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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제천장의 어제와 오늘 下

사람 따라 돈 따라 장꾼들도 흥망성쇠
5일장, 중앙시장서 역전시장으로 이동
약초 유명했던 덕산장 시들… 청풍장은 역사 속으로

  • 웹출고시간2013.10.13 17:50:17
  • 최종수정2013.10.13 17:51:00
장(場) :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곳.

사전적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 장이 들어서려면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아야 한다. 경제의 기본 원리인 공급과 수요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져야 장꾼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전국의 모든 시장은 누가 정해놓지도 않은 규칙에 따라 번성과 쇠퇴를 거듭해왔다. 한 쪽의 장이 몰락하면 다른 한 쪽의 장은 흥했다. 최근 경제용어로 자주 쓰이는 '풍선효과'가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1980년대 초. 한 약초상인이 작두로 약초를 썰고 있다.

ⓒ 임병무
제천지역 장도 역사의 파고를 넘고 넘었다. 때론 화마(火魔)의 아픔을 견뎌내기도 했고, 때론 수몰(水沒)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광복 후 현대의 시장 구조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형성됐다. 피란민들이 현재의 제천여고 앞에 막무가내로 집을 짓고 물건을 팔기 시작한 게 '서부시장'의 시초다. 수십년간 황금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내리막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신 명동 로터리에서 남천교에 이르렀던 '중앙시장'이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소화정'으로 불리며 제법 현대식 건물을 갖춘 중앙시장은 매일 1천여 명의 상인이 북적대며 제천상권의 노른자 역할을 했다.

1970~80년대 잡화전, 목물전, 채소전 등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는데 시장 복판에서 떡전으로 꺾어들면 구수한 토속미가 금방 피부에 와 닿곤 했다. 장꾼들은 사발막걸리에 장떡이나 녹두부침을 곁들이며 요기를 채웠다.

유래로 보면 서부시장이 더 깊지만 중앙시장이 더 번성했던 까닭에 5일장은 매월 2일·7일을 기해 중앙시장 주변에 들어섰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장돌림의 발길이 닿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곳의 5일장은 1970년대 중반 들어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제천시가 지역상권 보호차원이라는 명목으로 행정제제를 가한 것이다.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돈을 긁어가는 장돌림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점포 상인들의 반발에 따른 조치였다. 장꾼들은 서부시장으로 난전을 옮겼으나 예전만큼의 호황을 누리지 못했다.

그로부터 제천에서는 한동안 5일장의 맥이 끊겼다가 1998년부터 다시 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날짜는 매월 3일·8일, 장소는 '역전시장'이었다.

제천역전시장 앞에 길게 늘어선 5일장의 모습.

ⓒ 임장규기자
5일장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된 사연은 다소 이색적이다. 중앙시장에서 점포 상인들에게 쫓겨났던 장꾼들을 역전시장 점포 상인들이 다시 불러들인 거다. 밑바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역전시장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상설시장 상인들의 자구책이었다.

그때 상인회장을 지낸 윤영식(60)씨를 이번 장날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약초상인 윤영식씨가 약쑥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임장규기자
상인회 차원에서 성남, 정선, 평창, 영주, 봉평, 영월 등 가까운 지역을 다니면서 장돌림들을 섭외했어요. 역전시장이 장소를 제공해줄 테니 같이 잘 살아보자고. 시장이 잘 되려면 일단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장날만큼 매력적인 게 없었던 거죠."

상인회는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장꾼들을 집결할 수 있도록 점포 앞에서 난전을 펼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난전은 시장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점포 상인들과 차별화된 5일장만의 독립공간을 형성하려 한 것이다.

지금은 역전시장에 씌워진 아케이드를 완전히 벗어났다. 역전 앞 아스팔트 도로에 길게 난전이 늘어서는데 그 길이가 300여m, 매대 수가 200여개에 달한다.

품목은 다양하다. 채소류, 해산물, 잡화류 등 어느 장에 가도 볼 수 있는 것부터 제천장날만의 명물 '약초'가 손님을 기다린다. 골동품 경매장 2곳도 장이 들어서면 덩달아 대목을 누린다.

정작 장꾼들을 불러 모은 역전시장은 속된 말로 '배 아파 미칠 지경'이 돼 버렸다. 특히 1차 식품업소의 타격이 심하다. 몇 년 전부터는 많은 점포가 식당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장꾼들을 상대로 부침개, 막걸리를 팔아 생계를 연명하고 있다. 한 점포 상인은 "겉으로만 '상생'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갈등 투성이'"이라고 눈을 흘겼다.

