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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음성장의 어제와 오늘

통영갓 쓴 칠순 노인 대신 파란눈의 외국인 '들썩'
군청 앞 1㎞ 도로 통째로 점령 '비정상 구조'
현지상인·외지 장돌림 갈등… 제도정비 필요

  • 웹출고시간2013.07.28 17:49:0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83년 어느 날

1980년대 초 음성장의 모습. 장돌림들이 싸리비를 팔고 있다.

ⓒ 임병무
해발 204m의 백마령(白馬嶺)을 숨 가삐 오르면 담배와 고추의 산지로 이름난 음성 땅이 한 발치 앞으로 다가선다. 백마산 중턱이나 가섭산(加葉山) 산마루에서 이따금씩 마파람이 불어오긴 하나 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다. 뿜어대는 대지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녹이고 직행버스는 그 바닥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음성으로 치닫는다.

대개 군이나 면 단위 시장이 도시화·산업화 추세로 사양길을 걷고 있는 게 통례이나 음성 저자바닥은 어제도, 오늘도 매양 북적거린다. 꼭 물품 구입이 필요치 않아도 장터거리를 한 바퀴 돌아봐야 살맛이 난다는 게 시골 주민들의 습성이다.

여기에서 퉁뱅이뜰의 사돈 영감도 만나고, 세거리보의 오촌 당숙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뱃속이 허전하면 시장 모퉁이 포장집에서 사발 막걸리에 장떡으로 초벌요기를 채우고 다시 시장바닥을 돌아본다.

피복전 어름에는 초장부터 꼭두각시 놀음이 한창이다. 사당패에서 하는 전통적인 꼭두각시 놀음이 아니라 태엽을 감은 플라스틱 인형이 북도 치며 장구를 친다. 이른바 손님을 끌기 위한 작전이다.

"옳지 잘 돈다. 못생긴 요놈이 이제부터 홍도야 울지 마라,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를 판인데 노래가 안 나오면 내 모가지를 비틀어 놓으라구. 그리고 이 궤짝 속에는 설악산에서 잡은 구미호가 있는데 꼬리가 아홉 개요, 머리가 두 개란 말이여."

청산유수 같이 쏟아지는 장돌림의 입담과 손재간에 넋을 잃고 있는데 구미호 구경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아랑곳없이 대뜸 홀태바지를 꺼내들고 나선다.

고추는 숫제 관떼기로 거래된다. 장정 두 어명이 대저울을 양쪽에서 짊어지고 무게를 달아보고 있다.

ⓒ 임병무
그 옆으로는 목물전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두엄 나를 때 필요한 바소쿠리, 샛밥 지어 나를 때 요긴한 대광주리, 전을 부쳐두는 채반, 씨앗을 담아두는 함지박 등 농가에서 필요한 물목(物目)을 잔뜩 차려놓고 있다.

박달재를 넘어왔다는 40대 아낙이 산 버들로 만든 키를 목물 장수에게 넘기려 한다. "제천에서 7천원씩 팔았는데 5천원씩만 쳐주세요. 옛날부터 키는 쌀 한 말과 맞바꿨다구요."

초여름의 뙤약볕이 싫었던지 집집을 돌며 키를 팔던 아낙은 도매금으로 물목을 후딱 넘긴 뒤 자리를 뜬다.

음성천 변 우시장도 제법 성시를 이룬다. 출하된 소는 줄잡아 500여두. 향시(鄕市)의 우시장 치곤 제법 규모가 크다.

아랫녘의 소몰이꾼들은 대개 상주~보은~청주~음성을 거쳐 경기도 장호원으로 빠졌다. 일단 이곳까지 소를 몰고 가면 송파 소몰이꾼들이 인계인수를 받아 길을 재촉했다. 그래서 경기도와 접경지대인 감곡은 영남과 한양 쇠살주들이 들끓었고, 곳곳에는 마방(馬房)이 즐비했었다. 지금의 음성 하당리 2구에도 꽤 여러 곳의 마방이 남아 있다. 인근 주민들은 할아버지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마방일에 숙달돼 있고 소몰이에도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

세종실록에 나타난 음성의 특산물을 보면 쌀, 보리, 피, 콩, 기장, 조, 팥, 녹두, 메밀, 참깨, 뽕나무, 닥나무 등이 있다.

토산품으로는 꿀, 밀, 대추, 족제비 털, 여우가죽, 잇(홍람화), 자초, 종이가 유명했다. 인삼과 산골(自然銅), 복령(茯笭) 등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오늘날 음성지방의 특산물은 황색 연초와 고추, 과일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고추는 연간 4만5천t이 생산되고 이로 인한 농가소득이 무려 110억원에 달한다. 수년 전 고추 파동이 일었을 때 서울 등지의 유수한 관광회사가 고추의 명산지 음성을 당일 왕복한다는 조건으로 고추 관광객 모집 광고를 낼 정도였다.

