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 받는다. 가장 큰 업적은 아무래도 한글 창제일 것이다. 세종이 없었다면, 아니 신하들의 극간과 저항에 굴복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우리민족은 언어도 없는 미개민족으로 현대에 와서도 중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됐을 게다. 세종은 충북출신 신료들을 유독 신임했다. 한글창제의 최고 공로자로 꼽히는 신미대사(信眉大師)와는 매우 가까웠다. 세종은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에게 유명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로 존호할 것을 당부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시대적 사조였던 시기, 세종은 신하들의 벌떼 같은 반대에도 왜 신미를 최고의 국사로 추앙한 것인가. 승려에게 이 보다 더 높은 칭호를 내린 적이 없었다. 신미대사는 영산 김씨로 영동에서 태어난 고승이다. 친동생인 괴외 김수온(乖崖 金守溫)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으며 세종의 두터운 심임을 받았다. 신미와 세종을 연결한 장본인이 괴외가 아니었나 싶다. 불교신자였던 세종이 신미에게 감명을 받은 것은 바로 능엄경(楞嚴經)이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능엄경의 다라니를 외우면 임금과 백성, 나라가 다복해 질수 있다는 신앙을 세종은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글의 자형이 다라니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지론이다. 음악을 사랑한 세종이 가까이 한 인물은 바로 천재적 음악가 난계 박연(蘭溪 朴堧)이었다. 일설에는 박연으로부터 '궁상각치우' 오음(五音)에서 한글창제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설도 있다. 세종은 박연에게 명해 세계 최초로 400여 명을 단원으로 하는 국악교향악단을 만들었다. 지금도 매년 종묘제례 때 공연되는 세계문화유산 종묘제례악이 그 유풍이다. 세종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청주 초정약수에 와서 121일을 지냈다. 세종은 왜 한양 정궁을 떠나 이렇게 많은 날짜를 초정에서 보낸 것일까. 겉으로는 안질치료를 핑계로 속리산 복천암에 있던 신미를 불러 한글창제 비밀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한 나라의 국왕이 전란이 아니고서는 4개월씩이나 조정을 비우고 지방 행궁에서 보낸 사례는 없다. 세종은 효성이 깊었다. 부친인 태종도 효성에 감동했으며 몸이 비대해 건강이 나빴던 세자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다. 세종은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지나친 공부와 과로로 만년에는 시력을 잃기까지 했다. 초정으로 어가를 움직이면서 세종은 유숙했던 곳에서 효자를 발굴해 포상했다. 진천 백곡저수지에 살았던 효자 김덕숭(金德崇)을 특별히 행궁으로 부르기도 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세종은 김덕숭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소식을 듣고 효행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하고 마을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했다. 청주시 초정약수터에 세종행궁이 지어졌다. 옛날 건축 양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졌는데 향후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듯하다. 그런데 문화계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집만 지어놨지 '세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종의 위업과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컨텐츠가 없다는 주장이다. 평생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자신의 건강을 해쳐 가면서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세종. 세종행궁이 대왕의 위민정신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인륜상실 시대 특별한 인의(仁義)교육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공의휴(供儀休)는 고대 노나라 시대 청렴한 재상이었다. 당나라 정관황제(태종) 까지도 '공의휴의 청렴정신을 본 받으라' 유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어느 날 한 고관이 생선을 보냈으나 이를 거부했다. 고관이 불평어린 투로 '왜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생선을 받지 않은 것은 내가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이오. 지금 생선을 받고 내가 혹 뇌물로 파면되면 좋아하는 생선을 먹을 수 없지 않소' 그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자신의 하인들이 밭에다 채소를 많이 심자 수확기에 모두 뽑아버렸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채소를 심어먹으면 백성들이 애써 기른 채소는 어디에다 팔겠는가' 재상이라면 이 정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존경을 받고 행적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아닌가. 국무총리를 옛 재상(宰相)에 비유한다. '재(宰)'라는 글자의 본래 뜻은 '요리인'이라고 한다. '상(相)'은 보행을 돕는 자로 즉 노예라는 뜻이다. 대륙 통일 시기인 진(秦)·한(漢) 시대 부터 황제나 왕 다음의 행정 책임자를 일컫는 용어가 됐다. 현군 세종 때 명 재상들이 제일 많이 나왔다. 세종이 인재를 잘 뽑아 쓴 탓인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가 새는 안방에 그릇을 받치고 살았던 유관. 충청도 아산 출신 맹사성은 낙향하여 살 때는 농사꾼인지 정승인지 구분을 못했다. 맹대감을 백성들은 고불(古佛)이라고 불렀다. 오래 된 부처처럼 자비스러웠다는 것이다. 황희 정승은 모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너무 우유부단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싸우는 여종들 쌍방을 똑 같이 옳다고 한 것은 명판결의 하나로 회자 된다. 어느 날 여자종들이 다투면서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지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다 옳다고 했다. 이를 보고 있던 부인이 '두 사람이 다 옳다고 하는 판결이 어디 있느냐?'고 혀를 차자 '부인 말씀도 틀리지 않은 것 같소'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소한 일로 싸우지 말고 화해하라는 정승의 아량이 엿보인다.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전쟁 때도 명 재상이 많이 나왔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서애 류성룡,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오리 이원익이 그렇다. 