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경주 감은사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한 '왕의 길'을 묻다

  • 웹출고시간2010.04.22 19:21: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

◇ 동해구 대왕의 얼을 찾아

검은 조약돌이 수 없이 깔려있는 동해바다 봉길해수욕장이다.

그 앞 바위군이 파도가 오가는 세월속에 신라의 역사를 지켜 온 곳이다.

횐 거품을 토하는 바다에 서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면 아기자기한 바위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 군이 자리를 하고 동서남북 4방으로 가운데에 가공한 고랑이 패어있다. 주위에 자연 암석들이 기둥 모양 세워져 있다.

중심 길이가 약 3.5m 되는 고랑 안에 거북 등 모양 길이 3m, 폭 2.2m 의 돌이 얹어져 있는데 고랑에는 약간의 물이 항상 덮여져 있다. 사방을 트은 십자형 수로를 통해 물이 들어와서 세 고랑이로 서서히 쪼개져 빠져 나간다. 이는 거북 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 물은 항상 움직여 웅덩이의 수온을 조절하여 영원히 변치 않게 하는 1300년 전 과학이 여기에 있었다.

이 돌 밑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장치되어 있었다 하는데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둘러싼 주위 환경과 인근 주민들의 구전으로 내려온 설화,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떠낸 흔적이 등이 대왕암으로 불러 왔다.

사실 옛 부터 이곳 주민들은 대왕암으로 알고 신선시하여 백중 날 대왕 제를 앞 바위군 대왕암 앞에서 지내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신라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곳이 아니라도 우리의 얼과 민족정신이 있는 수중능이다.

'만파식적' 얻은 이견대

◇ 만파식적을 얻은 이견대

이곳에서 뒤 돌아 다리를 건너 감포 쪽으로 조금 가면 신무왕이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사적 159호 이견대가 나온다.

만파식적은 세상의 파란을 없애주고 편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한다.

신무왕이 선왕을 대왕암에 장사하고 대왕암이 보이는 용담산에서 살펴보니 동해에서 산이 떠서 감은사 항해 왔다 갔다 하였다.

왕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점괘에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 영혼이 서로 만나 신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준다는 것이다.

점쟁이의 말을 듣고 신무왕이 바다 더 가까이 가서 살폈다. 거북이 산머리 같은 산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한 그루가 되었다. 이튼 날 정오에 그 곳에 왕이 행차를 하니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이틀이나 일러 났다.

이틀을 기다리니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하여 왕이 손수 배를 타고 작은 섬에 들어가니 홀연히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받쳤다.

바다에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되신 김유신 장군이 왕에게 내리는 큰 보물이라는 것이다. 용에게 신무왕이 대나무가 갈라졌다 합쳐 졌다하는 연유를 물으니 용이 손뼉이 마주 처야 소리가 나듯이 대나무도 합쳐졌을 때 소리가 나는 것, 왕이 소리의 이치로 천하를 다스리게 된 징조라며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였다.

왕이 대나무를 잘라 나오자 용과 산이 홀연히 떠났다.

그 후에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으니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끝이고 비바람이 잔잔 히 불어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파시적은 경주를 벗어나면 소리가 나지 안했다고 한다.

나라를 걱정한 문무왕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켜주고 국태민안을 위한 만파식적까지 준 군왕은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

감은사지 금담터.

◇ 아! 감은사의 혼이여

681년 7월 7일에 그의 아들 신무왕이 문무왕이 감은사를 짓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나라 사랑, 삼국을 통일하신 은혜에 감사의 뜻으로 감은사를 지어 그의 영전에 받친 것이다.

동해 구에서 대종 천 따라 올라가면 풍수가 좋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있는 절이다.

용이 되신 대왕께서 이곳에 오셔서 부처님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곳 이다.

그러나 왜병이 임진란 때 아무런 이유 없이 불을 질렀다. 이는 동해를 지키시는 문무대왕의 혼, 우리의 얼, 민족정신을 태워 버린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 전당을 잃은 외로운 동 서 탑

불타버린 감은사에 석탑 2기가 외롭게 서있다.

불탄 절터 주위에 앙상한 주추 돌과 주변에 석재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전당 없는 대웅전 터에 대략 석재를 마추워 놓았다.

감은사는 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 일 금당으로 바뀌는 과정에 동, 서로 두 탑을 세우고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 북 선상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최초의 절이다.

중문 석탑 남쪽에 금당을 짓고 강당을 석탑의 북쪽 위치에 지었다.

