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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고치령(단양군 영춘면-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종과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곳
소백·태백산 중간위치 이른바 '兩白지간'
순흥-영춘-영월 이어주는 보부상 '商路'
동학 2세교주 최시형의 도피루트 이기도
충북 사면에 옛길 남아 있으나 관리 안돼

  • 웹출고시간2011.08.24 15:52:1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남쪽 국망봉(1,421m)과 북쪽 형제봉(1,1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760m다. 청원-보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피반령이 360m인 점을 감안하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를 정남-정북으로 연결하고 있다.(대동여지도 참조)

고치령은 여타 백두대간 고개와 행정적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백두대간 고갯길 정상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 만큼은 경북도계가 고개 정상을 넘어 백두대간 북쪽 사면까지 들어와 있다.

고치령 정상의 조형물이다. '옛고개가 고치령이 됐다'고 적어 놓고 있으나 사실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고치령(古峙嶺) 정상과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사이에는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가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경북의 도계 조형물(사진 참조)도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세워져 있다. 충북으로서는 썩 기분좋은 모습은 아니다.

고치령 영로는 남북사면 모두 S자형 굴곡을 많이 지니고 있다. 경사도는 경북 사면이 다소 가파른 모습이어서, 승용차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된다. 반면 충북 사면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응달이 짙게 지고 있다.

대간(大幹)인 만큼 마루금(능선)은 분수령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다. 충북 사면의 빗물은 마포천, 옥동천을 거쳐 영월을 지나온 남한강에 합류한다. 반면 경북 사면의 빗물은 일단 단산저수지에 모였다가 다시 죽계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리지 속의 죽령

대동여지도로, 중간 하단에 '串赤嶺'이 보인다. 순흥-영춘-영월이 거의 직선으로 연결돼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6)는 대동여지도에서 경상도 순흥-충청도 영춘-강원도 영월을 거의 직선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그 직선이 백두대간과 만나는 지점에 '곶적령'(串赤嶺)을 적어놨다.

곶적령을 '관적령'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지금의 지명이 '고치령'인 점을 고려하면 곶적령이 맞아 보인다.

곶적령 이름은 문헌상 세종실록지리지(1425, 단종),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중종)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1752, 영조) 산천조에 처음 등장한다.

'곶적령: 부(순흥 지칭)의 삼십리에 있다. 마아령에서 왔고 길은 영월, 영춘으로 통한다.'(串赤嶺: 在府北三十里 自馬兒嶺來 路通寧越永春)-<여지도서>

고치령 고갯길은 좁은 편이다. 승용차도 교행이 안되는 곳이 매우 많다.

대동지지((1861, 철종)는 '남쪽 삼십리에 있다. 순흥과 영천으로 통한다. 매우 험난하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곶적령은 장시가 활성화된 조선후기부터 사람과 물산의 왕래가 활발히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춘의 장날은 4.9일, 순흥은 6.10일로 각각 달랐다. 장날이 달랐다는 것은 당시 보부상들이 시간차를 이용, 양쪽을 활발히 오갔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관련, 대동지지는 당시 영춘현이 특산품으로 잣, 대추, 꿀, 회양목, 송이, 누치, 쏘가리 등을 적었다. 반면 순흥 특산물로는 닥, 감, 석이버서, 은어 등을 기록했다.

당시 보부상들은 직선거리 14㎞의 양쪽을 오가며 이같은 특산품을 거래, 마진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추를 주목할 픽요가 있다. '삼복에 비가 많이 오면 보은처녀 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대추는 보은이 유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문헌상의 조선시대 대추는 연산군이 진상을 명령할 정도로 영춘 것이 더 유명했다.

'전교하기를, "영춘현(永春縣)에서 생산되는 대추를 해마다 헌납하라" 하였다.(傳曰: "永春縣産大棗其歲獻")-<연산군일기>

고치령의 북쪽 들머리인 영춘면 의풍은 예로부터 양백지간(兩白之間), 삼풍지간(三豊之間)의 고을로 불렸다. 전자는 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 후자는 물·산·땅이 좋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속의 사건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1차는 이른바 사육신이, 2차는 금성대군이 주도했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본명 이유)은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형(수양대군)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단종)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고치령 정상의 이정표이다. 해발고도를 760m로 적어놨으나 일부에서는 780m로 보기도 한다.

이를 눈치챈 세조는 금성대군을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으로, 고치령 남쪽 사면인 순흥으로 유배를 보냈다. '당여'(黨與)는 자기편 사람을 모으는 행동을 말한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단종복위 행동을 구체화했다.

'장차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을 맞아서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연려실기술>

인용문에는 '노산(단종 지칭)을 계립령을 넘어 순흥으로 모신다'로 돼 있다. 그러나 이는 거리, 지형, 작전 등 어느 것도 맞지 않는다. 계립령은 고치령의 오기(誤記)임이 분명해 보인다. 서두에 영월-영춘-순흥이 직선으로 연결돼 있음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옆에서 이를 도운 인물이 순흥부사 이보흠이다. 그도 세조를 못 마땅히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은 중간에 비밀이 새나가면서 불발로 끝났다.

그 결과, 단종은 영월에서, 금성대군은 안동에서, 이보음은 평안도 박천에서 교살내지 사사됐다. 이른바 정축지변으로, 그 공간적인 주무대는 고치령 일대였다.

일부에서는 이보흠이 고치령을 넘어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와 순흥을 오갔다고 적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훗날 정조는 억울하게 희생된 금성대군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 제목은 '금성대군 이유(李瑜) 치제문'이다.

'노릉지를 읽을 때에 /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니 / 사육신과 생육신은 / 신하가 되어 신하의 본분을 다했네 / 종실의 공자(公子)로서 떨친 이는 / 금성대군이 열렬하였으니 / 노 나라 위 나라처럼 형제의 관계이고 / 백이숙제의 절의가 있었네 / 변방에 버려져 귀양을 떠나니 / 대령의 남쪽이었네 /…/'-<홍재전서>

인용문 중 '노릉지'는 노산대군 묘지에 관한 글, '대령 남쪽'은 고치령 바로 아래인 순흥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고치령 정상에 서있는 산신각이다. 단종과 금성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현재 고치령 정상에는 백두대간 충북고개 중 유일하게 산신각(사진 참조)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단종과 금성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을 찾는 산사람들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이 됐다고 믿고 있다.

방향은 다르지만 금성대군 사우인 청당사(靑塘祠)가 우리고장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에 위치하고 있다. 금성대군의 부인은 최사강의 딸인 전주최씨로, 초평서 가까운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가 친정이었다는 설이 있다.

고치령 충북사면은 동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곳이기도 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부인 손씨가 단양옥에 갇히자 도주를 하게 된다. 그 도주로가 고치령 아래인 남천, 동대, 의풍 지역이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고치령 부근의 충북과 경북의 도계이다. 경북 조형물 천마도에서는 힘이 느껴지지만, 충북쪽에는 어떤 조형물도 설치돼 있지 않다.

고치령 남북 사면은 워낙 오지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대신 비포장도로 구간이 남아 있어, 옛길 복원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고치령 경북사면은 모두 포장돼 있다.

반면 충북사면 상당 구간은 비포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비가 전혀 안 돼 있기 때문에 옛길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적절한 복원 계획을 세워 옛길을 복원할 경우 훌륭한 걷기문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지금도 고치령 충북 구간에는 이정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정표는 옛길 복원에 앞서 빨리 설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계 조형물 설치도 필요하다. 경북은 요란하다 할 정도로 도계 표지석과 함께 천마도 그림을 설치해 놓았다.(그림 참조) 충북도계에는 어떤 조형물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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