백사는 만년에 광해군의 폭정을 극간하다 북청으로 귀양을 가다 유명을 달리 했다. 후덕하고 인자했지만 군주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는 추상같은 상소로 극간을 서슴지 않았다. 오리(梧里)정승은 반정으로 유폐 된 광해군을 지나치면서 신하로서 예를 갖추며 오열한 장본인이다. 반정군이 광해를 죽이려 하자 결사적으로 이를 막았다. 그리고 만약 전왕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벼슬을 버리겠다고 했다. 결국 광해군은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끝내 사사되지 않았다. 그는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면서 집은 오막살이 초가였다고 한다. 이런 재상은 요즈음 왜 등장하지 않는 것인가. 21대 총선 당선자인 이낙연 전 총리가 지난 주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이천시 서희 청소년문화센터 체육관을 찾아 조문하는 과정에서 유족들과 언쟁을 벌이는 등 사려 깊지 않은 행동을 보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야당은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오만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이당선자는 사과를 했으며 여론의 뭇매는 진화되는 양상이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졸지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 앞에서 전직 총리가 언쟁을 벌인 것은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위로해야 했다. 모름지기 재상이라면 국민을 사랑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옛 재상들의 덕(德)을 배워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지금처럼 불분명하고 암담한 적도 없다. 코로나19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은 지금 심각한 헬 조선이다. 40대 가장이 또 10대 자녀들을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도저히 희망이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다. 민의의 축제여야 할 4·15 총선도 맥 빠진 분위기다. 국민 세금으로 소득을 보장해 준다는 집권여당, 대안하나 내 놓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무기력한 야당, 선거구 마다 인물론은 퇴색 되고 말았다. 조국 사태를 비판한 여당의 양심적인 전 의원은 선거전에서 이미 컷 오프되어 출마마저 못하고 말았다. 공정하지 못한 것을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백제 말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다 귀양을 간 충신 성충이 연상 된다. 성충을 귀양 보낸 의자왕은 잘 되었을까. 귀를 막은 그는 결국 나당 연합군이 왕도 인근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해 파멸하고 말았지 않은가. 이 나라의 정치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진한 젊은 세대에게 올바르게 살라는 소리마저 외면하고 있다. 윗선의 눈치에 익숙해야 하며 침묵으로 살아야 출세하는 기회주의적 사고를 집권당은 가르치고 있다. 나라가 망하건, 젊은이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오로지 선거만 승리하여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고 이권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유권의식도 문제다. 이제 선거 때마다 인물을 평가하는 시대는 멀어진 것 같다. 인물보다는 당이 선택 기준이 된다. 인물이 잘났건 못났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면 허수아비도 찍는 풍토를 만들었다. 여든 야든 꼼꼼히 인물을 저울질하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정견이나 지식을 갖추어도 지지정당이 아니면 깡그리 외면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나라의 장래 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나 지역의 이익을 자장 중요시 하게 됐다. 정부가 과오가 많고 무능해도 지역을 위해서는 찍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언론도 이에 편승, 올바른 대안을 제시 못하고 네 편 내 편만 감싸고 있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지속 될 경우 경제는 더욱 침체 될 것 같다. 어느 당이 승리를 하든 국론은 더욱 분열되고 불협화음은 지속 될 것 같다. 한국의 4월은 잔인한 달이 되고 있다. 경제 침체의 늪이 계속 깊어지며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 산업경기 전반에 걸친 지표는 계속 절망적이다. 미국의 경제 불황 쓰나미가 심상치 않다. 실업자 수가 단 2주만에 1천만 명이 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각종 시위도 늘어나고 있으며 대 공황 때 보다 더 심각하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경제의 부침에 가장 영향을 받는 우리로서는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풍속도는 국민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행복마저 뺏고 말았다. 강원도 삼척시가 최근 아름다운 유채 밭을 갈아엎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벚꽃이 만발한 전국의 주요 관광지는 관광버스가 끊겼다. 아름다운 봄 풍경은 어김없이 오는데 인적은 끊기고 말았다. 4·15 총선을 앞둔 국가적 비상상황에서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진솔한 자세로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탕발림으로 국민을 기망하여 당장 표만을 얻으려한다면 국가의 장래는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총선을 공정하게 치르고 그 다음 위기극복을 위환 국민 단합을 도모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하늘을 덮고 있는 암운을 걷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필자는 가끔 과거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인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곤 한다. 전직 총리도 있고 국회의원 장관을 몇 차례 씩 지낸 인사들도 있다. 아무리 높은 직위를 역임했던 인사들도 퇴임하여 자연인으로 돌아가면 그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과거 높은 직위에 있던 분을 만났다. 재력도 대단했고 대통령 인척으로 잘나가갔던 인사였다. 필자하고는 친분이 두터워 반갑게 인사했으며 종종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세무 삼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그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승용차도 없던 그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녔다. 