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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수양개 유적 발견 30주년

고고학 달력에만 존재하는 '수양개의 날'
"지난 7월 21일로 발견 30주년
생사를 건 도강, 지금도 아찔
지금생각해도 미친 일…"

"세계 석할들의 발길 이어져
슴베찌르개, 일본서 공식화
모든 유적에는 생명이 있다"

  • 웹출고시간2010.08.01 19:13:5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달력을 보면 공식적인 국경일, 기념일 이외에도 무슨 무슨 날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여기에다 집 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다보면 무싯날이 별로 없다. 2010년, 7월 21일은 무슨 날일까. 일반 달력에는 무싯날이지만 고고학자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원장과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후기 구석기유적인 단양 수양개를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코끝이 찡하고 가슴 아린 아주 특별한 날이다. 바로 수양개 유적을 찾은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기에 이 원장은 이 날에다 기억의 방점을 찍어놓았다. 이 날은 이 원장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수양개 날'이다. 30주년을 맞는 올해, 이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사흘이 지난 7월 24일. 당시 생사를 같이했던 사람들과 단양군청 관계자들, 언론계 인사들, 김재호 단양문화원장, 고고학계 인사들, 제자들 등 2백여 명의 '수양개 패밀리'를 초청, 30년 전의 추억을 되새기고 감사장 등을 전달하며 수양개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 고마운 뜻을 전달했다.
 
여기에서 '생사를 같이했던...'이란 표현은 필자가 임의로 부풀린 표현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고민(·) 끝에 선택한 문구다. 시간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사태로 민초의 한 숨과 피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지난 1980년 여름, 한 맺힌 하늘에선 장맛비가 연일 퍼부었다. 며칠 동안 750mm가 내린 보은에서는 산사태로 20명이 매몰됐다는 뉴스가 라디오, TV에서 흘러나왔다. 상습 수해지구인 단양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원장

 충북대 역사교육과 학생들과 수양개 답사에 나선 이융조 교수는 '답사를 강행하느냐, 철수를 하느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계속 내린 폭우로 답사반은 생쥐가 되었고 남한강의 황토 빛 물결은 답사반을 금방 삼킬 듯했다. 일엽편주에 올라탄 답사반을 보고 노를 젓는 늙은 사공은 욕을 패대기로 퍼부었다. "이 미친 사람들아, 죽으려고 환장 했어..." 맞다. 그 노사공의 말대로 이건 미친 짓이다. 다는 사람들은 물난리를 피해 위쪽으로 피신을 하는데 답사반은 반대로 성난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으니 말이다. 이 교수는 속으로 후회를 하면서도 나룻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다.

 

단양군 애곡리 수양개 유적 발굴 장면

천신만고 끝에 강을 무사히 건넜다. 강을 건너기 전, 새마을 지도자가 끓여 준 라면으로 요기를 하였으나 또 배가 고파왔다.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우종윤 학생(현 충북대박물관 학예실장)을 민가로 보내고 강 마을인 수양개 콩밭을 조사하는데 점판암(셰일)으로 만든 격지가 눈에 들에 들어왔다.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검은 돌로 된 것만 찾아라"하니 곳곳에서 석기가 찾아졌고 금세 1백여 점의 석기가 모아졌다. 1만5천 년 전의 수양개 유적은 이렇게 찾아진 것이다. 이틀 동안 세차게 내리던 빗발이 가늘어졌다. 석기를 찾는 맛에 배고픔도 잊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답사로 1천 여 점의 석기를 모았다. 그러나 막상 구제발굴에 들어간 충주댐 수몰지역 발굴 대상지역으로 수양개가 빠져 있었다. 박물관장의 직책이 아니었더라면 수양개 유적이 영원히 물에 묻힌 뻔 했다. 충주댐 유적 발굴조사단 및 관계당국과 다시 협의를 하여 이 지역을 조사대상지역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래서 발굴조사단이 구성됐다. 역사교육과 학생들도 여럿 포함됐다. 하문식(세종대 교수), 우종윤, 이충섭, 이윤제, 김옥현, 최경희, 김석훈, 조상기, 윤용현 등 제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이장 댁에서 식사를 하고 마을회관에서, 천막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나중에는 발굴 후 되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민가를 10만 원에 샀다. 제대로 보상되지 않은 땅의 사용료, 배 삯 등에도 원만히 타협을 보았다. 주민들은 발굴작업에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당시 충주댐조사단 본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승용차(포니)는 아주 요긴한 교통수단이었다.

