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장날 - 제천장 上. 1983년 어느 날

공어(公魚)와 기녀가 부침(浮沈)하던 의림지
규모는 중앙시장… 유래는 서부시장
강원도 태백에 채소 공급하는 번개시장

  • 웹출고시간2013.10.06 19:19:48
  • 최종수정2013.10.06 19:19:48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나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 구료…."

왕년의 인기가수였던 박재홍의 히트곡이다. 흘러간 옛 노래로 주흥(酒興)이 오르면 곧잘 애창되는 가락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그 지방의 소재가 담긴 노래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지만(이별의 부산정거장, 목포의 눈물, 금산아가씨, 대전부르스 등) 충북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오로지 '울고 넘는 박달재', 이 한 곡뿐이다.

한 촌로가 찢어진 고무장화의 수선을 만물장수에게 맡기고 있다.

ⓒ 임병무
박달(朴達) 도령과 금봉이의 애절한 사랑이 마디마디마다 맺혀 있다. 도토리묵을 쑤어서 허리 춤에 채워주며 이별의 눈물을 뿌렸던 박달재. 그 고개가 바로 충주와 제천을 갈라놓은 한 서린 고개다.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뽀얀 안개가 산기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데, 직행버스는 헐레벌떡 숨이 턱에 차오도록 고개를 기어오른다.

이윽고 박달재 정상에 도달하면 화강암에 커다랗게 새겨놓은 '박달재'란 표지가 눈앞에 다가오고 그 뒤에 자리 잡은 휴게소에서는 과객에게 도토리묵을 쑤어 판다. 팔각정까지 번듯하게 지어놓아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 번쯤 이곳에 들러 도토리묵을 먹고 간다.

옛날의 정취가 그윽하다. 게다가 스피커에서 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가 쟁쟁거리니 박달재에 얽힌 사연을 더듬어 나가는 행객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박달재를 넘어서면 시(市) 승격 3년을 맞은 제천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북부 교통의 십자로'. 이것이 제천을 한마디로 대변할 수 있는 단어인 것 같다. 충북선의 종착역이요, 중앙선의 통과 지점이며 또 다시 이곳에서 태백선(제천~장성), 함백선(제천~고한)이 갈려나가 탄광지대를 치닫는다.

거미줄 같은 철도망이 팔도(八道) 저자바닥을 모두 이어주는 곳이다. 대합실에서는 안내 방송이 요란을 떠는데 철마는 쉴 새 없이 수많은 승객을 토해낸다.

현재 제천의 상주인구는 8만8천명.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10만명을 헤아린다.

해발 220m 고원(高原) 분지에 10만의 인구가 복작대고, 인근에 5개 시멘트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니 제천을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공업 도시라고 부르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상업인구가 전체의 34%나 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중앙선 똬리굴(루프식 터널)이나 박달재를 오르는 열차도 숨이 찬데 하물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무거운 등짐을 진 선길 장수나 20여 마리의 소떼를 한 줄로 엮어 하늘에 닿는 듯한 죽령(竹嶺) 높은 재를 오르내리던 소몰이꾼의 고역이야 어떠했겠는가.

저자거리에 나온 아낙들이 젓갈장수에게 멸치젓을 사고 있다.

ⓒ 임병무
제천장에서 한 파수를 본 후 서울로 작로(作路)하거나 영월, 평창으로 접어들라치면 시내에서 2~3㎞ 떨어진 의림지에서 풍류를 즐기지 않고는 몸살이 나 배겨날 재간이 없다.

'똥 싼 주제에 매화 타령'이라고, 한 파수에 서푼어치도 못 번 장돌림 주제에 번듯한 기방에서 자진방아타령을 부를 정도는 못되지만 그런대로 주막거리에서 트레머리한 작부(酌婦) 정도야 희롱하기엔 이력이 난 그들이다.

거기에다 의림지에서만 번식한다는 공어(公魚)를 순채에 싸서 초장을 듬뿍 찍어 회로 먹게 되면 오장육부가 사르르 녹아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1년 365일을 두고 사철 공어가 잡히는 것이 아니요, 해빙기인 3월 초순께 나타났다 음력 4월 초파일을 전후해 모습을 감추고 마니 이때를 놓치면 공어 맛보기란 천도복숭아 구경하기보다 힘들다.

요즘에도 이 때가 되면 의림지 주변 술집에는 전국에서 한다하는 기녀들이 떼를 지어 찾아든다. 얼굴에 도화살이 끼어선지 역마살이 붙어서인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팔도 저자 유흥가를 배회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이다.

반달 같은 눈썹에다 마늘 코, 앵두 입의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 아니라 파운데이션을 덕지덕지 찍어 바른데다 아이섀도가 뭔가 하는 화장품으로 만들어낸 인공(人工)의 미인들이다.

