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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대흥사

땅끝에서 만난 불국세계 '감개무량'

  • 웹출고시간2010.06.17 19:42:4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대흥사를 찾아 매표소에서 오르니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괴암괴석과 같이한 나무들이 세속의 모든 것을 잊게 한다.

맑은 계류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이루고 그 위 무지개다리를 건너 숲속에서 잠자던 다람쥐가 먹이를 찾고 있다. 적송, 참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바람의 소리를 낸다. 계곡과 나무숲을 지나 중간 쯤 오르면 임업시험장에서 관리하는 편백나무, 삼나무가 군락지를 이르는데 두륜산의 자랑이란다.

해발 703m인 두륜산은 대흥사를 품안에 안고 열세분의 대종사와 열세분의 대강사를 배출 해냈다.

◇대흥사의 역사는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500개의 절을 짓기를 상소하여 그때 창건했다고 한다.

원래 두륜산의 옛 이름은 한듬으로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듬'은 덩어리의 뜻이라고 한다.

세월 따라 한자와 합하여져 대듬이 되고 다시 대듄으로 되어 대흥사도 하듬절에서 대듬절 대듄사로 바뀌어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지명을 새로 표기 하면서 대흥사로 고정하여 일주문과 천왕문에 편액 되어 있다.

대흥사는 작은 절이였는데 서산대사의 가사, 발우, 유품이 보관 되면서 큰 절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설법을 자청한 청허당 서산대사가 제자인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자신이 입적하면 가사 발우 등 유품을 우리나라 땅끝 해남 두륜사에 보관하여 달라고 유언 하면서 3가지 이유를 설명하셨단다.

첫째는 항상 아름다운 옷감과 먹을 것이 끊이지 않으며, 내가 볼 때 대륜산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북에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꾀는 기둥이 되고 남쪽엔 달마산이 지축을 연결하여 틈틈이 연결되며 동의 천관산 서의 선운산이 결연히 마주 솟아 산과 바다를 둘러싸 지켜주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터이다.

둘째는 왕의 덕화가 천리와 되면 제대로 미치지 못하여 모든 하늘 아래 땅이 왕토 아닌 곳이 없으나 나라를 향한 충성이 일어나기 어렵다. 나의 공적이 비록 가히 일컬을 만한 것이 못되나 성주께서 깊이 은혜를 베푸시니 이를 기대여 보고 느끼면 후세에 어찌 공적을 기린 소문으로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침이 없겠는가.

셋째는 처영 및 여러 제자들이 모두 남방에 있으니 곧 나의 출가 초기에 두류산(지리산)에서 서로 법을 들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종통이 돌아가야 할 바이니라. 돌이켜 보면 소중하지 않은자 너희들은 내 유촉을 쫓아서 의발 및 주상께서 하사하신 대선사 교지를 두륜산 중으로 옮겨 보관하고 입적한 날에 받들어 내어 재를 올리도록 하는데 제자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케 하라 하였다.

유촉을 받은 제자들이 시신을 다비하고 묘향산 보현사 안심사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은 금강산 유정사 북쪽 바위에 금란가사와 발우는 대흥사에 모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산대사는 임진란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선(禪)과 교(敎) 더 나가서 좌선, 진언, 염불, 간경등 여러가지 경향으로 나누워 자기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스님들에게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라 하시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이에 선교양종을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얀 물이 쏟아지는 계류 피안교를 오르면

선, 교양교의 도량 대흥사에 오르면 피안교에 이른다.

피안교는 모든 중생들이 번뇌 망상에서 깨어나 금락으로 가는 다리란다. 이 다리를 지나 모든 것이 하나로 부처님께 드리는 마음의 문 일주문이 서있고 이를지나 부도 밭이다.

큰 스님들의 사리나 영골을 모신 탑으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대흥사에 배출한 역대 종사와 강사 스님들을 모신 곳으로 부도와 비가 서 있다.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먼지를 털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해탈문을 지나면 돌담으로 4가지 영역으로 나누워 절이 배치돼있다.

◇4개의 영역 어디로 갈가?

경내 두륜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금당천을 경계로 하는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누고 다시 남원 뒤편 뚝 떨어진 서산대사의 사당 표충사 구역과 추사 김정희 선생을 위해 지였다는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누워 진다.

보통 절들이 남쪽을 향하여 건물들을 짓는데 반하여 대흥사는 입구가 서쪽으로 해탈문에서 절 안을 바라보면 중심이 북원이고 대웅전에 맞춰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을 바라보며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대웅보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대웅전은 창건에 대한 기록이 정확치 못하나 대륜 사지 2권에 조선 효종 8년에 중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웅진전 앞 보물 320호 3층탑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인데 이 현판을 명필 이광사가 썼다고 전한다.

