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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죽령(단양 대강면-경북 풍기읍)

신라 쾌속 북진의 시발점, 문헌상 2호 고개

  • 웹출고시간2011.08.17 15:22:0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죽령은 중앙고속도로, 5번 국도, 중앙선 등이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죽령 옛길은 계곡을 따라 나있다.

해발 696m로, 북쪽의 소백산 제 2연화봉(1,357m)과 도솔산(1,316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를 서북-동남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역시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최종 도착지가 다르다. 경북사면의 빗물은 영주 남원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충북사면의 빗물은 단양 죽령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충주호에 합류한다.

고개 경사도는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준다. 충북사면은 고갯마루에서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나 고개 밑에 이를수록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죽령의 GPS 고도표이다. 주변 산세가 매우 험함을 알 수 있다.

죽령 구배도이다. 경북사면(우측)이 더 가파름을 알 수 있다.

경북사면은 경사가 급하면서 굴곡이 심한 모습이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타난다. 그 구절양장 모습은 희방사 계곡 입구에 이르서야 끝이 난다.

죽령 경북사면은 옛길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지난 2007년 국가명승 제 30호로 지정됐다. <지도 참조>

경북사면의 죽령 옛길 지도이다. 충북사면 옛길은 농로로 포장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충북사면은 농로로 포장되면서 옛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같은 죽령 고갯길이면서 충북 사면은 명승에서 제외됐다.

◇지리지 속의 죽령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제 2호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조는 '춘삼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적었다. 서기 158년의 일이다.

우리 역사 제 1호 고갯길은 전회에 언급한 지금의 수안보 계립령(鷄立嶺·국가명승 제 49호)으로, 죽령보다 2년 앞서 개척됐다.

역사가 오래 된 고갯길인 만큼 조선시대 이른 시기의 문헌부터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의 경상도 풍기군 산천조는 '죽령: 군의 서쪽 이십사리에 있다. 신라 아달라왕 오년에 비로소 개통했다.' (竹嶺: 在西郡 二十四里 新羅 阿達羅王 午年 始開路)라고 기록했다.

대동지지(1861·철종) 단양군 산수조는 훨씬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신라 아달라왕 5년 봄에 죽죽을 시켜서 처음으로 이 길을 닦았음으로 이름을 죽령이라고 했다. 고개 서쪽에 죽죽사가 있다. 영이 매우 높고 험하며 경상좌도로 통하는 큰길이다.'(新羅 阿達羅王五年春 使竹竹 始開此路 故名之 嶺西有竹竹祀 嶺頗高峻 通慶尙左道大路)

대동여지도에는 단양과 풍기 사이에 이름뿐만 아니라 선이 그어져 있다. 인(人)과 물(物)의 이동이 매우 많았다는 뜻이다.

조선후기 단양과 경북 풍기의 장시일은 5·10일과 3·9일로 각각 달랐다. 따라서 당시 보부상들이 죽령을 오가며 양쪽 지역 특산품을 거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죽령 모습이다. 주변에 봉수대(삼각형 표시)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경북 예천에서 단양을 가려면 삼각형 모양으로 죽령을 경유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멀리 돌아가는 모습이다. 남쪽 저수령이 그 지름길로 생겨났다고 전회에 밝혔다. <지도 참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죽령이 기능이 분화됐음을 의미한다. 조선후기 보부상들은 '길은 직선으로 가야 경제적이다'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역사속의 사건

죽령이 역사의 문헌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4백여년 후인 신라 진흥왕 때이다.

진흥왕은 거칠부 등에 명령해 죽령일대 10군(郡)을 공취했다.('王命居柒夫等 侵高句려 乘勝取十郡'-삼국사기 진흥왕조)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는 이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 '죽령 바깥 고현 안쪽의 10개 군을 빼앗았다'(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라고 적었다.

10개 군이 지금 어디인지는 학문적으로 규명되지 않았으나, 이때 그 유명한 단양 적성비(국보 제 198호)가 세워진다. 550년의 일이다.

이후 신라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가며 북진을 거듭, 555년에 서울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우고 557년에는 우리고장 충주에 중원소경을 설립한다.

고려말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들이 죽령을 넘어 자주 단양까지 쳐들어왔다. 고려사가 전하는 일부 내용이다.

