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입구에 나무나 돌을 조각해 세우는 장승은 예로부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 왔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한 역참에는 오늘날의 고속도로 이정표처럼 동서남북 방향에 있는 마을이나 관청 및 그곳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장승을 세웠다. 그래서 장승배기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온 나라의 큰길에 역참을 설치하고 장승을 세웠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은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작은 돌을 쌓은 돌무더기나 나무로 만든 장승이 있던 곳을 의미하는 ‘승산(栍山), 승천(栍川), 승천원(栍川院), 승이(栍伊), 승역(栍驛), 석적(石積), 석적원(石積院)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또는 돌장승의 흔적으로서 ‘입석방(立石坊), 입석부곡(立石部曲), 입석소(立石所), 입석역, 입석원, 입석천’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장승배기’를 비롯하여 ‘장성백이, 장승고개, 장승재, 장성골, 장성현, 장성배기, 장성마을, 장승촌, 장승리, 장선이, 장선포(長先浦), 벅수거리, 당거리, 당산마을’ 등이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후기부터는 ‘승(栍), 장승(長丞,長承,長栍), 장생우(長栍偶), 후(堠), 장성(長性, 長城), 장선주(長先柱), 장선(長先, 長仙)’이라 했으며, 한글로는 ‘댱승, 쟝성, 장신’ 등 다양한 명칭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세진(崔世珍)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후를 ‘댱승 후’로 새기고 있어 ‘장승’이라는 명칭이 16세기 이후 일반적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정조대왕 13년(1789)에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다. 한어로는 ‘토지노아’(土地老兒)이며 ‘댱승’과 ‘쟝승’은 순수한 우리말(韓語)이다”라고 기록돼 있으며 15세기에 '댱승'이었다가 16세기에 '쟝승'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41개의 '큰길(驛道: 역도)'과 524곳의 '역마을(驛村: 역촌)'이 있었으며 장승을 세운 지역을 일컫는 '장승배기'가 전국에 1천500여 곳이 있었다. 그러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장승도 사라지고 말았다. 장승에는 그 위치와 이웃 마을 이름, 방향과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흙과 돌로 팻말을 세운 것을 '돈대'(墩臺: 흙이나 돌로 쌓은 단)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후(堠)’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를 사전에서 찾으면 ‘이정(里程)을 표시하기 위해 길가에 세운 팻말(돈대) 곧 장승’이라고 나온다. 5리, 또는 10리마다 세운 것은 ‘소후(小堠 ; 작은 장승)’, 30리마다 설치된 역참에 세워진 것은 ‘대후(大堠; 큰 장승)’라고 불렀다. 우리 신화 속의 장승은 산과 토지의 수호신인 산신 및 토지신의 신역(神域)에 속하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며 무속이나 민속에서 장승은 동제(洞祭)의 주신(主神) 또는 하위신으로 솟대, 신목(神木), 서낭당, 입석, 돌무더기 등과 함께 신역의 대상이 되어 왔다. 또한 방위신과 축귀 대장군, 길을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관에서 역참에 설치하는 이정표를 장승이라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승이라는 명칭의 혼란은 오히려 일제에 의하여 생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는 언문철자법을 만들어 '벅수와 장승이 같은 것인데 장승이 표준말'이라고 조작하여 공표했으며 불교의 사찰이 극도로 타락했던 시기에 서민들을 상대로 이자놀이와 사채업(高利貸金)을 하던 '장생고(長生庫, 長生錢, 長生布)', 사찰의 경계를 표시했던 '장생표주(長生標柱: 말뚝)' 등을 장승의 유래라고 강변했다. 왜냐하면 일제의 조선총독부(학무국)가 우리의 토속신앙을 미신으로 폄훼하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서낭당과 당산, 벅수, 장승까지도 타파하여 민족 의식을 말살하고, 조선 민족이 삼국시대부터 선진적으로 역참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완전히 소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아주 교묘한 술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생'이라는 말은 사찰 소유 토지의 경계 표시로서 세운 장생표탑(長生標塔), 장생표주(長生標柱)에 쓰였으며, 신선 사상의 장생불사(長生不死), 풍수 도참사상에 의한 비보 성격의 장생(長栍) 설치 등 불교나 신선 사상 또는 민속에서 ‘장승, 장생’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장생(長生)’과 ‘장승(長栍)’은 각각 다른 기능의 말이었는데 그 음이 유사하여 ‘장생’이라는 이름을 동시다발적으로 빌어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충주시 대소원면 매현리에 장승배기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는 '장승리(長承里)'로 표기하고 있다. '장승배기'라는 지명은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 옥천군 청성면 삼남리, 영동군 양산면 원당리 등에도 있으며 전국의 지명에서도 충남 청양군 정산면 송학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충남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경북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 강원도 영월군 남면 조전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등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승배기'라는 지명의 유래는 공통적으로 장승이 서 있던 지역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장승이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많은 지역에 장승이 서 있게 되었는지, 그 어원은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의 구룡산에 장승공원이 있다. 2004년 3월 폭설로 고사한 폐목을 이용해 만든 온간 형태의 장승 500여 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폭설로 피해를 본 주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장승은 저마다 개성이 가득한 모양과 표정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가을이면 장승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런데 폐목으로 왜 장승을 만들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각종 자연 재난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승을 만들어 세워 온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앞으로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마음으로 이 많은 장승을 일일이 조각한 마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웃고 있는 장승의 형상이 마냥 즐겁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장승의 기원은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장승의 흔적은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지명 속에 장승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지명을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내추리에 장성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장성고개인데 '장성(長城)'이라 표기하고 옛날에 기다란 토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 고개에 장승이 있었으므로 장승고개라 부르다가 장승이 없어지면서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게 되자 장성(長城)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인 돌장승이 있는데 바로 앞 도로의 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쓰인 '선돌'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돌이 서 있다 하여 선돌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돌장승의 얼굴 생김새는 마을 어귀를 지키는 장승이지만 돌장승의 명문에 기록된 '시주자, 화주'라는 글자들과 이마에 동그랗고 뚜렷하게 새긴 백호를 볼 때 '청주 순치명 석조여래입상(淸州 順治銘 石造如來立像)'이라는 이름처럼 불교의 흔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절에서 만든 예배불이라면 정교하게 조각했을 터인데 허름하게 조각한 것으로 보아 마을의 주민들이 불교가 성행하던 시절에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세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용정동 돌장승의 원래 위치는 이정골 입구 정자가 있는 버스정류장 자리였으나 오래전 큰 장마로 인해 돌장승이 영운천 하류로 떠내려가 개울 바닥에 박혀 있던 것을 40여 년전 마을 사람들이 발견을 해서 오늘날의 자리에다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장승이란 나무나 돌로 다듬어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물로 마을이나 절의 입구, 또는 고개 등에 세웠는데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일종의 수호신으로서 마을이나 절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나쁜 기운이나 병마, 호환을 방비하는 동시에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령시하여 제사를 드리거나 치성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또 하나는 장승에 인근 지명까지의 거리를 표시하여 이정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장승의 이러한 다양한 기능은 장승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다양한 의미로 혼용되다 보니 장승이라는 말도 다양한 기능을 가진 신앙물, 이정표 등을 두루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쓰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청주시 흥덕구의 송정동은 법정명이고 행정명은 편의상 봉명2동과 송정동을 하나로 묶어서 '봉명2송정동'이라 하여 관리하고 있다. 