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광혜원면 실원리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두교리의 개좌리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광혜원 지역의 주민들이 이곳을 왕래하면서 '개자리'라 불러 왔는데 한번만 들어도 기억하기가 쉽고 '-자리'가 지형의 위치와 연관지어져서 다른 지역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지명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이 지역에서는 한자로 '개좌리(介坐里)'라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 너머에 '원터'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 이 원터로 부임해 가던 원님이 이곳에 쉬면서 이 땅을 보고 가히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했다 해서 마을 이름을 '가좌(可座)'라 불렀으며, 이 말이 변하여 '개좌'가 됐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조선 시대에 이곳이 충청도 관찰사가 사무를 인수 인계하는 곳이므로 자리를 바꾼다 하여 '개좌리(改座里)'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가좌 마을'이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좌리'는 '가좌리'에서 온 말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음성군 대소면 소석리의 '질개자리',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의 '개자리구렁'을 비롯해 경기도 파주시 신촌동의 '개자리' 들이 발음의 편의상 '가좌리'가 '개자리'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가좌리'의 지명 예는 충북의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좌리,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가좌리를 비롯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가좌리,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가좌리,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가좌리, 경북 문경시 산북면 가좌리,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가좌리,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북가좌동, 서울 은평구 가좌동, 경남 진주시 가좌동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가좌리라는 지명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대부분의 지명에서는 가재가 많았으므로 가재울이라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국의 지명에서 '가재울'을 찾아보면 진천군 덕산면의 신척리를 비롯해 충남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충남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충남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석포리,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상하가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마전리,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가재월리 등 많이 있는데 한결같이 '가재'라는 음을 따라서 가재와 연계시키고 있다.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의 가좌리(佳佐里)도 가재가 많이 있으므로 가재울, 가재골 또는 가좌곡(佳佐谷)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당리(書堂里), 거치리(巨致里)와 정암리(亭岩里), 양촌리(陽村里), 공수동(公須洞)의 각 일부를 병합해 가좌리(佳佐里)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옛날에는 골짜기마다 물이 흐르는 곳에는 가재가 있으므로 마을 지명의 유래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남이면 가좌리 인근에 있는 갈원리도 가지리(佳芝里)와 구미리(九尾里)를 병합해 지어진 이름이며 이곳 가지리 마을에 있는 가지뜰을 가재뜰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 '가재'의 어원을 산줄기의 '가지(갖)'로 추정해본다면 '가지울'이 될 것인데 '가재울'이 된 것은 지형의 형태로 보아 '가지(갖)'가 '산(재)'의 줄기이므로 '재'라는 지명 요소가 추가되어 '갖재울'이 되었을 것이다. 즉 산줄기의 한 작은 능선을 산이 갈라진 작은 가지로 보아 '갖(가지)+재(산)+울(마을)'을 그 어원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으며 '갖재울'은 '가재울'로 변이되고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가좌리(佳佐里)가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따라서 산에서 뻗어내린 작은 산 줄기의 부근에 있는 마을을 '갖재울'이라 불렀고, 골짜기마다 많이 있는 '가재'를 연상해 자연스럽게 '가재울'이 되었다. 또한 한자로 표가하려다 보니 '개좌리, 가좌리' 등으로 변이됐고, '개자리'는 한자로 표기된 '개좌리, 가좌리'가 쉬운 발음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칭송 받아온 우리 조상들은 효(孝)를 인간이 지켜야할 도리 중에서 으뜸으로 여겼다. 그래서 효자, 효녀, 효부를 기리는 기념비나 정각을 많이 세우다 보니 이에서 비롯되는 지명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청주시 남일면 효촌리는 본래 청주군 남일하면(南一下面)의 지역으로서 효자 경 연(慶延)이 그 부모에게 효를 다 하였으므로 효촌(孝村)이라 불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정리(松亭里), 도덕리(道德里), 대평리(大坪里) 일부를 병합해 효촌리라 해서 남일면에 편입됐다. 효촌 마을 뒤에 있는 모산(茅山)에 효자 경연(慶延)의 묘가 있고 효촌 마을 앞에는 효자 경연(慶延)의 정문인 경효자문(慶孝子門)이 있다. 이처럼 효와 연관돼 생긴 효촌이라는 지명은 전북 임실군 오봉리, 경남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등에도 있고, 전북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등에는 효자촌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와 같이 '효'를 지명 요소로 사용한 지명도 있지만, 효와 연관된 일화가 전해져 오는 지역도 많다. 특히 '효'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기에 전국적으로 다양한 미담과 설화가 퍼져 있다. 아픈 부모를 위해 시체의 목을 잘라 바쳤는데 알고 보니 산삼이었다는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과 거두리의 마을 유래를 비롯해 경남 거제시 연초면 효촌의 '한겨울에 숭어를 구해온 효자 이야기',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의 '호랑이도 감동시킨 효자 이야기', 전북 고창군 성송면 뱀내골의 '뱀 알로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린 달래 이야기', 전북 진안군 용담면 범바위의 '개고기가 먹고 싶다는 노모를 위해 호랑이로 둔갑해 개를 잡아 온 아들 이야기', 울산시 서부동 삼밭골의 '삼을 캐어 부모님의 병을 고친 오누이 이야기', 대전직할시 중구 문화동 꽃적마을의 '꽃적을 구워 시아버지를 공양했던 며느리 이야기' 등이 지명과 연관지어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이양골의 '잉어를 스스로 뛰쳐나오게 한 효자' 이야기일 것이다. 충북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권국화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본관이 안동으로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어느 해 권국화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웠다. 이에 아들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아들이 수소문한 끝에 장호원에 명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밤중이었지만 마음이 급했던 권국화는 장호원에 가기 위해 고개를 넘었다. 그런데 커다란 호랑이가 고갯마루에 앉아있었다. 권국화는 죽었구나 싶었는데, 잘 보니 호랑이가 등을 권국화 쪽으로 내미는 것 같았다. 그는 호랑이가 자신에게 타라고 하는 건가 싶어 갸우뚱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호랑이 등에 올랐다. 그랬더니 호랑이는 순식간에 50리 길을 달려가 장호원 약방 앞에 권국화를 내려줬다. 권국화가 약을 지어 나오자 호랑이는 또다시 나타나 등을 내밀었다. 권국화를 태운 호랑이는 집 앞까지 빠르게 달려 내려주었고, 사 온 약을 달여 드시게 했더니 아버지의 병이 금방 나았다. 그 후 아버지가 다시 병석에 누우셨는데 잉어회가 먹고 싶다고 했다. 권국화는 마을 옆 성미저수지로 가서 얼음판에 무릎을 꿇고 하늘에 정성껏 기도를 드렸더니 무릎 체온이 얼음을 녹여 구멍이 뚫렸다. 그러더니 뚫린 구멍으로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얼음판 위로 솟구쳐 뛰쳐나왔다. 그 잉어를 잡아다 회를 떠서 아버님께 드렸더니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 그를 태우고 장호원 약방까지 왕복해 준 호랑이가 밤마다 움막 앞에 나타나 권국화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권국화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칭찬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권국화가 잉어를 잡았던 성미저수지가 있는 들판을 잉어가 올라온 곳이라 해 이양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효와 관련된 유래가 전해지는 지명은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애향심을 북돋워주는 자랑스러운 지명인 것이다.
