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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의 문을 여니 생육신 김시습 흔적 '오롯이'

  • 웹출고시간2010.05.06 19:29:2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남 부여 무량사 전경.

마음이 허전해 무량사를 찾았다.

무량은 셀 수 없다는 말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도 셀 수 없는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말이다. 곧 무량사가 극락이라는 뜻이다.

극락이 있는 곳 무량사 길에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에 먼지를 씻어준다. 매표소에 오르니 일주문이다.

일주문이 마음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중생도 하나라 생각되어 앞을 보니 산 까치들이 먹이를 찾다말고 나를 맞이하듯 나뭇가지에 올라 날개 짓을 한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던데 이 산사에 반가운 길손일까 아니면 세속의 찌든 먼지나 털고 가는 그런 중생이 아닐까 생각하니 출가하는 마음 같아 만수산 산자락에 있는 무량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길을 오르다가 천왕문 앞에 통일 신라 시대의 조형을 따라 만든 고려 때 당간지주가 산사로 안내를 한다.

충남 부여 무량사 전경.

천왕문으로 들어가면 동, 서, 남, 북을 수호하는 각각의 천왕들이 모여 사천왕문 되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부처님 도량으로 향하는 중생을 수호하고 몸과 마음 상태를 가다듬어 오르라는 무언중 교훈을 주는 보탑, 창, 칼, 보탑, 비파에 몸매를 가다듬고 천왕에게 빈배를 하였다.

경내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꽉 차 극락전, 5층 석탑, 석등 등이 함께 무량사의 역사를 알려준다.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 국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고승 무염대사가 머물렀다고 하는데 탑, 석등들이 고려 때 것으로 고려시대 크게 중창 불사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란으로 불탔는지 17세기 대대적인 중창 불사하여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이 17세기 전반의 모습이다.

조선 인조 때 술 잘 마시는 진묵대사가 점안 을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산수와 더불어 시와 함께 무량사를 지켰다고 한다.

무량사의 역사와 함께 석등이 보물 제233호되어 극락전 앞에 서있다. 이 석등은 하대석과 상대석에 아름답고 수려한 연꽃을 조성하여 정겨워 보인다. 높이가 2.9m으로 화사석이 다른 탑에서는 대개 사각에 비하여 팔각화사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석등의 지대석이 땅밑에 묻혀 던 것을 1971년 원상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보물 223호 석등과 보물 185호인 5층

석등 뒤에는 보물 제185호인 5층 석탑이 웅장한 몸체를 자랑하며 서있다. 1층이 낮고 지둥돌이 쑥 빠져나와 날씬한데 층층이 작아져 비례가 매우 우아하다. 지둥돌은 얇고 넓으며 추녀가 수평으로 가다가 추녀 끝에서 살짝 들린 모습이다. 기단 밑변 5.2m의 넓적한 기단석 위에 7.5m 높이의 탑으로 안정감과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층층에 쌓아올린 체감이 상승 감을 준다. 상륜 부에 노반, 복발, 양화가 소박하게 얹혀져 탑 전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1971년 탑을 보수, 수리하였는데 고려 불상과 사리가 나왔다. 이 탑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같은 수법으로 계승하여 세웠다.

석탑 뒤에는 웅장하고 수려한 극락전이 보물 제356호로 서있다. 이 건물은 안에는 1층, 밖에는 2층으로 된 중층의 구조로 내부가 통층으로 장엄해 보인다. 1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내부 구조가 16척의 높이로 공포를 아래층에 내외 2출목, 위층에 내외 4출목을 두고 우물 천장으로 되어있다.

현재의 건물을 1976에 보수하였는데 기단 하부가 땅에 묻혀 집은 웅장한데 기단부가 낮아 보인다.

김시습 자화상 초상화

옆 영산 전으로 오르면 조그마한 탑과 어울려 나한을 모신 영산 전이 있고 그 위에 오르면 매월당 김시습을 모신 영정 각이 있다.

영정 각에는 김시습 (1435 - 1493)의 벙거지 모자를 쓴 모습의 자화상 초상화 영정을 모셔 놓았다. 무량사의 자화상은 김시습이 손수 그린 말년의 그림이며 젊은 시절의 자화상은 경주 기림사에 모셔져 있다한다.

김시습은 5세 때 중용과 대학을 통달한 신동으로 1445년 21세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자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버리고 스님이 되어 전국을 방랑생활을 하며 글로 허무함을 달래던 중 고대 소설 " 금오신화 "를 써서 우리 문학사의 금자탑이 되었다.

47세가 되어 스님 생활을 청산하고 속세로 내려와 육식도 하며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여 살다가 2년 후 다시 방랑길로 떠났다. 방랑에 길을 떠돌던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 무량사에 귀의하여 59세로 한 많은 인생 사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매월당이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 하지 말고 관속에 3년 두었다 그 후에 관을 열어 화장을 하여 달라는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언 데로 3년이 지나 관을 여니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변하지 않아 무량사의 스님들이 부처되심을 경아 드리며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왔다.

부처가 되신 매월당의 사리 부도 탑을 아련하기 위하여 경내를 뒤로하고 들어올 때 그냥 지나온 전나무 숲 따라 오른편 버섯 양식장 언덕에 이르면 부도 밭에는 이 절에서 여생을 다하신 스님들의 부도가 여기저기에 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다. 조선시대에 부도들은 대개 석종형과 달갈형으로 간소화에 비하여 팔각원당형이었다. 높이 2.84m로 하대 석에 엎어진 연꽃이 도드라지고 중대 석에는 용 두 마리가 얽이고 설킨 구름 속에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었다. 연꽃 상대석 위에는 아무 무늬 없이 단정하여 대조적인데 지붕 돌에 다시 귀꽃을 솟아나게 했다. 엎어진 연꽃이 지둥을 덮은 듯 한 그 위에 동글납작한 공 모양 돌이 얹어져 있고 다시 지붕 돌을 얹은 모습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 25호인 이 부도가 일 제시 태풍에 쓰러져 사리가 나왔는데 이를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한다.

세상을 원망하고 떠돌던 그의 부도에 삼배를 하고 나오니 무량 사를 찾을 때 반기던 산 까치들이 이제 마중을 하려는 듯 노을에 젖은 산 까치가 노을 빛 금 까치 되어 내 인생의 과보를 지고 저 하늘로 날아가는 듯 하여 나무아비타불하고 서방 세계의 부처님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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