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조령(괴산 연풍~경북 문경)

기호지방의 목이니 '일이 있으면 꼭 지켜야 할 곳'
3개 관방 중 가장 먼저 축성된 것은 2관문
남아 있는 옛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혜안'
초점·새재·조령 어원적으로 서로 같은 뿌리
조선말기 전신선 지나가고 우편배달 루트

  • 웹출고시간2011.07.27 18:47:0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령 GPS 고도표이다. 주위에서는 조령산이 가장 높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를 고갯길 양사면으로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주흘산(1106m·북)과 조령산(1017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난 이는 넓게 본 것으로, 좁게 보면 마패봉(927m·북)과 치마바위봉(835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사면은 고갯길 정상까지 거리가 짧고, 동쪽사면은 반원 모양으로 돌아 저능부로 빠진다. 따라서 서쪽사면이 다소 가파르게 느껴지고 있다.

백두대간인 만큼 서쪽과 동쪽 사면의 빗물은 최종 목적지까지 동행하지 않는다. 서쪽사면의 물은 연풍천에 모여 충주 달천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사면의 물은 조령천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의 조령 모습이다. 분지 형태로 표현됐다.

충주목과 문경현 사이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 1866)의 당시 지도제작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강이나 하천과 달리 구불구불한 도로는 직선으로 긋고, 그 위에 10리마다 점표시를 했다. 따라서 조령은 문경-연풍-충주를 연결하고 있는 고갯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충주를 연결하는 길로 표시돼 있다.

조령은 예로부터 한반도 최고의 요충지로 꼽혀왔다. 대동여지도를 해설한 대동지지(1861·철종)도 조령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경상우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이다. 매우 험하고 구불구불하여 양장의 구곡같아 경계는 남북으로 되었고 경기와 호서 지방의 목이 되어, 일이 있으면 지켜야 할 곳이다.'(慶尙右道 通京大路 險阻橫· 羊腸百曲 界絶南北 爲畿湖咽喉 有事必守之地)

여지도서(1572·영조)도 '하늘에 닿은 산세로 성곽을 이룬다'는 표현을 사용, 역시 완곡하나마 지정학적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일맥은 주흘산이 되어 돌부리가 높고 모든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 있다. 일맥은 조령이 되고 옮겨 공정산으로 높이 되고 그 산세가 하늘에 닿아 주흘산의 서록과 함께 서로 대하여 스스로 성곽을 이루었다.'

조령 부분만을 확대한 1872년 조선시대 지방도이다. 왼쪽 위에 안부역 이름이 보인다.

조령은 기호와 영남을 연결하던 최대 관로(官路)였다. 때문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갈 때는 수안보를 거쳐 주로 조령을 넘었다.

그 루트는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달천-충주-안부역(수안보)-조령-문경현이 가장 많았다.

반면 한양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안부역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문경-조령-연풍-괴산-음성-무극역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과 조령

복원전 일제시대 조령 3관문 모습이다.(왼쪽) 조령3관문의 하나인 조곡관 모습이다. 가장 먼저 축성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삼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1546∼1592)은 조령 대신 충주 탄금대 앞 벌판에 배수진을 쳤고, 그 결과 자신을 포함해 수천명이 몰살당했다.

당시 조정은 조령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차단성의 일종인 관방(關防)시설 구축에 나섰다. 2관문인 조곡관(혹은 조동관)은 이때(선조 27년·1594) 구축됐다.

나머지 제1관문(주흘관), 제3관문(조령관)은 이보다 한참 늦은 숙종 34년(1708)에 이르서야 완성됐다. 조곡관 구축에는 영의정 유성룡의 주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당시 조령 수문장은 우리고장 충주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었다.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조령의 험준함을 막지 못하면 충주 또한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지난날 신립(申砬)의 패전으로 이미 분명히 징험되었습니다. 지금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이란 자는 바로 충주 사람인데 조령의 형세 곡절(曲折)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선조실록>

그 결과, 왜군은 한반도 재침의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조령을 단념하고 호남방면으로 침공 루트를 돌리게 된다.

