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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공주 석장리

석장리에 문명의 지문 찍고 흘러가는 비단강

  • 웹출고시간2010.09.12 21:20:0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공주에 가면 3개의 강물이 흐른다. 하나는 미호천에서 흘러들어 고마 나루를 에둘러가는 비단 강 금강(錦江)이고 또 하나는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 말해주듯 30만 년 전부터 공주를 감싸 흐르는 역사의 강이며 다른 하나는 공주시민의 자긍심 속으로 흐르는 마음의 강이다. 물리적인 강과 역사의 강은 현장에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의 강은 공주의 곳곳을 돌아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감지된다.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은 풀꽃같이 여린 호흡으로 서정시의 강물을 빚어내어 마음의 강물을 보태는 시인이다. 공주사람들의 가슴마다 시심의 강물을 흘려보내어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문화의 꽃을 피게 하니 이 또한 강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비단 강이 비단 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백 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 년을 가는/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어 봅니다. (나태주 '비단 강' 전문)

공주 사람들의 금강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강물이 생활용수를 해결해 주는 혜택이외에도 공주의 역사와 풍광을 빚어낸 역사의 강물이기에 그 강물을 배경으로 여러 편의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낸다. 2010 대충청방문의 해를 맞아 금강을 중심으로 대백제전을 연출해 내는 것만 보아도 강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쉽게 눈치 채게 된다. 금강이 없는 공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금강의 그리움은 공주사람들의 가슴을 통과하면서 대백제전, 금강 자연미술제, 공산성, 무령왕릉 등 수많은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공주에서 말하는 이른바 '스리 박' (박동진, 박찬호, 박세리)도 금강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런데 지난 달 28일에는 또 다른 배움의 강물이 공주문화원을 밀고 들어왔다. 소위 '고고학과 문학의 만남'이다. 지난 5월부터 공주문화원은 대충청방문의 해를 맞아 공주시와 손을 잡고 '명사와 함께하는 공주여행'이라는 상품을 내놓았다. 첫 회 김남조 시인 초청을 필두로 고은 시인, 소리꾼 이걸재, 나태주 시인에 이어 이번에는 손보기 교수를 도와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원장을 초청 '석장리 유적 이야기'라는 주제로 고고학 여행을 떠났다.

이 아이템은 지역민과 더불어 외지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서울의 몇몇 여행사에 의뢰하여 공주여행의 아이템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날도 서울 백미문학회(회장 김혜숙)에서 80여명의 회원이 공주나들이에 나섰다. 지역에서 서울의 문화관광객을 모집하는 '역 문화 마케팅'이다. 고고학과 문학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마는 학문의 퓨전시대에는 이도 가능한 모양이다. "소설을 쓰려면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호흡이 긴 문학작품이 나오거든요" 공주문화원장을 맡으며 이 상품을 개발한 나태주 시인은 역사와 문학의 연관성을 에둘러 밝힌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바로 공주 석장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30만 년 전이니까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것보다 60배도 더 되는 긴 세월이네요. 말하자면 우리나라 구석기학의 출발점이 된 곳입니다. 당시 저는 연세대 사학과 조교로 손보기 교수님을 도와 이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손보기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유적을 발굴했고 주먹도끼라든지 찍개, 긁개, 밀개 등 고고학 용어를 우리말로 표현했습니다. 지하 7m쯤 들어갔는데 물이 차올라 양수기로 물을 퍼냈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지하 11m쯤에서는 하는 수 없이 물속에서 석기를 건져 올리기도 했답니다. 현장에 벽돌집을 지었는데 그만 홍수에 떠내려가는 일도 있었구요, 사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서로 머리를 깎아주는 장면입니다. 교통이 열악하여 읍내에 가서 이발할 처지도 못됐습니다. 결국 현장에서 무리를 하다 그만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했지요. 이게 바로 그 사진입니다"

이융조 원장의 열강에 문학회원들은 귀를 기울이며 그 오랜 역사를 탐험했다. 그 빛바랜 흑백 사진은 우선 기록적인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문학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소재가 되어 다른 모습으로 변용(變容)돼 탄생할지도 모른다. 사라 넬슨이라는 작가는 우리나라 대표적 신석기 유적인 양양 오산리를 소재로 소설을 쓴 바 있다. 외국인도 우리나라의 선사유적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판인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장르를 파괴하는 학문과 예술과의 만남 효과를 기대해 볼 일이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강의내용 중에서 퀴즈를 내어 김남조 시인의 시집을 한권씩 나누어 주었다.

