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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운문사

고려때 일연 머무르며 삼국유사 집필 유명
1958년 불교정화운동후 비구니 전문 강원
비구니 승가대학 등 교육·경전연구기관

  • 웹출고시간2010.08.19 19:09:2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운문 호수에 마음을 씻고

맑은 계류가 흐르다 멈춘 운문 댐, 이곳에서 다슬기 잡고, 물장구치던 사람들은 다 떠났다.

역사가 가라앉은 땜, 길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꽃을 피우고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바람 따라 향수의 그리움을 노을 햇살에 풀어 놓는다.

운문사에는 그리움이 있다.

속세에 모든 인연 져버리고 찾아오던 길, 마음의 눈물도, 후회도 이 물에 던져버리고 첩첩 산중 운문승가대학을 찾아온 비구니 스님들의 길이기 때문이다.

운문 땜에서 지방도로 985번 따라 9.8km 지점에서 군 도로로 우회전하여 1.4km오면 운문사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입구 식당, 상가 지역에서 오르면 해 묵은 노송들이 우산처럼 터널을 이룬 솔바람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새들의 노래 소리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이 세속의 소리를 붉은 소나무 높은 날개가 이 소리들을 밑으로 가란 쳐 낮은 자의 소리가 되고, 부처님 나라에 오르는 피안의 세계에 주악이 되어 행복의 문을 열어 준다.

그런데 이 노송들이 밑동에 상처가 나 있다. 일제 대동아전쟁 때 군수용으로 송진을 공수하기 위하여 밑동에 도끼나 낫으로 파 광솔기름을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이야 아프지만 고난을 이긴 우리 민족의 기상처럼 상처를 이기고 우뚝 선 푸른 소나무가 고귀해 보인다.

이 소나무들의 상처가 있어서인지 우거진 솔밭, 넓게 퍼진 들녘, 마음이 편할 것 같으면서도 편치 않다. 이 는 돌아앉은 운문사의 가람 배치 때문일까? 아니면 후회하지 않는 여인의 연민일까? 생각되었다.

◇세상과 등진 운문사 풍경

주변산과 산사가 어우러진 운문사 전경

운문사 경내에 오면 야트막하게 싼 아담한 돌담이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막고 호거산 (虎踞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든 사찰이나 궁전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독 이 절만이 남향에 자리하여 있다.

풍수적으로 호랑이가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를 향한 모습으로 북향을 하면 골짜기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되어 재물이나 부에 인연이 멀다는 의미에서 절을 뒤로 하여 세운 것 이라 한다.

이 때문에 운문사는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 보이고 있다. 찾아가는 중생들은 운주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된다.

운문사는 넓고 평평한 대지 위에 여러 채의 전각을 지었다.

평지 가람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들이 이룬 높고 낮은 봉들이 둘려 싸여있어 운문사가 연꽃 속에 묻혀 있는 형국이다.

◇운문사는 어떻게


운문사의 내력을 보면 이곳의 주지였던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 스님의 "원광서학" "보양이목" 자세히 나와 있다한다.

또한 운문사의 사 적기에 신라 진흥왕 18년 한 도승이 운문사 자리 못미처 금수 동 계곡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을 수도를 하니 홀연히 득도하여 도우 십여 명과 함께 갑(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가운데 자리한 대작 갑사를 중심으로 가솔갑사, 천문 갑사, 대비갑사, 소보갑사, 등을 완성하였다.

이중 대작 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라 한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법사가 첫 번째 중수하고 두 번째 보양 스님이 중수 하였다 전한다.

◇보양 국사가 용궁에서 받아 온 금란가와 같이 중창

담벼락과 지붕, 굴뚝의 가지런함과 정렬이 또다른 운치를 자아냄.

보양스님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배로 돌아오는 길에 용왕이 용궁으로 청하여 금단가사 한 벌을 주면서 그의 아들을 데리고 작약 사를 창건하라고 부탁하였다.

보양스님이 절을 짓기 위하여 운문산 북쪽에 올라 살펴보니 산 아래 황금 5층탑이 서 있다. 깜짝 놀라서 황금 탑을 보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황금 탑이 서있던 자리에 아무런 흔적도 없고 탑도 없었다.

이에 다시 산에 올라 탑 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산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스님은 용왕 이 말한 작갑, 까치 생각이 났다. 다시 내려와 탑 자리를 파보니 무수한 벽돌이 묻혀 있었다. 그 벽돌로 탑을 쌓으니 한 장의 벽돌도 남지 않고 탑이 완성되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작갑 사라하였다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보양스님 왕건을 만나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보양스님이 밀양의 봉성 사에 머물고 있을 때 왕건이 백제의 산적들이 견성(犬城)에 들어와 거만을 부리는 통에 이를 함락 시키려고 군대를 이끌고 청도 경계를 쳐들어 왔다. 그러나 함락 시킬 수가 없었다. 왕건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간청 했다.

이에 "무릇 개(견성)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 않습니다. 마땅히 낮에 북쪽을 쳐야합니다". 보양스님의 작전 따라 견성을 함락 시켰다.

은혜를 입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 한 후 보양스님이 작갑 사를 창건하였다는 소문에 오갑의 땅 500걸을 시주하여 절에서 부치도록 하고 운문사라는 사찰 명을 내려 주었다한다.

이어 원흥 국사가 신원, 신수 등의 토지 200결과 국 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키고 "운문선원상사" 라는 시액을 내려 500선 사찰 중 제2 선 사찰이 되었다한다.

그 후 원웅, 일연, 운송대사 등이 이 절을 거처 갔으며 한때 2,000여명이 수도하던 대 사찰이었다.

임진란으로 일부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나 17전각 중 대웅전, 적압전, 미륵전, 오백나한전, 금 법당, 만세루, 관음전, 명부전, 등이 현존하여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비구도량이 비구니 도량으로


원래는 비구 도량이었으나, 1958년 불교 정화 운동할 시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탈바꿈하여 교육과 경전연구 기관이 되었다. 운문사에는 항상 180여명의 학인 스님들이 새벽 3시부터 취침할 때까지 꽉 찬 시간표 따라 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깨끗한 기숙시설과 많은 장서를 구비한 도서실을 갖춘 불교의 도량 중 최고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정신에 스님들이 노동과 공부를 함께 한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은 공동노동으로 모내기, 김매기 등은 물론 비가와도 쌀이나 콩의 뉘를 고르는 일을 하면서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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