청주의 상당산성에서 낭성으로 가다보면 현암리, 무성리, 지산리를 지나 낭성에 이르게 된다. 낭성면 갈산리는 지나는 길목이 아니고 현암리에서 일부러 찾아들어가야 하기에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나 것대산에서 상당산성, 구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갈산리에서 합쳐져서 감천을 이루게 되므로 산촌이면서 들판도 이루어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은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이름이 났으며 조선 3대 명수의 으뜸이 바로 달천수였다고 하니 달천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충북 지역의 사람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다. 이 달천강의 발원지가 속리산 천왕봉이라고 하지만 청주의 감천도 지류로서의 또 다른 발원지임에 틀림이 없다. 갈산리에는 말구리고개, 절골, 안골, 새치발골, 산소골, 달기밭골, 아낭골, 돈돌백이골, 둔버골, 사주뱅이들, 돼지미등이, 둔막골, 방아다리들, 잿밭 등 순수한 우리말로 이루어진 자연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어 물 좋고 산 좋은 청정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갈산리라는 지명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산에 칡이 많아서 갈미, 갈산(葛山)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마을 동쪽에 우뚝 솟은 가래산(해발 543.2m)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갈미, 갈산(葛山)'과 '가래산'은 결국 같은 말인데 어느 말이 먼저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지형에서 산줄기나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게 되므로 지명에서는 '가래, 갈'이 '가르다'의 어근으로서 '여러 갈래로 가르다, 갈라지다'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가래산의 위성사진을 보면 산의 지형이 유난히 여러 갈래로 갈라진 모습을 볼 수가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가래산이라고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미원면 대신리의 '갈매봉(해발 512.2m)'도 원형은 '갈미봉'이므로 역시 산줄기가 갈라지는 봉우리의 의미를 지닌 지명인 것이다. 전국의 지명에서 '갈미, 갈산, 가래산'을 찾아보면 충남 서산시 갈산동, 충남 홍성군 갈산면, 경기 이천시 갈산동,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인천 부평구 갈산동, 전북 익산시 갈산동, 대구 달서구 갈산동을 비롯하여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의 갈미들, 충남 아산시 음봉면의 갈미,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신갈리의 갈미, 충남 예산군 광시면 동산리의 갈미들,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갈미, 경기 하남시 감북동의 갈미, 경북 청송군 부남면 하속리의 갈미, 전북 남원시 아영면 의지리의 갈미들, 전북 남원시 대산면 수덕리의 갈미산, 전북 남원시 화정동의 갈미산골, 대구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의 갈미들,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당리의 가래산,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의 가래산, 경북 문경시 가은읍 죽문리의 가래산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난다. '가르, 가라, 갈'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변이가 이루어진다. '가르, 가라, 갈'이 '갈라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은 '가지'의 의미를 가진 '지(枝)'로 표기하였고, 그 의미를 모른 채 한자로 표기한 지역은 어느 산에나 흔하게 있는 칡으로 해석하여 '갈(葛)'로 표기하거나 '가래'를 가래나무로 해석하여 '추(楸)'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의 '가래실'은 한자로 '지내곡(枝內谷)'으로 표기하여 '가래실'로 읽을 수 있도록 조음소 '내(內)'를 첨부하였지만 '갈미'의 원형은 '가래잣'이므로 '가래잣'이 '가래정'으로 불리다 보니 '가래나무 정자'의 의미로 해석하여 '추정(楸亭)으로 표기한 지명도 많이 나타난다.
단양군 대강면에는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올산(兀山)'이라는 곳이 있다. 소백산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 줄기가 도솔봉을 지나 황장산이 이르기 전에 해발 1천100m의 시루봉이 있고 그 시루봉에서 북쪽으로 원통암 계곡과 남조천을 가르며 그 사이에 솟은 산봉우리가 이름 그대로 우뚝하게 솟은 올산이다. 온통 바위로 이뤄져 있어서 다채로운 모양의 바위가 비경을 이루기도 하지만 조망이 일품인 암산이 바로 올산인 것이다. 첩첩산중에 있어 감히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곳으로서 단양에서 가장 깊은 산골짜기 마을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산행을 즐기는 등산 애호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단양의 사계절 관광휴양지로 개발을 시작하는 등 급속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해발 858m의 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올산은 소유올산(所由兀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소백산과 올산의 형세를 표기하고 그 사이에 죽령을 표기함으로써 오래 전부터 중요한 위치로 인식되어 온 산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올산리는 군의 남쪽 30리에 있으며 올산리 마을 북쪽에 올산이라는 산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오랜 옛날부터 '올산리'라는 마을에 주민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올(兀)'을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우뚝하다, 높고 위가 평평하다, 민둥산이 되다, 머리가 벗어지다' 등의 의미를 지닌 글자이며 사람의 머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명에서 '올'이 지명 요소로 쓰인 지명은 찾기가 드물지만 변이형인 '울, 을, 월'이 쓰인 지명은 각 지역에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울'이 쓰인 대표적인 지명으로 경상도에 위치한 '울산'과 강원도의 설악산의 유명한 '울산바위'를 들 수가 있는데 두 지명 간에 얽힌 재미있는 유래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옛날에 금강산 산신령이 금강산을 천하제일로 만들기 위해 전국에 있는 명산에서 1만 2천개의 봉우리를 선착순으로 초청을 했다. 울산에 있는 바위가 이 소식을 듣고 금강산에 가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가 금강산까지 가지 못하고 설악산에 머물게 되어 울산바위라고 불리게 됐는데 울산 원님이 이를 알고는 설악산 신흥사 주지 스님에게 세금을 받아가려 하자 신흥사 동자승의 기지로 세금을 내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울산바위가 실제로 울산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이름이 같아서 이러한 유래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울산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당연히 울산광역시의 울산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울(蔚)'자가 울산광역시의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선사시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과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에 걸쳐 당시 소국인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두의 표기법에 의해 울산으로 불리게 된다. 흔히 이두에서는 '시(尸)'를 'ㄹ'의 표기로 사용했으므로 '우(于)+ㄹ+산'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울뫼나라, 울산국' 정도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울'은 우리말의 옛말에서 울타리, 혹은 성(城)을 의미한다. 따라서 울뫼나라는 '성으로 둘러싸인 나라'나 '산이 성처럼 둘러싸인 나라'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울뫼'가 '울산'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울'을 한자어로 표기하기 위해 무성하다는 의미의 '울(蔚)'자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의 '울미', 충남 태안군 남면 거아도리의 '을미, 을미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수도동의 '을미도',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의 '을미',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의 '을미골' 경북 울진군 근남면 진북리의 '을미골' 인천시 중구 북성동의 '월미도' 등에서 보면 '울'과 '울'의 변이형인 '을, 월' 등이 공통적으로 '미(山)'의 앞에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울'은 산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지형의 형세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단양의 '올산'에서 '올'은 '울'에서 변이된 것으로서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나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울산'과 어원을 같이 하는 말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청주 상당산성이 위치한 상당산의 골짜기들과 산성 안에 있는 방죽으로부터 시작된 물은 감천이라는 큰 하천을 이뤄 미원천을 이루고 청천, 괴산의 들판을 적시며 충주의 달래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청주의 무심천이 금강수계라면 상당산성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한강수계인 것이니 같은 청주시라도 수계로 보면 낭성과 미원은 청주권이 아니라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당산에서 흘러온 감천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이목리에서 낭성면의 면소재지인 벌말(坪村)과 미루봉(丁峰) 마을을 양쪽으로 갈라놓는다. 