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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예산 수덕사

백제 향기 따라… 비구니 수행 길 따라…

  • 웹출고시간2010.04.29 19:13:2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두고 온정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산 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과천리에 있는 수덕사를 오르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 조용한 산사를 울린다.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

◇스님의 길 찾아


수덕사는 모든 고뇌에서 해탈, 자신의 모든 명목을 추구하고 덕을 닦게 하여 모든 중생을 복과 덕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에서 수덕이라 한단다.

이 덕이 머무는 곳을 찾아 속세의 인연들을 끊고 스님이 되기 위하여 출가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모든 번뇌, 망상을 이겨야 한다.

이 고통과 싸워 이겨야 출가자가 된다. 부처님께 몸 바쳐 출가하는 데는 아무 자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출가 한다고 해서 누구나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제한도 있고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흉터가 있는 등 보기 흉하면 스님이 되는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 시험에 떨어져도 스님이 될 수 없다.

◇ 출가자의 마음과 몸은


출가는 집을 나서 사찰을 찾아 가는 것부터 시작이다. 출가를 결심하고 산문에 들어가면 보통은 상담하지 않고 하루 밤을 잘 수 있는 방을 구해 준다.

좀 더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집을 나서 적막한 산중에 홀로 지새는 동안 많은 사람들, 집 생각, 부모, 형제 생각에 뜬 눈으로 지새다 다음 날 산을 내려간다. 긴긴 밤을 이겨내면 주지스님이나 소임스님과 면담 할 수 있다.

스님께서 출가의 연유를 묻고 산중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 해 준다. 그래도 결심을 꺾지 않으면 행자 생활을 시킨다. 시간이 어느 정도 가면 삭발은 하지 않고 행자 복을 입은 채 사찰생활을 하나씩 배운다. 얼마의 시간이 가면 은사스님이 지정되고 삭발식을 갖는다. 삭발식은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송하고 결심을 다시 물어 결심이 서면 삭발을 거행 한다.

삭발은 출가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말한다. 이는 새로운 시작이다. 출가하여 정식구족계를 받기까지 만 5년이 걸린다. 사찰에서 그 동안 염불, 목탁치는 법, 예불의식을 배우고 강원이나 선원에서 4년 과정을 수학하여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과정을 통하여 출가하기도 한다.

스님이 되는데 쉽지 않음을 알고 출가자의 기분으로 수덕사 길 따라 오르는데 낙엽마저 바람 따라 날아간다.

◇ 산문의 첫문 일주문

일주문, 집이 있는 곳에는 문이 있다. 문을 통하여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사찰의 문은 속세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산문이다.

수덕사 일주문은 두툼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일주문은 사방이 아닌 일직선 기둥 위에 다포계 삼칸을 하고 있다.

일주문은 일심을 말 한다. 신선한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부산히 흐터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진리는 하나다.

마음이 쪼개어지고 나누워져 있을 때 삼매(三妹)는 생겨나지 않는다. 삼매 없는 수행은 진리가 하나가 될 수 없다.

일주문에 소전 소재형씨가 쓴 "덕숭산 수덕사" 글씨를 현액에 달고 있다.

◇ 수덕사에 웬 여관이

부처님의 세계 일주문 안으로 오르니 좌측에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수덕사와 더불어 반세기를 같이 해 왔다.

세계적인 화가 고암 이응로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 부인이 운영했던 곳이다. 수덕여관 입구 두 개의 바위에 한글 자모가 새겨져 있는데, 고암 이응로선생이 음각한 것으로 서로 엉킨 듯 아름답게 풀어져 가는 조화를 그린 그림이다.

문자 추상은 프랑스로 건너간 고암이 추상미술을 접하면서 동양의 정서를 서양기법에 풀어내려는 시도란다.

사군자에서 출발한 고암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정신과 기법을 집합시켜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개척하였다.

고암이 전부인과 이혼하고 신여성 박인경과 재혼하여 프랑스에서 새 삶을 꾸민 뒤였다.

홍성 사람인 전 부인 박귀녀는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며 살다가 남편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에 들어가자 버림받았지만, 온갖 뒷바라지로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무심히 바위에 그림만 남겨 두고 파리로 떠났다. 그 후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을 파리에서 열던 중 이승을 떠났다. 본부인 역시 수덕여관에서 일편단심 그를 그리다 돌아가셨다.

후에 폐허가 된 여관을 수덕사에서 인수해 오늘에 이른다. 추억의 옛 흔적은 없고 다시 지은 집 같아 아쉽다. 수덕여관은 많은 추억이 있는 여관이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시인, 문학인, 수덕사를 오가는 사람들, 사랑하던 사람들이 미로를 남긴 추억의 강이다.

◇ 역사 앞에 탑과 대웅전이

수덕여관에서 뒤돌아 나오니 옛날 고풍스러운 돌계단은 없어지고 새로 건축한 거대한 강원 건물이 앞을 막는다. 강원 밑으로 오르니 마당에 새로 조성한 탑과 석등이 있고, 양 옆에 범종과 각, 법고루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을 한단 더 오르면 여래탑이라 부르는 3층 석탑이 있다. 665년 신라 문무왕 때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석탑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귀꽃이 떨어져 나가고 이끼가 끼는 등 손실되어있다.

