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0.05.27 17:56:0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선운사의 풍경들

도솔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아지랑이 속에 부는 바람치고는 시원하기보다는 좀 차가운 바람 이였다.

도솔산 선운사를 찾아가는 마음은 잠시라도 세상의 번뇌, 망상,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함이다

사막에서는 연꽃이 자랄 수가 없다. 연꽃은 진흙 흙탕물 속에 나서 물을 청정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꽃으로 핀다.

진주를 갖고 져 하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손에 넣을 수 없다.

번뇌, 망상에 들어가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보주를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번뇌를 깨우침에는 선운의 도량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선운사는 안개, 구름 속에 수도하여 참선의 관문을 넘어 세속의 티끌들을 타파함에 있기 때문이다.

선운산은 만 필의 말들이 뛰어 오르는 형상으로 뭇 신하들이 임금과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며 만물의 근원에 돌아간 신선이 모이는 진리의 산이라 한다.

이 진리는 아침에는 선운(鮮雲)이 반공에 두둥실거리고 저녁에는 밝은 달 밤하늘, 별빛이 있는 훌륭한 수행 처에서 큰 뜻을 깨치라는 것이다.

◇ 선운사 가는 길


이 진리를 깨치기 위해 풍천 강 지류를 타고 선운사 계곡으로 오르는데 길가에 풍천 장어집들이 장어구이 비린내를 내고 있다.

진리의 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입구 장어들의 다비식을 보고 방생을 하는 마음과 먹 거리를 즐기려는 중생들의 야속함이 교차되고 있었다.

계곡 길 도로 따라 주차장과 상가, 해수목욕을 겸비한 호텔지역을 지나면 선운사 입구다.

절 입구엔 아름드리 가로수가 서있고 다시 만든 복분자 전시간이 길손을 맞이한다.


전시관에서 오솔 길 따라 오르면 미당 서정의 " 선운사 동구 "시비가 넓은 반석에 새겨져 있어 발을 멈추게 한다.

선운사 골짜기로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로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고창에서 배출한 서정주가 쓴 원고지를 그대로 확대 1974년 " 선운사 동구 " 시비를 세워 고창 군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서안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줄포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에 상경하여 중앙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주 학생 독립운동 주동자로 구속되었다.

1931년 고향으로 내려와 고창 고등 보통학교에 편입하였지만 권고로 자 퇴, 동국대학의 전신인 중앙 불교 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문 '벽'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에 시동인지 '시인 부락'을 발간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의 시집으로는 '하사' '귀촉도' 등이 있고 다수의 시집을 펴내면서 시의 대가 대열에 올을 수 있었다.

명성과 더불어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미당 시비에 " 단군기원 4307년 선운사 동구 미당 서정주 지어 씀 "을 바라보며 단기가 우리 것인데 서기를 고집하고 살아온 우리들은 지금 단기 몇 년인가 몇 사람이 아는지를 생각해보며 오르니 선운사 일주문이다

◇ 스님들의 납골 부도밭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수백 년 묵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그늘아래 선운사를 지켜온 선사들의 부도밭이 있다.

부도밭에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여러 기의 부도, 비가 서있다.

그 중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스님의 대리석 부도비가 눈에 띤다..

백파선사와 추사는 절친한 관계로 서로 비판도 하고 존경도 하는 사이다. 추사가 백파를 기리며 글을 짓고 이 비에 옮겼다.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 하도 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 하 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를 말해 무엇하리요

"완당 학파 김정희가 천하고 또 쓰다"

백파의 부도 앞에 서서 그의 철학과 그가 살아온 인생행로를 추사 선생이 아니라도 알 것 같은 느낌으로 부도밭에서 나왔다.

◇ 선경에 흐르는 계곡 물


그 앞에 도솔천에서나 볼 것 같은 맑은 물, 아름드리 단풍나무들이 물가에 허리를 꼬고 서서 바람에 흔들이고 있다. 맑은 물속에 놀고 있는 천연기념물 산천어, 계류와 함께 떠내려 온 단풍잎이 물속에서 단풍의 소리를 낸다.