선두산과 국수봉의 골짜기에 만들어진 작은 벌판에 작은 하천이 흐르니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됐다. 이름하여 미루봉(丁峰)이다. 뒷산의 모양이 고무래 같다고 해 '고무래 정(丁)'자를 써서 '정봉(丁峰)'이라 했다고 전해지지만 지명의 유래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미루'라는 지명 요소가 쓰인 곳을 찾아보니 충주시 호암동의 '미루산',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내태리의 '미루골', 경남 진주시 사봉면 방촌리의 '미루골'이 있는데 그 유래가 분명하게 전해지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명에 쓰인 '미루'의 의미는 무엇일까? '미루'라고 하면 먼저 '미루나무'가 생각나고 판문점의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를 벌목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도끼로 죽인 사건으로 이로 인해 온 국민이 '미루나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미루나무는 어린 시절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가에 양쪽으로 서 있던 가로수, 홀쭉하게 키가 커서 멀리서도 신작로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었던 추억의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나무가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나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차량 통행을 위한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가로수로 심기 위해 속성수인 미루나무 종자를 외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생각된다. 미루나무는 속명이 'Populus'인데 라틴어의 '인민(人民)'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바로 영어의 'people'의 어원이고 '민중, 대중'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포플러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들여온 버드나무라고 해서 미류(美柳)나무라고 했는데 '미루나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말의 '미루'라는 말은 지금은 잘 쓰이고 있지 않지만 국어사전에 보면 '밋밋하게 널리 펼쳐져 있는 들이나 벌판 또는 등판'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 왔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미루봉이란 산봉우리가 뽀족하지 않고 밋밋하게 넓게 퍼져 있는 모양의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밋밋하게 널리 퍼져 있는 들판에 있는 마을을 '미루골'이라 했던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이목리의 미루봉은 넓게 퍼져 있는 들판이 산줄기에 위치해 주변의 하천보다 높으므로 미루봉이라 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미루봉 마을에서 흘러오는 작은 하천이 있어 감천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 작은 하천의 상류로 따라 올라가면 '대월골'이라는 자연지명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대월'이란 무슨 의미일까? 미루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대월이'라고 하고 '대월이'에서 가덕면 한계리 한시울로 가는 고개를 대월고개라 하며 미루봉 북쪽의 방아다리라는 골짜기 위쪽의 긴 골짜기를 진대월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월'은 길고 짧다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지형임을 알 수가 있다. 결정적인 단서는 '말새끼난골' 남서쪽에 있는 '논다랭이골'에서 찾을 수가 있다. '다랭이'란 '물이 괴어 있도록 논의 가장자리를 흙으로 둘러막은 작고 얕은 논두렁'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큰 다랭이'를 한자로 '대월(大月)'이라 표기했지만 '큰 다랭이'의 '이' 음을 살리기 위하여 '대월이'라고 불러 왔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대월'은 '길고 큰 다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자연지명에 '대월'의 원래의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지명의 원래 의미를 찾아보면 그곳의 지형을 알 수가 있고 처음에 지명을 명명했던 조상들의 생활 모습과 지명 명명 의도까지도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에는 '전하울'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호정골과 병합하고 호정리라 해 낭성면에 편입됐다. 자연 지명으로는 '저나울'이라 하며 한자로는 '전하리(全夏里)'라 표기하고 있는데 음만 표기한 것이어서 마을의 유래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마을 뒤에 있는 대항산에는 예전에 낭성면 추정리와 왕래하기 위한 '저나울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저나울'이라는 자연지명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저나울'은 고유어로 이루어진 말일 것이므로 이곳 지형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말로서 유사한 음의 변이를 추정해 봐야 할 것이다. '저'라는 지명요소는 주로 '산'을 뜻하는 '잣'의 변이형이 지명에 많이 쓰이고 있고 이곳 지형이 대항산과 국수봉이라는 산의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하므로 '저'를 '잣'의 변이형으로 보는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산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잣골'이라는 지명이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의 '잣골'을 비롯해 충남 공주시 이인면 용성리,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흥리, 충남 아산시 선장면 선창리, 경북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 충남 홍성군 서부면 중리,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 경북 영주시 안정면 봉암리 등에 있다. '잣골'이 '젓골'로 변이된 지명은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젓골'을 비롯해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충남 서천군 기산면 산정리,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후포리, 경북 청송군 파천면 황목리, 전남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잣골'이나 '젓골'처럼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지명보다는 '절골'로 변이된 지명이 충북에서만 찾아봐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를 비롯해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덕리,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 보은군 회인면 용곡리,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보은군 회남면 산수리,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 등 너무나 많이 보이며 '절골'을 한자로 '사리(寺里), 사동(寺洞)'으로 표기한 지역도 많다. 옛날에 이 지역에 절이 있었다는 유래가 주민들에게 전해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들의 지형을 보면 절이 들어설 만한 지형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고 또 이렇게 산골짜기마다 많은 절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글자에 얽매여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 실제로 절이 있거나 과거에 절이 있었던 지역이라서 '절골'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곳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잣골'이나 '젓골'에서 '절골'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지형으로 보거나, 절터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저나울'에 '잣, 젓'이라는 지명요소가 들어 있다면 '젓아울→전아울'의 변이 과정을 재구해 볼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 '아'라는 음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을까?