궁벽한 산골마을이 특산물의 재배로 호당 300여만원의 농가 소득을 올리는 잘 사는 마을로 탈바꿈한 것이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

◇2013년 7월의 어느 날

음성 5일장은 사진에서 보듯 차도 자체를 막은 채 들어선다. 운전자들과 상가 상인들의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 / 임장규기자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다. 산골마을 음성은 어느새 인구 10만명을 바라보는 '기업 도시'로 거듭났다. 새 일거리를 찾아, 새 가정을 찾아 2억만리 땅에서 건너온 외국인도 8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음성 5일장은 혁신의 물결을 타고 변화의 몸짓을 했다. 봇짐·등짐 대신 1t 트럭이 등장했고, 통영갓을 멋스럽게 쓴 칠순 노인 대신 뽀글 머리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장돌림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잠비카(오른쪽)씨가 그의 직장 동료와 함께 장을 보고 있다.

ⓒ 임장규기자
"Can you speak Korean?" "네, 왜요?"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외국인 근로자 잠비카(34)씨의 능숙한 한국어에 기자의 어설픈 영어 발음이 머쓱해진다. "오늘 쉬는 날이라 장보러 왔어요. 양파, 감자, 가지 샀어요. 여기 정말 싸요."

그는 인근 마트보다 5일장을 더 즐겨 찾는다고 했다. 말만 잘하면 값을 깎을 수 있는데다 물건도 덤으로 가져갈 수 있다고 자랑한다. 까무잡잡하면서도 반들반들한 얼굴의 이 사람이 외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오늘날의 음성 5일장은 매월 2일, 7일 군청 앞 도로에서 열린다. 군청 사거리에서 시장로 사거리까지 970m의 도로에 빽빽하게 장이 들어선다. 음성천 쪽 3개 골목에도 장사진을 친다.

다른 지역의 5일장은 대개 상설시장 주변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음성은 특이하게 장날마다 도로 자체를 막는다. 도로 양 옆 인도 변엔 상가들이 즐비한데 장날만 되면 트럭 대매 천막에 가로막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장날만 되면 아예 문을 닫는 가게도 있다고 한다.

2~3층 모양의 주택형 상가 구조를 한 음성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전쟁 후 형성된 목조 건물형 시장을 40~50년 전에 1㎞ 뒤편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상인들이 움직이질 않았다. 힘들게 자리 잡은 상권을 빼앗기기 싫었던 게다.

5일장도 상가 시장을 떠나지 않고 반세기를 함께 했다. 음성천과 음성 양조장, 음성 주공아파트 터에 순차적으로 있던 우시장만 세월의 파고를 이기지 못하고 20여년 전 감곡면으로 떠나버렸다.

현대식 도시계획 이후에도 아스팔트 도로를 통째로 장악하고 있는 5일장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불러 왔다. 평일 같은 경우 군청으로 향하는 직선도로가 막히다보니 인근 도로에 잦은 교통체증이 빚어졌다. 대형 트럭을 동반한 장돌림들의 위세에 현지 상인들은 점점 설 곳을 잃었다.

"말이 좋아 장날이지. 열에 아홉은 외지 장돌림들이라오. 대전, 옥천, 영동 등 음성 이남(以南) 장돌림들이 많은데 순 날강도(?)들이야. 세금도 안 내고 음성사람들 지갑만 털어간다니깐? 남기는 건 쓰레기 뿐이여. 내 참 분통터져서."

상가 상인들의 불만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상인 A씨는 "장돌림과 현지 상인들 사이에는 서로의 상권을 존중해주는 이른바 '저지선'이란 게 있는데 요즘 들어 이 저지선이 망가지고 있다"며 "장돌림들끼리 자릿세를 사고파는 불법 거래까지 이뤄지고 있음에도 음성군은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초저녁 어스름이 지자 한 생선 장수가 매대를 번개같은 속도로 정리하고 있다.

ⓒ 임장규기자
이런 험악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매상을 한창 올린 장돌림들은 콧노래를 부른다. 초저녁 어스름이 지자 한 생선 장수가 매대를 접는데 그 속도가 거짓말 조금 보태 '마하'급이다. "오늘도 다 팔았네~, 내일은 무얼 팔까. 고등어를 잡을까, 갈치를 잡을까~." 주정뱅이나 부를 법한 기괴한 노래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음성장의 거래품은 따로 정해진 게 없다.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물품은 죄다 모인다. 음성장날인데 맹동수박은 안 보이고, 전북 고창 수박이 행인들의 발길을 잡는다. 아직도 현지에선 고추, 인삼, 마늘, 연초 같은 특산품이 많이 나는데 외지 장돌림 천지인 장날에선 그 모습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참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요즘 장날의 세태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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