회랑은 남, 동, 서로 금당 좌우는 동, 서 회랑을 연결되는 주회랑 이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금당 터 앞에 석재 중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보기 드문 석재가 보이는데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있던 것이 아닌 가 생각 된다.

금당 중문 남쪽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밖에는 대종 천 따라 들어온 동해 바닷물이 고여 있던 용담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금당 바닥은 마루 대신 돌로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루를 깔듯이 초대석을 깔아 장대석 밑을 빈공간이 되게 특수하게 만들었다.

◇ 여러 돌이 하나의 탑이 되어

금당 앞에 동, 서로 2개가 서있는 감은사지 3층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 석재로 조립 되었다.

하층 기단은 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 12매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매로 되어있다. 기단 양쪽에는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이다.

상층 기단 면석도 12매로 갑석은 8매로 2주의 탱주로 탑신부 1층 몸돌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우고 2층 몸돌은 각 한 쪽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을 1석으로 구성하여 놓았다.

지붕들은 각층의 낙 수면과 정상에 2단의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올라갔다.

3층 지붕에서 시작되는 탑 상륜부에 노반 석 1장이 남아있고 부재가 없으며 약 3,9m 높이의 쇠로된 찰주가 노반 석을 관통하여 서있고 석탑의 전체 높이가 13m로 찰주 높이를 빼면 9,1m 신라 제일탑인 국보 제112호이다.

◇ 신라의 예술 사리장엄구가 탑 속에

더욱 중요한 것은 1959년 탑을 해체복원 하였는데 쌍탑 중 서탑 중앙 사리 공에서 창건당시 사리장엄구와 사리가 발견되었다.

사리 장엄 구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모양 청동사리공이 정교한 연화문 받침에 57cm 29,5cm 깊이 29,5cm의 함을 놓았으며 함 네모서리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고 좌우에 귀신의 얼굴 고리가 있는 화려함과 섬세한 귀중한 유물이다.

이 사리공은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1996년 4월 동탑 수리 시에는 높이 27cm, 폭 19cm내에 정교하게 조각된 사천왕상의 금동사리 함이 나왔다. 사리함 속의 금동 사리 장치는 높이 13.4cm 폭 14.5cm의 2층 전각 모양의 사리 장치가 나왔다. 서 탑의 사리장치가 거의 같은 2층의 사리장치 연꽃봉우리 모양 탑 속에서 수정 사리병과 사리 55개가 나왔다.

◇ 감은사의 창건은

감은사를 문무대왕이 불력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승하 하시자 그의 아들 신무왕이 부왕의 업적과 은혜에 감사 하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 짓고 불사 하였다.

죽어 용이 되신 문무대왕이 대왕암에서 대종천 물길 따라 감은사 연못(용담)에서 금당과 연결된 음통을 타고 올라와 부처님의 정토아래 불국 세계의 조국번영을 발원하고 머물며 조국을 지킨 대왕의 나라사랑 민족 사랑을 폈던 참선의 도량 이였다.

감은사의 건축은 신무왕만의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 뿐 아니라 전 신라인이 삼국통일의 유업과 태평성세의 편안한 나라를 이룩하신 은혜에 감사한 전 민족적인 감사의 장이였을 것이다.

감은사 용담에 바닷물을 끌어 드린 것으로 생각되는 대종천은 토함산과 함월산에서 발원한다.

1235년 몽고군의 3차 침입으로 4년에 걸쳐서 국토가 유린 되었다. 경주를 불바다로 만들더니 황룡사 9층 목탑을 태워 버렸다. 그리고 선덕왕 신종(에밀레종) 보다 4배나 되는 무게 100톤의 종을 원나라로 가져가려고 하였다. 이 거대한 종을 바다가 아니고는 가져 갈수가 없어 토함산 너머 강물 길 대종천을 택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용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고 배가 대종 천에서 뜨자 갑자기 폭풍을 일으켜 배가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로 큰 종이 물에 무쳤다하여 대종천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이 곳 사람들은 비, 바람 부는 날에 바다 속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한다.

이를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발굴 조사단이 대종천에 종이 묻혀 있는지를 조사했지만 종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

이 대종천은 대왕암서부터 바다 물을 끌었다면 이 못은 수로의 관문이며 대왕이 조국을 지킨 넋의 관문으로 우리에게 민족에게 얼과 조국애를 시고 가신 교훈의 수로이다.

토함산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이 바람에 동해구 대왕의 수중 능에 명훈을 빌어 본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