물이 흐르지 않은 바닥에는 선운사를 찾아온 분들이 자비와 공덕 자기들의 행운을 비는 조약돌 탑을 쌓아 놓은 정성이 배여 있다.

이 계곡 따라 오르면 계류 위에 주차장과 연결하는 해탈교 다리가 가로지른다.

해탈교는 세속의 모든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흐르는 옥같은 계류에 마음을 닦고 사찰에 오르라는 무언 중 교훈이다.

사찰을 찾아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상징인 삼문을 통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경내를 보살피는 천왕문

해탈교 앞에 관문의 하나인 천왕문이 흘러간 세월만큼 늙은 모습으로 '도솔산 선운사' '사천왕 문' 현판을 달고 있다.

현판이 걸린 이 건물은 옛날 중수하다가 화재를 만나 불타다 남은 목재를 다시 사용해서 기둥과 서까래를 토막토막을 이어 건축 했다.

그 건물에 거른 현판 "도솔산 선운사" 는 현세의 예서체의 대가 일중선생이 썼고 "천왕문" 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란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1칸 이층 누각으로 거칠게 다듬은 돌기둥 위에 자연형태를 살려 나무기둥을 올이고 아래층에 천왕들을 모셨다.

예전엔 사천왕 문 위 2층에 범종, 법고를 달았으나 지금은 새로 지은 사물 각으로 이전 하였다.

◇ 선운사의 흘러간 세월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 검단 선사가 창건하였으나 폐사되어 한기의 석탑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충숙왕 때 효정선사가 중수 하고 조선 성종 14년 행초선사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대대적으로 중창 89개 암자와 189채의 요사 24개소의 수도를 위한 암자가 있는 대가람 사찰이 되었다. 후에 광해군 때 3년간 중수하여 대웅전 만세루,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나 수해로 붕괴된 것을 찬성, 의흥 등이 중건 오늘에 이른 단다.

원래는 용이 사는 용추(龍湫)못 이었다고 한다.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이 못에 있는 용을 몰아내고 꼭두각시를 짚으로 만들어 띄워 돌을 던져 못을 메워 나갔다.

그해 고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돌과 숯을 한 가마니씩 이 못에 갔다 넣으면 신기하게 그 자리에서 눈병이 났다.

그로 인해 동민들이 눈을 치료하려고 다투어 돌과 숯을 던져 못을 빨리 메울 수가 있었다 한다.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 불사하고 있었을 때 인근에 도둑들이 많아 인심이 훈훈 하자 선사가 불력으로 도둑을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바닷가에서 진흙으로 둥글게 싸 올인 소금 샘을 만들어 바닷물을 넣고 걸러서 소금을 굽는 천일염 제조 방법을 가르쳐 소금으로 인해 먹고 살 수 있게 하여 주웠다.

선사의 고마움에 도적들은 해마다 선운사에 봄, 가을로 소금을 받쳐 보은 염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 선사를 상징하는 검단리로 고쳐 지금 까지 내려온단다.

고창, 부안 일대에 아직도 검단 선사의 제조 기술로 오늘 까지도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다.

◇ 나무 생긴 대로 지은 만세루


선운사의 전설과 역사를 알아보고 사천왕문을 들어오면 정면에 커다란 만세루가 나온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수행승의 참선 정진 하던 강당 이였다.

건물을 아름드리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원형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삼고 한쪽 끝에 디딜방아처럼 두 갈래로 나뉜 나무를 대들보 위에 걸어 용머리를 조각한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많은 수행자들이 참선, 수행을 하기 위하여 땀을 흘린 것과는 달리 만세루 안에는 사기와 현판을 걸려 있을 뿐 비바람의 흔적을 손보지 않았다.

만세루의 주초 돌은 자연 그대로 사용 했으며 나무를 이은 기둥을 그랭이 공법을 사용 하여 지었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