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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오도치(영동 황간-상주 모동)

도둑맞은 고개이름, 충북은 뭐하고 있나
상주시 아무런 검증 없이 '수봉재'로 작명
본래지명 '오도치', 마을 '오도' 아직 존재
정약용 유배 가던 중 이곳에서 심경 읊어
충북사면, 숨은 관광자원 풍부 홍보 절실

  • 웹출고시간2011.07.07 17:47:5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오도치를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수봉쉼터와 오도 마을이 보인다.

지리적으로 지장산(772m)와 만경봉(690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를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49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오도치(吾道峙)는 해발고도 350m로 그리 높은 고개는 아니다. 대신 동·서 양쪽 사면이 비슷한 기울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동지역 다른 고개에 비해서는 다소 가파르게 느껴진다. 피반령 정도의 경사도를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로, 왼쪽 굵은 선이 백두대간이다. 왼쪽 상단에 '吾道峙'(원)가 보인다.

대동여지도는 충청도 황간현과 경상도 상주목을 연결하는 선(도로) 위에 오도치 표시를 해 놓았다. 대동여지도를 해설한 대동지지(1861·철종)의 황간현 산수조에 '동북 이십리에 있는데 상주로 통하는 간로이다'(東北二十里通尙州間路)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오도치는 세종실록지리지(1425)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에는 그 고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오도치가 비교적 늦은 시기에 개척됐고, 또 주용도가 상로(商路)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보부상들이 주로 왕래했던 길이었다. 이는 만기요람(1880·순조)이 오도치를 다루지 않은 것에서 역으로 입증되고 있다. 서영보 등이 순조 8년에 왕명을 받아 편찬한 만기요람은 공로와 관방로만을 주로 다뤘다.

대동지지는 황간현의 토산(土産)으로 海松子(잣), 枾(감), 蜂蜜(꿀), 松耳(송이), 石耳(석이버섯), 辛甘菜(당귀잎) 등을 적었다.

반면 상주목의 토산으로는 玉石(옥석), 玉燈石(옥등석), 鐵(철), 水晶石(수정석), 枾(감), 栗(밤), 胡桃(호두), 石耳(석이버섯), 松耳(송이), 莞草(왕골), 楮(닥), 銀口魚(은어), 蜂蜜(꿀) 등을 기록했다.

두 지역의 토산품 중 상대 지역에서 나지 않는 것들이 오도치를 경유해 거래됐을 것으로 보인다. 잣, 당귀, 옥석, 수정석, 잠, 왕골, 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황간과 상주는 직선거리로 대략 70리(27km) 정도 떨어져 있고, 장시일도 1·6일(황간)과 2·7일(상주)로 각각 달랐다.

상식적으로 장시일이 같으면 장돌뱅이들이 두 지역을 왕래하지 않은 것이 된다. 반면 장시일이 다른 것은 두 지역 장돌뱅이들이 시차를 두고 상대지역을 오간 것이 된다.

◇ 역사속의 사건

늦은 시기에 개척됐고, 또 상로였던 만큼 주요 사료에는 오도치와 관련된 기록이 극히 일부만 등장한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 정기룡 장군이 오도치를 넘어 황간의 왜적 3백여명을 토벌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오도치를 넘어 남쪽으로 유배를 갔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자 정약용은 이른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투옥됐다가 이듬해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는 그해 11월 전남 강진으로 이배(移配)되기 전까지 9개월간 장기에 머물렀다. 책롱사건은 천주교 신자가 성경과 관련된 책을 옮기다가 적발된 사전을 말한다.

정약용은 포항 인근 장기로 유배를 가던 중 오도치를 경유했고, 이때 이곳을 배경으로 시 한 수를 남겼다.

'우는 말 물가에서 이리 저리 맴도는데(嗚馬遲回立水頭) / 중모현 북쪽으로 뻗은 길 하염 없구나(牟縣北路悠悠) / 역정 너머 비스듬히 추풍령이 솟았고(驛亭斜出秋風嶺) / 산중 비는 아스라이 촉석류를 에워쌓네(山雨遙封矗石樓) / 이 인생 나라에 선뜻 바친 것이 잘못이라(已誤此生輕許國) / 괴로울사 늘그막에 수령될 것 없고 말고(不須良苦老知州) / 밭고랑에 지팡이 기댄 할아버지가 부럽구나(田間倚杖翁堪羨)/ 한가히 아들을 보내 석양에 소를 친다네(閒遣諸男暮牧牛)'-<다산시문집 제 2권>
 
이 한시의 제목은 '至中牟縣 家君赴鳳山書院 余與蔡郞前行 奉詩爲別'이다. 직역하면 '중모현에 이르러 부친은 봉산서원으로 가시게 되어 나는 채랑과 함께 앞서 떠나면서 시를 바쳐 작별하다' 정도가 된다. 제목과 본문에 등장하는 '중모현'은 오도치 동쪽 사면인 상주시 모동면의 옛지명이다. '채랑'은 몸종으로 여겨진다.
 