국회의원을 수차례 역임했던 과거의 영화가 한낮 물거품처럼 여겨졌다. 전직 장관을 역임하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L씨. 현역이었을 때 지역사회 일이라면 필자하고는 허심탄회하게 상의하는 사이였다. 은퇴하고는 일체 연락을 끊더니 어느 날 지하철에서 만났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총총히 헤어졌는데 얼마 후 부고가 날아왔다. 빈소에 조문을 갔을 때 L씨 유가족들은 부의금을 일체 사절한다고 했다. 고인의 유언이었던 것이다. 13평 아파트가 전 재산인 그는 그래도 멋지게 살다 간 풍운아 중의 한 분이었다. 생전에 가끔 만나 가슴에 숨겨 둔 얘길 들었으면 했던 아쉬움이 남는다. 5공 때 4성 장군으로 예편하여 차기 지도자감으로도 지목되었던 분이 있었다. 그가 몇 해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상가 집에는 그에게 엄청나게 신세를 지었던 인사들이 하나 없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하고 정승이 죽으면 적막이 감돈다는 말이 실감났다. 참으로 허망한 것이 인간사가 아닌가 싶었다. 여러 장관 직을 역임했던 한 분은 만년이 불우했다. IMF 이후 측근들이 모두 부도로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재력 있는 고향 지인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끝내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 왔다. 상가 빈소에는 과거 비서관들과 고향 지인들의 얼굴이 보였으나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는 영원한 권력이 없고 지나가면 한낱 꿈만 갔다는 것을 새삼 인식시켜 준다.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은 이렇게 다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정치권을 보면 감투싸움에만 모든 것을 건 듯 한 인상이다. 양보가 없고 불리하면 저주하고 싸우며 욕하는 일이 홍수를 이룬다. 국회의원을 지망한 모 인사는 지난날 과오를 잊은 채 두꺼운 얼굴로 나와 무엇을 개혁한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다. 그릇이 아닌 이들이 교언영색하며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애걸한다. 세상이 다 이런 욕심과 탐관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에 모 지역 군수를 지낸 한 분은 딱 2선만을 하고 용퇴하여 농사꾼으로 돌아갔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방불 하는 그는 벽지에서 이름 없는 농사꾼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대통령도 총리도 장관 의원들도 현직을 떠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기가 탁한 서울에 있으면서 권력과 선을 대고 이권에 기웃거리며 정치판 브러커가 되는 것은 노욕이다. 누가 존경을 하겠으며 후배들에게도 모범은 아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비례 대표당들이 예비후보를 둘러싼 이전투구가 도를 넘은 것 같다. 국민들이 혀를 차는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코로나 19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도 못할 짓이다. 감투전쟁은 졸렬하고 비겁한 짓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머니는 죽음의 문턱에 걸터앉아 자식을 낳는다'고 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종종 조선시대 양반의 묘소에서 아이를 뱃속에 넣고 생명을 잃은 비극저인 어머니들의 시신이 발굴된다. 고려 공민왕비는 원나라 노국공주였다. 배원파였던 공민왕은 처음에는 노국공주를 피하고 잠자리마저 외면했다. 그런데 노국공주가 임신을 하자 금슬이 좋아졌다. 그런데 출산하는 과정에서 노국공주가 애처롭게 목숨을 잃었다. 공주의 죽음을 지켜 본 공민왕은 그만 미쳐버리고 만다. 공민왕은 정신이상으로 일상을 보내다 그만 살해 되는데 고려 국운이 기울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 경전이면서 유교사회에서 가장 사랑받은 불서(佛書)가 있다. 바로 '부모은중경'이다. 왜 이 경전이 부처를 타부 시 했던 조선에서 그토록 사랑을 받은 것일까. 부모은중경을 읽고 제일 감동 받은 왕은 정조였다. 임금을 감동시킨 대목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가 죽음을 감수하고 자식을 낳아 온갖 정성으로 키우는 대목이었다. 기가 막힌 내용이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 수미산(須彌山)을 백 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일찍이 부친을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것을 목도한 세자는 홀어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 절감했다. 아들을 지키려고 입술을 깨물고 산 어머니 혜경궁 홍씨. 세자는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일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한 번도 수원에 있는 남편의 묘소를 참예하지 못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한 열성조에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임금은 곤룡포를 벗고 전쟁에 나가는 전립차림으로 말을 탔으며 어머니의 가마를 시위하고 갔다. 비록 지존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전통적으로 자식 성공이 일생의 가장 큰 희망이요 행복이었다. 훌륭한 어머니한테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한국 어머니의 표상으로 숭앙된다. 백사 이항복도 어머니 최씨의 훈육으로 훌륭한 재상이 되어 조선을 환난에서 구했다. 6.25의 환난을 겪은 한국의 어머니들은 남편을 잃고 생활 전선에 나가 5~ 7남매나 되는 자식을 키우고 살았다. 가난 속에 살아온 아들, 딸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를 세계 10위경제국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 위대한 힘은 지금도 곳곳에 살아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어떤 고통, 위험도 감수한다. 그런데 요즈음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로 동네에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에서 꼴찌라고 하지 않나. 영국 한 조산사가 지은 픽션 '여자는 목숨 걸고 아이를 낳는다'라는 책이 요즈음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이를 낳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출산처럼 숭고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신은 어느 곳이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이스라엘 속담이 기억난다. 아이를 낳는 여성들이 진정한 애국자가 되는 세태다. 위대한 어머니들의 나라 한국의 전통이 살아났으면 한다.
