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한다. 천간(天干)의 '임(壬)'과 '계(癸)'는 물(水)에 해당하며 검은색을 나타내므로 검은 토끼라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암흑의 무(無)에서 천지 창조가 시작되듯이 검은 색에 해당되는 '계(癸)'는 만물이 싹트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며 '묘(卯)'는 무성함을 나타내는 '무(茂)'로서 만물이 무성하게 우거짐을 뜻하는 것이니, 계묘(癸卯)는 암흑 속에 있던 만물이 싹을 틔워 무성하게 자라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올해는 어느 해보다 희망찬 한 해가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 정보에 따르면 전국의 지명 가운데 토끼와 관련된 지명이 158개에 달하는데 충북에는 11곳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토끼 관련 지명으로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의 '토끼실'을 들고 있는데 마을 뒷산이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토끼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토실(兎室) 또는 토곡(兎谷)으로 표기한다. 청주시 옥산면 가락리의 토끼봉, 옥산면 금계리의 토끼모롱이(퇴끼모랭이), 가덕면 금거리의 토끼골, 가덕면 상야리의 토끼미재, 남일면 효촌리의 토끼모통이,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토끼바위, 단양군 영춘면 하리의 토끼봉, 충주시 엄정면 용산리 토산마을의 토끼봉, 영동군 추풍령면 지봉리의 토끼미와 토끼미재, 옥천군 동이면 우산리의 토끼재 등에 토끼가 타난다. 그밖에도 지명에 토끼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지명의 유래나 의미 속에 토끼와 관련이 있는 지명도 많다.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의 '금리(錦里)'는 지금의 이름에선 토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원래 뒷산 모양이 토끼를 닮아 토령리(兎令里)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 무렵에 토령리(兎令里)가 토금리(兎今里)로 잘못 전해진 후에 토금리(土錦里)로 변했고, 이후 지금의 금리(錦里)가 됐다고 하며,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의 '토계울'은 마을의 하천에 산토끼가 많아서 토계울(톳계울)이라 부르고 한자로 '토계리(兎溪里)'라 표기하였다고 한다. 충주시 가금면 하구암리의 '묘곡(卯谷)' 마을은 토끼가 많이 서식해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토끼와 관련된 지명들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말에서 왔을까? 지명을 살펴보면 터골, 텃골이라 불리는 지명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청주시 낭성면 이목리, 남일면 가중리, 문의면 신대리, 현도면 시동리, 북이면 내추리, 내수읍 덕암리, 미원면 대신리,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청천면 부성리,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 단성면 가산리, 대강면 용부원리, 적성면 기동리, 어상천면 연곡리,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 삼승면 천남리, 옥천군 옥천읍 오대리, 옥천읍 구일리, 안내면 서대리,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음성읍 사정리, 생극면 생리, 대소면 미잠리 등의 터골(텃골)은 대체로 '집터'나 '마을 터'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 '터골(텃골)'은 많은 지역에서 음이 비슷한 '토골(톳골)'과 혼용되고 있었으며 '토골'이라는 지명도 '터골' 못지않게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토'는 '터'에서 비롯된 말로서, '토'는 토끼가 연상되기에 토끼와 관련된 유래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의 '톡골'을 '토곡, 토계실, 토끼실'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의 터골은 덕동이라고도 전해지며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의 고유 지명은 원래 '안터벌'인데 '안덕벌'로도 불려왔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때 내덕동(內德洞)이 된 것처럼 '터'의 원형은 '덕'이며 '덕'이 '터'로 음운변이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덕'은 '돋아오르다'의 의미인 '돋'에서 온 말로서 오늘날 '언덕'이라는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주변보다 돋은 땅이라야 좋은 마을터, 집터가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토끼와 관련된 지명들은 주로 '터(덕, 돋아있는 땅)'에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이 지명에 토끼를 연관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토끼는 예로부터 별주부전이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토끼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한 동물, 지혜롭고 꾀가 많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번성하는 동물이므로 지명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실현하고픈 선조들의 꿈이 어려 있는 아름다운 지명들이라고 하겠다.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仙井里)는 본래 충주군 천기면(川岐面)의 지역인데 고종 광무 10년(1606)에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상골(松仙里), 새터(新垈里), 김장골(金井里), 율산리(栗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선(松仙)'과 '금정(金井)'의 이름을 따서 선정리라 해서 삼성면에 편입되었다. 그렇다면 선정리에서 송상골(松仙里)과 김장골(金井里)은 다른 마을보다 먼저 마을이 형성되어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김장골(金井谷)'이라는 마을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큰 샘이 있는데 이 물이 넉넉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부족하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아래쪽에는 사금이 많이 나오므로 오랫동안 사금을 채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많았고 또 멀리서 사금을 캐러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는 무극 광산에서도 이곳에 금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관에서 관정을 파고 탐사를 했는데 금맥은 발견하지 못하고 물줄기만 세차게 솟아 나와서 틀어 막았는데 그후 이 물을 농업 용수로 활용케 되어 가뭄을 모르는 마을이 되었다고도 한다.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에도 '김장골(金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예전에 마을 앞 논바닥에서 금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채금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바람에 우물이 생겼으므로 그 때부터 이 우물을 금우물(金井)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장골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의 '김장골'을 비롯하여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경남 밀양시 산내면 가인리,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등에도 있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금'이라는 글자에 억매여 '금(金)'과 연관을 짓고 '장'을 우물로 보아 '정(井)'으로 표기하였다. 사금은 흐르는 물의 모래에서 채취하는 것이지 우물과는 관련이 적으므로 억지로 연관시킨 것으로짐작이 된다. 이러한 잘못된 연결은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의 '금정(金井)',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부산광역시 금정구, 전남 영암군 금정면 등에서 '금정(金井)'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에는 물이 매우 중요하므로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있어 그 물을 길어다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공동 우물은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땅을 파서 굴우물을 만들고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그래서 일부 지명 연구가들은 '금'을 '크다'는 의미의 고어인 '감, 가마'에서 변이된 '검, 금'으로 보아 '금정(金井)'을 '큰 우물'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설치되어 물을 편리하게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있으므로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다른 마을과 차별화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금정(金井)'을 '큰 우물'의 의미로 보는 것은 일리는 있으나 설득력이 매우 적다고 할 것이다. 그보다 '장'은 '잣(산)'이 변이된 것으로 '장고개, 장자마을, 호장골, 대장골' 등에서처럼 지명요소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의 의미로 보는 것이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仙井里)의 김장골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니 언덕처럼 낮은 산이 마을 뒤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렇다면 '김'은 '길다'는 의미의 '긴'에서 온 말이 아닐까? 