◇'새재'의 어원

조령의 또 다른 명칭인 '새재'는 지금도 그 의견이 다소 분분한다. 조령을 뜻하는 표현은 이것 외에 '초점'(草岾)도 있다.

이와 관련, 어문학자들은 '조령', '새재', '초점'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일란성 삼생아'로 보고 있다. '초점'이라는 표현은 의외로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지세가 험한 곳이 세 곳 있으니 초점 현의 서쪽에 있다. 이화현 현 서쪽에 있다. 관갑천 현의 남쪽에 있다.'(險阻處三, 草岾 在縣西 伊火峴 在縣西 串岬遷 在縣南)-<고려사지 상주목 문경군편>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초점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승계·표현된다. '험조처(險阻處)'는 험하고 험하다라는 뜻이다.

'험조처가 3이니, 하나는 초점인데, 현 서쪽 19리에 있다. 충청도 충주의 지로(指路)인데, 험조처가 7리이다.'(險阻處三, 一草岾在縣西十九里, 忠淸道忠州指路, 險阻處七里)

하늘에서 내려다본 조령 모습이다. 3관문이 아닌 매표소 부근이 충북과 경북의 경계가 된다.

새재의 한자식 표기인 조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중종 25) 때부터 등장했다. '조령: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다. 세상에서 새재(草岾)라고 부른다.'(在縣西二十七里 延豊縣界 俗號草岾)

문제는 초점이 왜 새재로 변했는가 하는 점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말 '새'는 '풀'(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붕에 얹는 '이엉새',과거 수세미로 사용했던 '솔새'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역사속의 조령

조령 옛길은 명승으로 지정될 만큼 주변의 풍광이 수려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묵객들이 자주 찾아 시와 문장을 남겼다. 이언적도 그중 한 명으로, 제목은 '새재에서 아우에게'(到鳥嶺寄舍弟)이다.

'멀어지면 질수록 시름이 더한 것은 / 늦가을 강가의 이별 뜻이 깊어서라 / 필마로 십 년 세월 떠돌았으니 / 석 잔 술에 천리 길 미련도 없으련만 / 낙엽은 쓸쓸히 용추에 떨어지고 / 먹구름 싸늘히 새재에 걸렸구나 / 너와 나눈 이별은 더욱 맺혀 아프고 / 꿈속인 듯 고향 산천 발목을 잡는다'

조선시대 영남 선비들에게 있어 조령은 가문을 일으키냐, 마느냐의 출세 분수령으로 상징됐다. 그들은 과거에 떨어진 후 조령을 넘는 기분을 '백의조령'으로 표현했다.

영조실록에는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한제국기 고종황제는 쇄국을 풀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88년 부산-청주-한양을 잇는 전신선이 준공됐다. 이른바 '남로전신선'이다.

그러나 일제는 남로전신선에 불통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고 주장, 야전 전신대 8백여명을 동원하여 별도의 군용전신선을 깔았다. 이 선로는 대구까지 올라온 후 문경-조령-충주를 거쳤다.

대륙 침략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위한 계책으로, 후에 조령 부근의 전신선은 의병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이 루트는 우편부의 배달로이기도 했다.

'다음날인 4일에는 聞慶을 떠난 郵便配達夫 2명이 조령 제3관문 산기슭에서 약 100명의 적과 마주쳐 火擊을 당했지만 다행히 우리 部隊의 도움으로 무사히 安保(지금의 수안보 지칭)에 도착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조령 서쪽사면은 콘크리트 포장을 하면서 옛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반면 문경쪽 동쪽사면은 명승에 지정될 만큼 잘 보존돼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수안보를 거쳐 문경 사면의 새재를 방문한 자리에서 옛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충북에서는 정종택 전 도지사가 수행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김수학 경북지사에게 새재 관문내에 버스나 승용차를 출입시키면 보존관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 관문 밖까지 포장해서 그 주변에 정류장을 만들고 차량은 이곳에 주차시키고 휴게소도 깨끗이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동아일보 1978년 11월 25일자>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괴산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아일보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