신라 처용무는 역귀를 쫓아내는 춤 놀이다. 무섭게 생긴 처용 탈을 쓴 건장한 남자가 등장하여 온갖 사설로 역귀를 저주하며 한 바탕 춤을 춘다. 서라벌 밝은 달 밤늦게 놀다 돌아온 이방인 처용은 아내가 다른 사내와 바람피운 것을 목격한다.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사내는 바로 역신. 처용이 화를 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다시 춤을 추자 역신은 잘못을 빌고 다시는 부인을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역신을 몰아 낸 처용은 신라인들의 신앙이 되었다. 그래서 달 밝은 밤이면 처용의 가면을 쓴 축제를 만들었다. 백제에서는 역병을 몰아내는 주금사(呪禁師)가 있었다고 한다. 주술(呪術)로 역병을 퇴치하려한 노력은 신라 처용무 풍속을 방불 한다. 고려 때는 역신에 제사하는 풍속이 있었고, 악질을 막기 위해 약을 몸에 지니기도 했다. 또 각 지방에서는 역귀를 달래거나 몰아내는 제단을 설치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 역질 퇴치를 꾀했다. 옛날에도 역병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역병이 돌면 수백 수천의 인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3회, 백제 6회, 신라 18회의 전염병 발생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지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지 않았을까. 고려시대에는 약 20여회에 불과한 반면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을 비롯한 많은 사료가 있어 풍부한 편이다. 세종 때 전염병이 창궐하자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특별 전교를 내렸다. 지방 수령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민간에서 전염병이 발생하거든 구제하여 치료해 주라는 조항을 여러 번 법으로 세웠는데도 각 고을 수령들은 취지를 살피지 않았다. 금년은 전염병이 더욱 심한 데도 구료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일찍이 각 조항을 상고하여 구료해 백성을 살리는데 마음을 쓰라' 전염병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1592년부터 1791년까지 200년 동안이다. 무려 91회나 기록이 나타난다. 연산군 3년 영안도(永安道. 조선 시대 함경도를 이르던 말) 감사 여자신(呂自新)이 삼수, 갑산의 역질을 임금에게 급보했다. 350명의 사망자가 생겨 의원과 약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의원 두 사람을 급파하고 약을 내렸다고 한다. 중종 10년(1524AD)에는 평안도 용천 지역에 역병이 돌아 무려 670명이나 사망했다. 중중은 긴급히 백성들을 진휼하고 사전에 막지 못한 해당군수를 잡아들여 추고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신종 코로나19 확진자 가운데 사망자가 늘고 있다. 신규환자도 계속 추가돼 국내 확진자수는 총 600명을 상회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전국지역사회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코로나 19대응 최고 수준으로 격상했으면 서도 발원지인 중국인들에 대한 여행금지를 막지 않고 있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기를 잡는 것'에 비유하는 기자들도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여러 차례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를 해도 묵살해 오다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확진자수가 제일 많이 발생한 대구시의 상황이 급박하다. 저녁이면 인적이 끊긴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앞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과 혼란에 빠지면 누가 책임 질 것인가. 그 것이 또한 우려 된다.