그 앞에는 역사의 흔적 대웅전이 옛 모습 그대로 서있다. 장대석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정면이 더 넓은 것과 달리 측면이 넓게 서있다.

이 건물은 1308년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 보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나라 세 번째 오래된 건물이다.

1937년 해체 복원수리 중 중수 연대를 적은 글씨가 발견되어 수덕사 연대를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고 건축의 건립 연대를 측정하데 기준 잣대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배흘림기둥 위에 공포를 둬 지붕 무게를 받게 하는 주심포 양식인데 화려하지 않은 고려와 조선 초기 건물이다.

공포는 단순하지만 건물이 11량으로 큰 지붕 맞배지붕이다. 특히 창방위에 파란 모양받침을 달아 항아리 모양의 충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 다시 파란 대공을 얹어 고주가 받고 있는 가로 부재를 받게 했다.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는 우미량이 달려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49호이다. 건물 내부에는 1937년 수리할 시 공양한 꽃꽂이, 작은 부처와 나한들, 극락조, 악기를 타는 비천 등 많은 벽화가 발견되어 찬탄하게 한다.

악기를 타는 비천의 풍만한 얼굴, 섬세한 이목구비와 손, 유연한 자태, 힘차게 펄럭이는 옷자락 등이 매우 생동하는 모양으로 그려있다.

꽃꽂이 그림은 수반처럼 생긴 도자기에 홍련, 백련과 여러 가지 야생화가 한 아름 소담하게 꽂혀있는 사실적 그림으로 고려 벽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리하려 떼어 놓았던 벽화가 한국전쟁으로 흔적도 없이 부서져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다행히 모사한 그림 몇 편이 국립 박물관에 있으니 다행이다.

수덕사는 백제 말 창건되었다하나, 기록이 없으며 고려 공민왕때 나웅대사가 중수하였다 한다. 그 후 한말 경허가 머물며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그의 제자 만공이 중창하여 제 7교구본사가 되었다. 선방 청운당, 백운당 지나 스님의 길을 공부하는 승가대학이다.

◇ 청춘을 불사른 일엽스님

승가대학에서 참선하는 행자승들을 보니 일엽스님이 생각난다. "청춘을 불사르고 "를 집필한 김일엽스님이 계셨다는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 넓은 방에 40여명의 수도 비구니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었다.

2층 법당에 올라 예불을 올리고 나오니 그는 갔지만 만공 스님이 쓰신 친필 칠근루(七斤樓)가 현판으로 걸려 있었다.

◇ 만공스님의 법문이

만공탑

견성암을 뒤로하고 나와 1200계단 정혜사를 향하여 비구니 되는 길 따라 올랐다. 흘러내리는 땀은 땀이 아니고 속세를 떠나면서 행자들이 인연들을 끊기 위한 눈물로 생각되었다.

이 계단 오르니 만공스님이 영친왕에게 얻은 거문고를 타던 자리에 안치한 미륵불이 미래의 내세를 기약하며 공덕을 베풀고 서있었다.

합장 반배를 하니 만공스님의 법문이 생각난다.

미륵불 앞에서 만공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상좌승이 차 공양을 올리면서 "스님 지금 타신 곡이 슬픈 곡입니까 아니면 기쁜 곡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만공은 "야 이놈아, 네가 가져온 차가 깨끗한 물이냐 아니면 더러운 물이냐" 하고 물으니 "예, 깨끗한 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야, 이놈 내가 먹고 오줌이 돼도 이 물을 먹겠느냐" 물으니 상좌승은 "못 먹습니다"했다 하니 이것이 자연의 이치 아닌가.

만공스님의 많은 법문을 생각하며 오르니 만공탑이다. 탑신 위에 둥글게 올린 부도이다.

인간은 하나의 둥근 원(공)따라 모지지 않으며 행동도 마음도 둥글게 살아야 하는 진리의 샘을 말하는 금언의 탑이다. 만공 스님의 넓고 둥근 마음을 제자가 유학에서 돌아와 그의 진리인 둥근 만공 탑을 세웠다한다. 탑 앞에 어느 불자가 놓은 생화가 있어 내가 드리는 마음으로 만공선사를 추모해 본다.

◇ 고요가 흐르는 정혜사

만공탑에서 구름 따라 오르니 정혜사이다.

수도자가 몇 십 명 있지만 산사가 너무 조용하다. 경내에 2개의 탑이 있고 관음전이다.

관음전 앞에는 높은 산에 원형으로 넓게 만든 우물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비구니 승들이 이 우물에서 참선을 하기 전 목욕재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우물물에 세수를 하고 앞 관음전 툇마루로 오르니 커다란 목탁이 봄의 햇살을 받으며 놓여있다.

산사의 고요 속에 마음을 한데 모아 맑고 깨끗한 독경 소리와 함께 예불에 두드림이 있는 큰 목탁을 사진에 담고자 카메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속세의 얼굴들이 보이기도 하고 자비와 은혜도 보였다. 또한 수행승의 괴로운 번민이 교차되기도 하고, 피안의 세계 극락이 보인듯하다. 그리고 정혜사에서 수덕사를 내려 보았다.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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