'왜(倭)가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군(丹陽郡)에 침입하니 원수(元帥) 변안열(邊安烈), 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패주(敗走)시켰다.'-<고려사 열전 신우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관문 방어를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 결과, 첫 작품으로 세워지는 것이 조령 2관문(선조 27년·일명 조곡관)이었다. 죽령 중요성도 조령못지 않게 거론됐다.

'조령, 화현(이화령 지칭),죽령 세 곳은 돌길이 가파르고 산봉우리가 치솟아 있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마련하여 왕국을 세워준 것입니다. 만일 중심으로 조령을 지킨다면 왕경(王京)이 편안해질 것이요, 서쪽에서 화현을 지킨다면 전라도가 안전할 것이며, 동쪽에서 죽령을 지킨다면 강원도가 편안해질 것인데 어찌하여 천연의 험지를 그대로 방치한 채…'-<선조실록>

나아가 당시 조정의 대신 중 일부는 죽령을 포함한 3영로를 요새화할 것을 상소했다.

먼저 '길 한복판에 중관(重關)을 세우고, 옆에 있는 작은 길에는 모두 담을 쌓아 막아서, 왕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통행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밖에 '관 밖에는 모두 참호와 갱도(坑道)를 만들되 모든 수목을 베어버릴 것이며, 관 안에는 덮개 있는 영방(營房)과 혹은 우묵한 토굴을 만들어서 만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상소했다.

옛사람들은 경상도를 오가는 길로 조령만큼이나 죽령도 많이 이용했다. 사료에는 마의태자, 왕건, 안향, 정몽주, 정도전, 하륜, 금성대군, 이황, 윤선도. 유인석, 이강년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죽령은 평화기에는 상로(商路) 외에 여행이나 귀양길로도 이용됐다.

한국 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에 올라 있는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는 그의 생애에 모두 세번의 귀양을 가게 된다.

첫번째는 31살 때 함북 경원, 두번째는 경북 영덕(52), 서번째는 삼수갑산의 삼수(79)로 귀양을 가야 했다. 14년 4개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윤선도는 1차 유배 때 우리고장 조령을 지나갔다. 그리고 20년만에 다시 떠나는 유배길은 죽령을 넘어야 했다. 그는 이때 심정을 시로 남겼다. 제목은 '죽령을 지나며'(竹嶺道中)이다.

'지난번에는 일찍이 조령을 지났는데(昔歲曾鳥嶺去) / 이번에는 죽령에 와서 앞길을 묻네(今來竹嶺問前程) / 어떡하면 지난날 걸었던 곳 피할 수 있을까(如何回避經行處) / 태평시절에 이 길을 찾아야 부끄러움 지우리(傀殺明時有此行)-<고산유고>

'어떠하든 유배는 가야 말아야 되는데 또 가게 됐다'는 서글픔와 원망이 배여 있다. 그의 유배는 병자호란 때 인조에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서인이 아닌 남인이었다.

죽령 단양쪽 사면 9부능선 쯤에 위치하는 보국사지 장육불이다. 불두가 잘려나갔다.

◇현대 대형 사고

죽령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가 일제에 의해 지난 1940년에 개통됐다. 죽령은 경사도가 심하기 때문에 선로가 나선형(일명 똬리터널) 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도 한 바킈 빙 돌아서 죽령을 넘는다. 이 때문에 후진국형 대형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지난 1949년 터널 안에서 탈선 사고가 일어나면서 51명이 사망하고 3백6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는 증기 기관차였다. 터널 안에 연기와 수증기가 꽉 들어차면서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1968년에는 희방사를 출발하여 죽령으로 향하던 화물열차가 연결기 고장으로 화차가 떨어져 나가면서 25량이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화차가 2.3km를 험준한 비탈 선로를 기관사도 없이 미끄러지면서 그중 17량이 전복, 황소 51마리가 죽고 소장수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죽령은 그 자체가 옛길이면서 인근에 죽령역, 보국사지 장육불(사진 참조), 죽령사당, 죽령폭포, 죽령산성 등 다양한 명소와 유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명소는 아직 스토리텔링 식의 유기적인 연결이 안 되고 않다.
 옛길을 시급히 복원하고 도계를 넘어간 보국사지 죽절문석주도 당연히 반환받아야 한다. 여객업무를 취급하지 않는 죽령 간이역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단양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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