우리 사서에는 가요의 효시를 고조선시대 공후인으로 기록한다. 뱃사공 곽리자고가 강가에서 한 노인이 물에 빠져 죽는 참상을 목격했다. 노인의 아내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얘길 했다. 그녀가 공후를 타고 처연하게 노래를 불렀다. 공후는 고대 악기의 하나로 지금의 하프를 닮고 있다. 2천년이 훨씬 넘는 고조선시대 공후인이란 악기가 있었고 여인들이 작사하여 애가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할까. 옛 부터 음악을 사랑한 민족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인들의 음악사랑은 고분벽화에도 나오지만 신라인들은 특별히 향가를 앞 다투어 지어 불렀다. 향가를 잘 부른 당대의 음악인들이 많이 기록되지만 늠름한 화랑 가운데도 절창(絶唱)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향가를 잘 부르는 꽃미남 화랑들은 서라벌 귀녀들에게 선망의 아이돌이 아니었을까. 이런 음악사랑은 천 수 백년 연면히 내려온다. 현군 세종대왕도 음악 마니아 였다. 특히 음률을 알고 피리를 사랑했다. 세종임금이 피리를 잘 불렀던 영동출신 난계 박연을 총애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박연을 궁중에 자주 불러 음악을 정리 하도록 했다. 없어진 편종(編鐘)등 악기도 만들고 가요는 채보(採譜)하여 후학들이 배우도록 했다. 세종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또 하나를 든다면 아악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악보를 왕조실록에 넣으라고 명령한다. 실록에 넣지 않으면 없어지기 십상이다. 악보를 만세에 전하기 위한 특별한 아이디어 였다. 세종의 지혜로 이 시기 만들어진 악보는 왕조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5백여년 간 궁중 악사들은 이 악보로 음악을 연주했으며 지금도 장엄한 아악을 연주 할 때는 이 악보를 사용한다. 이는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자랑이다. 박연은 세계에서 최초로 아악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이는 서양보다 수 백년 앞선다고 한다. 약 400여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궁중의 대소 행사 연회에서 연주했다. 장중한 음악으로 임금의 덕업은 빛났으며 행사는 더욱 빛이 났다. 국립국악원 연주단은 우리음악으로 예술의 도시 파리를 감동시킨 적도 있다. 지난 2015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국악 오케스트라가 아악을 공연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동양의 신비스런 음악에 깊이 빠지기도 했다. 중국은 우리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었으면서도 악보를 기록하지 않았다. 지난 70년대 중국과 수교이후 한국에 온 고전 음악인들은 종묘제례악을 보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이미 사라진 당, 송대의 음악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둘러 아악을 배워갔다. 요즈음 종편 방송의 미스터 트롯 열풍이 대단하다. 시청률 27.5%를 상회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스터 트롯에서 주목을 끄는 가수들이 바로 전통음악을 기초로 다진 가수들이란 이라는 점이다. 미스트롯에서도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수도 국악인 출신이다. 우리를 감동 시키는 음악의 내면에는 바로 전통적인 한의 선율이 존재 했던 것이다. 한국인 특유의 음악 사랑의 저력에는 민족음악이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영화 기생충이 2020년 헐리웃 오스카상을 휩쓸어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증폭 되고 있다. 우리 전통음악도 세계에 기상을 펼칠 준비를 해야 한다.
굴원(屈原)은 전국시대 후기 초(楚)나라 사람으로 서정 시인이었다. 중국인들은 고래로 그를 최고의 애국시인으로 숭모하여 교과서에도 실었다. 그러나 그의 생은 불행했다. 임금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굴원은 나라에 비리가 넘치는 것을 개탄, 우한 동정호 수계인 미뤄강 물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굴원의 삶과 문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초사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굴원이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못가로 다니며 침울하게 읊조리니 그의 모습은 아주 파리하고 수척했다. 자나가던 한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상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하되 나 홀로 맑으며, 많은 사람들이 취하였으되 나 홀로 깨었소. 이런 까닭으로 쫓겨나 이 지경이 되었소'- 굴원의 시를 보면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이 엿보인다.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으나/ 임의 분별없는 흔들림이 원망스러울 뿐이네 / 끝내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시지 않으니..- 초나라 회왕은 법치를 외면하고 정실로 나라를 다스렸다. 굴원은 왕에게 진심어린 간언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충언을 듣지 않고 법을 어기자 굴원은 동정호로 내려와 이에 한탄하는 시를 쓴 것이다. 호수가에서 애가를 부르며 외롭게 산 굴원은 희망이 없었다. 충성스런 신하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날이 5월5일 단오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용선(龍船)을 타고 잉어에게 먹이를 주는 자선 축제를 베풀었다. 이 행사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정호 용선축제로 이어진다. 용머리를 장식한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치열하게 경주한다. 그리고 배에 탄 사람들이 갈대잎에 밥을 싼 쫑즈를 물고기에게 던져준다. 물속에 잠긴 굴원이 물고기에게 뜯어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라고 한다. 동정호가 있는 무한(武漢)은 조조와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오(吳)제국을 세운 손권(孫權)과 인연이 깊다. 그가 이곳에 철벽같은 하구성(夏口城)을 구축했다고 한다. 원(元)·명(明)·청(淸)대에는 우창부(武昌府)가 설치되었다. 1911년 무창(武昌) 봉기가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동정호에 굴원의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졌으며 굴원의 문학을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매년 한국 관광객들도 줄을 잇는다. 그런데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폐렴이 발생,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지금은 죽음과 정적의 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발병자와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우한시를 전격적으로 봉쇄했지만 급속한 확산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한 전문가가 지적했다. 병원마다 환자들이 넘쳐나도 마스크마저 달리고 제대로 치료가 안 된다고 한다. 돈이 없는 빈곤층은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고 있다. 중국이 우한 폐렴을 쉬쉬하고 보도를 통제한 것이 더 확산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부정과 비리가 가득 찬 세상에 대한 굴원의 저주인가. 우한 신종 폐렴은 이웃인 한국도 심각한 위험이 되고 있다. 초나라 임금 곁을 떠나 동정호에 몸을 던지면서 의로써 항명한 굴원의 고향이라서 역사를 상고해 본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총리의 운신 폭은 좁다. 청와대가 권력을 움켜쥐고 직접적인 권한을 주지 않는다. 각료 임명 제청권도 형식적이고 대통령의 오더를 받는다. 