법정명인 송정동(松亭洞)은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西州內面)의 지역으로서 소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송정(松亭)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좌귀리(坐貴里), 외중리(外中里), 서강내일상면(西江內一上面)의 송정리(松亭里), 왕암리(旺岩里), 복대리(福臺里)의 각 일부와 남주내면(南州內面)의 송정리(松亭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松亭里)라 해서 사주면(四州面)에 편입됐다가 1963년에 청주시에 편입됐다. 송정동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많이 나타난다. 서울특별시 성동구의 송정동은 조선시대에 나라 말(馬)을 기르던 곳으로 '솔마장벌' 또는 '養馬場坪'이라 불렀으며, 숫말을 기르던 곳이라 하여 '숫마장'으로 부르던 것이 전음되어 '솔마장'이 되고 솔마장을 한자명으로 옮겨 '松亭'이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서울시 종로구의 송정마을은 종로구 송월동에 있던 마을로서, 교남동의 동쪽 개천변에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특히 휜 소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소나무 아래에는 물맛이 매우 좋은 우물이 있었으므로 송정동(松井洞)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송정(松亭)'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갈대가 많이 서식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 전해진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하며,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가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죽도(竹島) 앞 거북 바위에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서 따왔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송정 마을은 큰 길목에 있어서, 계곡의 노송과 팽나무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정자나무가 되고, 점차 정자나무 아래로 주막 등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인접한 고을의 관원들이 배웅을 할 때 이 정자나무까지 와 배웅을 했다고 해 '보낼 송(送)'에 '정자 정(亭)' 자를 써 송정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하는데 이 정자나무는 6·25 전쟁 당시 영국군이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고사했다. 이와 같이 송정(松亭)이라는 지명은 한결같이 소나무와 연관을 짓고 있으나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의 우리말로 된 자연 지명에 나타나는 '솔'이라는 음을 '소나무'로 보려 한 것일 뿐 소나무와 연관이 없는 지역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경북 칠곡군 북삼읍 어로리에는 옛날에 주막이 있었는데 소금장수를 비롯한 여러 상인들이 주막에서 정박한 곳이라 해서 '솔징이'라 했는데 한자로 송정(松亭)이라 표기하게 되었다고 하며, 경남 의령군 정곡면(正谷面) 석곡리(石谷里)의 '솔징이'는 소나무가 많은 밭으로 '송정(松亭) 평지'라고도 하는데 지형(地形)이 평평해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경남 의령군 용덕면(龍德面) 가미리(佳美里)의 '솔정지'는 소나무 숲으로 '솔징이'라 하기도 하며,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의 솔징이는 옛날 솔이 무성했던 곳으로 '솔갱이, 솔지, 솔치'라고도 한다. 그밖에도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계리의 '솔징이',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솔징이골' 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자로 송정동이라 표기하기 전의 우리말 지명은 '솔징이'임을 알 수가 있는데 '솔징이'는 무슨 의미일까? 소나무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기에는 지명으로서의 유연성이 적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자라는 나무, 가장 넓은 서식 분포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가 소나무이기에 소나무가 있다는 것으로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이름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옛말 '솔'은 '작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었기에 '솔골, 솔고개, 솔뱅이, 솔밭, 솔밭골'과 같은 지명들은 '소나무'와 관련이 있는 지명도 있겠지만 '작은 골짜기, 작은 마을, 작은 고개, 작은 논, 작은 밭, 작은 밭골'과 같은 의미로 쓰인 곳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솔징이'의 '솔'을 '소나무'로 볼 때 '징'은 순우리말일 것이므로 '정자(亭)'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징이'를 땅의 단위를 가리키는 접미사로 본다면 '솔징이'는 '작은 밭, 작은 들'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은 '소나무'라는 의식이 너무 강력하므로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지명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순수한 우리말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이름들이 많이 전해지지만 나라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행정지명은 구역 안의 있는 자연지명을 한 글자씩 합하여 만들거나 아니면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북이면'처럼 행정의 편의를 위해 관청을 중심으로 그 위치만을 나타내는 삭막한 이름이 청주시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청주시의 동이름 중에 봉명동(鳳鳴洞)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지명이라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고 본다 봉명동은 소나무 숲에서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법정명으로는 봉명동과 송정동이 나누어지지만 행정명으로는 봉명1동과 봉명2송정동으로 나눈다. 아마도 송정동의 대부분의 지역이 공단에 속하여 공장이 들어섬으로써 주민의 수가 적으므로 봉명동과 송정동을 함께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황이 소나무숲에서 울었다고 하므로 봉명동과 송정동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에도 봉명동이 있는데 바로 인근에 송정동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듯하다. 전국에서 봉명동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봉명동은 옛날에 숲이 우거져서 부엉이가 많이 찾아왔던 마을이라 봉명동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충남 천안시 동남구의 봉명동은 봉서산(鳳棲山)의 이름을 따서 봉명(鳳鳴)이라 하였다고 한다. 봉서산(鳳棲山)은 봉황새가 깃들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남쪽의 월봉산(月峰山)에 이어지고 있다. 봉황새는 상상의 새로 봉(鳳)은 수컷이고 황(凰)은 암컷이다. 고대 묘의 벽화에 많이 그려졌던 새로서 태평성대인 요순시대에 한번 지상에 왔었고 아직은 지상에 온 일이 없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는 신성스러운 새로 전해지고 있으며 봉황과 관련된 지명 인근에는 죽골, 죽실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봉황과 관련된 지명들은봉황이 신성스러운 상상의 새이니 '봉'과 유사한 음을 '봉황'과 연관시킨 것으로 추측되며, '부엉이, 범, 봉우리(峰)' 등의 말이 '봉, 봉황'으로 변이가 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에는 '봉계(鳳溪)'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산 사이의 계곡이 길게 벋어 '벋골'로 부르다가 '범골, 벙골, 봉골'로 변이되면서 한자로 '봉계(鳳溪)'라 표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으며, 이와 함께 인근의 '백봉산, 월명산, 명심산'등의 산이름 들이 '봉명'이란 이름이 만들어지는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만 봉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로는 '과상미'를 비롯하여 덤박골(德岩), 두집매, 봉계, 봉명리, 새터, 죽말 들이 있었으며 '구실고개'라는 고개의 인근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주현(珠峴), 주연이, 주암'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지명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지어준 이유는 후손들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깊은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봉명동에는 이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마음과 마을을 사랑하는 애향심을 가진 주민들이 많아서 1998년부터 매년 봉황제라는 지역 축제를 열어 오고 있다. 2018년에는 '봉명2송정동 400살소나무명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봉황송'이라는 이름을 짓고 명명식을 가짐으로써 봉명동과 송정동을 하나로 묶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고 그 뜻을 살려 보람있는 일을 하고자 이 지역 인사들 중심으로 '봉황송미래발전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봉황송은 조선 개국공신 남은(南誾)의 12세손인 남응호(南應浩)가 아들 남대현(南大賢)이 광해군 10년(1618년)에 19살로 무과에 장원급제함을 기념하여 심은 소나무라고 하며, 청주시가 1992년 2월에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백봉공원 일원에서는 해마다 경로잔치, 주민자치 프로그램 발표회, 전시회, 봉황가요제, 봉황장학금전달, 먹거리장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의 화합을 도모하던 신명나던 축제가 열려왔으나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하고 있다. 