 

수양개 유적서 출토된 슴베찌르개

1차 발굴에서부터 대박이 터졌다. 표토에서 30cm도 채 안 들어갔는데 유물층이 확인되었다. 슴베찌르개, 좀돌날 몸돌, 돌날 격지 등이 잇따라 알몸을 드러냈다. 무려 1만5천 년 만의 외출이다. 이 교수는 그때의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발굴단은 망중한을 내어 남한강에서 수영도 하며 올갱이(다슬기)도 잡았다. 이장이 가끔 끓여내는 민물매운탕과 학생들이 잡아 요리한 올갱이 탕은 아주 별미였고, 그런 별식은 지친 심신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3년, 충북대에 사학과가 개설되어 이윤석, 노병식 등 사학과 학생들이 합류했다. 천군만마를 얻기라도 한 듯 발굴단은 흡족했다.
 
기일 안에 발굴조사보고서를 정성껏 작성했으나 유적이 너무 방대하여 이것으로 발굴조사를 마치기에는 뭔가 미진했다. 발굴연장에 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대로 물속에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수자원 공사를 방문하여 그 당위성을 설명하니 적극 협조적이었는데 충북도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도청 간부와 고성이 오갔다. 도청관계자는 '감사대상'이라는 점을 들어 발굴 연장 호소를 봉쇄했다. 이 교수는 당시 황영시 감사원장까지 만나 발굴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런 로비 끝에 수양개의 2차 발굴은 가능해졌다. 유적이 넓어지면서 훌륭한 유물들이 세트로 나왔다. 발굴대원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2차 발굴도 미진한 상태에서 막을 내려야 했다.
 
이 교수는 고백했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허가 없는 발굴을 자비를 들여 3차 발굴에 나선 것이다. 부인이 약국을 하여 쌍화탕, 활명수 팔은 돈을 발굴비로 쓴 것이다. 이점에 대해선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한 심정이다. 수양개 발굴은 끝이 없어 보였다. 하면 할수록 진귀한 석기가 자꾸 출토되니 이를 어쩌랴. 4차발굴의 필요성이 재개되었다. 다행히 수자원공사와 충북도의 협조로 발굴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충주댐의 물은 점점 차올랐다.
 
4차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수양개 마을은 모두 철거되었고 발굴조사대원 40여 명만 남게 되었다. 이때에 인부 한 명이 리어카 길을 만드느라고 벽을 정리하다가 흙더미에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다행히 재빨리 구조하였다. 발굴면적 1250㎡로 단일 발굴사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발굴면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까지 출토된 석기만 해도 3만 여점에 이르고 49개소에 달하는 석기제작소가 나왔으며 소뼈 정강이에 새긴 물고기 예술품도 출토됐다. 국화과, 명아주과에 속하는 씨앗들은 당시에 진통제로 썼을 것으로 추정됐다. 수양개 유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프랑스의 룸리, 러시아의 데레비안코, 폴란드의 루시나 도만스카, 탄자니아의 피델리오 마사오, 일본의 암비루 마사오, 미국의 마이클 조킴, 고 김원룡 교수, 손보기 교수 등 세계 석학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수양개 유적서 출토된 주먹도끼

 이 교수는 이런 발굴결과를 정리하여 1989년 미 메인주립대학과 북경에서 열린 국제고고학 학술대회를 필두로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등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가, 수양개발굴의 성과를 소개하며 수양개 유적이 동북아 후기구석기유적의 중심축으로 후기구석기 문화의 전파에 고리역할을 했다는 학설을 내놓아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부터 수양개 유적은 국제고고학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주연급 스타로 급부상했다. 일본 명치대는 지난 2004년 개교 123주년을 기념한 학술대회의 포스터에 수양개 출토 슴베찌르개를 표지화 심벌마크로 게재했다. 일본 후쿠오카 시립박물관이나 구마모토 박물관에는 후기 구석기의 문화가 한반도 단양 수양개에서 전파되었다고 화살표로 명기하고 있고 지난 1997년에는 나고야성 박물관 학예팀이 충북대에 머무르며 슴베찌르개 10점을 복제해갔다. 뿐만 아니라 단양 수양개 출토 주먹도끼는 우리나라 중고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고 2006년 2월부터는 대영박물관 한국관 실에 한국 선사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전시되고 있다. 수양개유적은 1997년 사적(제 398호)으로 지정을 받았고 이융조 교수는 1996년부터 단양과 해외를 오가며 수양개 국제학술회의를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라는 주제로 매년 열고 있다.

수양개 발견 30주년 기념식 광경

지난 5월에는 15회 수양개국제학술회의를 단양에서 열었다. 단일유적에 대해 15회나 계속되는 학술회의는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른바 '수양개 패밀리'가 국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수양개 야외 박물관 전경

수양개 발굴현장에는 드디어 '수양개 야외박물관'이 들어서 발굴유물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게 됐다. 2006년 7월에 120억 원을 들여 준공된 '수양개 박물관'은 이제 단양의 자랑꺼리이자 명소가 됐다. 이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유적은 생명이 있는 것 같고 또 그 맡은 바 역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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