지금은 한반도에 구석기 유적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발굴조사 사례도 흔히 나타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암흑기만큼이나 한반도의 선사유적이 조명을 받지 못했다. 구석기를 연구하는 학자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구석기 유적이 나온다 해도 식민사관에 의해 폄훼되기 일쑤였다. 지난 1935년 함북 종성 동관진(潼關鎭)에서는 일제가 만주 철도를 놓다 구석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음에도 유구가 교란됐다는 이유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를 조사한 일인학자가 구석기 유적으로 볼 수 없다 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 내에서도 그만한 유적이 안 나오는 판에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이 나왔다고 인정하면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도 우리나라 고고학은 초보 수준이었다. 설상가상 격으로 1948년 미국 하버드대의 핼럼 레너드 모비우스 교수는 "인도 동쪽에는 주먹도끼가 없고 찍개 등만 존재한다"라는 이른바 '모비우스 라인'을 발표해 우리를 주눅 들게 했다. 그 후에 중국, 한반도 등지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잇따라 발견되어 '모비우스 라인'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단양 수양개 등지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서구 위주의 고고학을 깨트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석장리를 발굴한 손보기 연세대 교수나 고 김원룡 박사 등 한국구석기의 1세대 학자들이 그 첨병역할을 해낸 것이다.


석장리 유적은 1964년, 미국인 대학원생 앨버트 모아와 그의 아내 엘 샘플이 뗀 석기를 찾음으로 해서 알려졌다. 곧바로 연세대 손보기 교수가 현장조사에서 이를 확인했고 그해 11월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1974년까지 10차례나 발굴하였다. 그 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11차, 12차 (1990~1992)조사를 마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발굴결과 전기구석기(30만 년 전)에서부터, 중기구석기(10만년~3만년), 후기구석기(2만년)~신석기~청동기에 이르기까지 13개 문화층이 확인된 표준유적으로 나타났다.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유적 발굴이자 최장 발굴을 기록했다.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 찍개, 긁개, 밀개 등 수많은 석기와 후기구석기시대의 집터, 화덕자리, 사람머리카락 등도 발굴조사 되었다.

이융조 원장은 석장리 발굴이 '친 서민 발굴'이었음을 강조한다.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을 때 많은 주민을 인부로 채용하여 마을의 소득을 높게 해주었다는 얘기다. 이날 행사에는 김동은 씨(70) 등 당시 현장 인부로 일하던 여러 명의 석장리 주민이 참석하여 40여 년 전의 당시를 회고했다. "그 때 나무 한 짐 해서 팔아야 5백 원을 벌었는데 발굴현장에서 하루 일하면 1천 원을 줬거든, 나중에서 하루 일당으로 2~3천 원을 주더라구...농사짓는 것 보다 백번 나았지" 손보기, 이융조 교수와 발굴현장에서 동고동락한 김씨의 말이다. "그때 석장리 주민 30여 명이 여기서 일했는데 거의 다 죽고 이제 3명만 남았어..." 당시를 회상하는 김 씨의 눈에서 이슬이 맺힌다.

석장리 유적은 이런 고통 속에서 탄생하고 빛을 보았다. 1990년 10월26일에는 사적 334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현장에 박물관이 들어섰고 막집, 집 자리 등 2만 년 전의 주거시설이 재현되어있다. 석장리 옆으로는 태고의 비단 강이 여전히 굼실굼실 흐른다. 충청도 사람의 심성을 알기라도 하는 듯 서두루지 않고 양반걸음으로 조용조용히 흐른다. 30만 년 전의 강물도 그랬을 것이다. 청주 사람들이 공주 석장리 유적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같은 주(州)자가 들어가는 고도인데다 진천 장관리, 청원 만수리 등 금강 상류에 문명의 지문을 찍고 간 구석기인들이 석장리에서 다시 문명을 횃불을 밝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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