 좋아하는 양수로 길가를 따라가다 보면 5리도 못 가서 만날 수 있는 흔한 나무이면서 그 이름도 오리목(五里木)이기에 그런 속설을 만들었음 직하다. 청동기시대나 삼국 초기의 유적지에서 나온 나무를 분석해보면 오리나무가 꼭 들어 있을 정도로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귀중한 나무였다. 오리나무는 껍질이나 열매에 탄닌이 함유되어 붉은 색과 검은 갈색의 염료로 쓰여 물감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여러 가지 색을 만드는 물감으로 쓰였지만 특히 붉은 색을 만드는 물감에 많이 쓰였기에 '적양(赤陽)'이름을 얻었고 중국에서는 '차조(茶條)'라 했다. 그리고 목재는 재질이 치밀하고 연하여 가구재, 건축재, 칠기재 등의 재료로 쓰였으며 특히 함지박, 나막신을 비롯해서 목기의 재료로 많이 쓰였으므로 '유리목(楡理木)'이라 했는데 아마도 이 유리목이 오리목으로 변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오리나무는 공기 중에 있는 유리질소를 흡수하고 콩과식물처럼 근류균이 생기므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고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목으로 중요시했으며 또 둑을 보호하는 사방목이었다. 그리고 주로 논밭 등의 둑에 몇 그루씩 심는 풍습이 있어 농사일을 하다가 쉴 때는 이 나무의 그늘에서 쉬는 그림자나무(影子木)로 삼아 새참이나 점심은 주로 이 그늘 밑에서 먹었으며 추수 때는 장대를 나무와 나무의 가지에 걸쳐서 거기에 볏단을 걸어서 말리는 도가(稻架) 역할도 했던 것이다. 가지는 지팡이, 지게 작대기, 농기구의 연장 자루로 이용했으며 쉽게 터지지 않는 이점을 살려 나막신, 얼레빗 등 집기류를 만들고 숯은 화력이 강해 화약을 만드는 데도 썼으며 대장간의 풀무불 숯으로도 귀중하게 쓰였던 것이다. 이렇게 요긴한 오리나무라서 자꾸 잘라 쓰다 보니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오리나무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다.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의 삶과 함께 해온 귀한 나무를 이제는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 수목 갱신을 위해 벌목을 하는 산에 대체목으로 오리나무를 좀 심어본다면 옛 정서를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역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에 딸린 감원역(坎原驛)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역말' 또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에 딸린 인산역(仁山驛)이 있었다 하여 인산이라고도 부르고 주변에 역고개, 역말다리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으며,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의 '역말'도 역이 있었던 지역임에 다름이 없다. 이와같이 역이 있었다하여 역말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된 곳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과 은평구 역촌동의 역말을 비롯하여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 충남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충남 천안시 서북구 두정동, 충남 아산시 신창면 창암리, 충남 아산시 영인면 역리, 충남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경북 상주시 낙양동 등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오늘날 교통기관의 발달로 철로가 설치되면서 각지에 기차역이 생겨나고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는 버스역이 생겨나 먼 길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역이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시설이 되면서 주택을 구입할 때도 역세권의 주택을 선호하게 되어 가격도 비싸게 호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각지에 역이 왜 존재하였을까· 역은 본래 역참(驛站)에서 나온 말이다. 역참이란 중간에 쉬어가거나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육상 교통로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이다. 역참이라는 제도는 신라 때로부터 존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을 위하여 설치한 통신수단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필요성이 증대하여 봉수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선조 30년 1597년, 승지 한준겸의 건의에 따라 파발(擺撥)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각 역에 소속되어서 공문 등을 가지고 역참 사이를 나르는 사람을 파발꾼(擺撥-)이라고 했으며 파발꾼이 타는 말을 파발마(擺撥馬)라고 했던 것이다. 인조 때에 서발(西撥), 북발(北撥), 남발(南撥)의 삼대로(三大路)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가 완성되었다. 파발제의 조직은 지역에 따라 직발(直撥)과 간발(間撥)이 있고 전달수단에 따라 말을 타고 전송하는 기발(騎撥)과 사람의 속보로 전달하는 보발(步撥)이 있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수록된 파발의 조직망을 보면 서발(西撥)은 의주(義州)에서 한성(漢城)까지 1,050리, 86참(站)을, 북발(北撥)은 경흥(慶興)에서 한성까지 2,300리, 96참(站)을, 남발(南撥)은 부산 동래(東萊)에서 한성까지 920리, 31참(站)을 설치하여 전국의 통신망이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운영되었던 것이다. 서울 은평구 구파발의 이름도 서발(西撥)의 첫 역참(驛站)으로 현재 구파발의 역 입구에 파발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구파발의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면 역참과 역참의 거리는 대략 얼마일까· 역참간의 거리가 일정하진 않지만 설치된 역참간의 거리를 역참 수로 나누어 보면 대략 30리 정도가 된다. 아마도 말이 빠르게 달리다가 쉬어가야 할 만한 거리, 그리고 사람이 걸어서 가다가 쉬어서 갈만한 적절한 거리가 30리 정도라 하니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역참을 설치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거기다가 공무로 출장 가는 사람들의 숙식을 접대하는 '원'이라는 제도를 운영했는데 이태원, 퇴계원, 장호원, 조치원 등의 지명이 바로 원이 있던 지역의 흔적인 것이다. 