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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불한령(괴산 청천-문경 가은)

'이고 지고' 일제때 간도 이주자 많이 생겨났다
당시 신문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참상' 기사화
주변 명승지많아 김정희 등 묵객들 자주 찾아
옛길, 인적 완전히 끊겼으나 보존상태 꽤 양호
유교+산수문화 하나로 묶을 전시공간 꼭 필요

  • 웹출고시간2011.07.13 16:54:2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행정적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를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남쪽 대야산(930m)과 장성산(916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불한령의 GPS고도표로, 고도가 제법 높음을 알 수 있다(위). 불한령의 구배를 나타내는 고도표이다. 충북사면(우측)이 훨씬 가파름을 알 수 있다. (아래)

주변의 산세가 높은 만큼 불한령(弗寒嶺)의 해발고도는 비교적 높다. 510m이다. 고개 양사면도 비교적 가파른 편이고, 그 길이도 '연료가 많이 소모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편이다. 특히 청천 관평리에서 올라가는 충북쪽 사면이 더 가파르다.<그림 참조>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산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쪽 사면의 경우, 이제부터는 금강수계가 아닌 남한강수계가 등장한다.

서쪽의 물은 괴산 선유동-화양동-달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동쪽의 물은 문경 선유동-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우측 부분에 不寒嶺, 그리고 그 아래 仙遊洞과 內仙遊洞 표기가 보인다.

대동여지도는 백두대간 대야산 위에 '불한령'(不寒嶺)을 표시해 놓았다. 참고로 한자 '不'과 '弗' 자는 같은 뜻으로 '不'이 약자가 된다. 그러나 두 지역을 연결하는 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이는 조선시대 불한령이 공로(公露)가 아닌 상로(商路)로 주로 이용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대동지지(1861·철종)는 괴산현의 토산품으로 옻(漆), 지치(紫草), 꿀(蜂蜜), 누치(訥魚), 쏘가리(錦鱗魚), 대추(棗) 등을 적었다. 지치는 현재 자초 또는 자근으로 불리는 것으로, 한약재로 주로 사용된다.

문경현의 토산품으로는 감(枾), 잣(海松子, 송이, 석이(버섯 종류), 닥(楮), 꿀(蜂蜜), 웅담(熊膽), 은어(銀口魚) 등을 적었다.

따라서 보부상들에 의해 양쪽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주로 거래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시일은 괴산은 3·8일, 문경 2·7일로 역시 각각 달랐다.

불한령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922번 지방도가 새로 생기면서 지금은 인적이 끊겼다.

장시일이 다른 것은 보부상들이 불한령을 넘어 양쪽을 오갔음을 간접적으로 의미한다.

20년전 불한령 북쪽을 우회하는 왕복 2차선 922번 지방도가 개설됐다. 그 영로 정상이 버리미기재이다. <그림 참조>

그 결과, 불한령 옛길은 '人'과 '物'의 이동이 완전히 끊겼지만, 역설적으로 충북 고개 중 가장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쌍곡계곡에서 남쪽 방향으로 제수리치를 넘으면 517번 지방도를 만날 수 있다.

이 삼거리 바로 위의 오른쪽으로 농로가 존재하고, 이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비포장 도로를 만날 수 있다.

불한령 옛길 모습이다.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폭이 넓다.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도로폭이면 교통량이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불한령 옛길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도 불한령을 다소 비중있게 다뤘다.

여지도서(1572·영조) 문경현 산천조는 불한령을 '대야산 허리에 위치하는데 괴산 경계로 통한다(弗寒嶺 在大耶山腰 通槐山界)'라고 적었다.

대동지지(1861·철종)도 대야산이 중심이 된 일대의 지리적 환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희양산 남쪽 갈래로 주봉을 비로라 하고 선유동의 주산이 된다. 서쪽으로 청주 화양동 삼십리 거리에 있다.'(曦陽山南支 主峰曰毘盧 爲仙遊洞主山 西巨淸州華陽洞三十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내용이 있다. 현재 백두대간이 지나가면서 수계가 나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한령 서쪽과 동쪽 사면 계곡을 모두 선유동 계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같이 의도하지 않은 혼선은 적어도 조선후기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는 괴산 선유동을 '仙遊洞', 반면 문경 선유동은 '內仙遊洞'이라고 표기했다. 이는 양사면 모두가 경상도에 속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역사속의 음영

불한령 문경쪽 사면의 초입이다. 계곡 안에 펜션이 있어 옛길 일부는 포장된 상태다.