하지만 봉황송 온마을돌봄공동체가 마을 주민들의 자원봉사로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한 사랑의 배움터를 운영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모두가 아름다운 지명의 영향이 아니겠는가?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에 과상미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름이 상당히 특이하여 전국의 지명에서 찾아보았으나 같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과상미는 과상뫼라고도 하는데 백봉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며 이 지역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과상미라는 마을은 도시 개발로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백봉산 동남쪽, 현재 봉명초등학교와 봉명주공아파트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령 남씨의 세거지로서 남씨촌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의 지명 유래로서 백봉 공원에 있는 유래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 시대 중엽에 보부상(봇짐장수)들이 청주를 향하여 들어가다가 날이 저물어 이곳 백봉산 아래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 삼경에 이르자 활시위 소리가 들려 사방을 둘러보니 백봉산 중턱에서 다섯명의 무사가 달빛 아래 활을 쏘고 있었다. 무사들은 활쏘기를 마치고 나서 몸을 씻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동녘 하늘에 해가 돋을 무렵 안개가 짙게 깔리자 다섯 무사들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부상들은 마치 신선을 본 것 같았다. 이때 안개에 휩싸인 백봉산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두들 중국에 있는 명산인 과상산(果商山)과 같다고 감탄하면서 백봉산을 과상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보부상들은 성문으로 들어가 관청에 이 사실을 고하였는데 관에서도 그 다섯 무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후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 다섯 무사들은 개국 공신 남은(南誾)의 후예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상미'라는 지명은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일까?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음이 변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자 한자로 '과상미(果商山, 果桑山, 果産里)'라 표기하면서 이 둘레가 과일밭이라거나, 과일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고 심지어는 위의 전설처럼 중국의 과상산(果商山)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국의 지명에서 비슷한 음으로 변이된 지명을 찾아보니 '가상골'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었다.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만정리의 '가상골'을 비롯하여 경북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 충남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음현리, 충남 보령시 청라면 소양리 등에 보이는데 가장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가장골이라 하다가 가상골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골'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니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내암리의 가장골을 비롯하여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 단양군 단양읍 장현리, 음성군 생극면 생리,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 보은군 내북면 염둔리 등 충북에 20여 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전국의 지명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난다. 전남 영광군 군서면 가사리의 가사골은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장골, 가작골, 가상골'로 불리다가 '가사골(加沙)'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의 가동(佳洞)마을은 백제시대에 절 어귀에 있는 마을이라서 가장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가상골이라 부른 것이 '가동(佳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충남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의 '가장미', 경남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의 '가정산',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의 '가골', 경남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의 '가골' 들이 모두 가장자리에 있는 위치를 가리키는 지명들로 볼 수가 있으므로 '가장자리'라는 지형적 특성은 지명의 명명 요인으로 유연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에 있는 '백봉산(白峰山)'은 원래 '백봉산(栢峰山)'으로서 '잣봉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잣'은 '산'의 옛말로서 '잣봉'이란 '산봉우리'라는 의미이므로, 해발 95m의 낮은 봉우리인 '잣봉'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쓰였다면 주민들은 그 위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산의 이름을 지어서 부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형으로 보아 인근에 있는, 백제고분군이 있는 명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있는 작은 봉우리로서 '가장자리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가상미'로 부르다가 한자로 과상미로 표기하면서 다른 의미의 유래가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팬데믹 상태에 이르게 한 지가 2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변종인 오미크론이 점점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 변종 바이러스의 이름은 그리스 알파벳의 순서대로 붙이게 되는데 오미크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순서를 건너 뛰어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오미'라는 지명이 많이 있으니 세계보건기구(WHO)에 오미크론 이름 사용 금지 청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오미라는 지명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음성군 대소면의 오산리는 본래 충주군 대조곡면(大鳥谷面)의 지역으로서 외딴 산 밑이 되므로 오미라 했는데 한자로 오산(梧山)이라 표기한 것이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의 면소재지인 오산리도 산이 외따로 있으므로 오미 또는 오산(烏山)이라 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옛날 이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던 살던 이가 있었다. 어머니의 나이가 이미 구십을 넘어 노망기가 들자 참다못한 아들은 늙은 어머니를 내다 버리기로 작정을 했다. 마을 밖 적당한 곳에 토굴을 파 움막을 만들고 짚과 솜을 깔아 어머니가 여생의 마지막 며칠을 누워있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지만 아무리 노망이 든 노인이라 하더라도 천륜의 정은 어찌 못해 아들은 착잡한 마음으로 움막 부근의 바위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때 이들은 문득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다섯 마리의 까마귀 떼 중 한 마리는 다른 네 마리에 비해 몹시 늙어 보였고 게다가 눈이 먼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두 마리는 늙은 까마귀를 부축하듯 호위해서 먹이가 많은 장소로 인도했고, 나머지 두 마리는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며 늙은 까마귀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어미와 자식 관계임이 분명했다. '까마귀가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구나. 한낱 미물마저도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려 하는데 사람인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들은 어머니를 구덩이에서 다시 끌어올리고 집으로 모셔왔으며 그때부터 아들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공양했다. 하늘의 보살핌인지 어머니는 얼마 후 정신을 회복하기 시작해 정정한 노인으로 백 세까지 수명을 다하셨다. 