전국의 지명에서 '긴장골'이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하석리,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 인천 중구 운서동, 전남 해남군 계곡면 신평리,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등에 있으며, '진장골'이라는 지명이 제천시 덕산면 도기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금사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 등에 있고, '짐장골'이라는 지명이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 경북 영덕군 영덕읍 남산리,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등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길게 뻗어내린 산골'이라는 의미로 '긴장골(긴잣골)'이라는 지명이 처음에 생겨나고, 구개음화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진장골'로 변이되고, 이어서 '진장골'은 발음의 편이에 따라 '짐장골'로, 짐장골이 '김장골'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다른 지역의 지명의 예를 보거나 이곳의 지형과 음운의 변이 과정으로 보아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면소재지인 이목리(梨木里)에 대해서는 이미 그 유래를 추정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지명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니, 고고학자들이 새로운 유물의 발굴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역사적 흔적을 찾아내어 엄청난 기쁨을 맛보듯이 이제야 이목리(梨木里)의 참다운 유래를 찾아낸 듯하여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이목리(梨木里)에 있었다고 하는 배나무(梨木)의 뿌리를 샅샅이 파헤쳐보고자 한다. 이목리(梨木里)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의 지역으로서 배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배나무징이, 배나무정이, 또는 이목정(梨木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목리(梨木里)라 해서 낭성면에 편입된 후, 1956년 8월10일 관정리에 위치한 낭성면사무소를 현위치로 이전함으로써 이목리(梨木里)는 낭성면의 면소재지로서 각종 행정기관이 들어서고 낭성면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하지만 정말로 배나무 정자가 있어서 이목리(梨木里)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인지, 배나무 정자라고 하는 것이 배나무로 만든 정자인지 아니면 배나무 밑에 있는 정자인지 확실하게 단정을 할 수가 없었다.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금거리의 '살구징이들', 가덕면 병암리의 '병풍징이', 남일면 가산리의 '살구징이(행정)', 남일면 은행리의 '으능징이(은행정)',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엄나무정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의 '은행정이', 경남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의 '배나무징이, 대징이, 참나무징이' 등의 지명 예에서 보면 '-징이'란 '어떤 사물이 있는 장소'의 의미로서 주로 '나무가 심어져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에 자연스럽게 '정자'로 생각하여 한자로 '정(亭)'이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징이, 정이'는 정자는 아닌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명에 나타나는 '배나무'는 무슨 의미일까?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와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에 '배낭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배나무골'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예는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원도 영월군 남면 연당리, 경남 거창 신원면 양지리,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경북 청송군 현서면 두현리의 '배낭골'도 마찬가지 였다. 즉 '나무'의 고어가 '남ㄱ, 남그, 낭구'이었으므로 '배나무골'은 '배낭골'에서 온 말이며 예전에는 음이 같아서 그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함께 사용되었을 것이다. 전국에 배와 관련된 지명은 주로 고개나 산이 많다. 치악산에도 '배너미'가 있는데, 홍수 때 배가 넘어왔었다고 전해지며, 다른 지역의 '배너미'도 배가 넘어왔다거나 배나무가 많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배나무골'이라는 지명들의 유래도 '배가 넘은 골'이라고 하며 인근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옛날에 이곳에 물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배가 넘어다닐 수 있었다고 하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 유래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배너미, 배너미골' 지명들은 이러한 유래를 바탕으로 하여 한자로 '주월리(舟越里)'로 표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연지명으로는 배골, 배나뭇골, 배남골, 배낭골, 배내, 배내미, 배내미골, 배냉기, 배나들이, 배냉갯다리, 배너리, 배너미, 배너리, 배널리, 배다리, 배남골, 배낭골, 배티, 백티 등 다양하게 변이되어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배와 관련된 지명은 높고 험한 산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어원을 살펴보면 '크고 높은, 밝고 신성한'을 의미하는 옛말 'ᄇᆞᆰ'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ᄇᆞᆰ>박'은 '박혁거세, 박달재, 박석고개, 박치기' 등에 남아있고 '백(白)·적(赤)' 계통의 산 이름을 낳았다. 따라서 '너미'란 '고개'를 가리키는 옛말이므로 '배너미, 배나미(배남이), 배티, 뱃재'는 '크고 높은 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배'가 '배(梨)'가 아닌 '배(船)'와 관련된 전설을 남겨놓은 조상들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목리에는 배나무 정자만 세울 것이 아니라 돛대를 상징하는 나무와 함께 배를 묶어놓는 닻돌을 마련해 놓고 수해 예방 시설을 충분히 설치해야만 큰 수해로마을이 크게 훼손될 것을 염려한 조상들의 뜻을 받들고 이어가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관정리에서 이목리로 넘어가는 곳이나 아니면 청주에서 이목리로 넘어오는 어디 쯤에 있었음직한 배너미(배나미)고개의 흔적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에 '여우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여우골'이라는 지명은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를 비롯하여, 단양군 적성면 파랑리, 단양군 가곡면 사평리,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리, 충주시 살미면 문강리, 제천시 덕산면 도전리,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괴산군 불정면 탑촌리, 보은군 마로면 기대리, 보은군 수한면 거현리,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 영동군 양강면 남전리 등 헤아릴 없이 많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 4리는 여우골이라고도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사냥을 좋아하는 김 진사가 어느 날 닭을 물고 가는 여우를 보고 활을 쏘아 잡았다. 그 얼마 후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고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다섯 살이 되자 뱀과 개구리를 잡아먹어 걱정이 많았으나 스무 살이 되자 그 버릇은 싹 사라졌다. 더 늦기 전에 아들을 장가보내기로 했다. 혼례날, 신부의 가마가 도착했는데 똑같이 생긴 신부 둘이 내렸다. 스님의 도움으로 가짜 신부를 가려내어 죽였더니 여우로 변했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여우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지명들은 한결같이 '여우가 많이 나타난다'는 등 여우와 관련된 유래를 들고 있으며 '여우'의 고어 또는 사투리로서 '여수, 여시'라는 말이 있는데 충주시 안림동의 '여수골'을 비롯하여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화하리, 보은군 내북면 염둔리, 보은군 산외면 구티리,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의 '여수골' 등 전국의 지명에서 '여수골, 여시골, 여수고개, 여시고개' 등도 많이 쓰이고 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천주교 여사울 성지가 있는데 여사울이라는 이름은 '서울과 같은 곳', '여슬(물이 빨리 흐르는 개울)', '여수골(예수 고을)' 등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한자로는 '호동(狐洞)'이라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여우골'과 같은 뿌리를 가진 이름으로 보인다. 