그래도 취객에겐 그들의 배 씹는 소리가 마냥 싫지가 않다. 갖은 아양과 교태를 부리며 취객을 녹아웃 시키는데 여기에 말려들어 자꾸만 시켜대면 기마원의 술값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르게 되니 까딱 잘못하면 쌈짓돈까지 홀랑 발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들도 달포가량 의림지 주변에서 한몫을 본 연후 공어가 사라지면 때를 맞춰 뿔뿔이 흩어진다. 공어와 함께 부침(浮沈)하는 기녀들의 생활 습성이다.

대죽장수가 전주합죽선으로 한낮의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요즘와선 좀처럼 보기 드믄 땀받이등걸이가 이채롭다.

ⓒ 임병무
제천의 시장은 서부시장, 중앙시장, 역전시장, 우시장, 그리고 영월·평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속칭 '번개시장'으로 나눠진다.

규모로 치면 명동 로터리에서 남천교에 이르는 '중앙시장'이 가장 크지만 동명 국교를 지나 제천여고 앞에 자리 잡은 '서부시장'의 유래가 더 깊다.

서부동 68번지에 들어선 서부공설시장은 6·25 피란민이 터를 잡아 만들어 놓은 시장이다. 피란민들이 막무가내로 가게를 짓고 터를 잡으니 혼란기였던 당시에는 행정력을 동원해 철거할 처지도 못됐다.

하는 수 없이 1954년 제천읍의회가 이를 양성화하고 목조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 시장 개설에 따른 기채액(빌려 쓴 돈)이 200만환이었다고 한다. 1천846평의 대지에 14동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공설시장으로 정식허가가 난 것은 1964년 12월이었다.

물목(物目)이라고 해야 의류, 잡화류 정도로 별다른 특색은 없지만 버젓이 점포를 가진 상인과 노점상간에 상권을 놓고 티격태격 입씨름이 잦은 곳이다.

점포상은 또박또박 세금을 내고 장사를 하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는 노점상은 똑같이 장사를 해먹으면서도 한 푼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게 불화의 씨앗이다.

서부시장에서 명동 로터리를 돌아 발걸음을 옮기면 제법 현대식 시설을 갖춘 중앙시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명동과 더불어 제천시의 노른자위로 일제 강점시대에는 '소화정(昭和町)'으로 불리었지만 해방과 더불어 중앙로 1가로 이름을 바꿨다.

줄잡아 1천여명의 상인이 북적대는 이곳은 제천시민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가장 큰 시장이다. 잡화전, 목물전, 채소전 등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는데 시장 복판에서 떡전으로 꺾어들면 구수한 토속미가 금방 피부에 와 닿는다.

중앙시장은 한 해에 두 번이나 큰 불이 일어나는 액운을 당하기도 했었다. 1960년 4월5일 대(大) 화재로 점포 62칸이 불에 타 잿더미로 되더니 그 해 8월22일 다시 큰불이 나 점포 62칸을 태우고 말았다. 화마(火魔)가 짝을 지어 찾아든 게다.

한 해 두 차례의 큰불을 겪고 나서도 중앙시장은 번성을 거듭했다. 시련을 억척스레 이겨낸 상인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월·평창으로 가는 장락 간이역 앞 삼거리에는 새벽에 열리는 임시 시장이 들어서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번개시장'이라고 부른다. 강원도 탄광지대에 채소를 공급하는 시장으로 새벽 4시만 되면 수백대의 경운기와 리어카가 채소를 쟁여 싣고 이곳을 찾아드는데 거래는 한두 시간 가량이면 거의 끝나고 만다.

매일 아침 번개처럼 시장이 형성됐다가 순식간에 거래가 끝나기 때문에 '번개시장'이란 말이 쓰여진 것이다.

해발 260m 이상의 고랭지인 터라 벼는 조생종을 재배하는 정도이고, 주로 밭작물이 농가 소득을 올린다. 여기에서 출하되는 채소는 장락 간이역에서 태백선을 타거나 트럭에 실려 정선, 함백, 사북, 고한, 황지, 여량, 석항까지 찾아든다.

채소와 석탄이 교차되는 곳으로 옛날 아침저녁으로 열렸던 저자시의 족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천 부근에는 5인 이상 기업체가 40여개에 이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옥수수로 빚은 '동해 고량주'가 가장 유명하다.

최근에는 '동해골드'와 사나이 가슴에 불을 댕긴다는 '동해백주'를 개발해 인기를 끌고 있으나 약 100억원에 달하는 부채로 운영난에 허덕인다고 한다. 제천 주민들은 30년 전통의 내 고장 유수 기업체가 쓰러지는 것을 눈감고 있을 수 없다며 동해 고량주 먹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진정한 향토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충북의 북부와 강원도 태백권을 잇는 가교적인 역할을 하던 제천시장은 한 때 인근 지방의 상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으나 교통이 발달하면서부터 평창·정선은 원주에, 단양은 서월 상권에 영화를 넘겨주고 말았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임장규기자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