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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6.10 19:15:4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본보는 2010 대충청방문의 해를 맞아 호서지방의 유적 및 명소를 탐방하는 '새 충청문화기행'을 연재한다. 임병무 프리랜서가 문화 현장을 탐방하여 그 의미를 재조명하면서 푸짐한 읽을거리를 제공, 독자들을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게 된다.

공남문 앞에서 바라본 상당산성 전경

"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에 파고 드는데/ 날 개이니 풍경이 청량하여라/ 들꽃에는 벌이 와서 꽃잎에 입 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 내려 향길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말고 저녁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바로 남방으로 떠나갈 것 일세"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반미치광이가 되어 세상을 조롱하며 전국팔도를 유랑하던 그가 청주에 와서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나보다. 상당산성에 이르러 청풍에 취하고 명월에 반해 '유산성(遊山城)'이라는 시를 남겼다.

공남문 잔디밭에 세운 김시습 시비

사적 제 212호로 지정된 상당산성에 오르면 산성 초입 잔디밭에 서있는 김시습 시비가 길손을 맞는다. 지난 2000년 7월, 청주문인협회와 청주시가 공동으로 해 세운 것이다.

오늘날 이 시비 근처에서는 여러 모임에서 벌이는 야유회나 레크리에이션이 날마다 펼쳐진다. 유치원 소풍 길도 여기에서 짐을 풀고, 대학 신입생 MT도 간간이 열린다. 아마도 김시습의 '유산성'을 따라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산성'은 '산성에서 놀며'가 아니라 '산성에서 배우며'로 해석되는 것이니 성의 고즈넉한 역사를 먼저 배우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유(遊)자는 일반적으로 '논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배울 유'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서는 '배울 유'롤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산성은 언제 누가 쌓은 것일까. 여기에 대해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고문헌에 등장하지 않음으로 신빙성이 없다.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인 원정공(元貞公)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이 다름 아닌 상당산성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불분명하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상당산성은 현재의 석성이 아니라 흙으로 쌓은 토성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으나 산성의 근처에서 토성이나 판축의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이런 가운데 필자가 지난 1989년, 오순균 씨가 경영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찾아낸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는 이 성을 궁예가 쌓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영조 21년(1774), 상당산성에 기거하던 승장(僧將) 영휴(靈休)가 쓴 이 기록에 의하면 '궁예는 상당산성을 쌓고 견훤은 까치 내(鵲江)변에 토성을 쌓아 서로 대치했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지난 2000년대 초,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미호문 일대의 서쪽 벽을 발굴하였는데 궁예 때 쌓은 성벽이 드러났다. 그때의 성벽은 현재보다 밖으로 나가 있고 성문도 그렇다. 이 성벽이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 아니라 후삼국 때 쌓은 것이라는 사실은 석축의 성 쌓는 기법에서 나타난다. 성돌에서는 이른바 '퇴물림' 기법이 나타났다. 성돌에 턱을 만들고 다듬어 쌓는 기법이다. 밑돌에 턱을 만든 후 그 위에 돌을 쌓으면 여간해서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랭이 기법'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은 오래된 고성(古城)에서 흔히 나타난다.