만약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다면 조국 같은 위선적 인물이 법무장관에 임명되어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이낙연 총리는 역대총리 가운데 제일 장수했다. 그러나 이총리는 문재인의 등 뒤에 숨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무능력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닌가. 굳이 국민들에게 어필 했다면 국회 대정부 질의가 있을 때 마다 야당의원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고 굵직한 목소리로 개그와 같은 멘트를 날린 것뿐이다. 자천타천 차기 대권 잠룡에 거명 되면서 여론조사 1,2등을 달리고 있지만 영혼이 없는 달변자로 평가받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 호되게 언론의 비판을 받았던 최저임금인상, 탈원전과 원자력발전소 가동중단, 주 52시간 근무제 등 봇물처럼 쏟아진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았다. 말을 아낀 것인가, 아니면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조신을 떤 것인가. 대통령 다음의 국정 책임자는 국무총리다. 실패한 정책이나 국민들의 고통이 따르는 문제라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개선을 건의해야 하는 자리다. 어떤 때는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들과 각을 세울지라도 올바른 소리를 해야 했다. 대통령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황송해 하는 사진을 보면 과연 이총리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짊어진 차기 잠룡으로 적합한 가 의문이 간다. 그는 또 이번 추미애 법무의 검란 수준 인사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의 항명을 조사하라는 식의 멘트를 날렸다. 총리직을 떠나면서 애써 여당과 청와대에 봉사하는 듯 한 자세를 보인 것인가. 대통령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차기 대선에서 낙점 받기 어려워서 인가. 이총리는 동아일보 출신 언론인이다. 동아일보는 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정신 고취에 선봉을 섰고, 군사 정권 시대에는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를 지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언론 사학자 천관우, 한국 언론의 사표로 일컬어지는 송건호, 자유 언론 투쟁을 주도한 안종필 등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언론인은 진실 보도를 위해서는 칼이 목에 들어 와도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 민족사상을 고취했던 청주 낭성출신 단재 신채호의 강인한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굴복하기 싫어 세수 할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지 않은가. 대통령이나 그 측근의 실세들이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할 때는 기탄없이 지적해야 하고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못 본 척 방관하는 것만이 잘한 일은 아니다. 청와대 참모들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검사들을 일거에 모두 바꾸는 검란이 단행했는데도 이총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오히려 법을 어긴 추장관을 옹호하고 응원하는 멘트를 날려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상(商)나라 성탕(成湯)은 재상 이윤(伊尹)의 보좌가 있어 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다. 주(周) 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현명한 재상 여상(呂尙)이 있어 역사에 남는 명군이 되었다. 여상은 바로 낚시를 즐긴 유명한 강태공이다. 조선임금 증 가장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자신이 임금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한 황희를 재상으로 발탁하여 쓴 소리를 들었다. 훌륭한 재상들은 목을 내 놓고 쓴 소리를 하여 군주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문대통령이 독선과 아집으로 헌법과 법률 위반이 잦아지고 측근들의 비리로 곤경에 빠져 있다. 이 총리는 그동안 어디가 있었으며 왜 적극적으로 나서 극간을 못했는가는 후일 역사가 그 잘못을 기록 할 것이다.
이옥봉(李玉峯)은 조선 선조 때 여류시인으로 옥천 출신이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더불어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그녀의 '몽혼(夢魂)'은 남편을 그리는 간절함을 담은 최고의 명시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떻게 지내셨나요 /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엔 그리움이 가득 합니다 /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될 것입니다.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한 한시 연구가는 이 시를 최고의 명작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왜 옥봉은 이처럼 슬프고 간절한 시를 썼을까. 그녀는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옥천군수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송나라 시인 소동파를 공부했다. 그녀는 당대의 촉망되는 사대부 조원(호 雲江. 趙瑗)의 첩이 되었는데 모함을 받은 백성들의 신원을 위해 씨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남편의 집근처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남편의 마음이 돌아설 것을 바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임진전쟁의 와중에서 죽었다는 설과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 조난되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실학자였던 이수광의 문집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조원의 아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시는 당대에도 칭송을 받았다. 인조 때 명신 신흠(申欽)은 '청창연담'에서 '근래 규수의 작품으로는 옥봉 이씨의 것이 제일이다.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이는 아직 없었다'고 했다. 허균은 '맑고 장엄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없다'고 평했다.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더 유명했다.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 중국의 시집에 그녀의 시가 수록되어 전해진다. 부군이었던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에는 옥봉의 시가 32수 실려 있다. 국문학계에서 옥봉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도 정작 그녀의 고향인 옥천에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강원도 삼척군은 그녀가 놀던 곳을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으며 영월군은 그녀가 장릉((莊陵.단종)을 지나며 쓴 '영월도중(寧越道中)' 시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최근 민간에서 찾아진 옥봉 육필시 제2의 '몽혼(夢魂)'은 그녀가 공부했던 소동파 시집의 맨 끝장에 있으며 결혼 초 괴산현감으로 부임한 남편을 그리며 쓴 시다. 처음 발견 된 옥봉의 친필이다. 옥천은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 아닌가. 다른 곳에 조선최고의 여류시인 옥봉을 빼앗기지 말고 새해는 그녀가 태어난 옥천에서 문학관 건립을 서둘러야 할 때다.