지명을 통해 남아 있는 우리 조상들의 이러한 훌륭한 지혜를 이제는 후손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날 쓰는 '한참동안'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참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리키는지 애매하여 그 어원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바로 역참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는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리게 되었다. '한참'이란 '하나의 참(역참)'이라는 뜻이다. 즉 '한참'은 '두 역참(驛站) 사이의 거리'를 뜻하는 단어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대략 30리 정도)를 걸어서 오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므로 '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 단어로서 '한참'은 공간 개념이 시간 개념으로 바뀐 단어인 것이다.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먹는 음식인 새참(사이참)이나 밤에 먹는 군음식인 밤참도 여기서 파생된 말이라는 것을 알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는 자연 지명인 오리골 들은 단순히 음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오리나 오리나무와 연관짓고 있으나 오늘날 '봉우리'에 남아있는 '우리'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주변보다 높은 지역이나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앞에서 제시한 바가 있다. 그동안 어원을 찾기가 어려웠던 지명 중에 '오류골'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오리골과 음이 유사하여 연관된 지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어 그 마을들을 찾아 보았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오류골'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 五柳里(오류리)로 표기하고 있으며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화당리의 오류골, 청주시 서원구 성화동의 오류골, 대전광역시 중구 오류동(五柳洞) 등과 함께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서울 구로구 오류동(梧柳洞),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梧柳洞), 인천광역시 서구 오류동(梧柳洞) 등은 예전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등 모두 한자로 표기된 '류(柳)'를 근거로 버드나무와 연관짓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의 '오류골'은 본래 충주군 사다면(沙多面)의 지역으로서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오륫골 또는 오류동이라 하였는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상리(五上里), 오중리(五中里), 오하리(五下里)와 천기면의 용산리(龍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오류리라 해서 대소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 인근에 오리골고개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류골'이라는 지명은 '오리골'에서 온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으며 청주시 서원구 성화동의 오류골도 전해오는 토박이말로는 '오릿골'이었다고 전해지는 등 오류골과 오리골이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류골, 오류동'의 어원은 분명히 '오리골'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월오동은 청주시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원래 청주군 산내이하면(山內二下面)의 지역으로서 '다리실, 달오리 또는 월오동(月午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월리, 중월리와 남일상면의 월오리와 남일하면의 백운리(白雲里)를 병합하여 월오리(月午里)라 해서 남일면에 편입되었다가 1990년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월오리(月午里)는 '달오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끝글자가 '리'라서 '월오라는 마을(里)'이라는 의미로 '리(里)'가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 지명이 '달오리'이므로 '달(산)+오리(언덕)'의 구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리실'은 '산마을'이라는 의미이지만 '달오리'는 '높은 산의 인근에 있는 오리골'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흥덕구 강내면의 월곡리는 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은 청주시 수의동, 서는 탑연리, 남은 다락리, 북은 사인2리와 접해 있다. 월곡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내이하면(西江內二下面)의 지역으로 마을의 서남간에 월봉산(月峯山)이라 불리는 야산이 있었는데 매년 정월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올라가 달맞이를 하면서 마을의 번영과 풍년농사를 기원하였던 유래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다름뱅이라고 부르다가 월곡리가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내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다름뱅이의 남쪽에 있는 들을 오리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름뱅이'란 '달봉오리(높은 지역에 있는 오리골 마을)'가 변이되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월곡리의 원래 이름인 '다름뱅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상당구 월오동의 '월오리'와 같은 말이 되어 결국 오리골에서 파생된 지명 들인 것이다. 또한 청주시 상당구의 영운동(永雲洞)은 본래 '영오리'라 불리었으며 '영오리→영우리→영운리'의 변이 과정을 거쳐 영운(永雲)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영'의 의미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역시 '달오리'처럼 '오리'를 수식하는 말로 쓰였을 것이다. 그밖에도 오리골과 연관된 지명으로 괴산군 사리면 노송리의 송오리(松塢里)를 들 수가 있는데 마을 언덕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솔(작다)+오리(언덕)'로 볼 수 있으며,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의 '소로리'도 같은 형태의 '솔+오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