또한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의 '여우골'은 조선시대 양녕대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뜻대로 되는 마을' 이라는 뜻의 '여의곡'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전해지며 경북 칠곡군 왜관읍(倭館邑) 석전(石田) 4리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여우골' 또는 '여의리(女意里)'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여의'도 '여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볼 때 여우가 많이 나타난다고 하여 '여우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므로 '여우'란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우'는 어떤 말에서 변이된 것일까? 박목월 시인의 '여우비'라는 동시가 있다. 뙤약볕 나는데도/ 오는 비,/ 여우비. 시집 가는 꽃가마에,/ 한 방울 오고, 뒤에 가는 당나귀에,/ 두 방울 오고. 오는 비,/ 여우비./ 쨍쨍 개었다. 여우비는 햇볕이 나 있는데 잠깐 내리다가 곧 그치는 비를 말한다. 옛 이야기에서는 여우를 사랑한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 우는 비를 여우비라고 했다고 하며, 구미호가 울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대기 높은 곳에서 강한 돌풍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비구름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나 강한 바람으로 인해 빗방울이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곳까지 오는 것이다. 이렇게 여우비가 생기게 되는 기상 상황으로 보아 여우비란 굵고 살찐 비가 아닌 '여윈비'가 '여우비'로 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우비가 올 때마다 여우는 팔자에도 없는 시집을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여우골'이란 '여윈비'가 '여우비'로 변이되었듯이 '넓지 않고 좁은 골짜기, 가늘고 여읜 골짜기'의 의미로 '여읜골'이라 하다가 '여의골, 여우골'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또한 '산길이 넓지 않고 좁은, 가늘고 여윈(살찌지 않은) 길이 나 있는 작은 고개'라는 뜻으로 '여윈고개'라 부르다가 '여우고개'가 생겨났다면 '여우고개' 인근의 마을은 자연스럽게 '여우골'이 되지 않겠는가?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에 '소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무릉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우동(牛洞)이라 표기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 진영면 우동리(牛洞里)는 소가 누운 형국의 와우산(臥牛山)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예부터 '소골(솟골), 소동'이라 부르다가 '우동(牛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소골'이라는 지명은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의 '소골'을 비롯하여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제천시 봉양읍 마곡리,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진천군 광혜원면 회죽리,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 등에 있는데 모두 소(牛)와 연관짓고 있지만 마을에 '소(牛)'가 있다고 하여 '소골'이라는 지명으로 부른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으며 경기도 평택시 송북동 의 우곡마을은 고려 말부터 진주 소씨가 집성촌을 이뤄 '소골'이라 부르다 한자로 '우곡(牛谷)'으로 쓰게 됐다고 하지만 이 역시 지명에 쓰인 한자의 의미에 맞추어 만든 유래로 여겨진다. 유사한 음을 가진 '솟골'이라는 지명이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의 '솟골'을 비롯하여 경기 이천시 설성면 장능리,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신월리, 세종시 연서면 와촌리,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마지리, 대구 달성군 유가읍 용리, 경북 문경시 마성면 정리, 경북 성주군 수륜면 계정리, 경북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경북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 전북 정읍시 입암면 봉양리 등에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에게 '낙화' 라는 시로 잘 알려진 이형기 시인의 고향은 경남 사천시 곤양면 서정리 솥골마을이다. 마을의 뒷산이 솥을 걸어둔 형세라 하여 솥골마을로 불린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지역의 '솥골'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지형으로 보아 솥과의 연관성은 설득력이 적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 있는 '점골, 점말'이 '솥점이 있던 마을'의 의미인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 '잣골, 잣말'에서 온 것으로 '산 아래, 산 줄기 등 산 인근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솥골'이라는 지명도 '솥'과의 연관보다는 다른 음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솥골이라는 지명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정리, 경북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경북 예천군 예천읍 생천리, 강원 홍천군 서면 굴업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경북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경남 사천시 곤양면 서정리, 경남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등에 있는데 솥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주 생활에서 필수적인 물건이기에 솥과 연관 짓다 보니 세 발로 된 솥의 다리 모형을 연상하여 '솥을 걸어 둔 지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춘양면 의양리의 솥골·솟골·정곡(鼎谷)마을은 소재지에서 약 1㎞쯤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나 산이 솥을 건 모양과 같다하여 정곡(鼎谷)이라 하였으며 일설에는 솥을 부어 만든 곳이라고도 하며 금이 나는 곳이라고 쇳골이라고 불리다가 솥골로 와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정리의 솥골마을은 '솥골, 정리(鼎里), 소계동(蘇溪洞), 솟골'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에는 성주봉, 주지봉, 능곡봉 등 3봉이 솥발과 같이 둘러싸여 있고 마을이 부엌 아궁이 같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하여 솥골 또는 정리(鼎里)라 하였다 한다. 또 땅에서 솟는 샘이 있어서 조천(潮泉)이라 하였는데 샘물이 하루 두 번 크게 솟으므로 솟골이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그밖에도 경북 예천군 예천읍 생천리의 '솥골'은 솥뚜껑이산(鼎蓋山)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한자로 '정곡(鼎谷)'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와같이 '소골, 솟골, 솥골' 등은 그 음이 유사하여 소리만 듣고는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보아 같은 뿌리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명들은 다음 지명에서 그 유래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제천시 청풍면 실리곡리의 '다라솟골'은 '다라'가 산의 옛말인 '달'로 볼 수가 있으므로 '산이 솟아 있는 골짜기'로 볼 수가 있으며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도웅리의 '작솟골'에서 '작'은 '잣(산)'이 변이된 것으로 보아 역시 '산이 솟아 있는 골짜기'로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소골, 솟골, 솥골'들은 '산이 솟아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음성(陰城)'이라는 지명은 나 등 여러 고문서에 의하면 본래의 지명 이 '잉근내(仍斤內)'이었는데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잉홀(仍忽)'로 바꾸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명은 이두식 한자로 표기한 것이어서 그렇게 표기한 이유나 과정도 알 수가 없고, 그동안 원래의 의미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추측하기를 고구려 시대에 잉근내(仍斤內)'의 '잉(仍)'자에 성(城)을 의미하는 홀(忽)을 붙여 '잉홀(仍忽)'이라 하였고 신라시대에는 한자식 표기를 하면서 '잉홀(仍忽)'의 '잉(仍)'과 '음성(陰城)'의 '음(陰)'의 한자음이 비슷하므로 잉홀을 음성으로 바꾸었다고 궁여지책으로 설명하는데 그쳐 왔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지명의 유래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못난 후손들이라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이번에 그 뿌리를 낱낱이 파헤쳐 보고자 한다. 음성 지역은 삼한 시대에 원래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접경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곳에 수정산성이 만들어졌고 이 산성을 통치성으로 삼아 산성 아래 통치를 위한 관청이 들어섰다. 그 흔적이 바로 지금의 평곡리 들판에 있었던 '관뜰(官坪)'이라는 마을인 것이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평촌(坪村-들골)'과 '기곡(基谷-터골)'이라는 마을이 들어서고, 이 마을들은 오늘날 평촌(坪村)의 '평(坪)'과 과 기곡(基谷)의 '기(基)'를 따서 '평곡리(坪谷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신천리 지역에까지 마을이 생겨나게 되자 통치를 위한 읍성으로서 후에 신천리 토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정산성과 평곡리 지역이 음성의 뿌리가 되는 지역인 것이다.