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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정북동 토성

청주 역사의 원형질 간직한 미호천의 파수꾼

  • 웹출고시간2010.12.20 01:36:4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정북동 토성 입구의 표지석

정북동 토성(사적 제 415호)가는 길에 무진장 피어나던 달맞이꽃이 자취를 감추고 흰수염 억새풀이 머리채를 흔들며 겨울 노래를 서럽게 부른다. 까치 내에서 정북동 토성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맵다. 지난 가을, 옹골차게 여문 오곡백과는 곳간으로 들어가고 빈 들녘엔 그저 바람만 스쳐간다. 정북동 토성으로 입성하자면 정하에 있는 마애비로자나불의 검문을 받아야 한다.

비로자나불은 불지(佛智)의 무변광대함과 광명을 뜻하는 부처다. 전국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하는 법당은 수도 없이 많으나 바위에 부조 양식으로 세운 마애비로자나불은 이곳 부처님이 유일하다. 속칭 돌산으로 불리는 바위산의 돌출된 암벽에 비로자나불을 새겼다. 높이 323cm, 머리높이 65cm, 연화대좌 높이 45cm, 연화대좌 폭 214cm 규모로 조성된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 9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화려한 연꽃받침 위에 결가부좌를 한 이 마애불은 비로자나불로 드물게 모자를 썼고 머리 뒤로는 둥근 형태의 두광(頭光)이 표현되어 있다. 이마 한가운데 백호를 끼웠던 구멍이 남아 있다. 큼직한 귀에 목에는 삼도(三道: 세겹의 목주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 무늬가 유려하게 무릎 위로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 손으로 왼쪽 검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손 모양(手印)이 인상적이다. 모든 부처는 대개 손바닥을 펴고 있는데 이 부처 만큼은 주먹을 쥐고 있다.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복싱이나 격투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백팔번뇌를 감싸 안는다는 뜻이다. 천년을 한 자리에 머물며 길손을 안내하는 돌부처는 얄팍한 가사 한 벌로 긴 겨울을 난다. 게다가 인근의 충북선 기차소리와 항공기 소음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 그래서 한낮에 조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정북동 까치 내, 합수머리로 가는 이곳에는 큰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을 기점으로 우물아래(정하), 우물 위(정상), 우물 북쪽(정북)마을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 우물은 물맛 좋기로 소문났었다. 오가는 장꾼의 목을 축여주던 길가의 우물은 없어지고 지명만 남아 있다. 일대는 논밭이 많고 산이 적다. 산이라고 해야 해발 100m 안팎의 구릉지대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다'라는 비산비야(非山非野) 문구가 고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벌판이다.

정북동 토성의 남문터와 동쪽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는 성벽

이곳에서 까치내 쪽으로 1km 쯤 거슬러 올라가면 정북동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청주시로 편입되었으나 주민들은 대개 농사를 짓고 있다. 이를테면 도·농 복합지구다. 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 표석이 길손을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이 정북동 토성임을 알리는 표석에는 동네 이름을 '梧竹, 머귀대'로 표현하였다. '머구'는 오동나무를 뜻한다. 오동나무, 대나무 동네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어색하다. 터를 뜻하는 대(垈)를 대(竹)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정북동 토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2~3세기 마한(馬韓)시대나 이른 백제시대에 쌓은 토성으로 청주 역사의 원형질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 꽤 많은 토성이 존재하고 있지만 네모반듯한 토성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은 정북동 토성이 유일하다. 둘레 675m에 달하는 정북동 토성은 사방이 동서남북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각 방향마다 산성과 대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족으로는 우암산성과 상당산성을, 서쪽으로는 부모산성을, 남쪽으로는 문의 양성산성을, 북쪽으로는 증평 두타산성과 오창 목령산성을 마주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미호천이 흐르는 하천가에 토성을 쌓은 것일까. 아마도 청주에서 진천으로 이어지는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금강으로 흘러드는 미호천을 지키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미호천 변의 알토란같은 퇴적층을 차지하기 위해 삼국이 서로 싸운 것이다.

이 토성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 1980년, 이원근, 민덕식 씨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4년 후 충북대 차용걸 교수가 '방형 토성의 이례(二例)'라는 논문을 통해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그 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우리나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삼국시대의 완벽한 네모꼴 토성'이라는 사실을 재차 입증했다. 1차 축성시기는 2~3세기로 마한, 이른 백제 시기에 해당하며 2차 축성시기은 후삼국이 다투던 9세기로 추정된다.