까마귀로부터 효의 아름다움을 깨우쳤다고 하여 '오미(烏美)'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설은 '오미'를 한자로 '오미(烏美)'라 표기함으로써 지명의 유래를 까마귀와 연관짓게 된 것으로 보이며 경기도 오산시 오산동의 오산(烏山)이라는 지명도 1900년경 경부선 철도를 건설할 당시에 철도공사 구간을 따라 까마귀떼가 몰려들어서 그때부터 오산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유래가 전해오기도 한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五美里)의 오미마을은 원래 마을 뒷산이 다섯 줄기 능선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릉동'으로 불렸는데, 1630년 인조 때 김대현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에 급제를 해 그 이후부터 '오계지미'라 칭찬을 받아 '오미동(五美洞)'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상의 지명에서는 '오미'의 '오'를 한자로 '梧(오동나무), 烏(까마귀), 五(다섯)'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오'는 '외따로 떨어진'의 의미를 지닌 '외'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순우리말로 전해오는 '오이골'이라는 지명이 경북 상주시 모서면 화현리,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송곡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충남 당진시 신평면 상오리, 경남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 등 전국에 20여 지역에 분포돼 있고,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오미리의 오미마을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 단성면 오미리, 전남 구례군 마산면 문수리 등에 오미마을이 있는데 이 지명들은 모두가 '외딴 산'의 의미라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오미'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한자의 의미에 따라 여러 가지 유래나 전설이 만들어져서 전해지고 있으나 원래의 유래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외진 곳에 있는'의 의미를 가진 '외'와 산이라는 말의 고어인 '뫼'의 변이형인 '미(山)'가 결합해 '외미'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이 '외미'가 '오미'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네와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있는 집을 '외딴집'이라 부르듯이 큰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을 '오미'라 하고 그곳에 생겨난 마을의 이름도 역시 '오미'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지명 명명의 유연성으로서의 설득력이 높을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에 호무골이라 부르는 자연지명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풍수지리에 밝은 술사가 청주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3㎞ 거리에 있는 곳에 낙엽송과 참나무로 울창하게 둘러싸인 깊은 산골짜기에 명당 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곳이 장차 번창할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집을 짓기로 결심했는데 주변에 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술사는 집짓기를 포기하고 떠났다. 술사가 떠난 지 얼마 후에 이명도라는 분이 지나가다가 이곳 지형의 오묘함을 발견하고 정착할 것을 결심했다. 집터를 닦는 한편 물을 얻기 위해 집 주변의 땅을 파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파보아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계곡은 깊으나 석벽을 이루고 있는 까닭에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세가 아무리 좋다 한들 물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에 술사와 마찬가지로 정착할 뜻을 포기했다. 이명도는 평탄하게 닦아놓은 집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에 길을 떠나기 위해 쉬고 있는데 계곡 한쪽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춤을 추면서 우거진 숲속에 머리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 장면을 보았다. 날이 밝은 후 이명도는 호랑이가 춤을 추면서 머리를 넣었던 숲속을 살펴보니 물이 흐르고 있었다. 호랑이는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도는 집터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짓고 정착했으며 그 후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 한 마을을 이루었다. 그 후로부터 호랑이가 달빛에 춤을 추면서 샘물 자리를 일러준 곳이라 하여 호무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 '호무골'이라는 지명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의 호무골을 주민들은 호미골로 많이 부르고 있으며 전국의 지명에서도 호무골의 예는 찾기 어렵고 호미골이 많이 보인다. 단양군 매포읍 삼곡리의 호미골을 비롯하여 제천시 청풍면 연론리,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구룡동, 경북 경산시 남천면 하도리, 전북 진안군 용담면 와룡리,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안덕리 등에서 호미골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호무골, 호미골'은 '홈골'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지명에서 '홈'은 '홈처럼 길고 깊은 골짜기의 지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홈'자가 붙어 쓰이는 지명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에 홈터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홈처럼 길고 깊은 골짜기의 지형'을 가리키는 말임을 금세 알 수가 있다. 경남 거제시 연초면 이목리에는 '홈택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홈통 모양의 길고 깊은 골짜기라서 홈택골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홈터골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삼동리의 '홈재'는 옛날 이곳에 오랑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호산(胡山)이라 불리었다는 설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이곳에 살고 있을 리는 없고 단순히 글자와 연관 지은 유래일 것이며 산길이 홈같이 좁고 길어서 홈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홈골'이란 '홈처럼 깊게 파인 지형에 있는 마을, 산골짜기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홈골'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홈골'은 여러 지역에서 '홍골'로 변이된 곳이 많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문박리의 '홍골'을 비롯하여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 괴산군 문광면 흑석리, 보은군 마로면 한중리 등의 '홍골'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에서 두모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홍고개(赤峴)'라 부르는데 조선조 중엽에 중국의 학자가 이 산을 그대로 두면 명장이 생긴다 하여 칼로 산을 친 결과 붉은 피가 흘렀다고 전해지지만 지금도 '홈너머고개, 홈너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원래의 이름은 '홈너미(홈처럼 길게 이어진 골짜기를 넘는 고개)'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따라서 '호무골, 호미골'이라는 이름은 '홈골'에서 온 말이지만 마을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며 살기 좋은 마을, 그리고 영험한 기운을 지닌 호랑이가 점지해 준 마을이라는 의미를 마을의 이름과 연결지으려 노력한 조상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들을 보면 '범골, 범말, 범실, 범바위, 범밭골, 범고개'처럼 호랑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범'자가 쓰이거나, 아니면 '호골, 호동, 호암, 호무골, 호미곶, 호구포, 각호산' 등에서처럼 한자어 '호(虎)'자가 쓰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의 호계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지형도'에 호계리(虎溪里)라는 한자 명칭과 함께 일본의 가타카나로 범계리라는 발음도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범-'이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원래부터 자연지명이 '범-'이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호(虎)-'가 된 지명도 있지만,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로 '호-'자가 쓰인 지명의 경우에는 그 어원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원남동에 있었던 자연마을인 호동(壺洞)은 모양이 호리병과 같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었던 호동(壺洞)도 동네의 모양이 병처럼 생겼으므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들 마을은 호랑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지형의 형태가 홈처럼 깊게 파인 모양이라서 '홈골'이 그 뿌리일 것이며 '홈'이 '호'로 변이되다 보니 지형의 특성으로 보아 호리병을 연상하여 한자로 '호동(壺洞)'이라 표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구직할시 남구 대명동의 '야시골(狐谷)'은 몇 개의 톱니바퀴 모양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약 2백여년 전의 이 일대는 소나무 등이 우거진 울창한 잡목림을 이루어 여우, 늑대 들이 많이 살았고, 최근까지 '긴등골' 이라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1년 이내에 죽는 일이 빈번했으므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여기저기에 묻어 애총을 마련했는데 여우들이 이 무덤을 파헤치려고 몰려들어 '야시골(호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이곳에 살던 한 여자 몽유병 환자가 밤만 되면 나타나 무덤 사이를 여우처럼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 지나가기를 두려워하였고, 이로써 '야시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일설도 전해지고 있다. 