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성이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이 지역을 가리키는 행정명을 만들어 부를 필요가 생겼다. 이 지역의 자연 지명을 이두식 한자로 '잉근내(仍斤內)'라 표기하고 '잉근내'에 있는 읍성이므로 '잉근내'의 첫 자인 '잉(仍)'과 행정명인 '홀(忽)'을 붙여 '잉홀(仍忽)'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가 점령지역의 이름을 정하면서 읍성이 있는 지역에 '-홀(忽)'을 붙여 불렀으므로 '잉홀(仍忽)'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잉근내라는 이두식 한자로 표기하게 된 원래의 자연지명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잉근내(仍斤內)에서 '잉근(仍斤)'이란 옛날에 이두로 표기할 때 '넓다'의 관형사형인 '넓은, 너른'을 표기하기 위해 '잉'에 조음소 '근(斤)'을 붙여서 썼다. '내'는 '냇물'을 가리키므로 '잉근내'란 '넓은 내, 너른내, 널내, 늘내'라는 순우리말 자연지명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오늘날 평곡리 지역에 전해오는 자연지명을 살펴보자. 평곡리의 자연지명에 평촌, 넓은바위, 바다미들이 있는데 '평촌'이란 너른 들판에 있는 마을 즉 '너른 골'이며, '넓은 바위'는 실제의 바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너른바위←너른 박←너른 밭←너른 들'의 변이에 따른 '너른 들'이며, '바다미들'은 '받내들'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아 역시 '너른 내가 있는 들'이라는 의미의 '너른 들'인 것이다. 옛날에는 인근의 산골짜기에 비하여 이 지역은 너른 들판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있어 사람이 모여 살기 좋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음성 읍내를 가로지르는 음성천과 소여리, 신천리를 흘러오는 소여천, 그리고 상당리, 하당리와 원남면 상노리, 하로리 그리고 소수면 구안리 등에서 흘로온 구안천 등이 이곳에서 합류하게 되니 얼마나 '너른 내'요 '너른 들'이었겠는가? 그러면 통일산라시대에 왜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잉(仍)'과 '음(陰)'의 한자음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이곳의 자연 지명인 '너른내, 널내, 늘내'에서 '음(陰)'의 훈이 '그늘'이기에 '늘'을 이두식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성이라는 지명의 뿌리는 '너른 내(넓은 냇물), 너른 들(넓은 들판)'이며, 괴산의 옛 지명인 '잉근내(仍斤內)'도 역시 '너른 내'로서 '괴강'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먹뱅이'라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다. 충북 지역에만 해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묵방리를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내산리의 먹뱅이, 묵방들, 금왕읍 육령리의 먹뱅이,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의 먹뱅이, 보은군 수한면 묘서리의 먹뱅이들,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의 먹뱅이 들이 있는데 한결같이 한자로 '묵방리(墨房里)'라 표기하면서 '먹(墨)'과 관련된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 먹을 만드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 '먹방'이었기 때문에 '먹방'이 마을의 이름이 되는 경우가 있었고, 선비들이 많이 살았거나 서당이 있었던 마을도 '묵방, 묵실' 등으로 부르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먹뱅이'는 자연스럽게 '먹방(墨房)'과 연관 짓거나, '먹(墨)'의 '검다'는 의미를 가지고 유래나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는 소백산맥 준령의 천마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먹(墨)을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먹뱅이', 또는 '묵방동(墨芳洞)'이라 불렸고, 지금도 마을 앞 골짜기인 복골(福谷)에는 먹을 굽던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의 '먹뱅이'의 유래를 보면 "옛날 어느해 설날에 이 마을에 있는 김서방네 집에서 아낙네와 색시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소낙비가 내리더니 하늘에서 먹구름이 흘러와 김서방네 집을 둘러싸고는 천둥소리와 번개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먹구름이 서서히 동녘으로 사라졌는데 그 때 김서방의 아내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먹구름이 끼고 한 아낙네가 없어진 곳이라 하여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먹뱅이라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남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는 먹을 만드는 곳이라 하여 먹뱅이 또는 묵동이라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마을 앞 별매산에 '필봉(筆峰)'이 있고, 마을 동쪽에 '연수등(硯水嶝)'이 자리하며 서쪽에는 등잔봉(燈盞峰)이 있고 북쪽의 마을 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옥녀가 글을 쓰려 할 때 붓과 벼루는 있는데 먹이 없어 마을 이름을 먹뱅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다른 지역의 '먹뱅이'들에서도 예전에 묵(서예)을 자영하거나 학문을 숭상하는 문필사우의 후예가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먹뱅이라는 지명은 왜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먹뱅이'란 '묵은 배미'가 변이된 말로서 '농사를 짓지 않고 묵히는 농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옛날에는 농업사회이기 때문에 농토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농토가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하여 남의 농토를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 대부분이었고, 남의 집의 머슴살이를 하거나 화전민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농지에 농사를 짓지 않고 묵히는 묵밭, 묵은 배미가 많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비료가 없었기에 오직 지력에 의해서만 농사를 지었고 농토에는 인분, 가축분뇨, 퇴비 등으로 거름을 했으나 지력을 회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화전민들도 산을 개간해 한번 농사를 지으면 지력이 감퇴해 다음해에는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기에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새로 개간해 농사를 짓는 일이 되풀이되므로 산지의 곳곳에 잡초가 우거진 묵은 배미가 많았다. 더욱이 사냥꾼이나 화전민과 같은 유목 생활을 벗어나 일정한 곳에 모여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같은 농지를 재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화곡류는 연작으로 지력이 감퇴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면 지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휴한농법이 유일했다. 오늘날은 각종 비료를 사용하거나 품종 개량, 다른 품종의 연작 등을 통해 묵히는 농지가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아주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고 묵히는 묵은 배미를 가리키는 '먹뱅이'가 지명으로 정착돼 여러 지역의 지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먹뱅이'를 음차해 한자로 '묵방리(墨房里)'라 표기하다보니 먹과 관련된 유래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 매곡면에 돈대리(敦大里)가 있는데 '돈대'는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홍수 피해가 많이 일어나는 지역에 인공적으로 만든 피수대로서 하천 주변의 범람원이나 삼각주 등에서 하천 범람에 대비하여 주위보다 높고 평평하게 축대를 쌓은 대피 시설이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장마와 태풍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많은 비가 내리는 집중 호우가 발생하는데, 이때 지대가 낮은 지역에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돈대를 축조한 것이다. 돈대와 더불어 가옥의 침수를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터를 돋우어 높인 다음 그 위에 터돋움집을 짓기도 했다. 또하나는 돈대(墩臺)는 성곽 시설의 하나이다. 평지에 있는 성에서는 보통 가장 높은 평지에 높게 축조했으며, 해안에 있는 성에서는 적들이 침입하기 쉬운 요충지에 주로 설치했다. 