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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전 음성교육장, 수필가

 증평에서 괴산으로 가는 34번 국도를 가다 보면 사리를 지나자마자 바로 모래재가 나오는데 전에는 험한 고개를 숨가쁘게 넘어갔지만 지금은 고개를 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4차선 도로를 평지처럼 달려간다. 유평 터널에 들어서기 전에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에서 좌회전해 533번 지방도로 들어서서 화산리를 지나면 길가에 고말귀라는 마을 유래비가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한다.

 마을 이름도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비석에 마을 유래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도대체 어떤 유래를 지닌 마을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을 유래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종 원년(1453)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단종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군국 대권을 장악하였으나 허후한 사람은 평소부터 아끼는 마음이 간절해 처음에는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정난(靖難) 성공을 자축하는 연회에서 황보인, 김종서 등의 무죄를 주장하고 정난(靖難)이 잘못됐음을 간(諫)하다가 수양대군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향후 10대(300년) 동안 등용하지 않는다는 처벌을 받았다. 세조 2년(1456) 영월로 귀양간 단종을 모시기 위한 사육신 사건으로 허후의 아들 손자 등 삼부자가 모두 처형됐는데 셋째 손자는 출생한지 15일 미만이라 죽음을 면하고 이곳 괴산에서 살게 됐다. 허후가 죽은지 300년이 지난 영조 23년(1747)에야 억울한 누명을 벗고 관직이 회복됐다. 영조 42년(1766)에 정간(貞簡)의 시호를 내리고 왕명으로 일곱 고을의 관장(官長)에게 제사 지낼 것을 명했는데 중국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꼬삐를 잡고 그 부당함을 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고사를 비유해 말하기를 '허후는 청렴결백해 모든 언행이 자숙하며 진실된 말로 기탄없이 간함이 백이와 숙제에 뒤지지 아니하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간하였고(叩馬而諫), 허후는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라(叩馬而歸) 했다.' 그래서 그 자손이 살아 온 곳을 '고마귀(叩馬歸)'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고말기'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면 '고말기'라는 지명은 과연 '고마귀(叩馬歸)'에서 유래된 것일까?

 지명이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이 있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부르게 되는 것이므로 순수한 자연 지명이 먼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이나 풍수지리, 동양 철학, 교훈적 내용을 접목시키거나 또는 표기하는 사람의 이상이나 마을 이름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변이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고마귀, 고말기'에는 지명에서 흔히 쓰이는 '고마'라는 말이 주요 요소 즉 어근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마'는 지명에서 매우 빈번히 쓰이는 말로서 '크다'는 의미의 '곰, 감'이 그 뿌리이다. 충남 공주는 예로부터 금강 가에 물류 운송의 중심인 커다란 나루가 있어 고마나루(곰나루)라 한 것처럼 지명에서 '곰, 감, 고마, 가마, 감우, 개미' 등으로 변이돼 널리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말기'라는 지명에서 '기'가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명사형 접미사로 붙어쓰이는 것으로 짐작이 되며 조선시대에도 이곳을 '고마(叩馬), 고마리(叩馬里)'라 기록한 것을 보면 의미가 없는 접미사이거나 아니면 예전에는 '고마리, 고말이'라 한 것 같다. 그러면 한자로 표기하기 전의 지명은 '고마리'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고마리'와 '고말이'는 음은 같으나 표기만 다를 뿐이며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한자음의 '마(馬)'와 우리말의 '말'의 음이 달라지는 것과 후대에 허후의 후손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인 '고마이귀(叩馬而歸)'와 연관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말기'는 '고마리, 고말이'가 그 원형으로서 다른 지역에서는 '가마리, 감골, 감나무골, 개미실'로 변이된 지역을 많이 볼 수가 있으며 '큰 마을'이라는 아주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크다'는 뜻을 가진 고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지명이라 하겠다.

 그리고 인근에 해발 539m의 보광산이 높이 솟아 있고, 마을 앞에는 설우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지만 마을 뒤의 산은 해발 400~500m의 산줄기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특별히 부르는 이름이 없기에 중국 고사에 근거한 마을 유래에 맞춰 수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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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