지명에서 '호'가 단독적인 지명요소로 쓰인 예는 전북 순창군 구림면 성곡리의 '호곡(虎谷)'을 비롯하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전남 곡성군 고달면 두가리, 전남 순천시 주암면 고산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술역리, 전남 영광군 백수읍 양성리의 '호곡'을 들 수 있는데 '범골, 범말, 범실'이라는 자연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호곡(虎谷)'이 된 곳도 있지만 '범'과 관련이 없이 원래부터 '호골'이었던 지역도 많이 있다. 이러한 '호골'은 아마도 '홈골'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홈골'은 '호미골, 호무골'로 변이되기도 하지만 '홍골'로 변이된 경우에는 '호골'로 변이될 가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호'가 다른 지명요소와 함께 어울려 쓰인 예가 많이 보이는데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대곡리의 호장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약 500여 년 전에 손씨 성을 가진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골짜기 한곳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범이 나타나 장군 일행을 가로막았다. 손 장군은 부하들을 피하게 하고 범과 싸움을 벌였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싸우는 소리가 조용해졌다. 가슴을 조이던 부하들이 조심스레 찾아가 보니 장군도 범도 다 죽어 있었다. 부하들은 손 장군을 후히 장사 지내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 골짜기를 범과 장군이 싸운 곳이라 하여 호장골(虎將谷) 이라고 불렀다" 이 전설은 호장골이라는 지명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자 호랑이와 관련지은 유래를 지어내고는 '호장골(虎將谷)'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충주시 노은면 대덕리의 '호장골',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의 '호정골'과 그 뿌리를 같이하는 지명으로 보인다. 즉 산줄기가 뻗어내려와 깊은 골짜기가 생기자 '홈처럼 깊게 파인 잣(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홈잣골'이라 부르다가 '홈잣골→홈작골→홍작골→호작골→호장골'등의 변이 과정을 거쳐 '호정골, 호장골'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명에서처럼 '호'를 한자 '虎'로 표기하고 호랑이와 연관된 유래와 전설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호랑이가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범바위'가 있다. 우리 충북에서 범바위라는 지명의 대표적인 곳으로 충주의 호암동(虎岩洞)을 들 수가 있다. 인근에 있는 남산(일명 금봉산)에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 산신령으로 추앙받던 호랑이가 오르내리며 사천개(부근의 옛 이름)를 돌보던 파수대 같은 곳이라 하여 범바위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옛날 어느 선비가 이웃 마을 직동에서 내려오던 중 관음사 옆 큰 바위에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범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며 한자로 '호암(虎岩)'이라 표기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청주시 상당구 명암약수터가 있는 명암동에도 '범바위골(虎岩谷), 범밭골(虎田谷)'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숲이 울창해 밤낮으로 호랑이와 늑대가 출몰했고 큰 바위에 호랑이가 올라 앉아 있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전설에는 시집간 딸이 병을 앓자 범밭골에서 맑은 공기와 물을 마시면서 요양하면 좋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범밭골에 100일 동안 먹을 양식과 함께 두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왔다. 한 달이 지나서 움막을 찾아가니 죽은 줄 알았던 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목이 말라 물을 찾으러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맛이 아주 좋아서 매일 먹다보니 차츰 몸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신기한 약효가 있는 이 약수는 '명암약수'라 하여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매우 많았고,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가 주변에 출몰해 자주 호환을 당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처럼 호랑이가 생활 주변에 많이 존재했기에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들은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나 호랑이와 연관된 전설, 또는 호랑이 형상의 어떤 물체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범바위'라는 지명은 '범'자가 붙은 지명이지만 다른 지명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범바위'는 서울 남산의 범바위와 인왕산의 범바위를 비롯해 전국에 널리 분포돼 있다. 바위가 호랑이 모양인 데서 유래된 이름도 있지만 호랑이 형상으로 이렇게 많은 지역에 지명으로 생겨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원도 속초의 속초팔경 중 제2경으로 영랑호 최고의 명소인 범바위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기는 하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야 범의 형상이 나오는지를 지역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사한 형상의 물체가 아니라 유사한 음에서 변이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범바위는 효자 전설에 의하여 만들어진 '효암(孝巖)'이 '호암(虎巖)'으로 불리면서 '범바위'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효자 전설은 부엉바위를 한자로 표기한 '효암(梟巖)'을 '효암(孝巖)'으로 잘못 알고 만들어진 전설로 생각된다. 즉 원래는 '범바위'였는데 범과의 연관성이 적다보니 '벙바위, 부엉이바위'로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한자로 '효암(梟巖)'이라 표기하면서 '효암(孝巖)'으로 잘못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孝)와 관련된 '효암(孝巖)'의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범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나 지명의 지형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산봉우리이거나 산의 높은 곳에 솟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범바위의 '범'이란 처음에는 '호랑이'라는 의미의 '범'이 아니라 '벋은(뻗어 오른)'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범바위는 '범'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유사한 말이 호랑이를 연상해 '범'으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봉황골(鳳凰)' 이란 지명이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를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와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도 있다. 봉황이란 상상의 새이면서 임금의 권위와 상서로움의 상징인데 어떻게 해서 지명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바로 범바위에서 단서를 얻게 됐다. '산에 높이 벋은(뻗어 오른, 솟아 있는) 바위'를 가리켜 '벋바위'라 했는데 이 '벋바우'가 '벌바위' '범바위'로 변이되고 '범바위'는 '벙바위'로 불리다보니 소리가 유사한 '부엉이바위'로 변이되기도 했지만 '벙바위'는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음차해 '봉암'이 되고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벌바위'처럼 의차해 '봉암(蜂岩)'이 됐는데 이 '봉암'이 상서로운 의미의 '봉황'으로 변이됐다는 것을 '부엉이바위, 봉암, 봉황'이라는 지명이 혼용되는 지역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로 얼룩진 소띠 해 신축년(辛丑年)이 물러가고 이제 새로운 해가 밝았다. 금년 임인년(壬寅年)은 육십간지 중 39번째 해로, '검은 호랑이의 해'에 해당된다고 한다. '호랑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을까? 호랑이(虎狼)는 한자어이며 순수한 우리말은 '범'이다. 호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으나 범을 뜻하는 '호(虎)'와 이리를 뜻하는 '랑(狼)'에 접미사가 붙어서 육식 맹수를 가리키던 것이 점차 범 대신 호랑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어떤 사람은 일제가 만든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조선을 상징하는 용맹스러운 범이 조선 땅에 많이 살고 있으므로 조선을 지배하려면 우선 범의 이름을 비하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자어 '호(虎)'에 교활한 이미지를 지닌 이리를 뜻하는 '랑(狼)'을 붙여서 만든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설이 아니고 호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래된 일이 아님을 근거로 추측한 것에 불과할 뿐이며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범'이라 불러왔던 것이다. 호랑이는 맹수 중의 맹수로 용맹과 기상의 표상이면서 잡귀와 나쁜 존재를 쫓아내는 영물로 여기기도 하는 등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호랑이와 삶을 함께 해왔기 때문에 오늘날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 동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따라서 신화, 전설, 민담 등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호랑이가 많이 등장해 왔다.