울주 반구대 벽화는 우리나라 선사시대 암각화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바위에 이처럼 많은 선사시대의 다양한 생활상이 어떻게 그려지게 된 것일까. 바위에는 약 300여점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은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유물이 1971년 전 충북대 이융조 교수 등이 발견한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불교유물 전문가인 전 동국대 문명대 교수, 고대사를 하는 고대 김정배 교수도 이 유적을 찾는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아무래도 하단에 기록 된 300여자의 명문이다. 바로 신라시대 젊은 남녀들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들을 화랑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바위에 새겨진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글이 나타난다. "을사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은 없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하였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을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AD)으로 추정 된다. 등장인물은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과 그의 연인이자 누이였던 '어사추여랑'이다. 학자들은 이 여인이 갈문왕의 사촌누이이며 둘은 혼인을 기약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사회에서는 사촌간의 근친혼이 유행했다.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지소부인(어사추여랑.법흥왕비)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 3일,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셋이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지소부인)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은 진흥왕대 화랑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의 로맨스다. 사랑했지만 결국은 다른 인생을 살았던 남녀의 애련이 엿보이는 글이다. 후에 신라 화랑들도 산천을 유람할 때는 젊은 여랑(女娘)들도 함께 했으며 이들은 많은 추억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런데 2017년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여당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환경부 장관이 반구대 암각화 보존책을 강구한다고 울산을 전격 방문한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단체 고문이던 현 시장인 송철호 변호사도 참석했다. 김부겸 전 장관은 통상적인 일정이라고 하지만 울산을 찾아 황운하 울산경찰청장과 송 시장 측 인사인 지역건설사 대표를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과 호형호제하는 여당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청와대 민주당 정부가 총출동한 것 같은 의혹을 주고 있다. 세계적 유적 반구대 보존대책을 구실로 관권선거를 지원한 것인가. 반구대유적에 일말의 부끄럼도 없는 것인가. 최근 국립박물관은 대통령의 관심사라고 하여 신라 유물도 가야유물이라고 소개하여 전시 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을 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학술기관이나 학자들이 청치권력의 입맛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학자들의 양식인가. 이제 며칠 있으면 기해(己亥)년을 보내고, 쥐의 해인 경자년(庚子年)을 맞는다. 쥐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새해를 맞아 다시 태어나는 대한민국, 지혜가 충만한 한 해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를 가져 본다.
간디는 생전에 18회, 모두 140일을 단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 영국에 대한 저항으로 투옥 된 그는 73세의 노인이었다. 노인들이 생명을 담보하는 단식은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단식에 돌입 20~30일을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10여일이 한계 상황이다. 한일 합방당시 애국지사 장태수 선생은 단식 27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70세였다. 지난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시절 가택연금 상태서 독재 항거의 뜻으로 23일간 단식기록을 세웠다. 그는 단식을 철회하며 '굶어 죽는 것 보다는 싸워 죽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역사를 보면 불의에 항거하여 단식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고구려 동천왕대 득래(得來)라는 사람은 왕에게 위(魏)나라와 화친을 간언하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단식, 목숨을 버렸다. 득래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한 때문이다. 그는 '여기 서서 바라보니 장차 이 땅은 쑥갓만이 자라는 땅이 되겠구나.' 라고 한탄했다. 신라 때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일본에 가서 죽자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곡기를 끊었다. 그 녀는 두 딸과 함께 단식했는데 나중에는 망부석 전설이 되었다. 우리 설화에는 부인의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재미난 기록이 전한다. -그가(박제상)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변해 왜왕을 기절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사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 백제 충신 성충은 감옥에서 단식을 했다. "살아서 내 두 눈으로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험준한 곳에 의거해야만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의자왕은 성충의 충성 어린 단식 간언을 외면하여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말 때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은 충남 청양분이시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항거하다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 되었다. 감옥에 갇힌 면암은 일본이 주는 음식은 일체 먹지 않겠다고 저항하며 결국 옥에서 운명했다. 일제 강점기 청원 낭성에서 한학을 가르쳐 온 유학자 소당 김제환(素堂 金濟煥)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에 불응했다. 일본 헌병이 주재소로 잡아가 구류를 살리며 모욕을 주었다. 김제환은 이에 항거 단식, 결국 운명을 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겨울 단식 8일 만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 한 후 여성 최고위원들의 동조단식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황대표의 만류에도 단식을 감행하고 있다. 또 젊은 모당의 대표가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 인근에 '국회의원 축소, 비례대표 폐지, 공수처 반대' 등을 주장하며 혹한의 단식을 하다 병원에 실려 갔다. 생명을 담보로 한 이들의 주장을 폄하하거나 희화화 하면 역풍을 만난다. 대통령과 여당은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찾아 국민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자당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일방통행은 독재요 오만이다.