지난 1989년 5월에 필자는 청주시내 오순균 씨가 운영하는 모 골동품 가게에서 상당산성과 정북동 토성에 관련된 매우 희귀한 고서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이 바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史蹟記)이다. 조선 영조21년(1774), 상당산성에 거주하던 승장(僧將) 영휴(靈休)가 쓴 이 책은 비록 야사이긴 하나 이 고장 고대사를 밝힌 만한 중요한 자료다. 주인과 나그네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체로 기술하였는데 상당산성의 궁예와 정북동 토성의 견훤의 대치상황을 묘사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견훤은 주야로 2백여리를 걸어 궁예가 지키고 있던 상당산성을 빼앗고 서문 밖 작강(鵲江:까치내)에 토성을 쌓아 창고를 짓고 세금을 거둬 성안으로 운반해 갔다'고 적고 있다. (西門外 鵲江邊 築土城 作倉庫 受賦稅). 견훤이 상당산성을 점령하자 고려 태조 왕건은 이를 치기 위해 복지겸과 의논하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로 정북동 토성과 상당산성을 발굴해 본 결과 이 문헌과 일치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다. 고대의 산성은 토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중국의 만리장성은 지금의 벽돌성이 아니라 토성이었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 무슨 방어역할을 했겠느냐는 의문도 들겠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병장기라고 해야 창, 칼, 화살이 고작인 시대여서 토성을 적병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토성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흙더미를 마구 퍼다 부은 게 아니다. 성벽의 안팎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나무판자로 구분하여 흙과 진흙을 교대로 흙다짐을 하면서 쌓아올린 것이다. 토성의 성벽을 절단해보면 마치 시루떡과 같은 판축 흔적이 발견된다. 흙다짐을 암팡지게 했기 때문에 굴삭기의 삽날이 튕겨나갈 정도다.

동문 성둑에서 남쪽 성둑으로 바라본 토성 모습.

정북동 토성의 문터는 서로 엇갈려 있다. 옹성의 초기 형태다. 옹성은 독을 세로방향으로 쪼갠 듯한 모습이다. 성문 앞에 대개 옹성을 쌓아 시야를 차단하고 침투하는 적병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엇갈린 성벽에서 적병이 헤매는 사이에 대각선 지점에서 적병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정북동 토성의 성문터는 이곳에 거주하던 농민이 농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일부 훼손되었으나 정비과정에서 말끔히 보수하였다. 성벽 곳곳에는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를 치성(雉城) 또는 곡성(曲城)이라 한다. 이 또한 적을 대각선으로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성벽이 돌아가는 모서리에는 초소격인 각루(角樓)를 조성했다. 까치 내 옆에 토성을 쌓은 사람은 누구일까. 흙다짐이 예사롭지 않은 점을 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 수 만 명의 노역군이 동원된 듯하다. 그렇다면 팔결다리 근처에 사는 까치 내 사람들만이 그 노역에 참여한 것일까.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송절동, 봉명동에 사는 청주사람들이 대규모로 동원된 듯 하다.

그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송절동, 봉명동, 신봉동 백제고분의 문화양상이 정북동 토성과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을 보면 '쇠뿔손잡이 토기'라든지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 '민무늬토기' 등 삼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인 원삼국 시대 토기가 대다수다. 정북동 토성의 유물은 청동기 시대에서 원삼국 시대를 거쳐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문화의 전환기를 그대로 말해준다. 남문 터 안쪽에서는 청동기 집터와 화덕·불탄 흔적·숯 등이 나온 점으로 보아 성을 쌓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점을 알 수 있다. 집터를 가로질러 큰 기둥구멍이 1.5~1.7m 간격으로 20여개가 확인되었는데 목책을 세웠던 시설로 추정된다. 남문 밖에서는 최대너비 17m의 해자(垓字: 적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파놓은 연못)가 확인되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성 둑은 낮아졌지만 아직도 4m 가량의 높이가 남아 있고 675m 둘레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성벽을 한 바퀴 돌자면 20~30분 정도가 걸린다. 근대에 이르러서 토성 안에는 주민이 촌락을 이루었고, 성 안에서는 소채류를 경작하였다. 최근 정비 과정에서 주민을 이주시켰고 경작지엔 잔디를 심어 사적공원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상수리나무와 잡목이 울창했던 성 둑도 말끔히 잔디 옷을 입었다. 성 안 곳곳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정북동 토성의 역사를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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