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문리의 '자난골'은 '잣안골→잔안골→자난골'로 보아 '산의 안쪽 고을'이라는 의미로 보이며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의 '정안골'도 '잣안골→정안골'에서 '잣'이 '정'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북 상주시 이안면 구미리의 '자나동'은 '잣아래동→잔알동→자날동→자나동'으로서 '아'가 '아래'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저나울' 마을의 위쪽에 위치하는, 국수봉 아래의 높은 지대에는 '절골'이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절골'의 원형이 '잣골'이기에 저나울이란 '잣아래골→잔아울→저나울'의 변이과정으로 보아 '산(잣)의 아래에 있는 고을' 이라는 의미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윗절골, 아랫절골'이라는 지명과 '윗저나울, 아랫저나울' 이라는 지명이 쓰이고 있으므로 '산이라는 지형지물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지명요소로 이루어진 '잣아래골(산 아래 마을)'을 이 지역의 지명의 뿌리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지 않을까?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호정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의 지역으로서 호연정(浩然亭)이 있으므로 '호연동(浩然洞)' 또는 '호정골'이라 부르다가 줄여서 '호동(浩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호정이란 지명에 대한 유래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이 이곳의 승경에 매료되어 초가집을 짓고 이 지역에 은거하였다. 어느날 동쪽 봉우리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니 마을이 흡사 배 모양을 한 행주형(行舟形)임을 발견하고 장차 이곳에 큰 수해가 있어 마을이 크게 훼손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급히 산에서 내려와 남산에 돛대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어놓고 배를 묶어놓는 닻돌을 마련하였다. 그런 후에 다시 산에 올라가 사방을 살피고 나서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네 개의 산의 이름을 지었는데 동쪽의 봉우리는 용마산(龍馬山), 북쪽 봉우리는 매봉산, 남쪽 산은 대왕산, 서쪽 산은 선도산(仙到山)이라 하고 북쪽과 동쪽 사이의 낮은 산은 치복산(雉伏山), 그 사이에 있는 계곡을 사냥골이라 한 후 이 산들을 돌면서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륜이 정양을 하고 있던 마을을 하륜의 호를 따서 '호정(浩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개국 공신인 하륜과 연계하거나 호연정이 있어서 '호정골'로 불렀다는 유래는 유사한 어휘와 연관지은 것이어서 지명의 어원으로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므로 '호정골'은 고유어로 이루어진 자연지명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호정골이라는 지명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의 호정골을 비롯하여 경남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에서 찾을 수 있지만 '호장골'은 충주시 노은면 대덕리의 '호장골'을 비롯하여 경기도 이천시 증일동,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마치리, 경북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대곡리,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만석리, 전남 나주시 다시면 송촌리 등 많은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호정골'은 '호장골'에서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호장골, 호정골'을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로 본다면 '장, 정'은 '잣(산)'에서 변이된 말일 것이다. '잣'은 '산'의 옛말로서 지명요소로 많이 쓰여왔다. 지명에서 '잣'은 '작, 적, 장, 정, 자, 재' 등으로 변이되어 쓰인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리와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의 '호자골'의 예를 보더라도 '호장골, 호정골'은 '호잣골'에서 온 말임이 분명하다고 히겠다. 그렇다면 '호정골'의 '호는 무슨 의미일까· 지명에서 '호'가 지명요소로 쓰인 예를 보면, 경기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은 이 지역에 호랑이가 많이 나타났던 지역이므로 호계(虎溪)라고 불렀다고 하며, 울산광역시 북구의 호계동(虎溪洞)은 마을 동쪽에 호랑이 모양을 한 봉우리가 있어 호곡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옛날 이곳에 홈이 있었다하여 '홈골, 홍골, 호곡'이라도 불러왔다는 것으로 보아 '호'는 '호랑이'를 의미한다고 하기보다는 '홈'이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 지명의 예에서 보면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의 '홈골'을 비롯하여 대전시 유성구 반석동, 경북 상주시 화남면 중눌리, 경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경북 문경시 마성면 외어리 등에 '홈골'이 있는데 글자 그대로 '홈'처럼 파여 있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그런데 '홈골'은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홍골'로 변이된 곳이 많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문박리의 '홍골'을 비롯하여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 괴산군 문광면 흑석리, 보은군 마로면 한중리 등의 '홍골'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개의 지형을 보면 양쪽이 높고, 길은 낮아서 '홈'의 모양으로 이루어진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삼동리의 홈재(胡山)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홍재동),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의 홍현(紅峴),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의 호현(狐峴),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의 홍고개 등의 원형은 '홈고개'로 추정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호정골의 변이 과정은 '홈잣골→홈장골→호장골→호정골'로 재구해 볼 수가 있으며 '홈 모양으로 깊게 파인 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지산리에 '태봉산'이 있고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는 '태봉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태봉'이라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가 '태봉(胎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 지명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의 '태봉'을 비롯하여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경북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 경북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전북 정읍시 상평동 등에 '태봉'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태봉산'이라는 지명도 충남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남관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무학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경기도 화성시 송동,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에 '태봉산'이란 지명이 있다. 이와같이 '태봉'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나 '태봉산'은 주로 경기도에 있고 충청권에 일부 있는 것으로 보아 '태봉(胎封)'과 '태봉(胎峯)', '태봉산(胎峰山)'은 의미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태봉의 성격을 알아야 구분이 될 것이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한다. 처음 태실을 정해 태를 봉안할 때는 태실에 대한 장식이 호화롭지 않으나, 왕으로 즉위하는 해에 태봉으로 봉해지게 되는데 태봉은 태실 내부와 외부의 장식이 달라진다. 태실을 태봉으로 가봉하면 태실의 내부와 주위에 석물(石物)을 추가로 시설하는데, 그 절차가 매우 장엄하였다고 한다. 특히 태봉의 부근에 있는 관할 관서에서는 매년 춘추로 태봉을 순행해 도벌, 태실의 손괴, 천재지변 등 태봉에 영향이 미치는 일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해야 하며 태봉에는 태실을 중심으로 사방 300보(540m) 안에는 경지를 개간하는 행위를 금하며, 만약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면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역대 왕의 태봉이 있는 고을에는 그 자격이 승격되고 필역 후에는 유공자에게 상사가 행해졌으므로 이러한 고을을 '태봉'이라 부르게 되고 '태봉'이 있는 산을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꼭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충북에는 3개의 국왕 태실이 존재하고 있다.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경종대왕태실이 있어 1975년 8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1688년(경종 14) 10월 22일에 후궁인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몸에서 숙종의 첫 왕자로 태어나 왕실의 예에 따라 이곳에 태항아리를 묻었다. 