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의 덕동계곡에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 사람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떡시루에 칼을 꽂아두는 호식총 풍속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영동군 황간면의 백화산 자락에 있는 반야사(般若寺)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돌무더기가 호랑이 모양을 닮아서 백화산 호랑이가 반야사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등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이나 풍속, 옛이야기, 지명 등이 많다. 전국의 지명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범골, 호동, 용호동, 범바위, 호암, 호미곶, 호구포' 등 다양하게 많이 존재하는데 충북에도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범골, 범말, 범바위, 호암, 범고개, 호무골, 각호산 등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 중에서 '범골'이라는 지명은 충북에만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지산리의 '범골'을 비롯해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대련리,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괴산군 청천면 삼리,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 충주시 노은면 법동리, 보은군 수한면 산척리 등지에 있으며 전국에는 매우 많이 분포돼 있다. 이 지명들은 대부분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우리 조상들은 전쟁과 천재지변, 가난이라는 재난보다 수시로 생명을 위협하는 호랑이가 더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공자가 수레를 타고 몇 사람의 제자와 길을 가고 있었다. 고요한 산속을 지날 때 정적을 깨고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이상히 여겨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부인이 길가에 있는 세 개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비통하고 애절해서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공자는 예를 표한 후 제자를 시켜 까닭을 물어보았다. "옛날 저의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몰려 돌아가셨는데 곧이어 저의 남편도 호랑이에게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까지 잡아 먹혔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그렇게 위험한 곳인데 왜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곳에 살고 있으면 마구 뜯어 가는 세금을 재촉 받을 걱정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동행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니라(苛政猛於虎)" 대선 정국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시끄러운 요즈음 정치가들이 호랑이 해를 맞아 새겨들어야 할 성어가 아닌가? 작년 한 해 우리 국민들 모두가 코로나로 힘든 한 해를 보냈는데 새해에는 신비롭고 영험한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코로나 걱정 없이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2022년을 기대해 본다.
우리 주변의 산 이름 중에는 '매산' 또는 '매봉산'이 유난히 많다.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의 '매산(마이산)'과 맹동면 마산리 의 '매산'이 있고,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매봉리와,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 등에 '매봉'이 있으며, '매봉산'은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등에 있다. 그리고 '매봉재'는 충주시 주덕읍 대곡리를 비롯하여 충주시 앙성면 지당리, 충주시 용관동, 충주시 소태면 동막리,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음성군 음성읍 한벌리,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 음성군 원남면 하로리,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 음성군 금왕읍 본대리, 음성군 맹동면 용촌리,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음성군 금왕읍 구계리, 진천군 초평면 은암리,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 보은군 마로면 변둔리, 보은군 회남면 용호리, 보은군 회남면 분저리,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 영동군 양강면 만계리,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 등에 있다. 그러면 이 지명들에서 '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매'는 '산'의 고어인 '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다. '뫼'는 지명에서 후부에 쓰일 때는 '성미, 연미, 구미, 태미' 등 '미'가 되지만, 앞에 쓰일 때는 '뫼'의 음을 간직한 '메, 매'로 쓰였다. '메'와 '매'는 소리가 유사해 구분이 어려우므로 지명에서 서로 구분이 없이 표기됐다. 아주 오랜 옛날 나무 열매를 따 먹거나 수렵 생활을 할 때는 나무 열매가 많은 지역을 찾아, 그리고 사냥감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생활 반경이 집과 농토 주변으로 좁아지게 되니 여러 산으로 두루 이동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동네 주변에 있는 하나의 산만이 생활과 관련이 있기에 '산'의 이름을 구별할 필요가 없이 '뫼(메, 매)' 하나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산'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뫼(메, 매)'의 의미를 잃게 되자 '뫼(메, 매)라 부르는 산'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매산(메산), 매봉'이라는 말이 고유명사로 굳어지는 지역이 많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의 질매산, 전남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의 고매산,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등메산,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 어두메산, 전북 군산시 옥산면 옥산리의 소매산, 전북 부안군 보안면 부곡리 성메산,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의 누루메산, 경남 창녕군 이방면 옥천리의 큰당메산, 전남 담양군 무정면 정석리 도루메산, 인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의 시루메산 등에서 보면 산과 산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메, 매'의 앞에 수식하는 지명 요소가 붙어 쓰이는 예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매산, 매봉, 매봉산, 매봉재'와 같은 지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매(鷹)'와 연관된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뫼(매)'가 '산'으로 교체되어 사용되면서 '뫼(매)'의 의미를 모르게 되자 '매'라는 소리에서 '매(鷹)'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사냥은 4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 풍습으로서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매를 길러서 사냥을 하는 일이 매우 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매사냥을 즐기다 보니 매의 꼬리에 시치미라는 표식을 달았다. 그런데 남의 매를 잡아서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시치미 떼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됐다고 한다. 생후 1년 미만인 매는 길들이기에 아주 좋은 매로서 보라매라고 했다. 오늘날 공군사관생도를 보라매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나는 훌륭한 비행기 조종사를 길러내기 위한 인재'라는 의미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 것이다. 산에서 1년이 지난 매는 '산진이', 보라매로 들어와서 사람 손에서 1년을 난 매를 '수진이'라고 하였고, 사람 손에서 3년 이상을 난 장수매는 '삼계창'이라고 했다. 매를 통해서 잡는 것은 주로 꿩이었는데 매의 먹이로는 꿩 대신 닭을 주었기에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하여튼 지명에서의 '매'를 '매(鷹)'와 연관지은 것은 매사냥이 번성했던 사회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명요소인 '메, 매'가 '산, 봉'과 함께 쓰이는 것으로 보아 그 뿌리는 '뫼(山)'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시 용정동의 이정골은 어떤 의미로 이정골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용정이라는 이름은 용성골과 이정골에서 따온 말이므로 이곳에 이정골이라는 큰 마을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골은 용정동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유정골'(有亭-), 유정리(有亭里)'라고도 한다. 