외부는 성곽으로 축조되어 있으나 보통 내부에는 군사 시설이 들어서서 포를 쏘거나 사방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강화도에 검암돈대, 빙현돈대, 철북돈대, 초루돈대 등 53개의 돈대가 있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하효돈대가 있는데 이들 돈대(墩臺)는 조선 중기 이후 17~18세기에 성곽 시설을 조성하면서 포대를 설치하게 되었고, 조정에서 국가 방위를 위해 설치했으므로 처음부터 한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어 '돈대(墩臺)'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연지명에서의 '돈대'는 영동군 매곡면의 돈대리 이외에는 전국의 지명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순우리말로 된 고유어 지명이 전해지다가 행정명으로 쓰이게 되면서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돈대의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 지명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땅의 가운데가 솟아서 불룩하게 언덕이 진 곳을 둔덕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언덕은 땅이 비탈진 곳으로, 그것을 둘러싸는 지대보다 높이 솟아 오른 비교적 좁은 곳으로서, 지형 종류의 한 가지이다. 언덕은 평원보다는 고저차가 크고, 산지보다는 고저차가 작은 곳을 가리키나, 산과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언덕이 진 곳을 가리키는 말로 구릉, 둔덕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내둔리의 '둔디기'라는 마을은 하천변 둔턱에 있는 마을로서 다락같이 높은 지형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다락말이라고도 부르는데 '둔디기'는 '둔덕'이 그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지명에서 '둔덕골'을 찾아보면 세종특별시 연기면 수산리의 둔덕골을 비롯해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강원도 인제군 남면 상수내리, 전남 보성군 겸백면 평호리, 전남 영암군 영암읍 한대리 등에 둔덕골이 있으며, 전북 군산시 성산면 둔덕리는 '둔디기'로 불리고 있고,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의 둔덕 마을도 부계면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마을로 '둔더기, 둔디기, 둔덕(屯德)'이라고 부른다. 그밖에도 전남 여수시의 둔덕동, 경남 거제시의 둔덕면도 '둔덕'에서 비롯된 지명들인 것이다. 또한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있는 가시오름에서 서쪽 약 3㎞ 떨어진 영락리 바닷가에 위치한 나지막한 오름을 돈대미라 부른다. 돈도미오름, 돈돌오름이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돈두악(敦頭岳), 돈도악(頓道岳), 돈대산(墩臺山)으로 여러 문헌에 표기되어 있다. 가시오름의 절반 높이에도 못 미치므로 산이라기보다는 구릉, 언덕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돈두미오름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모양이 조금 높직하고 평평하여 돈대를 이루고 있는 데서 '돈대미'라 부르던 것이 '돈대'가 '돈도, 돈두'로 와전되어 '돈도미, 돈두미'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돈대미의 원래의 이름을 둔덕으로 본다면 '돈두악(敦頭岳), 돈도악(頓道岳)'은 둔덕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둔덕, 둔디기'라는 순우리말 지명이 오랫동안 쓰여오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둔덕(屯德), 돈두악(敦頭岳), 돈도악(頓道岳), 돈대(墩臺)'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장동이라는 지명은 지난 대선에서 부동산 개발 부정 의혹에 휩싸이면서 널리 알려진 마을이 되고 말았다. '대장동'이라 하면 '크다'는 의미의 '대(大)'자로 시작하면서 '대장(우두머리)'의 이미지의 영향으로 규모가 크다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기암리와 충주시 소태면 복탄리에 '대장골'이라는 지명이 있고 전국의 지명에서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노곡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골'이라는 고유어 지명이 일찍부터 존재하였고 행정명으로서 대장리, 대장동이 된 것으로 보이며, 대장리와 대장동의 뿌리가 대장골이라면 '대'는 한자어 '대(大)'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대장리'는 제천시 금성면의 대장리, 음성군 소이면의 대장리(大長里)를 비롯해 전북 고창군 대산면, 전남 곡성군 입면, 경북 성주군 초전면 등에 대장리가 있다. 그런데 음성군 소이면의 대장리(大長里)는 본래 충주군 사이포면(沙伊浦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장막리(長幕里), 대평리(大平里), 금정리(金井里) 일부와 소파면(蘇坡면) 후미리(厚美里) 일부를 병합해 '대평(大平)'의 '대(大)' 자와 '장막리(長幕里)'의 '장(長)' 자를 따서 대장리라 한 것이므로 '대장'의 원래의 의미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대장동(大壯洞)은 조선 후기부터 등장하는 지명으로 그 유래는 이 마을에서 큰 장군이 나온다는 전설과 함께 마을의 생김새가 마치 큰 대(大)자 모양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경기도 부천시의 대장동(大壯洞)에는 김포공항 남서쪽에 형성된 넓은 평야인 대장들녘이 있는데 지리적으로 서울시, 인천시와 접하고 한강하구와 연결된 굴포천과 인접한 지역으로, 부천시 중동(1994년), 상동(2002년) 신도시 개발 이후 부천의 마지막 남은 들판을 보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대장동(大庄洞, 大·洞)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였다. 1914년 조선행정구역변경 때에 태릉, 장토리, 무두만이(뫼두루안이)를 병합해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가 됐으며,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승격과 함께 대장동으로 승격되었다. 대장동은 태릉(胎陵)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의 태실(胎室)이 이곳에 있어서 태릉(胎陵), 또는 태봉(胎封), 태장산(胎藏山)으로 불린 산이 있어 태장리(胎藏里)로 불렸다가 태장(太庄)으로 변하고 다시 대장(大庄)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인조대왕(仁祖大王, 1623-1649)의 태실(胎室)이 있던 대장동은 옛날에는 '뫼두루안'이라고 불렸었던 곳인데 산이 둘러싸인 모습이 산이 마을을 둘러싸 안고 있는 모습과 같아서 부쳐진 이름이다.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의 대장골(大莊谷)은 대정골(大井谷)이라고도 하고 산적의 본거지였다 하여 대적골(大賊谷)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장'의 '장'은 '정, 적, 작'으로 두루 변이돼 사용되고 있으므로 그 어원은 '잣(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잣'이 '장'으로 변이된 지명인 '장골'은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보은군 외속리면 장재리, 보은군 회인면 용곡리, 충주시 살미면 설운리, 단양군 대강면 당동리, 괴산군 소수면 옥현리,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 괴산군 소수면 길선리, 충주시 앙성면 영죽리,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등지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대'는 무슨 의미일까? '대'는 '댓골, 댓재, 대재, 대섬' 등의 지명에 보이는데 '골짜기가 대통처럼 곧게 뻗어 들어간 곳, 대나무가 많이 있는 곳' 등 한결같이 대나무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충남 금산군 금산면 하신리에 '댓골, 대장골'의 지명이 혼재하는 것은 대나무는 주로 산에 있기에 '댓골'과 '장골(산골)'이 합쳐지는 것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나무가 많은 산의 의미인 '대잣'이 '골'앞에 쓰여 대장골(대장동), 대정골(대정동)이 되거나, '대잣'에 중복된 의미의 '산'이 추가되어 '대잣산'이 되고 '대잣산'이 '대자산, 대정산, 대장산' 등으로 변이된 것으로 본다면 '대장동'의 어원은 '대잣골'로서 '대나무가 많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제천시 봉양읍 옥전리에 댓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대나무가 많았다 하여 한자로 '죽동(竹洞)'이라 표기하지만 음차를 하여 '대곡(垈谷)'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의 '댓골'은 골이 크고 깊다 하여 '대굴'이라고도 부르고 '대구동(大口洞)'이라 표기하였다.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의 가섭산 계곡에도 '댓골'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는데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전국의 지명에서도 댓골이라는 지명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을 비롯하여 대전시 유성구 대동, 충남 공주시 사곡면 계실리, 경북 상주시 중동면 간상리, 전북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 등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의미는 크다는 의미의 '대(大)'와 대나무를 가리키는 '죽(竹)'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댓골'은 자연지명이므로 '대'는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군량리의 '큰댓골'이나 전남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의 '작은댓골(소댓골)'이라는 지명을 보더라도 '대'의 앞에 '큰,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으로 보아 '대'는 '크다(大)'의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대'가 '크다(大)'는 의미가 아니라면 '대나무'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인데 일반적으로 대나무는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이므로 대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추운 지역에도 댓골이라는 지명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의 의미로 단정하기에 망서려진다.