후에 왕으로 즉위한 경종은 관례에 따라 그의 태실을 석물로 가봉(加封)하여야 하나 재위 4년 중에 이를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였으므로 다음의 왕인 1756년(영조 2)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석물로 장식된 태실로서 격식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에 있는 순조 태실은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순조의 태실도 그가 왕위에 오른 후 1806년(순조 6)에 왕의 태실로서 석물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으며 이를 기념하여 보은현(報恩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청주시 낭성면 지산리에 있는 영조 태실은 영조의 출생 이듬해인 숙종 21년(1695년)에 조성됐다. 보통의 경우 왕자가 보위에 오르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격상시키고 주위 석물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영조의 태실은 즉위 후 5년이 지난 1729년에야 가봉됐다. 이유는 1728년의 무신란과 극심한 가뭄 때문이었으며 영조는 자신의 태봉을 매우 검소하게 조성할 것을 지시하여 규모가 다른 왕의 태봉보다 규모가 작다. 더우기 1928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 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었는데 청원군이 지난 1982년 를 바탕으로 석물을 복원했다. 이와 같이 '태봉(胎封)'의 의례와 관리가 엄중하매 태봉(胎封)이 위치한 산을 '태봉산(胎峰山)', 태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태봉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의 태실(충청북도기념물 제86호)이 선조 임금의 7번째 왕자인 인성군의 태실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을 태봉이라 부르는 등 왕으로 즉위하지 않은 왕손들이나 양반의 자손들의 태실이 있는 산도 '태실이 있는 봉우리'라는 의미로 '태봉(胎峰)이라 부르면서 의미의 혼란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에 이목리(梨木里)가 있다. 이목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의 지역으로서 배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배나무정이, 또는 이목정(梨木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목리(梨木里)라 해서 낭성면에 편입된 후, 1956년 8월10일 관정리에 위치한 낭성면사무소를 현위치로 이전함으로써 이목리(梨木里)는 낭성면의 면소재지로서 각종 행정기관이 들어서고 낭성면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배나무정자가 있어서 이목리(梨木里)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 사실일까? 배나무 정자라고 하는 것이 배나무로 만든 정자인지 아니면 배나무 밑에 있는 정자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배나무는 재목으로 사용되기가 어렵고, 그늘을 만들 정도로 가지나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아니어서 정자목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배나무 정자라는 말은 아마도 비슷한 음을 가진 다른 말이 배나무와 연관지어 변이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이 이곳의 승경에 매료되어 초가집을 짓고 한동안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륜이 동쪽 봉우리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니 마을이 흡사 배(船) 모양을 한 행주형(行舟形)임을 발견하고 장차 이곳에 큰 수해가 있어 마을이 크게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급히 산에서 내려와 남산에 돛대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어 놓고 이어 배를 묶어놓는 닻돌을 마련해 놓았다. 그런 후에 다시 산을 올라가 사방을 살피고 나서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네 개의 산세를 따라 각각 동쪽의 봉우리는 용마산(龍馬山), 북쪽의 봉우리는 매봉산(鷹峰山), 남쪽 산을 대왕산(大王山), 서쪽에 자리한 봉우리를 선도산(仙到山)이라 이름 지었다." 이 전설에 의하면 '배'는 '梨'가 아니라 '船'이니 원래 '배(梨)'와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으며 '배나무정자'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사한 음을 잘못 해석하여 변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전국의 지명에서 이목리(梨木里)를 찾아보니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의 이목리를 비롯하여 전남 신안군 팔금면, 전남 여수시 화양면, 경북 문경시 영순면, 경남 거제시 연초면, 경남 의령군 용덕면,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전남 완도군 노화읍 등에 이목리가 있는데 한자로는 한결같이 '梨木里'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의 '이목정리'처럼 '정'이 붙어 쓰이는 지명이 있는데 자연지명에서 '배나무'에서 '정'이 붙어 쓰이는 지명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의 '배나무정'을 비롯하여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리, 경북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 강원도 금강군 금강읍, 강원도 세포군 이목리,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이목정리 등 각지에 보인다. 배나무정은 '배나무+정'이기에 배나무(梨木)와 정자(亭子)를 떠올리게 되고 한자로 '이목정(梨木亭)'이라 표기하게 되는 것은 많은 지명이 한결같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자연스럽다기보다 당연한 현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지명에서 '배나무정'의 원형은 '배나무징이'이므로 '징'이 '정자'가 아니고 다른 말에서 변이된 것이라면 '-징이'가 지명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금거리의 '살구징이들', 가덕면 병암리의 '병풍징이', 남일면 가산리의 '살구징이(행정)', 남일면 은행리의 '으능징이(은행정)',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엄나무정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은행정이', 경남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의 '배나무징이, 대징이, 참나무징이'등의 지명예에서 보면 '-징이'란 '어떤 사물이 있는 장소'의 의미로서 주로' 나무가 심어져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에 자연스럽게 '정자'로 생각하여 한자로 '정(亭)'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의 이목리에는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배나무징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것은 사실이다. 이 마을이 경관이 좋아서 정자를 세우고 보니 정자의 이름은 당연히 이목정(梨木亭)이라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여튼 이목리가 이목정이 있었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배나무도 심고 정자(梨木亭)도 세워서 뿌리와 전통이 있는 마을로 만들어 봄이 어떨까?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성대리에 있는 낭성산성은 낭성산 위에 있다. 이 낭성 산성으로부터 '낭성산, 낭성리, 낭성면'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낭성'이 청주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낭성산 밑에 자연 지명으로 '테미, 퇴미, 탯말' 등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 '대산(垈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퇴미'란 '성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므로 테뫼식 산성인 낭성산성과 연관이 있는 지명이라 하겠다. 그런데 '낭성'의 '낭'은 어떤 의미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일까? 낭성의 어원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학계에서 낭성산성이나 낭비성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이름의 성이 여러 곳에 많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낭'은 산성의 위치나 형태 등, 산성과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낭성산성이나 낭비성들은 한결같이 '낭자곡성'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낭자곡성(狼子谷城 - 벼랑이 있는 산골짜기에 있는 성)'이 일반 명사로서 성을 두루 지칭할 수 있는 말일 것이며 여기에 공통적으로 쓰인 '낭'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테뫼식 산성에 대하여 알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산성은 형태에 따라 포곡식 산성과 테뫼식 산성으로 구분된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성안에 끼고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규모가 큰 형태이고 테뫼식 산성은 산정상부를 둘러싸고 성벽을 두른 것으로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하며 규모가 작아서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청주의 낭성산성과 낭비성은 테뫼식 산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산 정상 주변의 절벽을 이용하여 띠(테)를 두르듯이 성을 축조함으로써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구조라면 '테뫼식 산성'이라는 말이 금방 이해가 되며 절벽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벼랑에 세운 성'이라 표현한다면 '낭'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벼랑이라는 지형과 관련된 지명은 엄청나게 많다. '벼랑'이 지명에서 변이되어 '바랑골(벼랑골), 발왕산, 바랑미, 발산, 바람골, 벼락바위, 바리골, 족지곡(足芝谷), 파랑리, 비알산, 비하리, 낭골'로 심지어는 '비렁뱅이들'이라는 지명까지 생겨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벼랑골'은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높은벼랑골'을 비롯하여 전북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 경북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경북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 경북 안동시 길안면 송사리, 경북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경남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의 '벼랑골', 경남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의 '아랫벼랑골' 등이 있다. '벼랑'이 '랑'으로 줄어서 지명으로 만들어진 예를 충북 지역에서 찾아보면 괴산군 청천면 대티리의 '낭골'을 비롯하여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충주시 앙성면 영죽리, 단양군 대강면 직티리 등에 '낭골'이 있으며 전국의 지명에서는 각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낭'은 '벼랑'이 줄어진 말로서 지명에 두루 쓰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벼랑에 축조되는 성을 당연히 '낭성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낭성'은 산성 중에서 벼랑에 축조된 성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서 충북 청주의 '낭성'은 일반 명사가 지명으로 정착한 예라고 하겠다. 청주대학교는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 자락에 있다. 그러므로 이 학교의 교가에는 당연히 우암산의 우뚝 솟은 정기를 이어받는다는 내용의 가사가 있거나 아니면 우암산의 뒤를 받치고 있는 큰 산줄기인 상당산 또는 상령산(上嶺山)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일 터인데 1947년에 지어진 청주대학교의 교가에는 학교 뒤에 위치한 산을 낭성산이라 하였다. 최근까지도 '낭성'이라는 말이 '벼랑에 있는 성'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였던 것이라면 청주대학교의 옛 교가 가사에 나오는 낭성산은 상당산성이 있는 상령산 산줄기의 우암산을 낭성산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낭성의 어원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백두대간 정맥인 한남금북정맥에 있는 분젓치는 증평군과 청주시의 경계인 증평읍 율리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곳에 생태 터널을 만들어 생태축을 복원함으로써 '율티'라고 알고 있던 고개가 '분젓치'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생태터널은 야생동식물의 서식지가 단절되거나 훼손 또는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동식물의 이동을 돕기 위하여 만드는 것으로 분젓치에 길이 68.13m 폭 9.5m의 생태터널을 만들어 도로개설로 단절된 산림 지형을 되살렸으며 터널 상부로 이어지는 등산로(180m)를 새로 조성하여, 방문객이 전망대까지 편하게 이용하도록 했다. 너무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분젓치라는 지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타임머신을 타고 천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옛날에는 증평에서 오다보면 삼기 저수지 상류에 청천과 미원 방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었는데 이 갈림길은 옛날에는 당연히 방아다리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방아다리라는 말은 지명이 아니라 방아다리 모양으로 세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가리키는 말로 흔하게 쓰이던 말이었기에 지명으로 정착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사용되었다. 지금 쓰이는 말로 하면 '삼거리'라는 말과 비슷하다. 우리가 쓰고 있는 '삼거리'라는 말은 '삼(三)+거리(갈라지다)'로 이루어진 말로서 한자와 고유어가 합쳐진 것이다. 지금도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라고 할 때 '거리'는 '거리(街)'가 아니라 '갈라지다'라는 의미의 고유어이기에 옛날의 의미가 그대로 이어져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삼거리(세갈래길)일 경우에는 '방아다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곳의 지명을 한자로 '삼기리(三岐里)'라 표기하고 '삼거리'라 읽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분티 고개 너머에 방앗간이 있어서 솟점말, 밤티, 삼기 등 세 마을 사람들이 방아를 찧으러 넘어 다닌 길이라고 하며 이 갈림길 바로 위의 골짜기를 지금도 방아다리골이라 부르고 있다. 무거운 쌀가마니를 지게로 지고 날라야 하는 험한 고개 위의 산속에 방앗간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이곳의 옛 지명이 방아다리였다는 확실한 증거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고개 이름도 예전에는 방아고개(방고개, 밤고개, 밤티)라 불렀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분젓치라는 지명은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가 없으나 분티재라고도 불리고 있으므로 분티마을이란 이름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젓'이라는 지명 요소는 일반적으로 '잣(산)'에서 온 것이므로 분티(분고개)가 있는 산을 '분젓'이라 하면서 다시 분젓(분잣)에 있는 고개를 '분젓치'라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와같이 '분티, 분고개'라는 지명이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분'은 어떤 의미일까· '고개'를 수식하는 말이므로 고개의 지형적 특성이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경남 밀양군 하남읍 귀명리에 분티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분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 산능선을 밤팅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밤나무 숲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주위에 고분군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분터골, 분티골이라 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한자로는 '율림등(栗林嶝)'이라 표기하여 '밤나무 숲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고. 분티골이 있는 산을 '사등산(蛇嶝山)'이라하여 '뱀고개산'의 의미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밤고개→방고개→분고개'의 변이 과정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밤고개와 방고개의 지명 예는 전국의 지명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는데, 좌구산 천문대가 있는 고개의 이름도 밤고개이며 이 '밤고개' 아래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율티리(栗峙里)'라 표기한 것으로 보아 '분'은 '밤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두 고개가 모두 밤고개(방고개)이므로 미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차별화를 위하여 '젓(잣)'을 덧붙여 '분젓치'가 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의 지형의 특성과 전해지는 자연지명들로 보아 '방아고개(방아다리고개)→방고개→반고개→분고개'의 변이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분젓치'는 '방아산 고개(세갈래길이 있는 산 고개)'의 의미로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낭성면의 이름은 낭성산성에서 온 것인데 오늘날 낭성산성이 미원면에 속해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낭성산성은 미원면 성대리에 있는 낭성산 정상에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낭성리와 평대리를 병합하여 성대리라 하여 낭성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89년에 낭성면 성대리를 미원면에 넘겨줌으로써 낭성은 뿌리를 잃은 꼴이 되고 말았으니 낭성면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낭성면은 조선 시대에는 상당산성 안쪽이 되므로 산내이하면(山內二下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의 일부, 산내일면((山內一面)이 일부, 남일상면(南一上面) 의 일부, 보은군 주성면의 평동 일부를 병합하여 낭성산성의 이름을 따서 낭성면이라 하였다. 