마을에 전해오는 유래에 의하면 '유정골'은 마을에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유정'이 '이정'으로 바뀌어 '이정골'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정골'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여러 군데 존재한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의 '이정골'을 비롯하여 울산 울주군 두동면 이전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전남 함평군 학교면 죽정리 등에 '이정골'이 있으며, 전남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의 '유정골', 전남 나주시 봉황면 유곡리의 '유정앞골',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계리의 '학유정골' 등의 지명으로 보아 이정골은 이전골, 유정골, 유전골 등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이름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정골'에서 '이정골'로 변이되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유정골'이 원 뿌리라면 실제로 정자가 있다고 해 '유정(有亭)'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플어줄 열쇠는 충청북도기념물 제42호인 신항서원(莘巷書院) 창건 과정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신항서원지(莘巷書院誌)' 서문에 의하면 "신항서원(莘巷書院)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삼남의 가장 으뜸이 되는 서원으로 조선 선조 3년 경오년(1570년)에 청주의 사림(士林)이 유정곡(有定谷)에 서원을 창립하고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고 했다. 호서지방에서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1570년에 청주목 서주내면 유정리 안말 마을(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번지)에 건립되었다. 신항서원의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서원이 위치한 마을 이름을 따라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 했다가 1660년 사액을 받으면서 신항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유정리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에 서원이 설립되면서 이름을 지을 때 마을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본다면 이미 그 당시에도 유정골이라 했는데 '유정(有定)'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아 정자가 있어서 '유정(有亭)'이라 했다는 유래는 후대에 정자가 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직도 주민들에게는 자연지명으로 '이정골'이라 불리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정골이 이정골로 변이됐다는 유래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정골'이 원래의 자연지명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유정'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지명인 '이정골'은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 유사한 음을 가진 지명을 찾아보면 광주시 남구 이장동의 '이장골'을 비롯해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경북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리, 경북 영덕군 영덕읍 삼계리 등에 '이정골'이 있고,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의 '이전골'을 비롯해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의 '이전말',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리의 '이전동' 등의 지명으로 보아 지명에서 '잣(산)의 변이음인 '장'이 '정, 전'으로 서로 교류하면서 혼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정골'의 '정'은 '장(잣)'에서 변이된 것으로 본다면 '이'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청주시 용정동에 있는 자연지명을 찾아보면 '안골'(신항서원 안쪽에 있는 골짜기), '안말'(용정동 안쪽에 있는 마을), '앞말/아랫말'(이정골의 앞, 아래에 있는 마을), '뒷말'(마을로 들어가면서 개울 우측에 있는 마을), '문앞들'(이정골 앞에 있는 들) 들처럼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이름 지은 지명이 많이 존재한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우장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위장골로도 불리고 있으며 한자로는 '우정동(雨井洞), 위장곡(葦長谷)'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정골'도 '장고개(중고개)의 위쪽에 있는 마을'의 의미로 '위장골'로 부르다 보니 구전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정골, 유정골'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정골로 넘어가는 고개인 '중고개'라는 지명도 '장고개(산을 넘는 고개)'에서 온 말임이 더욱 확실해지지 않겠는가?
음성군 삼성면의 면소재지인 덕정리에서 진천군 광혜원을 가다보면 삼성면 상곡리를 지나게 된다. 삼성면의 서북단에 위치한 상곡리는 해발 345.6m의 백운산 줄기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과 음성군 진천군 광혜원면에 접해 있는 곳이다. 원래 웃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어 한자로 상곡(上谷)이라 표기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점골을 병합해 상곡리라 하고 삼성면에 편입됐다. 인근에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산골 마을에 음성삼성농공단지와 음성하이텍일반산업단지가 조성돼 에이스 침대를 비롯한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전국으로 축산물을 공급하는 음성축산물공판장이 생겨나면서 새로 난 길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니 어디가 마을이고 어디가 공장인지 한참을 헤맨 후에야 마을을 찾아갈 수가 있었다. 작은 언덕으로 이뤄진 야트막한 야산에 녹색으로 우거진 숲과 논과 밭이 펼쳐진 넓은 들판에 소꿉장난하듯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정겨운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농공단지의 대규모 공장들에 가려진 마을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 더욱이 도로는 구불구불한 농로를 상곡로, 청용로라 이름 짓고 마을에서 갈라지는 골목길은 모두 점골길이라 해 위치를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도로명 주소는 반듯한 도로와 건물이 있는 도시에서는 편리하지만 우리나라의 농촌 지형에는 전혀 맞지 않아서 혼란만 주게 되는 것 같다. 상곡리에는 웃골, 웃점골, 아랫점골, 매일, 건너말 등의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점골은 '점골, 정골, 웃정골, 상점동(上點洞), 아랫정골, 하점동(下點洞)'이라 불리고 있어 '점골'이 무슨 의미를 가진 지명인지 그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점골, 점말, 정골, 점동'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너무 많이 있으므로 충북 지역에서 찾아보면 '점골'이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영동군 영동읍 오탄리 등에 있고 '점말'은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의 금관리와 성대리, 충주시의 살미면 설운리와 수안보면 미륵리, 노은면 문성리, 살미면 내사리, 제천시의 송학면 포전리, 음성군의 음성읍 신천리와 읍내리, 진천군의 백곡면 용덕리, 괴산군의 장연면 장암리, 사리면 화산리, 사리면 이곡리, 보은군의 속리산면 중판리, 옥천군의 군서면 오동리, 영동군의 심천면 각계리, 영동읍 오탄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정골'은 제천시의 수산면 구곡리, 백운면 모정리, 진천군의 광혜원면 실원리, 괴산군의 괴산읍 검승리, 소수면 길선리, 괴산읍 능촌리, 연풍면 유하리, 보은군의 내북면 법주리, 장안면 불목리, 영동군의 매곡면 수원리, 용산면 매금리 등에 있는데 '정골'과 '점골'을 혼용하는 지역이 많이 있고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와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의 '점동'은 '점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정골, 점골, 점동, 점말'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은 한자로 표기하면 '정(鼎)'이 돼 '솥'의 의미가 되고 '점(店)'은 물건을 만들거나 파는 장소가 돼 '솥점'을 연상하게 되므로 이 마을들은 공통적으로 '옛날에 솥점이 있었다'는 것이 마을 이름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철을 가공해 솥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솥을 만들거나 솥을 파는 곳이 이렇게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점골'과 '정골'의 혼용에서 비롯된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만약에 솥점이 많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솥을 만들거나 파는 집만을 가리켜 '솥점'이라 할 것이며 솥점이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지명이라면 '솥점말, 솥점골'이라는 이름이 많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점골, 점말, 정골'이 '솥'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점'이나 '정'은 유사한 음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근에 '잣골'에서 변이된 '절골'이 존재하는 곳이 많은 점과 지형상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지명 요소에서 '점'이나 '정'과 유사한 음의 지명 요소는 '잣(산)'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점골, 점말, 정골, 점동'의 뿌리는 '잣골(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의 '중고개'가 '산고개'라는 의미의 '잣고개'에서 변이된 것이라면 '이정골고개'라고도 불리는 '구중고개'는 무슨 의미일까? '중고개'의 유래를 '중이 넘던 고개'라 해석한다면 '중고개'의 앞에 붙은 '구'는 자연스럽게 '옛(舊)'의 의미로 보아 '옛날에 중이 넘던 고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중고개'의 원래의 의미가 '산고개'라면 '옛산고개'라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다. '중(산)'을 수식할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구중'이라는 단어는 독자적으로 마을 이름으로도 쓰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의 '구중',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의 '구중'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구중곡', '구중골', '구중다리', '구중산' 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도 적극적으로 쓰인다 이러한 예로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대상리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가곡리의 '구중골', 충남 공주시 이인면 운암리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산전리, 경북 울진군 북면 고목리, 충남 금산군 남일면 신천리, 전북 김제시 상동동, 전북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등의 '구장골', 전북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전남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 등의 '구장산'을 들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 '구중'의 '중'이 '장'으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중, 장'이 '잣(산)'에서 온 말임이 드러난다. 