◇왜곡된 고개 문화

 

오도치 정상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경북이 행정명을 고개명으로 정했다.

경북 상주시는 지난 90년대 일대 49번 국도를 포장하면서 오도치 정상 동쪽사면에 '수봉재'라는 지명 표지석을 세웠다. 따라서 상당수 사람들이 수봉재를 정식 지명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 고유 지명이면서 정식 이름인 오도치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상주시가 수봉재라는 왜곡된 표지석을 세운 것은 일대 행정명이 '수봉리'이고 또 고개 아래 '수봉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 참조>
 
그러나 논쟁할 필요도 없이 이곳의 지명은 '오도치'가 맞다. 대동여지도(그림 참조), 국립지리원 지형도 등이 직접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고개 바로 아래 위치하는 옥동서원 안내도이다. 이 그림도 '오도치'라고 적었다.

뿐만 아니라 황희 정승 위패를 모시고 있는 옥동서원은 그 안내도(그림참조)에 49번 국도, 오도치, 마을 이름 '오도' 등을 분명히 표시해 놓고 있다.

이밖에 오도마을 입구에는 지난 1973년에 세워진 '오도향우회'(그림참조) 비가 아직도 위치하고 있다.

고개 정상 아래의 오도 마을에 위치하는 '오도향우회' 비다. 오도치라는 이름이 이 마을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오도치서 멀지 않은 상주시 화동면에 신의터재라는 백두대간 고개가 존재하고 있다. 충북경계에서 너무 들어가 있어 이번에는 소개하지 않지만, 이 고개 역시 아무런 검증없이 고개 이름이 작명됐다.

비문은 임란 이전에 신은현(新恩峴)으로 부른 것에서 고개 이름이 유래했다고 적고 있으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여지도서 등 조선시대 어느 문헌에도 신은현은 나오지 않는다. 반면 대동여지도는 이곳 지명을 '웅현'이라고 적었다.

앞으로 추가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충북-경북 경계인 백두대간에는 이런 현장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고개 정상은 양사면이 공유하는 곳으로, 그 지명은 두 지역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라야 한다.

충북도는 시급히 경북도와 이 문제를 협의할 필요가 있다. 또 국립지리원도 이같은 현장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알면서 방치하는 것은 업무 태만으로 비춰질 수 있다.

 

GPS고도표로, 오도치는 지장산과 만경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오도치는 백두대간 고개가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고산자 김정호는 오도치를 황간과 상주를 연결선의 백두대간에 오도치를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반계천 등 모동면 일대의 수계는 황간 쪽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고 있다.
 
상주 모동면 일대가 백두대간 동쪽사면에 속한다면 반계천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해야 한다. 추풍령과 연결된 북향 산줄기는 용문산에 이르러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국수봉-백학산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줄기는 지장산-만경봉을 만들고 있다. 이중 국수봉-백학산 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이 부분은 김정호의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반야사 문수전은 깍아지른 벼랑위의 제비집 모양을 하고 있다. 아직 잘 안 알려져 있다.

 
고개 양사면 진입로 부근에 명소가 자리하고 있다. 충북사면 독점마을에서 2km 들어가면 고찰 반야사와 석천계곡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반야사 문수전은 마치 깎아지른 벼랑 위의 제비집 모양을 하고 있는 등 소문이 날 경우 관광객 유인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과 관련이 있는 월류봉, 풍수지리 사연이 있는 회도석 등도 충북사면에서 만날 수 있다.
영동인이면서 농서 촬요신서를 쓴 박흥생(朴興生·1374∼1446)이 반야사를 찾아 한시 한 수를 남겼다. 시비를 세워도 될 만큼의 명시로, 반야사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고 있다.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네 / 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 / 대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 / 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 /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두둥실 / 스님은 이미 공부를 끝냈는데 / 읽던 책이 상 위에 남았구나.'
경북사면에서는 옥동서원, 백옥정, 세심석 등을 만날 수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영동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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