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 있는 '대동(大洞)'이라는 지명은 댓골을 한자로 대동(大洞)이라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댓골을 '죽동(竹洞)'이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이 큰 대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지역이므로 '큰골·대동(大洞)·댓골·죽동(竹洞)'으로 변해온 것으로 설명하는 등 원래의 의미를 찾는데 혼란을 겪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대나무의 종류를 알아보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나무는 키가 큰 대나무로서 대나무의 여러 종류 중에서 왕대속에 속하는 것인데, 대나무의 종류에는 그밖에도 6-7m의 크기로 자라는 해장죽속이 있고, 전국 어디에나 숲속의 나무 밑에서 흔히 자라는 조릿대속에 속하는 자그마한 대나무도 있다. 이 중 내한성이 강한 조릿대는 북위 40도까지 분포하고, 우리나라 특산종인 고려조릿대는 북위 41도 위치에 있는 함경도 명주군 상고면 운만대에도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댓골, 댓재'라는 지명들에서 '대'가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골짜기나 고개, 산'을 수식하는 지명 요소로 쓰인 것으로 보아 '대'는 '대나무'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대나무 중에서도 이대속에 속하는 대나무는 키가 5-6m 정도로 담뱃대, 붓대, 화살, 죽세공재로 많이 쓰였으며 조릿대는 조리를 만들거나 생활 도구를 만드는데 쓰였기에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한 연관이 있어 지명 요소로 많이 쓰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고개 이름에서는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에 '댓재'라는 지명이 있지만, '댓재'보다 '대재'가 많이 나타난다.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의 '대재'를 비롯하여 세종시 전동면 청송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 경북 영천시 청통면 계포리 등에 나타나지만 널리 알려진 곳은 '죽령대재'일 것이다.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의 '대재'는 오랫동안 '대재'로 불리어 왔기에 한자로 '죽령(竹嶺)'이라 표기하면서도 주민들은 '죽령이라 부르는 대재'라는 의미로 '죽령 대재'라 하여 '대재'를 고집했던 것이다. '대재, 댓재'라는 지명은 '대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의미로 지명이 생겨났다기보다는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인 '댓골'이 먼저 생기고 그 인근의 고개를 의미하는 말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댓골'의 한자 표기는 일반적으로 '죽곡(竹谷)'이라 표기한 곳이 많지만 '대야리(大也里)'라 표기한 곳도 보인다. 음성군 삼성면의 대야리를 비롯하여 보은군 보은읍,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충남 예산군 대흥면, 전남 보성군 보성읍, 전남 완도군 완도읍, 경북 김천시 부항면, 경남 거창군 남하면 등에 '대야리'가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댓골'을 '큰 골짜기, 큰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고 '큰 대(大)'에 사이시옷의 이두식 표기인 '야(也)'를 첨가하여 '대야리(大也里), 또는 대야곡(大也谷)'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는 지명의 유래를 추정하는데 혼란을 줌으로써 '큰 마을', '지형이 대야처럼 생긴 마을' 등의 유래가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충북 도민의 젖줄인 미호천이 미호강으로 격상되고 미호강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하니 바다가 없는 충북에 대청호, 충주호는 물론 미호강, 남한강 물길에 레이크파크를 조성함으로써 아름다운 호수의 바다, 환경과 생명의 바다, 문화와 예술의 바다가 만들어진다는 부푼 기대를 하게 된다. 강에는 저마다의 발원지가 있다. 발원지의 의미는 강의 시작에서 끝이 바다에 닿는 거리가 가장 긴 곳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 시작점을 어디로 삼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서로 자기 동네가 발원지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곤 한다. 그래서 연중 마르지 않는 물길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또는 솟아나는 샘물을 발원지의 기준점으로 삼기도 한다. 그동안 미호강의 발원지는 일반적으로 음성군 삼성면의 마이산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고서에 기록된 마이산의 옛이름인 망이산, 또는 망이산성을 발원지라 하기도 하고, 언론에 따라서는 도청천의 시작인 금왕읍 부용산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발원지가 강의 본류에서 가장 긴 상류를 가리킨다고 할 때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와 죽산면 당목리도 미호강의 발원지라 주장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논란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도 이번 기회에 발원지를 명확히 밝혀 통일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한강의 경우에는, 북한강의 발원지는 금강산이고 남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의 검룡소다. 남한강의 발원지는 1980년대까지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에 있는 우통수(于筒水)라 했었으나, 태백산 금대봉의 물구뎅이가 물길이 더 긴 발원지라는 주장에 대해 국토지리원에서 위성 사진으로 측량한 결과 그 연장 거리가 더 긴 것으로 인정이 되어 태백시 금대봉의 검룡소로 바꾸게 된 것이다. 낙동강 1천300리의 발원지는 태백시의 황지연못이라 알려져 있으나 이곳은 상징적인 발원지이고 10㎞ 상류인 태백시 천의봉 너덜샘이 실제의 발원지이므로 발원지가 이원화되어 있다. 울산의 태화강도 종전까지 울주군 상북면 가지산 쌀바위가 발원지로 알려져 왔었는데 울산시는 2006년 '태화강 발원지 찾기' 용역을 통해 울주군 두서면 백운산 탑골샘을 '최장거리 발원지'로 확정했다. 용역을 맡은 울산발전연구원이 제시한 "발원지에 대한 고문헌 조사, 실측 등의 방법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결과 탑골샘은 길이는 길었으나 지역적 공감 형성이 미흡했다. 쌀바위는 탑골샘보다는 길이가 짧지만 지역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두 곳을 발원지로 이원 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따라 탑골샘을 실제적 발원지로, 쌀바위는 상징적 발원지로 명명됐다. 이와 같이 여러 강들의 발원지 설정 과정을 살펴볼 때 미호강의 발원지도 지역 이기주의에 따른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관계 기관의 공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미호강의 발원지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음성군 삼성면의 마이산이다. 오랫동안 미호천의 발원지로 인식되어 이미 마이산 정상에 발원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고, 미호천의 지류 중 최장거리에 해당되며, 결정적인 것은 발원지에 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섬진강 발원지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데미샘이며, 미호강의 본류인 금강의 발원지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의 신무산에 있는 뜬봉샘인 것처럼 강들의 발원지의 공통점은 대부분 연중 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 샘이 기준점인 것을 볼 수가 있다. 평탄한 구릉 지대에 우뚝 솟은 마이산 정상에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마우정'이라 표시하고 쉼터를 만들어 많은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 물을 받아다가 식수로 사용하였었는데 지금은 망이산성 문화재 발굴 공사를 하면서 훼손된 상태에 있어 시급히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마이산 정상에서 솟은 물과 마이산 여러 골짜기에서 시작된 물이 삼성면 덕정리에서 대야천과 만나 큰 내를 이룬다. 그래서 두 하천이 만나는 이곳의 자연지명이 '모라내'인데 고어의 의미로 보면 '큰 냇물'이라는 뜻이니 그동안 '모라내'를 미호천의 기점으로 삼아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호천의 구간을 미호강의 구간으로 본다면 마이산의 마우정이 미호강의 발원지로서 손색이 없으므로 미호강으로 격상되는 이 시점에 행정기관에서 시급히 발원지로 공인을 하고 발원지 공원화 조성과 발원제 행사 추진 사업도 미호강프로젝트에 포함하는 것이 어떨까?