"자, 하수오 들여가시오. 검은 머리에 좋고, 치매 예방에 좋다오. '마누라, 마누라 화 내지 마오. 내가 하수오 사줄게'란 옛말도 잊지 않소?"

장꾼들에게 약초로 인기를 끄는 제천산 엄나무.

ⓒ 임장규기자
제천역 바로 뒤편에 들어선 약초전이 북적인다. 예로부터 제천은 대구, 전주와 더불어 전국 3대 약령시장으로 꼽혔다. 강원도와 충북 북부, 경상도, 지리산 약초들의 집결지로 명성을 떨쳤다. 2010년부터 제천한방바이오엑스포가 열리면서 제천약초의 우수성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약초 유통법도 발전을 거듭해 웬만한 약초는 진공포장 상태로 팔린다. 작두에 약초 뿌리를 넣고 쑥덕쑥덕 자르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제천역에서 쏟아져 나온 외지 관광객들이 오미자, 맥문동, 당귀, 감초, 오미자 등 60~70여개의 약초를 고르느라 때 아닌 난리법석을 떤다. 제천시에서는 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제천시장 러브투어'라는 기차여행상품을 운영 중인데 이날이 장날과 똑 맞아 떨어지면 말 그대로 '가는 날이 장날'이 된다.

약초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면 원래 약초시장은 제천읍내보다 덕산 쪽이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덕산하면 진천(鎭川) 덕산(德山)을 떠올리는데 제천 월악산 아래에도 같은 이름의 덕산(德山)이 있다.

해발 1천62m의 월악산이 하늘 높이 솟구쳐 있는 이곳은 제천에서 비교적 오지에 속한다. 과거 주된 소득원은 월악 계곡에서 재배되는 특용작물과 약초였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도라지, 황기, 작약, 목단 등의 약초가 17ha에서 연간 100t이 생산돼 5천여만원의 수입을 올려줬다. 연초, 고추, 마늘 등 특용작물도 줄잡아 20여억원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요즘의 덕산장을 보노라면 쓸쓸하기 짝이 없다. 약초의 재배가 큰 폭으로 줄고, 판로(販路)마저 현대화 돼 현지 거래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월악은 약초, 관광으로도 유명했지만 많은 지하자원도 갖고 있었다. 한때는 무연탄을 캐던 문화광산, 청풍광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부 폐광됐다. 저자거리를 가득 매우던 광부들이 떠나니 장꾼들도 자연스레 덕산장을 떠나게 된 됐다.

읍내 5일장, 덕산장과 함께 제천에는 또 하나의 장날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청풍장'이다.

1970년대만 해도 청풍 황석나루에는 장꾼을 실어 나르던 거룻배가 운행됐다고 한다. 80년대 들어선 전기모터를 갖춘 발동선이 사람을 물론 대형트럭, 버스, 경운기 할 것 없이 쟁여 싣고 물살을 헤쳤다.

바로 옆 북진나루에는 소금배가 닿았다. 각종 해산물과 비누, 석유, 성냥 등 농가 필수품을 가득 실은 소금배가 도착할 때마다 북새통을 치렀다. 한창 땐 200~300여 호의 임시 상가가 형성됐었다고 한다.

사람·돈 있는 곳엔 술이 있고, 술 있는 곳에 색(色)이 있는 것은 인류지사(人類之史) 당연한 현상이다. 가슴팍이 닳아빠지도록 노를 저어 강물을 거슬러 온 뗏사공에게 주막거리의 꽁지 갈보는 그런대로 나그네의 향수를 달래주던 안식처였다. 주막과 기방을 합치면 줄잡아 30여개소를 헤아렸는데, 그 중에서도 '언덕집'이 가장 유명했다.

"말도 말어. 한창 때에 우리 집에는 꽁지 갈보가 대여섯명이나 됐다구. 꽁지 갈보란 꽁지머리를 한 술집 색시를 두고 하는 말이여. 뗏사공이 밀어닥치면 서로 때깔 좋은 색시 차지하겠다고 쌈박질하기 일쑤였지. 며칠 동안 이곳에서 묵고나면 술값과 화대(花代)에 거머쥔 돈 다 발리고 노잣돈이 없어 뗑깡 놓는 왈짜도 많았다구."

'장돌뱅이 치고 청풍장 와서 돈 안 번 사람이 없었다'는 주민들의 말은 1985년 충주댐 준공과 함께 전설이 돼 버렸다.

당시 취재기자에게 "인근 술집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낸다"고 수선을 피우던 언덕집 주인 장애기(66) 여인. 만약 살아 계시다면 백수(白壽)를 바라보지 않을까. 청풍호를 가득 메운 물은 말없이 흐른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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