더욱이 전남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의 '구장산'은 '구장달산'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장, 달, 산'은 모두 '산'의 의미인데 언어의 변화에 따라 같은 의미이지만 소리가 다른 음이 세 번 중복돼 쓰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중, 장, 산'을 수식하는 '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명에서 수식어로 쓰인 '구'라는 지명요소의 어원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지명에서 산의 지형과 연관이 있는 의미를 가진 말로서 '굼'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굼'은 '구렁'의 의미인데 '굼+안+이'가 '구만리'라 불리거나, '구렁'이 '산'을 수식하게 되면 '구렁+산'이 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려다 보니 '구렁산→구룡산'으로 변이돼 쓰이게 된다. 청주시 서원구 산남동의 '구룡산'을 비롯해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보은군 내북면 용수리,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운학리, 서울 서초구 염곡동,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경북 영천시 북안면 상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 지개리, 경남 창녕군 이방면 초곡리,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전남 고흥군 동일면 덕흥리 등지에 '구룡산'이 존재한다. 또 하나는 부여 백마강 유역(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에 있는 '구드레나루'의 '구'를 들 수가 있겠다. 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큰 나라'라는 의미로 '구다라'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구다라'는 '구드레나루'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여기에서 '구'는 '크다'의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드레'라는 말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드나든다(들어오고 나간다)'에서 '드레나루'란 말이 생겨났는데 지금은 '드레'는 생략하고 '나루'라는 말로 쓰이고 있다. '큰 드레나루'가 '구드레나루'가 되었으므로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큰나루'라고나 할까? 또한 경북 군위군 삼국유사면 석산리의 '고드레들'도 '구드레들'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의 '드레'는 '들판'의 의미이다. 음이 변해 그 의미를 잃게 되자 우리 선조님들은 친절하게도 뒤에 원래의 의미를 지닌 말을 중복하여 쓰지 않았는가? 어쨌든 '드레'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으나 '구드레'의 '구'는 '크다'는 의미를 가진 말의 원형이거나 변이형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구중고개를 '구렁산고개(골짜기가 있는 산을 넘는 고개)'의 의미로 보는 것보다는 '큰 중고개(큰산고개)'의 의미로 보는 것이 음운 변이 과정이나 지명 명명의 유연성으로 보아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구중고개는 '중고개' 즉 산을 넘는 '산고개'가 둘이니 하나는 중고개라 부르고, 그 중에서 더 크고 더 높은 산고개는 '큰산고개' 즉 '구중고개'라 불렀음직하다. 또한 '장고개'와 '중고개'가 전국의 지명에 많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은 옛날에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서 산을 넘는 고개를 두루 '장고개, 중고개'로 불렀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은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정리(有亭里), 구곡리(九谷里), 용성리(龍城里), 구하리(九下里) 일부를 병합해 용성(龍城)과 유정(有亭)의 이름을 따서 용정(龍亭)이라 하여 사주면(四州面)에 편입됐다가 1963년에 청주시에 편입됐다. '용성골'이라 불리던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가 넘는 고개를 '중고개'라 하고 이 주변에 생겨난 마을도 '중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옛 지형이 모두 사라지고 용암동, 금천동 지역의 '중고개로'라는 도로명에, 그리고 용성초등학교라는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정골을 가려면 중고개를 넘어 험난한 구중고개를 또 넘어야 했는데 중고개와 구중고개가 같은 음의 중복으로 혼란을 주므로 구중고개를 이정골고개라고도 불렀다. 중고개와 구중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중엽에 청주에 낙향해서 살던 이참판의 딸이 집안에서 부리는 머슴을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되고 말았다. 머슴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간곡하게 만류했으나 막무가내였으므로 그 길로 혼자 도망을 쳐 용바위골 낙가산(洛迦山) 기슭에 있는 보살사(菩薩寺)로 들어가 불가(佛家)에 귀의했다. 그녀는 머슴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절에 있는 머슴을 발견하고는 둘이 절을 빠져나갈 것을 간청했다. 머슴은 그녀의 흐느낌과 호소에 마음이 움직여 두 남녀가 몰래 보살사를 빠져 나와 청주성으로 향하던 중 항상 넘나들었던 '중고개'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두 남녀는 서로가 같은 신분이 아닌 이상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루어질 수 없는 처지를 슬퍼하며 함께 목을 매고 죽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주지 스님은 참회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스님들에게 이 고개의 통행을 금했다. 그리하여 옛 중들이 지나던 고개라고 해서 오늘날 그 고개를 '구중고개(舊僧峙)'라 하고, 새로 넘나드는 길목을 '중고개(僧峙)'라 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보면 '구중고개'의 '구'를 '구(舊)'로 보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나 어떤 이는 '구중고개'의 '구중"은 한자 '九重'으로 보기도 한다. '구중(九重) 궁궐'이라는 표현에서도 보듯이 '구중(九重)'은 어떤 대상이 겹겹이 이어진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이므로 고개가 몇 겹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 '구중고개'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자의 의미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자연 지명은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의 순수한 우리말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전해져 온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우선 중고개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고개란 산을 넘는 길을 의미하므로 고개와 산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을 넘는 고개'라는 의미로 '잣고개'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높고 낮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마을 주변에 높고 낮은 고개가 있게 마련이므로 이 고개를 가리키는 말인 '잣고개'가 일반명사로 흔히 사용됐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잣고개'가 그대로 전해지거나 '잣'을 '백(栢)'으로 표기한 지명도 있지만, 많은 지명에서 '장고개'로 변이돼 '시장으로 가는 고개'의 의미로 지명 유래가 만들어졌다. 중고개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의 '중고개'를 비롯해 음성군 감곡면 월정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전북 남원시 보절면 신파리, 전남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대전 유성구 둔곡동,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전북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전북 정읍시 내장동,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경남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등지에 있다. 이와같이 '중고개'가 '장고개' 못지 않게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중이 넘어다니는 고개'라는 유래는 유사한 음으로 추측한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중고개'는 지형으로 보거나 지명 명명의 유연성으로 보아 '잣고개'에서 '장고개', '중고개'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