미호천을 미호강으로 명칭 변경하게 된 것은 '천(川)'을 '강(江)'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지만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는 명칭의 격상을 통하여 미호강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미호강 프로젝트라는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명분과 근거가 마련됨으로써 미호강이 충북 중부권역 중심하천이자 미래성장의 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면 강(江)과 천(川)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강(江)은 넓고 긴 하천을, 천(川)은 작은 하천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맞지 않는다. 하천법 제2조에 의하면 '하천'이라 함은 '지표에 내린 강우 등이 모여서 흐르는 물길'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하천을 일컫는 한자는 '강(江), 천(川)'이 있는데 '강(江)'이라는 한자는 '물(水)과 장인(工)'을 합해서 만들어진 글자로서 '장인이 공사를 한 물길'을 의미하므로 치수 사업이 이루어진 하천을 말하고, '천(川)'은 치수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천을 말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치수사업 여부로 강과 천으로 명칭을 구분하여 사용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농업과 수해 예방을 위해 발달된 중장비를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하천 개수 사업이 실시됨으로써 크게 변화되었지만 하천 명칭은 전해져 내려오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오기에 이를 근거로 삼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한자에서 하천을 의미하는 글자에 '하(河)'가 있는데 '강(江)과 하(河)'는 하천의 탁도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강이 양자강과 황하인데 강(江)은 맑은 하천을 의미하므로 양자강이 되고, 하(河)는 탁한 하천을 의미하므로 황하라 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 캄보디아에서 메콩강을 보면서 강물이 흙탕물이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를 흐르는 강물은 모두 맑은 물만 흐르고 탁한 물이 흐르는 강이 없으므로, 우리나라는 하(河)로 불리는 하천이 없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면 미호천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원래 동진강, 미곶강 또는 지역에 따라 북강, 서강 등과 같이 '강(江)'의 명칭을 사용해 왔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1년 간행된 충북도편 청주군 기록에 첫 등장하며, 굽이굽이 흐르는 하천 풍경이 아름다워 미호천(美湖川)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또 최근에는 미호천의 상류인 음성군 대소면 미곡리(美谷里)와 삼호리(三湖里)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이것은 지나친 견강부회가 아닐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에는 '미곶강(彌串江)'과 '동진(東津)'이 표기되어 있으며 에도 오늘날 청주시 오송읍 서평리와 동평리,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 부근을 흐르는 하천을 '彌串(미곶)'이라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이 지금까지 미꾸지라 불러오는데 아마도 '미꾸지'라 부르는 자연 지명을 조선시대에 한자로 '彌串(미곶)'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진(東津)'이라는 지명을 근거로 이곳의 앞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동진강(東津江)이라 부르고, 미곶(彌串)이라는 곳의 인근을 흐르는 강을 자연스럽게 미곶강(彌串江)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려운 한자를 약자로 만들어 쓰는 일에 익숙해져 왔으며 일제가 조선을을 점령하여 지명을 표기할 때도 어려운 한자는 쉬운 한자로 치환시키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으면 우리 지명에 거북구(龜)자를 아홉구(九)로 바꾸거나 삼(蔘)자 같은 경우도 석삼(三)자로 바꾼 예로 보아 '彌串(미곶)'을 '미호(美湖)'로 표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미(彌)'라는 한자는 어렵고, '곶(串)'은 일본인들이 잘 쓰지 않는 글자인데다가 일본어의 '호(湖)'의 음이 '고(ko)'이므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쓰는 '미호(美湖)'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일제의 잔재인 미호강으로 부를 것인가? 아니면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불러오던 미곶강, 동진강으로 부를 것인가? 이 이름들이 청주 지역 중심의 지명에서 온 것이 아니라서 적합하지 않다면 청주의 입장에서 예로부터 불러오던 서강, 북강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서강이나 북강은 고유 명사라기 보다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일반 명사라고 볼 때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미호천에 역사 이래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그동안 미호천을 미호강으로 바꾸는 노력이 계속되어 오던 중 환경부에서 충북도의 건의와 4개 시·군 주민의 의견을 고려해 국가수자원관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하천인 미호천의 명칭을 미호강으로 변경하기로 확정하고 7월 7일 관보에 게재 했다고 한다. 충북의 물줄기는 크게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로 나누어진다. 단양, 제천, 충주, 괴산 지역의 물줄기가 충주댐에서 모여 남한강으로 흐르는 것이 한강 수계이며, 금강 수계는 보은 옥천, 영동 지역의 물줄기가 대청댐에서 모아져서 금강으로 흘러가는 대청댐 수계와 음성, 진천, 청주, 괴산 지역의 물줄기가 모여서 금강으로 흘러가는 미호천 수계로 다시 나누어지는 것이다. 미호천 수계의 지역은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와 나지막한 구릉, 풍부한 산림으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등 인간이 살기에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미호천 변에 있는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우리나라가 벼농사의 원류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산이 되고 있다. 미호천을 미호강으로 격상되는 일에 대해서 충북도민으로서 크게 환영할 일이지만 마냥 기뻐하기에 앞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미호강이라고 부를 구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호천의 구간은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서 세종시 합강까지를 미호천이라 불러 왔다. 그런데 미호강으로 바뀌면서 미호강 구간을 '진천군에서 세종시, 음성군에서 세종시' 등으로 언론 매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따라서 미호천 구간을 그대로 미호강으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미호천 구간 중 국가 하천 부분만 미호강이라 할 것인지를 명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가 하천과 지방 하천은 필요에 따라 그 구간이 변경되므로 강의 명칭을 국가 하천으로 한정하는 것은 모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호천 전구간을 국가하천으로 지정하도록 추진하든지 아니면 주민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미호강의 명칭을 바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명은 한번 정해지면 쉽게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미호강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기 전에 시급히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호천이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지명이 아니며 그 구간도 오송에서 세종시 합강에 이르는 일부 하천을 가리키던 것이 음성군 삼성면까지 그 명칭을 확장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즉 미호천은 역사문헌자료에 따르면 오송의 하류 지역의 일부를 동진강, 미곶강 또는 지역에 따라 북강, 서강 등과 같이 '강(江)'의 명칭을 사용해 왔다. 그리고 1900년까지는 통일된 지명 없이 불려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 작천(까치내) 지역까지 확장하여 미호천으로 표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강(江)'과 '천(川)'을 구분하는 별도의 법적 기준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유역 면적이 큰 국가 하천들이 이미 '강'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미호천의 경우 유역면적으로 볼 때 대규모 하천 중 하나이므로 이번에 '강'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미호강에 걸맞는 이름이며 충북인으로서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이 조상 대대로 사용해 온 이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름의 뿌리를 찾아 미호강 주변의 지형과 지역의 정서, 그리고 충북의 고유한 역사와 자랑스러운 전통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미호강의 발원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그동안 미호천의 발원지는 음성군 삼성면의 마이산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망이산, 망이산성이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언론에 따라 도청천의 시작인 금왕읍 부용산을 언급하기도 하므로 미호강으로 격상하는 이번 기회에 발원지를 명확히 통일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충주 교현동의 향교말에서 시누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갱고개'라 불렀는데 지금은 교현동에서 연수동으로 이어지는 '갱고개로'라는 도로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어디가 갱고개였는지 찾아보기가 어려울 뿐아니라 갱고개의 의미도 알기가 어렵다. 