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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이화령(충북 연풍~ 경북 문경)

노을 비낀 길은 끝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조선후기 이후 크게 각광…현재 3개 도로 경유
전통 옛길, 일제가 신작로 개념으로 확장 매몰
인근 은티마을에 주막문화 남아있어 묘한 향수
한국 도로 발달사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 필요

  • 웹출고시간2011.07.20 16:05: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이화령의 GPS고도표이다. 조령산이 매우 높고, 또 이곳에서 하늘재(좌측)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조령산(1,017m)과 갈미봉(783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해발 548m이다.

백두대간인 만큼 영로 정상을 기준으로 빗물이 동서로 나눠진다. 서쪽 사면의 물은 연풍 이화천, 괴산 괴강, 충주 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 사면의 물은 문경 초천, 곡천 등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해발고도가 비교적 높은 만큼 고개 경사도 다소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개가 말목처럼 서서히 높아지고 있어 유장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연풍과 문경 사이에 '伊火峴'(붉은 원)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그 아래로 伊火南嶺, 周峴 등도 보인다.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들은 문경에서 충청도 방면으로 넘을 때 3개의 고갯길을 택할 수 있었다. 이른바 조령삼로이다.

제일 북쪽의 고개는 계립령(일명 하늘재)으로 충주로 연결됐다. 다음은 조령(일명 문경새재)으로 역시 충주로 통했다. 나머지 하나는 이화령이다. 그러나 이화령은 충주가 아닌, 연풍을 거쳐 괴산으로 향하는 고갯길이었다.

대동여지도 역시 충청도 연풍현과 경상도 문경현을 연결하는 선 위에 이화현(伊火峴)이라는 고개이름을 적어놨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화현은 인근 조령에 비해서는 통행량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 지도는 중요도에 따라 도로를 대로, 중로, 소로 등 3등급으로 분류했고, 이를 각각 적색, 황색, 청황색 등을 칠해 구분했다.

이와 관련 18세기 중엽에 발간된 '영남지도'를 보면 이화령을 지나는 연풍-문경간 도로에 황색이 그어져 있다.

당시 각종 지리지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중종)은 '문경현의 서쪽 십팔리에 있다. 충청도 연풍현 경계이다.'(伊火峴: 在縣西 十八里 延豊縣界)라고 적었다.

대동지지(1861, 철종)도 '문경 서쪽 십팔리에 있다. 연풍의 경계로 지름길이다.'(伊火峴 西十八里 延豊界 捷路)라고 적었다.

설명구가 짧은 것은 당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비교적 적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화령의 시작 지점인 연풍 주진리에는 사실 이화현 외에 2개의 고개가 더 존재했다.

대동여지도는 이화령 남쪽에 주현(周峴, 지금의 은티)과 이화남령(伊火南嶺)을 표시해 놓고 있다.

주현은 연풍과 문경 가은을 연결하던 옛길로, 그 중간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암사를 지나게 된다. 이화남령은 문경 아래 마포원을 연결하던 고갯길이었다.

고개가 많다는 것은 마을 위로 준령이 지나가고, 또 주변이 두메산골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택리지에서 그 은자적인 풍광을 적었다.

'비록 만첩산중에 있으나 추하거나 험한 봉우리가 없으니 참으로 은자가 살만한 곳이다.'(雖在萬産中 亦無險之峰 眞隱者之所居)

조선시대 큰 고개 밑에는 거의 대부분 주막이 존재했고, 당시 사람들은 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도둑이 자주 출몰했다.

이화령 인근 은티마을의 주막 모습이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이주막 안으로 들어간 듯 배낭만 보인다.

또 고개 정상을 넘어가려면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화령 옛길은 신작로로 확장되면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주현은 지금도 옛길뿐만 아니라 마을 입구에 주막이 현존하고 있다.

비록 현대적 모습의 주막이지만, 주인이 오가는 길손과 백두대간 종주자들을 위해 '주막' 간판을 커다랗게 달아놨다. <사진참조>

이같은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가 있다. 지금도 많이 애송되고 있는 김용호의 '주막에서'(1956년)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 길 옆 / 주막 // 그 / 수없이 입술이 닿은 / 이 빠진 낡은 사발에 / 나도 입술을 댄다. // 흡사 / 정처럼 옮아오는 / 막걸리 맛 // 여기 /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 알맞은 자리, 저만치 /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 소금보다 짜다는 / 인생을 안주하여 / 주막을 나서면 / 노을 비낀 길은 /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 누가 또한 닿으랴 / 이런 무렵에'

◇이화령 어원

지금의 이화령은 한자로는 '梨花嶺'으로 적고 있다. 직역하면 '배꽃고개'라는 예쁜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화령 주변에서는 배나무를 거의 구경할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 나타나는 조선시대 지명은 '梨花嶺'이 아닌, '伊火峴'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화령의 어원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주 나타낸다.

아직 정설화된 이론은 없다. 다만 대동여지도는 연풍을 가로지르는 하천의 이름을 '伊火川'이라고 적었다. 따라서 '이화령'이 문경사면이 아닌 충북사면에서 생겨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어떤 어문 전문가는 '연풍 이유릿재 혹은 이우릿재를 한자로 옮긴 것이 이화령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상당히 근거있는 주장으로 보여지나 더 이상의 학문적인 추적은 안 되고 있다.

◇역사속의 이화령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연풍지역 지도이다. 붉은선이 당시 막 확장된 신작로로, '至聞慶'은 '문경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화령 옛길은 그 위로 신작로가 나면서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일제는 지난 1925년 한반도 도로를 선진화시킨다는 명목하에 전국 주요 도로를 확장하거나 직선화 사업을 벌였다. 이화령은 이때부터 통행량이 급속히 늘어났다.

백두대간 충북사면에는 죽령, 조령, 이화령 등 3개의 주요 고개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3개 고갯길은 시대별로 통행량이 많았다. 죽령은 삼국시대, 조령은 조선시대에 각각 활용도가 높았다. 반면 이화령은 근·현대 들어와서 활성화됐다.

이화령 일대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흰선이 옛길이고 그 아래로 3번 국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현재 이화령 정상이나 그 부근으로 이화령 옛길, 이화령 국도(제 3번),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3개의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이중 이화령 옛길과 이화령 국도는 상하로 나란히 위치, 마치 '길의 아파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화령 정상에 서면 길도 진화를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화령 일대는 내륙 최고의 격전장이었다. 백두대간이 뚫리면 방어선이 낙동강으로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국군 6사단은 이화령에 배수진을 치고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국군은 7월 13~15일 전투에서 북한군 8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화력에서 밀려 이화령을 내주고 낙동강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이화령 옛길에서 3번 국도를 내려다본 모습이다. 일대가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 충북사면 고개 중 이화령에 가장 많은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화령을 찾으면 한국 도로 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가 되고 있다.

현재 이화령 옛길은 계속 방치되고 있다.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화령 영로 아래인 은티마을에는 주막문화가 어느 정도 보존돼 있고, 그 위로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다.

이 세가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책 입안이 필요해 보인다. 아울러 은티마을의 경우 택리지가 언급한 '십승지' 개념을 홍보, 이를 관관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괴산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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