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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보은장의 어제와 오늘

"진짜 사람이 없어"
황토대추 나오는 10월에야 반짝 활기

  • 웹출고시간2013.07.21 18:05:4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83년 어느 날

잘 포장된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국립공원 속리산의 관문인 보은읍에 이르게 된다. 경북 상주로 통하는 이 길은 문경새재, 죽령과 함께 남도(南道)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코스였다.

"손주놈의 발에 맞을까?" 보은장에 나온 한 촌로가 손주 신발을 정성스레 고르고 있다.

ⓒ 임병무
대바우(大岩)를 비껴들면 산간 분지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춘수골 모퉁이를 돌아서면 대추의 산지로 이름났던 보은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국여지승람도 보은의 특산물로 대추를 꼽고 있으며, 기타 문헌에도 대추에 얽힌 얘기가 곧잘 등장한다.

제사상이나 한약재로 없어서는 안 될 대추가 보은에서 가장 많이 생산됐고, 그것은 곧바로 농가소득과 직결됐다. 그래서 대추가 풍년이 돼야만 농가에서는 혼기 찬 큰 애기를 푸짐한 혼숫감과 함께 내놓곤 했다. 어쩌다 흉년이 들어 대추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올해도 시집가긴 글렀구나'하며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대추가 탐스럽게 영글길 손꼽아 기다리던 여심(女心)을 가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러나 오늘날 보은에서는 대추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추보다는 고추나 마늘 등 특용작물의 재배가 훨씬 큰 농가소득을 몰아다 줬기 때문이다. 쇠푸니(金掘)나 노루목 고개를 넘어야 농가 뒤뜰에 한두 그루 남아 있는 것을 구경할 정도다.

보은의 시장은 싸전 거리와 채소전 거리로 나뉜다. 싸전에는 쌀을 비롯한 각종 곡식이 출하되고, 채소전에는 이름 그대로 소채류가 쏟아져 나온다.

1977년 시장 현대화 계획에 따라 싸전 거리를 통일시장과 화랑시장으로, 채소전을 중앙시장으로 이름을 바꿔놓고 새 상가를 조성해 놓았지만 여전히 싸전이나 채소전 거리라는 이름이 낯익다.

시골의 장터가 사양길을 걷고 있는데 반해 아직도 보은의 장은 풍성한 일면을 보여준다. 싸전에서 주차장 일대에 이르는 채소전까지 장돌림들이 장사진을 치며 행객을 부르는데 열을 올린다.

"어혈든덴 복령이 그만"이라고 약 선전에 열을 올리는데, 이따금 복령주를 구경꾼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 임병무
"대나무 뿌리에서 나는 이 복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혈든 데는 최고라고요. 멍든데 좋을 뿐 아니라 위장병에도 잘 듣습니다." 구경꾼을 모아놓고 복령주(酒) 한 잔 권하더니 접시를 꺼내 먹물을 갈아 놓는다. 먹물이 바로 멍이 든 것과 같다는 설명을 곁들이면서 그곳에다 복령주를 두세 방울 떨어트리니 희한하게도 먹빛이 금세 흰 빛으로 변해 버린다.

그 모습이 기이하여 카메라를 들이대자 피복을 팔던 이순(耳順)의 노인이 다짜고짜 취재기자의 멱살을 본때 있게 쥐어튼다. "네 이놈, 생면부지의 사람을 왜 찍어? 어느 신문사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우리 사진은 박아서 무엇에 쓸거여 이놈, 너 죽고 나 죽자!"

벌써 해장술에 눈동자가 허공에 매달린 장돌림의 객기에 카메라가 그만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졌다. 가까스로 손아귀를 벗어나 채소전 어름으로 접어드니 떠돌이 약장수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쟁쟁거린다. 자칭 도사(道師)라고 일컫는 약장수는 승복에다 백팔 염주까지 목에 걸고 약 선전에 한창이다. 그 옆에선 건장한 사내가 간간이 차력 시범이나 공중 묘기를 선보인다. 자신은 약을 팔러 온 것이 아니라 부적을 써주러 왔다는 약장수의 입놀림이 법석을 떠는데 픽업트럭이 영화 프로를 싣고 장터거리를 한 바퀴 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보은군민 여러분. 오늘 저녁엔 감동의 명화 '보디히트'가 상영됩니다. 문화의 전당 보은극장에서 알려드립니다."