일부 주민들은 '갱고개'가 아니라 날씨가 갠다는 의미의 '갠고개'이며 해가 잘 비치는 양지바른 곳에 있는 고개라서 '갠고개'라 했으므로 한자로는 '청현(晴峴)'이라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근거는 옛 기록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원통리와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갱고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고개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죽전리의 '갱치'라는 지명은 한자로 개영치(開榮置)로 표기하고 있으며, 보은군 보은읍 노티리와 충남 아산시 초사동의 '갱치'라는 지명도 '갱고개'와 같은 의미로 역시 고개 이름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개를 수식하고 있는 '갱'의 의미는 무엇일까? '갱'이 쓰인 지명이 많지 않아서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고유어 중에서 '갱'자가 쓰인 말을 찾아보니 '갱엿'이 언뜻 생각이 났다.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갱엿'이란 '검붉은 빛깔의 엿'이라 설명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갱엿이 검고, 딱딱하고 끈끈해 먹기가 어려우므로 길게 늘이는 동작을 반복해 하얗고 먹기 좋은 엿으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갱엿'은 '강엿'에서 온 말이며 '강엿'은 '검은 엿'의 사투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명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크다'는 의미의 '감, 검'과 같은 뿌리를 지닌 말이 아닌가?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가마솥이라는 순우리말에 '크다'라는 의미의 '가마'라는 말이 남아 있다. '가마'는 '크다'는 의미이므로 지명에서 '가마, 감, 곰, 금, 고모, 감우, 개미' 등으로 많은 변이를 거치면서 지형의 형태를 수식하는 지명 요소로 매우 빈번히 사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고개이름에 쓰인 예를 보면 음성읍 소여리의 '감우재'를 비롯해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모령,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고모치 또는 고모령, 고미재, 경북 청도군 매전면 운산리의 곰티재 등이 모두 '큰고개'의 의미인 것이다. '검은엿'이 '감엿 → 강엿 → 갱엿'으로 변이하는 과정으로 보아 '감고개→강고개→갱고개'의 변이 과정을 유추해 볼 때 이 변이 과정에 남아 있는 지명을 찾아보면 '감고개'는 부산광역시 가야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개발로 사라졌지만 '감고개공원'으로 그 이름이 살아남았으며, '강고개'는 충남 청양군 정산면 와촌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등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갱고개'의 '갱'을 '크다'는 의미로 본다면 지명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된 지명요소이므로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이 크고 설득력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런데 '갱'이라는 지명요소가 사용된 지명에 '갱기들'이 있다.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의 '갱기들'을 비롯해 옥천군 청산면 장위리,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능국리,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삼합리, 충남 아산시 신창면 가내리,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경남 산청군 산청읍 범학리 등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갱기'란 무슨 의미일까? 보은군 마로면 수문리의 감지고개를 비롯해 보은군 삼승면 천남리 감지둑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의 '강지들', 경북 의성군 비안면 화신리의 '가마지' ,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칠리의 '감지들',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와 충주시 엄정면 추평리의 '갱지들'과 같은 지명을 볼 때 '갱'은 '크다'는 의미의 '가마, 감'에서 변이된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기, 지'는 '마지기,마직이(한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땅)', '한섬지기, 한섬직이(한섬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에서 '농사짓는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그 의미를 점차 잃어가게 되자 비슷한 의미인 '들(농사 짓는 땅)'과 중복해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갱고개는 '큰고개'의 의미로, '갱기들'은 '감지기들, 가마지기들'로 보아 '농사짓는 큰 들'의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장승배기라는 지명과 관련해 장승의 어원을 찾다 보니 '장생고'는 '무진장'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표현할 때 '무진장 많다'라는 표현을 한다. 여기서 '무진장'은 '다함이 없다 또는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며 '아주, 대단히, 엄청나게'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무진장이라는 낱말은 '다함이 없다'는 의미의 '무진(無盡)'과 '창고'라는 의미의 '장(藏)'이라는 말로 구성되어 있다. '무진장(無盡藏)'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한 말로서 '끝이 없이 넓은 덕, 또는 닦고 닦아도 다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의(法義)'를 가리키는 말이다. 빈곤한 중생을 돕는 것을 불교에서 '무진장'을 실천한다고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는 것이 바로 무진장인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무진장은 자비 사상의 실천적 행위이며 결국 보시(布施)가 되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발달과 함께 불교의 발전과 포교를 위해 신도가 희사한 시주와 보시금을 자본금으로 해 돈을 적립하고 그 적립금을 이용해 이자를 늘려 사용하는 제도가 성행하자 중국 당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면서 '무진을 실천한다'하고 자본금을 적립한 곳을 '무진장'이라 불렀다. 무진이라는 것은 일정한 전곡(錢穀)을 본으로 해 그것을 대여해주고 거기서 이자를 얻는 경제행위였다. 그 수입은 반드시 불전공의(佛前供義), 가람보수(伽藍補修), 병자와 빈자의 구제사업에 쓰도록 되어 있었지만 점차 사찰의 영리사업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리고 그 자본은 포시(布施)에 의한 자본에다가 사찰 소유의 재산, 그리고 민간기탁의 자본을 더해 합자(合資)에 의한 경영 규모의 확대를 가져와 대규모화되었으며 그 자본품도 곡물이외에 '전(錢), 견, 면, 금, 은 등'으로 확대돼 오늘날의 대규모 금융기관을 방불케 됐다. 더욱이 권력층과 부유층은 물론 서원까지도 가세해 장생고(長生庫)라는 이름으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장생고는 불법과 함께 고려로 전파됐다.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군신과 백성이 한마음으로 뭉쳐 사회를 통합시키고, 재난과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호국 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고려 초기부터 국가의 정책적 보호를 받으며 크게 발달했다. 왕실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엄청난 사전(寺田)과 노비를 사찰에 하사했으며 귀족들도 승려의 막강한 힘에 의지하기 위해 많은 보시(布施)를 하는 등 사찰은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 보호를 받으면서 경제적으로 막대한 재화를 모으게 됐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찰의 남아도는 돈을 자본으로 해 일반 백성의 경제에 도움을 주고, 사찰 자체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장생고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장생고에 저장된 자본을 장생전(長生錢)이라 했다. 즉 사전(寺田)에서 수확된 소득을 자본으로 해 이자 발생의 원칙에 의해서 민간경제의 융통을 기하는 동시에 사원 자체의 유지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차츰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부(富)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질돼 갔다. 심지어는 사속(寺屬)의 노비를 생산수단으로 부리는 동시에 자본의 주체인 곡물을 가공하여 판매까지 행하게 됨에 따라 국가에서 여러 번 금지령을 내렸으나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장생고는 처음에는 불법의 전파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받아들였으나 고려 중기 이후부터 불교계 권력이 너무 강해지고 사찰이 세속화하면서 장생고 본래 뜻과는 달리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후에는 사원 외에도 왕실과 귀족이 각각 장생고를 개설하기에 이르렀으며 불교는 점점 부패하게 되고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으며 나라 전체의 경제까지 병들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말 유생들이 불교를 배척하게 되면서 결국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재물이 힘과 권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재물과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무진장과 장생고를 통해서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