낭성산성은 청주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산성으로 2015년 4월 17일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346m 산정(山頂)과 남사면에 걸쳐 석축(石築)의 내성(內城)과 토축(土築)의 외성(外城)을 이룬 테뫼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에 의하면 "진흥왕 12년(551) 3월에, 왕이 순수(巡守)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眞興王 十二年 三月王巡守 次娘城 聞 于勒 及其弟子 尼文 知音樂特喚之 王駐 河臨宮 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나오는 '낭성(娘城)'이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주목 군명(郡名)의 옛이름을 '상당(上黨), 낭비성(娘臂城), 서원경(西原京), 청주(靑洲), 낭성(琅城), 전절군(全節軍)'이라고 실려 있는데 '낭성(琅城)'의 음이 낭성(娘城)과 같고,《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낭성산성(琅城山城)은 낭성면(琅城面) 성대리(城坮里)의 낭성(琅城)이라 칭함'이라 기록되어 있어 하림궁이 청주시 미원면 낭성산성에 소재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의 충주(忠州) 연혁에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으로 후에 백제(百濟)가 소유하면서 별칭한 낭자곡성(狼子谷城)은 일설에는 낭자성(娘子城), 일설에는 미을성(未乙省)이라 한다. '라는 구절이 있어 학자들은 낭자성의 위치를 남한강 유역으로 보기도 한다. 하여튼 낭성산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쟁탈하던 시기였으며, 신라는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보은 벌판에서 남부여군을 몰아내고 고구려군의 근거지인 남한강 상류 지류인 달천 유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달천 상류인 청원군 미원면 성대리 퇴미 마을 뒷산인 해발 346.4m의 산정과 남사면에 걸쳐 석축한 내성과 토루의 외곽을 이룬 테뫼식 산성이 바로 낭성산성이다. 이로써 신라군은 낭성산성을 토대로 구녀산의 구녀산성과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 은성마을 뒷산으로 추정되는 낭비성까지 구축함으로써 금강 상류 유역인 미호천의 지류까지 진출한 것이다. 신라의 낭성산성 구축은 고대 삼국 전쟁의 역사상 그 의미가 자못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산성은 위치상으로 청주-미원-보은(報恩) 통로의 요충지인 동시에 미원에서 북으로 구라산성(謳羅山城)을 넘는 옛길과 북서쪽으로 상당산성(上黨山城), 동쪽으로는 청천-괴산(靑川-槐山)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삼국시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낭비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지역' 또는 '충주 지역' 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청주의 상당산성을 가리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 지역에도 낭비성이라 부르는 성이 존재했었을 수도 있지만 청주를 옛날에 '낭비성'이라 부르게 된 근거가 되는 낭비성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부연리의 야산에 있는 석축 테뫼식 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낭성산성과 낭비성이 비록 위치는 다르다 하더라도 모두 청주의 옛 지명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성이었으며 공통적으로 낭자곡성이라고도 불린다는 점에서 언어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겠다.
청주의 안덕벌은 밤고개라는 지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밤고개'는 '방고개, 반고개, 구명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어느 이름이 원래의 이름인지 알기가 어려우며 그 위치도 내덕7거리가 아니라 내덕동 천주교 정문 소공원이 원래의 위치이므로 1995년에 내덕7거리에 세운 밤고개 유래비는 원래의 위치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밤고개'란 글자 그대로 밤나무가 많아서 생긴 말이라고 하며 발음하기에 따라서 '방고개, 반고개'로도 발음하게 된다. 호랑이가 지나가다 방귀를 뀌어 '방고개'라고 했다는 설은 언어 유희로 재미있게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지명의 유래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하지만 '밤고개'와 '구명고개'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조원의(趙元宜)라는 유생이 임금에게 보낸 과격한 상소 때문에 보은 회인으로 귀양보내졌는데, 임금은 금부도사에게 도착 즉시 유생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청주 북쪽의 율봉원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조원의는 이곳에서 하룻밤 쉬어 가자고 간청했으나 금부도사는 빨리 유배지에 도착하여 왕명을 시행하고 돌아갈 생각에 이를 거절하고 출발을 재촉했다. 이때 원에서 잡일을 하던 역졸 하나가 밤을 한 바구니 삶아 와서 시장할 테니 요기나 하고 떠나라고 했다. 일행은 다시 앉아서 밤을 먹기 시작했는데 밤 맛이 너무나 좋았다. 그들이 한결같이 밤 맛이 특출하게 좋다고 칭찬하자 그 역졸은 밤의 유래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옛날 박서린(朴瑞麟)이란 사람이 남쪽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밤 하나를 찰방(察訪)에게 주면서 '이 밤을 심어 그 밤나무의 꽃이 필 무렵이면 내가 귀양에서 돌아올 것이오.' 하고 떠났다. 그 후 찰방이 밤알을 심어 싹이 터서 자라 첫 밤꽃이 필 무렵 박서린이 과연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찰방은 크게 반가워해서 이곳에 그 밤나무를 번식시켜 해마다 많은 밤을 수확하고 있었다. 밤 맛이 너무나 유명해서 한양으로의 진상 품목에 오르게까지 되었다. 조원의 일행은 역졸로부터 이와 같은 내력을 들으면서 밤을 먹다가 그만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귀양지를 향해 율봉원을 떠나 고분터(高隱里)에 이르러 주막에 들러 쉬면서 막걸리 한잔을 먹고 있을 때 파발마가 달려와 어명을 전했다. 조원의의 귀양을 풀고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율봉원의 역졸이 밤을 가져다 주지 않았더라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지 않았을 것이고, 사면을 받기 전에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구명고개(救命峙)'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분터는 지금의 고은 사거리 인근의 마을을 가리키는데 청주에서 문의와 보은으로 갈라지는 주요 교통로였다. 이곳에 주막(막걸리집)을 차리고, 목숨을 건진 막걸리 한잔의 의미를 되살린다면 장사도 잘 되고 비록 전설이지만 청주의 역사적 발자취를 보존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여튼 주민들 중에는 '밤고개'가 아니고 '반고개'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옛날 청주읍 북문앞 방아다리에서 위방고개까지 가려면, 아랫방고개(청주대앞)가 딱 반이 되므로 반고개라 했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 방고개가 되었다는 설과 큰 고개 아닌 얕은 고개라 해서 반고개라는 설도 있어서 한자로 표기하면 '율현(栗峴)'이 아니라 '반현(半峴)'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개 이름이 '밤고개'인가 아니면 '반고개'인가 하는 문제는 2008년에 두 학자간에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청주시는 주민들에게 결정권을 주겠다고 밝힌 바가 있다. '밤고개'를 주장하는 학자는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문제의 '밤고개' 지명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이 고개와 관련된 명칭은 현재 일제강점기 문헌을 통해서야 확인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일제시대 군사용 지도와 1914년 일제강점 이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 1912년 조선총독부가 낸 , 1917년 등에 모두 '밤고개'를 한자화한 '율현(栗峴)'지명이 기록돼 있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일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수천년 우리 조상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자연 지명을 인정하지 않고 간과했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안덕벌이 충북의 산업 중심지에서 문화 중심지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면 안덕벌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내덕동(內德洞)이라는 지명의 변천 과정을 보면 본래 청주군 북주내면(北州內面)의 지역인데 덧벌 안쪽이 되므로 '안덧벌' 또는 한자로 '내덕평(內德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현리(栗峴里)'를 병햡하여 '내덕리(內德里)'라 해서 사주면(四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20년에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원래 안덕벌은 덕벌(덧벌)의 안쪽이라는 의미로서 한자로 내덕리(內德里)라 표기하였으며 이와 대응되는 '바깥덕벌' 역시 사주면 소속의 외덕리(外德里)로 존재했으며 동으로 승격되면서 우암동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과정을 볼 때 옛날에 안씨가 많이 살아서 안덕벌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수긍하기 어려우며, '안'이란 '안쪽(內)'을 의미하는 말임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덕벌'의 '벌'은 '들, 벌'을 의미하는 말인데 '덕'은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 '안덕벌'은 '안터벌'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그렇다면 '터'와 '덕'은 어떻게 다를까? 