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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추풍령

정약용 "빼앗기면 멱살 잡히는 격이다"
관로였지만 초기에는 통행량 많지 않았던 듯
추풍령 어원, 추풍 마을에 있는 고개라는 뜻
경부고속도 개통으로 숙박업 등 되레 찬서리
한적한 구도로+포도밭+맑은 하천 연계필요

  • 웹출고시간2011.06.30 18:36:2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추풍령 고갯길의 구배를 보여주고 있는 GPS 고도표이다. 영동사면(위 우측)은 경사가 완만하나 김천사면은 매우 가파름을 알 수 있다. 추풍령은 영동지역 3개 주요 고개 중 가장 낮은 해발고도를 나타내고 있다.(아래)

추풍령(秋風嶺)은 눌의산(743)과 난함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관리와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영동지역 3개 주요 고개 중 가장 낮은 해발고도 221m를 나타내고 있다. 종단 기울기를 나타내는 고개 구배는 지난주 소개한 괘방령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영동사면은 "이곳이 백두대간 고개 근처인가" 할 정도로 경사도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로 정상을 넘어서면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김천쪽 사면은 승용차 가속이 저절로 붙을 정도로 경사도가 심한 편이다. <그림>에서 보듯 4㎞ 남짓 사이에 해발고도가 1백m 넘게 낮아지고 있다.

추풍령 정상에 떨어지는 빗물은 역시 '이산가족'(?)이 된다. 영동사면의 물은 추풍령천-초강천 등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반면 김천사면의 물은 직지천-감천을 경유해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의 추풍령(원안)이다. 그 아래로 전회에 소개한 괘방령, 우두령이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깝게는 충북 황간과 경북 금산(지금의 김천)을 연결했다.

이와 관련, 대동여지도를 해설한 대동지지(1861~1866) 금산군 편은 추풍령을 '호서와 경상도의 인후가 되고 영이 높고 험하지 아니하여 봉우리가 고루 평탄하고 계곡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른다(爲湖嶺咽喉 嶺不高峻 峰巒和平 溪間澄淸)'라고 적고 있다.

같은 대동지지 황간현 편은 추풍령의 지정학적 위치를 강조, '매우 높지 아니하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차지이다. 큰 길이므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수비할 곳이다(不甚高峻 爲忠慶兩道之交 大路有事 必守之地)'라고 쓰고 있다.

전회에 소개한 우두령과 괘방령이 상로(商路·혹은 私路)였다면 추풍령은 관로(官路)내지 공로(公路) 역할을 하면서 한양과 영남을 연결했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풍역'은 보이지만 '추풍령'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추풍령 고개가 비교적 늦은 시기에 개척됐고 또 당시에는 교통량도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시대 신구 관찰사가 임무 교대식을 거행하던 장소를 '교귀'(交龜)라고 불렀다. '거북'(龜) 모양의 관인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같은 이름이 생겨났다. 경상도관찰사의 교귀 장소는 추풍령이 아닌 문경 새재였다.

'교귀정(交龜亭): 서쪽으로 27리, 조령 용추(龍湫) 위에 있으며, 신구(新舊) 감사(관찰사)가 인(印)을 교환하던 곳이다.'-<대동지지>

추풍령 주변은 경관이 그리 수려한 편은 아니다. 그래도 관로였던 만큼 관료층이 추풍령을 주로 이용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63)이 추풍령을 넘는 감회를 '추풍령을 넘으며'(踰秋風嶺)라는 제목의 한시로 남겼다.

가수 남상규 씨가 불러 히트했던 '추풍령' 노래비다. 영로 정상 근처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낭만적 풍류를 읊은 것이 아니고, 실학자답게 추풍령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二白飛騰脊勢强) /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神龍於此地中藏) /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溪通北地趨黃澗) /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쌌네(山出西枝繞赤裳) /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았다만(每向高峯增塹壘) /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느 누가 안단 말고(誰知平陸是關防) / 청주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淸州大野開千里) / 추풍령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一據秋風便··'-<다산시문집 제 2권>

추풍령의 어원도 사뭇 궁금하다. 이와 관련, 성종실록에는 '추풍역에 정역(定役)된 배원련의 아내 소사와 딸 종단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용문 중 추풍역은 '추풍'+'역'의 결합어이다.

지명어 '추풍령'도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명 '추풍령'이 본래부터 존재해 추풍령면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추풍'이라는 마을이 있은 후 추풍령과 추풍령면이 생겨났다.

바로 추풍령은 '추풍 마을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추풍령면은 고종 광무10년(1906)에 비로소 충북 영동군에 편입됐다.

◇ 역사속의 사건

임진왜란 때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진격하려 했다. 이때 왜군과 추풍령에서 맞서 싸운 의병장이 장지현(張智賢·1536~1593)이다. 그는 여지도서의 표현을 빌면 하루종일 싸우다 화살이 다 떨어져 장렬하게 전사했다.

'경상도 안에서 서울이나 본도로 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리로 와야 함으로 임진란에 조정에서 조방장 장지현을 보내 이곳을 지키게 했는데 적진이 크게 이르니 아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지현이 종일토록 힘을 다하여 싸우다 화살이 다하여 죽었다.(嶺南之內 京及本道者 必取此路故 壬辰之亂 朝廷 遣助防將 張智賢 拒守此處賊陣大至 我軍潰散 智賢終日力戰 矢盡乃死)'-<여지도서>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자국의 우편물을 수시로 서울로 운송했다. 그러나 부산-서울 거리가 너무 먼 까닭에 우편물이 중간지점인 추풍령에서 1박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추풍령 우체국은 지금도 국내 제 1호 우체국으로 불리고 있다.

추풍령 정상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도로가 많이 지나가면서 옛길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추풍령은 지금도 날씨예보에 자주 등장한다. 1934년 추풍령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기상관측소가 세워졌고, 비슷한 시기에 추풍령 인근 눌의산 정상의 항공등대가 점멸등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추풍령 지역의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 전까지 머무는 손님이 많으면서 숙박, 음식업이 제법 성행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스쳐가는 곳이 되면서 외지 손님들이 크게 줄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 7월 추풍령휴게소 남쪽 147m 지점에서 한진고속버스가 40m 아래로 굴러 25명이 죽고 2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후 최초의 대형사고로, 동아일보가 7월 21일자로 보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치산녹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유행한 표현이 이른바 '추풍령식 벌채'였다.

박 전 대통령은 산불 진화나 병충해 방지작업 등을 위해 만드는 산길(임도)을 세로가 아닌 가로로 내도록 지시했다. 큰비가 올 경우 한꺼번에 흘러내리기 쉽고, 또 밖에서 볼 때 나무의 울창도가 낮아 보인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때부터 횡으로 하는 간벌을 추풍령식 벌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옛 4번 국도(종방향)와 신 4번 국도(횡방향)가 만나는 지점의 바로 앞이 추풍령 정상이 된다.

추풍령은 우리나라에서 도로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4번 옛국도, 4번 신국도, 경부선 등이 영로 정상이나 주변을 지나고 있다. 이중 4번 옛국도는 통행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따라서 일대는 걷기문화와 연계된 콘텐츠 발굴이 필요해 보인다. 인근은 포도밭이 매우 많고 앞서 언급했듯이 추풍령천의 물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 이런 요소들은 걷기문화의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추풍령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유적으로는 사부리 백자요지, 분청사기 요지, 추풍역터, 지봉리 고분군 등이 있다. 이것 역시 걷기문화와 연계할 필요가 있다. 정상서 얼마 걷지 않으면 등록문화재 제 47호인 추풍령역 급수탑도 만날 수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영동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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