추사 김정희가 현종때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평소 가깝게 지낸 초의 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렸다가 이광사가 쓴 편액의 글을 보고 "촌스러운 글씨다" 라면서 떼어 내고 자기의 쓴 글 무량수전을 달게 하고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제주도에서 9년의 세월을 글을 쓰면서 지나오면 귀양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서 느낀 듯 자기가 쓴 편액 글을 떼어 내고 이광사의 글을 다시 찾아다가 달게 했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 삼존불과 광무년간에 만들어진 후불정이 있는 단조로운 불당에 절을 하고 대웅전에서 나와 좌우를 보니 명부전과 범종각, 웅진전이 나란히 서 있다.

마당 서쪽 지붕이 첩첩하고 커다란 승방 백설당 있다. 그 뒤 웅진전 앞에 보물 320호인 3층탑이 서 있었는데 대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란다.

이 탑은 흙담으로 둘러싸인 위치에 있는데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의 탑으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을 한데 붙혀 4면의 장석으로 하층 기단을 구성 했다. 중대석에는 구석기둥과 버팀기둥 2주가 각면에 모각 되었고 갑석은 한장이다. 옥계석은 중급 받침이 4층으로 1, 2, 3층이 같고 상륜 받침의 4각형 위에 복발, 양련, 보주가 차례로 있으며 구성 수법이 단정 완아하고 조각 수법이 세련 정교하고 아름답다.

◇경주에서 조성한 옥돌 부처님이 대마도엔 왜?

대웅전에서 돌담 밖으로 나와 남원에 이르면 천불전이 있고 동국선원, 용화당등 강원과 승방 몇 채가 돌담으로 쌓여 있다.

남원 앞에 넓은 터가 있어 예전에 다른 건물이 있지 아니했나 하는 생각하며 앞 초의 선사가 만들은 무염지로 갔다. 입구 가허루에서 편액을 바라보니 호남의 명필 청암 이삼만의 글씨 이였다.

대흥사 천불전 전경

그 위 남원 중심건물 천불전이다 지방 문화재 제8호이며 불상은 제52호로 화재가나서 없어졌던 것을 완호스님이 순조때 다시 옥돌 부처님을 안치하고 천불전을 건축 하였다 한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으로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한 모습 이다.

현판 편액을 이광사가 썼는데 양옆의 용머리 장식과 앞쪽 문살에 분합 문살을 가득 메운 꽃무늬 조각이 현판과 같이해 아름답기만 하다.

천불전 안 중앙에는 목조 삼존불을 모시고 주위에 옥돌로 만든 천불이 안치 되여 불국 세계를 이뤄 놓았다.

완호스님께서 천불전을 다시 질 때 쌍봉사에 있으며 그림에 뛰어난 풍계스님과 석공 열명을 함께 경주로 보내 6년에 걸처 옥돌 부처님을 만들게 하였다 한다.

옥돌 부처님이 완성되자 3척의 배에 나누워 싣고 해남으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나 한 척이 표류 하다가 일본 나가사키 현으로 갔다. 옥돌을 싣은 배를 맞이하여 일본인들이 절을 짓고 이를 모시려 하자 그들 꿈속에 불상들이 자기들이 원래 해남 대흥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안치 될 수 없다고 항의하여 대흥사로 되 돌아왔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그때 일본에 갔다가 되 돌아온 불상이 약 700여불로 어깨나 좌대 아래 일(日)자를 써져 있다.

◇절에 웬 사당이

천불전이 있는 남원에서 담장을 끼고 무염지 옆을 지나 왼쪽으로 오면 표충사 구역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례를 위한 의중당 등 건물이 있고 다시 안쪽 작은 문안에 표충사 조사전 비각이 서 있다.

표충사를 절이라고 하기보다는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제자인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들의 영정이 지엄의 모습으로 모셔져 있었다.

표충사는 정조 때 지였다는데 화재로 소실되고 철종때 다시 진 건물로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표충사 내에 유물 전시관에 가사와 발우, 신발, 서산대사에게 선조가 교지를 내린 교지,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유물 등이 보관 되여 있다.

◇범종소리 들으며 추사를 그리던 초의 선사

그 앞에 고려 때 조성된 동종이 보물 제88호 지정 되여 중생 구제를 위하여 부처님의 소리를 내려는 듯 걸여있다.

여기에서 뒤편으로 300여m 가면 대광명전인데 지금은 선원으로 사용 중에 있다.

대광명전은 제주도에 귀양 중인 추사 김정희를 위하여 초의 스님 추사의 제자 신관호의 소치 허련이 합신하여 귀양 풀이기를 빌었던 곳으로 편액을 그때 신관호가 썼으며 단청은 초의 선사가 직접 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흥사에는 초의 스님의 얼이 담긴 보물제301호 3층 석탑이 있는 북미륵암, 자불암이 있다.

초의 선사는 '동다송'을 지어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을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대한 책을 만들었다.

차향을 느끼며 육지의 끝 두륜산 자락을 나오는데 선운의 구름에 청청한 동백이 나무 사이에 박혀 대흥사의 정경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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