전국의 지명에 '터골, 텃골'이라 불리는 지명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보은군 수한면 오정리의 '터골'은 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집터가 있는 골짜기라 '터골'이라 불리워온다고 전해지며 보은읍 중초리의 '텃골'은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좋은 터가 많다 하여 '터골'로 불린다고 하는 등 모두가 집터나 마을 터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터'의 사전적 의미는 자리나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마을의 터나 집의 터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성읍 평곡리 약물재 동남쪽에 '터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 '기곡(基谷)' 으로 표기하고 '터가 좋은 마을'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터'의 의미인 '기(基)'는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글자일까? '기(基)'의 갑골문은 대나무 삼태기인 '기(其)'에 토석이 담긴 모양이다. 본의는 삼태기에 토석을 담아 담장을 쌓는 것이다(土 土石, 其 箕, 造字本義 用竹筐裝土築牆). 중국의 가장 오랜 자전(字典)인 에는 '기(基)는 담장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토(土)로 구성되고 기(其)는 소리'라고 했다. 따라서 '터'란 건축물을 짓거나 사물을 올려놓을 수 있는 높지 않은 땅의 의미로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낮은 언덕이나 인위적으로 흙이나 돌을 쌓아서 만든 낮은 언덕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므로 '터'는 '덕'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의 터골은 덕동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터'의 원형을 '덕'으로 보아 '덕'이 '터'로 음운변이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송읍 만수리의 덕골(德洞), 덕골 고개,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 덕골,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 덕골, 남이면 팔봉리 덕고개, 단양군 매포읍 상괴리 덕고개, 단양군 대강면 괴평리 덕고개, 보은군 삼승면 우진리의 덕고개 들은 터골의 옛이름을 간직해온 귀한 마을 이름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같이 지명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덕'의 뿌리는 무엇일까?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의 '토옥고개'는 '돗골고개'라고도 부르는데 '돗골'은 자연스럽게 '돋골, 돋은 골'로 해석이 된다. 땅이름은 주로 지형의 형태를 가지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지명으로서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덕'이 주로 '고개'의 앞에 붙어 쓰이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의 '토돈, 토둔(土屯)'은 '돋은, 도둔'의 의미를 간직하기 위하여 '돈'이나 '둔' 음을 지켜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 지역에서는 한자로 '대돈, 대둔(垈屯)'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터의 의미인 '대(垈)', 그리고 '돋은, 도둔'의 의미를 간직한 '둔'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옛 의미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돋은 언덕'의 의미로 '둔덕'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청주시 북이면 내둔리의 둔덕, 보은군 삼승면 둔덕리 등의 지명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덕벌'이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높은 언덕에 해당하는 들판'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으며 '안덕벌'은 '안터벌'과 같은 말로서, '덕벌의 안쪽' 또는 '안 쪽에 있는 덕벌'의 의미이고 '바깥덕벌'은 '덕벌의 바깥쪽' 또는 '바깥쪽에 있는 덕벌'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안덕벌의 전성기는 연초제조창으로 인하여 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안덕벌에 첫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새벽부터 소달구지와 경운기가 줄지어 서 있었다. 잎담배를 수매하기 위하여 충북 각지에서 이곳 안덕벌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순대국집에서 모여 앉아 걸쭉한 막걸리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농부들이 수매가 끝나면 묵직한 돈다발을 품에 안고 방아다리 근처의 고급 주점을 찾아 젓가락 두들겨 가며 힘겨운 한해 농사일의 피로를 풀곤 했다. 잎담배는 그야말로 충북인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담배 농사는 이른 봄부터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계속된다. 비닐하우스에 씨앗을 뿌린 뒤 애지중지 싹을 키우고, 쟁기질로 밭을 간 뒤 어린 묘를 심었다. 자라는 동안 여러 차례 밭을 매고, 풀을 뽑고, 담배잎을 갉아먹는 굼벵이처럼 생긴 벌레를 손가락으로 비벼서 죽이는 작업도 수시로 해주어야 한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담배잎을 따다가 새끼줄에 꼬여 건조실로 들어가고 밤을 새우며 며칠 동안 석탄불을 지펴 가마 안을 가열시켜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뱃잎의 등급이 달라지게 된다. 마치 어느 도공이 장작가마에 도자기를 넣고 자신의 모든 혼과 열정을 다해 불을 때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는 것처럼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동안은 꼼짝달싹할 수 없다. 한눈 팔다가 불꽃이라도 꺼지는 날이면 일 년 농사가 말짱 헛것이 된다. 이 잎을 서너 달 동안 적당한 습도에 숙성시킨 뒤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밤을 지새가며 정겨운 수다와 따뜻한 손길로 다듬어져야 비로소 수매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저녁나절의 안덕벌은 골목마다 연탄불에 삼겹살 구워 먹고 순대국을 안주삼아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던 사람들로 붐볐다. 이들은 연초제조창의 노동자들이었는데 한 때는 이곳의 노동자가 3천여 명에 달했으니 안덕벌 일대 식당가는 연일 문전성시였으며, 인근에 선술집이 100여개나 될 정도로 흥겨운 동네였다. 공장 굴뚝에서는 연일 담배연기를 내뿜어 날이 궂은 날이면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했으나 이것 때문에 먹고 살기에 불평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연초제조창은 1946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에 연초제조창 건물을 지어 청주 지역 근대화 산업의 상징 역할을 해 왔는데 산업 환경의 변화로 58년만인 2004년에 생산을 중단하게 되면서 안덕벌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생기가 넘치고 삶의 희망이었던 청주 시민의 추억을 간직한 장소인데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채 몇 년이 흘러가자 건물이 파손되고 시설물이 망가져 흉물처럼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 폐시설을 철거하지 말고 그대로 재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추진하게 되었다. 1999년도에 시작된 청주공예비엔날레가 2011년 제7회 행사를 옛 연초제조창에서 개최하게 되면서부터 문화제조창으로의 변모가 시작되었으며 이곳에 청주문화산업단지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들어서게 되니 그야말로 안덕벌의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안덕벌 삶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안덕벌의 설화와 역사적 사건들을 국악, 미술, 연극, 문학의 장르로 표현함으로써 안덕벌의 과거와 6·25전쟁으로 인하여 겪은 안덕벌의 아픈 역사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안덕벌 떼과부'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보도연맹 사건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다. 당시 군경은 좌익분자들을 처분한다며 내덕동에서 민간인 153명을 학살했는데 이 가운데 안덕벌 주민이 5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여인들이 콩나물과 두부를 만들어 내다 팔며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해서 '안덕벌 떼과부'라는 속담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지닌 안덕벌이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나 이제 문화 중심지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2018년 시작된 '안덕벌 삶 이야기'는 '안덕벌의 탄생'을 시작으로 '안덕벌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음악극으로 공연하였고, 2019년에는 '엄마와 콩나물'을, 2020년에는 세 번째 무대인 '남겨진 이들의 노래'가 안덕벌 동네예술가들이 참여하여 국악극으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충북의 산업화를 선도하던 안덕벌은 산업 환경과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기 시작한 이후 이들 기업들이 하나씩 사라지게 되면서 안덕벌도 한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졌었는데 이제는 충북의 문화 중심지로서 힘찬 부활을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