불한령 진입부에 위치하는 선유동은 구곡(九曲)이 설정될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구곡은 조선 선비들의 별장 개념으로, 지금도 산수문화의 1번지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러 묵객들이 불한령 일대를 찾아 그 명승을 노래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그중의 한 명으로 '선유동'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푸른 구름 조각조각 가을 그늘 이뤘는데(碧雲零落作秋陰) / 날리는 샘물조차 돌 숲에 뿌려대네(唯有飛泉灑石林) / 옥퉁소 불던 사람 떠나간 뒤부터는(一自吹簫人去後) / 계화향기 차가워라 오늘에 이르렀네(桂花香冷到如今)'-<완당전집 제 10권>

시 내용중 '계화'는 계수나무를 의미한다. 조선후기 문신인 농암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선유동 계곡을 끼고 불한령을 명랑한(?) 기분으로 걷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다. 제목은 '송면(松面)에서 외선유동(外仙游洞·괴산 선유동 지칭)으로 향해 가며'이다.

'산속 수십 리 걸어가는 길( 山行數十里) / 지저귀는 새소리 끊이지 않네(鳥啼無時歇) / 맑은 시내 버렸는데 다시 만나고(淸溪棄復得) / 구름 깊어 헤어나기 어렵지마는(白雲深難出) 우거진 숲 꽃송이 곱게 피었고(··長林花) / 푸른 못에 잠긴 해 일렁거리니(搖··潭日) /…/-<농암집 제 3권>

역사속의 불한령은 '밝음'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사연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일제가 만주 이주정책을 추진하자 불한령 아래의 충북사면 마을에서도 고향을 등지는 주민이 많이 생겨났다.

'먹고 살기 힘든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동아일보가 '男負女戴로 간도 이주군…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참상' 제목으로 그 사연을 기사화했다. '男負女戴'는 남자는 어깨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라는 뜻이다.

'…지난 십팔일 충북 괴산군 청천시장을 통과하야 수십명의 남녀가 남자는 의복과 금침 등을 질머지고 녀자는 어린아이를 업고 머리인들 편할 수 잇으나 하는 듯이 묵어운 것을 니고 북간도의 길을 찻는 모양은 마음이 잇고 눈물이 잇는 이로는 차마 볼 수가 업섯다는데'-<동아일보 1928년 2월 24일자>

'청천면 관평리와 가튼 곳에서 일동이 거의 북간도로 떠나게 되엇슴으로 뎨동(폐동 지칭)이 될 지경이라 하며 가산즙물을 방매하는 등 아즉도 뎍확한 숫자를 알 수 업스나 현재에 떠난 호수만 하야도 수십여호에 달한다더라.(청천)-<〃>

이밖에 동아일보는 1927년 11월 28일자 기사에서 '충북괴산 디방에서는 근일에 서북간도로 몰려가는 동포가 나날이 늘어간다는데 일전에도 연풍면 사람 팔십여명이 떼지어 갓엇고…'라고 적어, 당시 괴산 일대에서 만주 이주자가 많이 발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불한령 서쪽 사면의 주막터에 비가 세워져 있다. 서쪽 사면이지만 이곳 만큼은 경북에 속한다.

주변에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등이 설정돼 있는 것에서 보듯 불한령 일대는 유교문화의 명소이자 우리나라 산수문화의 1번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산들은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단단한 암질의 암릉이 많아 전국 산악인에게 인기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고개 아래와 중간에는 주막터와 산제당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등 전통 고개문화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이들 요소를 하나로 묶고 여기에 스토리텔링적인 요소를 가미하면 관광객 유인 효과가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묵객들이 일대를 찾아 시를 많이 남긴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면 작은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괴산군문화원, 산림청, 동아일보,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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