4~5년 전 문을 닫았던 보은극장은 최근 들어 내부를 곱게 단장하고 손님 끌기에 바쁜데 하루 입장객은 고작 20~30명 정도다. 장날만큼은 1회 더 늘려 3회 상영하고 있으나 안방에서 두 다리 뻗고 주옥같은 명화를 감상하는 판에 돈 들여 굳이 극장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게 요즘 세태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

◇2013년 7월의 어느 날

장(場)이 흥하려면 장꾼, 즉 사람이 많아야 한다. 사는 사람이 있어야 파는 사람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보은엔 사람이 없다. 군 인구를 죄다 합쳐야 3만5천명이 못 된다. 도내 최하위 수준이다. 당연히 시장도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보은장날에 들어선 노점들. 사진에서 보듯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다.

ⓒ 임장규기자
30년 전만해도 보은시장은 싸전, 채소전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인구가 줄면서 자연스레 시장도 쇠퇴의 길을 걸었다. 보은군 인구는 1990년 5만2천여명에서 2013년 3만4천여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그나마 과거엔 보은군 공무원들이 시장을 먹여 살렸다. 장이 들어서는 날이면 강제로라도 잡아 두고 대폿집이나 선술집을 들락거리게 했다. 보은에서 난다 긴다 하는 기녀들은 갖은 애교와 교태를 부리며 말쑥한 샌님들의 쌈짓돈까지 홀랑 발라버리곤 했다.

이런 옛 풍경들은 청주와 보은을 잇는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보은으로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은 오후 6시가 땡 치기 무섭게 고속도로를 달려 청주나 대전집으로 돌아갔다. 보은과 타 지역과의 접근성이 너무나 좋아진 탓(?)에 보은장꾼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됐다.

보은장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매월 5일, 10일에 열렸지만 지금은 6일, 11일에 들어선다. 인근 옥천장과 장날이 겹친다는 이유로 사실상 강제 조정됐다. 모두 장꾼들이 줄면서 생긴 현상이다.

지금의 보은시장은 시외버스터미널 뒤편으로 형성돼 있다. 동다리에서 가까운 쪽부터 보은전통시장, 화랑시장, 중앙시장, 보은종합시장이 골목별로 들어서 있다.

이 중 화랑시장이 5일 장터다. 나머지는 매일 문을 여는 상설시장이다. 전통시장은 채소, 건어물, 생선, 과일 등을 주로 취급하고 중앙시장은 옷과 가방을 판다. 과거 포목전이라 불린 종합시장에선 비단, 이불 등이 팔린다.

"에이~ 더워." 한 70대 상인이 매기가 신통치 않자 애꿎은 부채질만 해대고 있다.

ⓒ 임장규기자
300여평의 화랑시장은 말만 5일 장터지 큰길가에 놓인 노점상보다 시원찮다. 과거엔 보은군과의 계약을 통해 자릿세까지 낼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10여명의 외지상인들만이 장날을 찾고 있다.

시장 터 전체를 아무리 둘러봐도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다. 장날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한 70대 노파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가 되려 혼만 났다. "장사도 안 돼 죽겠는데 뭔 놈의 사진이여? 누구 약 올리나." 그래도 잔정은 많은지 매상에 대해선 슬쩍 귀띔한다. "보은은 진짜 사람이 없어. 내가 진천장이랑 보은장을 돌며 건어물을 파는데 진천장 매출이 2배가 넘는다오."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애꿎은 부채질을 정신없이 해댔다. 건어물 매대엔 눈치 없는 파리만 들락거리며 상인의 약을 바싹 올렸다.

지금의 시장 건너편과 뒤편에 각각 있던 싸전과 채소전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찐빵, 만두, 옥수수 같은 전통 먹거리를 팔던 1천평 규모의 싸전거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는데 '○○바게트', '△△쥬르' 같은 서양식 빵집 간판이 유독 눈에 띈다.

고요한 정적이 일상화된 보은장. 그래도 10월이면 꽤나 활기를 띤다고 한다. 보은의 명물 '대추'가 출하되기 때문이다.

한 때 '빗자루병'에 걸려 고사되다시피 한 대추농가는 이향래 전 군수 시절에 활기를 되찾았다. 이 전 군수는 약재·제수용으로만 쓰이던 대추를 과일 상품화 해 '향토대추'란 브랜드를 만든 뒤 농가에 전폭적인 재배 지원을 했다. 수십년이나 대추농가를 괴롭힌 빗자루병에 대한 방제기술도 정립했다.

그 결과, 당도가 높고 향이 좋은 보은 향토대추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다. 지금은 대추 출하기인 10월 상순에서 중순만 되면 전국에서 장꾼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활기를 잃을 대로 잃은 보은시장이 왁자지껄하고, 사람 냄새나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때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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