따라서 상당산성은 특정 시기에 쌓은 성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쌓은 성으로 봐야 한다. 현재의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영조 연간에 집중적으로 쌓은 산성이다. 성의 안팎을 돌로 쌓은 협축 산성이 아니라 밖은 돌로 쌓고 안은 흙과 자갈로 다짐을 한 이른바 내탁공법(內托工法)의 성이다. 상당산성은 수원의 화성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산성을 대표하는 성곽이다. 산성에는 모습에 따라 대략 두 가지로 분류된다. 산 능선에 쌓아 계곡을 감싸는 형태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라고 하고, 운동선수의 머리띠처럼 산의 이마에 돌려쌓는 산성을 '테뫼식' 산성이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포곡식 산성이 테뫼식 산성보다 더 크다. 어떤 경우에는 포곡식과 테뫼식을 겸하는 수도 있다. 둘레 4.2km에 달하는 상당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상당산성의 상당(上黨)이란 '윗 무리' 즉 지배계급을 뜻한다. 지난 1982년, 서원학회의 이재준 씨가 남문 밖에서 사탁부(沙啄部) 명문이 있는 기와를 수습한 바 있다. 사탁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와 같은 것이다. 이로보아 통일신라 신문왕 때 설치된 서원경성(西原京城)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지)가 바로 상당산성이 아니냐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서원경성의 치소에 대해선 우암산 토성 설, 상당산성 설, 청주 읍성 설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상당'의 의미대로 이 산성에 지배계급이 살던 것은 분명하다. 산성과 읍성이 대칭 꼴을 이루며 지역을 방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성 배치의 한 특징이다. 필요에 따라 산성과 읍성을 연결하는 나성(羅城)을 쌓기도 했다. 청주에도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나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평시에 향토사단장에 해당하는 충청병마절도사는 중앙공원 안의 충청병영에 기거했고 상당산성에는 병마절도사우후가 집무했다. 우후(虞侯)란 병마절도사 다음가는 벼슬로 오늘날로 치면 '부장 대우' '과장 대우' 등 '대우'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병마절도사는 평시에 읍성 안의 충청병영에 기거하다 전쟁이 나면 백성들과 함께 상당산성으로 옮겨 적을 방어했다. 우리의 고대전술 중 하나가 성문을 굳게 닫고 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농성(籠城)이라 했다. 오늘날에도 각종 시위현장에서 '단식 농성'을 하느니 하는 식의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때 쓰는 '농성'의 어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동쪽벽에 조성된 동암문.

상당산성에는 3개의 문과 2개의 암문(暗門)이 있다. 흔히 이를 일컬어 남문, 동문, 서문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일본식 방위명칭이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원래 우리식으로 하면 남문은 공남문,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미호문이라고 불러야 옳다. 일반적으로 정문인 공남문 앞에는 옹성(甕城)이 있어야 하는데 상당산성은 지형 상 옹성을 설치하지 못하고 그 대신 내옹성과 3개의 치성으로 기능을 보완했다. 옹성이란 독을 세로방향으로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모습으로 성문 앞에 설치되어 적의 침입을 막던 시설물이다. 오늘날 철옹성(鐵甕城) 운운하는 것도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암문은 비밀 통로다. 통신, 보급에 필수적인 문이다. 적병이 이곳으로 침투하면 곧바로 폐쇄되게 설계됐다. 동암문 벽에는 양덕부 패장 한량(梁德溥 牌將 閑良)이 음각되어 있다. 동암문 축조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사실명제인 셈이다. 그런데 양덕부는 이인좌의 난 때 반군과 내통하여 청주읍성의 성문(청남문)을 몰래 열어준 사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양덕부의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는데 이번에 확인하니 이름 석자가 모두 지워졌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다.

성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치성 부분

성벽 곳곳엔 불쑥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를 치성(雉城)이라 한다. 적병의 동향을 살피는 초소 역할과 더불어 적병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대각선에서 이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상당산성 공남문을 들어서면 내옹성이 시야를 가린다.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를 내옹성으로 불러도 큰 하자는 없으나 원래는 용도(甬道)라 불러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성 둑을 도는데 일정한 법칙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게 순서다. 공남문 위로 올라 서쪽 성벽을 따라가면 성벽 위에 작은 담이 있고 사각형으로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 이것을 여장(女墻)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여장에 뚫린 구멍을 따라 엄폐, 은폐를 하며 활시위를 당기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성벽 끄트머리에서 약간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를 눈썹 돌(미석:眉石)이라고 한다. 미석은 여장의 초석 역할을 하는데 산성의 여장은 미석이 있는 여장이 있고 미석이 없는 여장이 있다. 상당산성은 미석이 있는 여장이다.

서쪽 치성에서 바라본 상당산성 전경

상당산성 안에는 관아와 부속건물이 있었고 구룡사, 남악사, 장대사 등의 절이 있었는데 모두 없어졌다. 관아 터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고 아직도 관아의 초석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다. 전투시 지휘소 역할을 한 동장대(보화정)와 서장대(제승당)가 있는데 동장대는 복원됐고 서장대는 위치만 확인하였다. 성의 동쪽에는 민속촌이 들어서 있다. 이천년 청주 역사의 산 증인인 상당산성에서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향기에 취해야 순서가 아닌가. 이끼 낀 성돌에선 청주 역사가 스믈스믈 피어오르는데 산성은 비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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