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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진천 종박물관

"혼을 담아야 천년의 소리가 나는 법"

  • 웹출고시간2011.07.14 15:39:0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소낙비가 내린 이후로 해 길어지고 청산이 더욱 우거졌다. 산 넘어 흰 구름 하릴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대자연은 석양 노을과 함께 깊어만 갔다. 마을 사람들은 논농사 밭농사 한창이고 구릿빛 얼굴에는 스멀스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골목길마다 소달구지 바쁜 걸음 재촉하고 아낙네는 새참 머리에 이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고갔다. 누렁이는 촐랑대고 시냇가 풀 뜯어 먹던 얼룩빼기 황소는 졸음에 겨운지 꾸뻑꾸뻑 세월만 낚는다. 노인들은 팽나무 아래에서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고 염소 떼 풀어놓고 풀밭에서 소꿉놀이하는 어린 아이들의 풍경이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서정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화를 닮았다고 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여름이 가고 귀뚜라미 처량하며 소슬한 바람으로 가득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옥수수 잎사귀 와삭거리고 수수밭에 알 찬 곡식 머리 숙이며 고추잠자리 코발트블루 하늘을 날던 초가을에 스무 살 청년은 몸과 마음이 심드렁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와도 되레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 일어설 기운마저 잃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 옆에서 종 만드는 재주를 어깨너머로 배운 게 후회막급이었다. 그 때 팔촌형이 내 팔을 붙잡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을 매일같이 끌고 다니지만 않았더라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뽐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공방에만 가면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쇳물을 녹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 올랐다. 붉게 빛나는 얼굴에, 주름진 목젖에, 검게 그을린 팔뚝과 등짝에 유리알 같은 땀방울이 솟구칠 때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팔촌형은 할아버지를 빼닮았다. 손짓 발짓 몸짓도 그러하고 눈빛까지 똑같았으니 종을 만드는 것은 우리 집안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곳을 탈출하면 무슨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팔촌형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종 만드는 일을 배웠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종을 만드는 기술도 늘지 않았다. 내 기술의 완성도는 종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종소리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종과 종메가 어울려야 온전한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래서 종메는 깊은 산속의 수백 년 된 소나무 중에서 곧게 뻗은 것을 잘라 잘 말리고 다듬어야 했고 마지막까지 상처하나 없어야 했다. 종과 종메가 부딪히면 온 몸이 으깨지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와 용기와 슬기로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때묻지 않은 대자연의 소리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인고의 세월속에 숱한 풍랑을 겪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것이어야만 했다.

아무리 좋은 종메라 할지라도 천년의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장인의 혼과 열정과 땀과 기예의 결실인 최고의 종이 아니면 뛰어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다 건너 일본도 가보고 중국으로 달려가 보았다. 세상의 종이란 종은 다 만나보고 그 형태와 디자인과 구석구석의 숨어있는 비밀을 찾고자 했다. 세상의 범종 중에서 으뜸이라 하는 통일신라 종에서 울리는 심연의 소리를 담기 위해서다. 통일신라 종은 무늬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리가 맑고 은은하며 향기롭다. 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향기를 만드는 것은 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화룡정점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애써도, 부단히 노력해도, 젖 먹던 힘을 다해도, 피를 토하고 온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담아도 만족할만한 소리와 향기가 나지 않았다. 후회막급이다. 종을 만드는 일이 이토록 힘든 노정이었으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에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했는데, 이 일에 집착하고 애정을 가졌던 그간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밤잠을 설치고 아침햇살 쏟아지기가 무섭게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근만근이었다. 혼미한 상태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쇳물을 붓는 순간 뜨거운 쇳물이 오른쪽 눈에 들어갔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뜨겁다는 생각을 가질 틈도 없이 고꾸라졌고 의식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늘과 산과 들을 한 바퀴 휘익 둘러보았다. 신기하게도 오른쪽 눈을 잃었는데 왼쪽 눈이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짧지만 긴 방황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최고의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오직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좋은 종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가졌다. 그러하니 내 몸과 마음이 더욱 단단해졌다. 밀랍과 쇠기름을 섞어 만든 초로 종 모형과 문형을 만들고, 겉에 흙을 바른 뒤 열을 가해 초를 녹였다. 그렇게 남은 흙 거푸집에 쇳물을 붓고, 도가니 속의 열을 고르게 유지하고, 불순물의 유입을 막으며, 1500도가 넘는 쇳물 온도를 유지하면서 내부의 공기가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숨을 쉬는 흙을 만들었다. 공정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일본 시마네현 광명사 보물고에 수장돼 있던 9세기 통일신라 종을 처음으로 복원했다. 1992년의 일이다.


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씨는 이렇게 해서 신라의 상원사 종, 선림원 종, 흥덕사 출토 범종과 고려의 내소사 종을 재현했다. 보신각 종,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조계사 종, 낙산사 동종…. 원광식씨가 재현하거나 복원한 종만 해도 100여개가 넘는다. 잡음이 섞이지 않는 맑은 소리, 골과 마루의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지고 멀리 퍼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과 은은한 향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잔잔하게 파도치곤 했다.


지난 2005년에 개관한 진천종박물관도 주철장 원광식씨와 무관치 않다.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백곡저수지 아래에 자리 잡은 종박물관은 건물자체가 종의 이미지를 닮아 흥미롭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성덕대왕 신종을 비롯해 150여개의 범종을 소개하고 있으며, 범종의 역사와 특성, 제작과정 등을 다양한 자료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광식씨가 기증한 보물급 복원 범종도 만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장인들의 밀랍주조 기법을 엿볼 수 있도록 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음통, 음관, 당좌의 특징을 소리로 비교체험 할 수 있다. 도자 회화 조각 등 타 장르의 미술전시도 병행하고 있으니 사전에 정보를 얻으면 좋겠다.

광장에는 각종행사나 체험학습이 가능한 야외무대와 역사테마공원이 있다. 상원사 종과 성덕대왕 신종 복제품을 세워 타종 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어린이 체험행사로 종 문양 탁본체험, 천연비누에 종 문양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연중 운영되고 있으며 물장구치며 동심의 세계로 풍덩 빠질 수 있는 공간까지 준비돼 있다.


종박물관과 이웃하고 있는 판화미술관으로 발걸음으로 옮겨 문을 살짝 열어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판화전문 미술관으로 방문객들을 판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 또한 인근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목판화계의 거목 김준권 화가와 무관치 않다. 숲과 나무, 산과 들, 바다와 호수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애틋하고 정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하니 종의 기원과 역사와 문화와 생태를 호흡하고 이것들을 한 폭의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을 보는 여행은 즐거움이자 새로움이요, 낯선 삶에 대한 설렘이자 신나는 놀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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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