아름답고 희망찬 한국이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전 미국대통령이었던 오바마 마저 한국의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격찬하고, 어머니들의 교육열을 칭송했던 코리아 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지독한 혼돈을 겪고 있다. 정치는 실종되고 나라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좌우 대립 양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형국이다.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간다. 한국사회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총칼을 안 들었다 뿐이지 저주와 성토는 폭력 수준을 능가하고 있다. 광화문에선 문대통령 하야를, 서초동에서는 조국 수호, 사법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대통령은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 같은 집단 민원이나 시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수 십만 혹은 백만명이 넘는 군중이 집합하여 정부를 성토해도 폭력이나 파괴 같은 비 민주적 행태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 민주주의가 최고로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반문 집회에는 학생이나 주부, 지방에서 사업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자영업자들도 자비로 상경하여 이 대열에 서고 있다. 이들을 야당이나 특정세력의 사주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국회는 어떤가.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들의 일대 전장화한 인상을 떨칠 수 없다. 페어플레이는 어디가고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의 양상이다. 오로지 내년 총선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정부의 잇단 정책 실패로 인해 내년도 경제전망은 어둡다. 잇단 통계가 향후 몇 년 간 더욱 어려워 질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한국경제는 건실하며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주 52시간 근무, 자영업자들을 사지에 빠지게 한 기초임금의 인상 등 실패한 정책을 사과하거나 뒤로 후퇴시킬 의도는 없는 것 같다. 청와대는 이런 정책을 자화자찬하며 문재인 정부 전반기 최고 업적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청와대나 정부가 지독한 나르시즘에 빠진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약속이 불행한 예언처럼 들리고 있다. 그동안 서울에서도 가장 경기가 좋다는 강남구 논현, 신사, 압구정동을 가보면 얼마나 경제가 어렵냐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잘나가던 많은 음식점, 프랜차이점, 서비스업종들이 한집 건너 하나 씩 폐업한 것을 볼 수 있다. 손님들로 북적이던 식당들도 요즈음은 한산하다. 오피스텔 사무실 빌딩은 공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혼돈과 불안 갈등은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다.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 오만과 독선이 지금의 사태를 키워왔다. 진영논리에 빠져 국민화합과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 같은 잇단 인사실패로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청와대의 북한에 대한 굴욕적 자세도 혀를 차게 한다. 동해에서 남하했으나 살인자라는 이유로 즉각 북한에 돌려보낸 젊은 청년 두 명에 대해 비인도적 처사도 문제가 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성공을 세계에 보여준 대한민국의 위상을 뒤흔든 사건이다. 이 같은 일을 결정한 청와대 안보실의 월권은 법적책임을 져야 한다. 위상을 다시 세우려면 비장한 각오와 반성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이라도 대통령과 정부는 환골탈태의 의지로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올드보이(old boy)'는 늙은 사람이란 뜻이다. 지난 2003년 박찬욱 감독은 최민식을 주연으로 기용, 영화 올드보이를 제작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난해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을 가둔 남자를 찾아가면서 벌이는 숨 막히는 추적과 특히 클라이막스가 충격적이었다. 이 영화가 히트한 이후 언론에서 올드보이란 말이 부쩍 유행이 됐다. 색깔이 어둔 영화라 올드보이가 일반에게는 부정적이며 침울하게 느껴졌던 것인가. 하여튼 이 용어가 노인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올드보이란 말이 나쁜 뜻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올드보이'를 장로나 지도자로 표현하고 있다. 잠언서에는 노인이 되는 것을 일종의 복으로 간주했다. 옛날 동양에서는 40대를 '초로'(初老), 50대를 '중로'(中老), 60대를 '기로'(耆老)라고 했다. 수명이 짧은 것도 이유였지만 40대부터 노인 행세를 한 셈이다. 고대 사회에서도 치자(治者)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 유리왕 5년 11월 왕이 순행 중 얼어 죽을 지경에 처한 한 노인을 발견하고 '이는 나의 죄다' 라고 하며 옷을 벗어 덮어주고 음식을 먹여주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나이 먹은 관리들의 집합소인 기로소(耆老所)를 만들고 늙은 신하에게는 궤장을 하사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기로소에 자주 나가 주식을 하사하고 담소하는 것을 즐겨했다. 설날이 되면 8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는 음식과 술을 하사했다. 100세 노인들을 궁중으로 초치해 세자에게 업어 주도록 했다. 장수 노인을 업으면 수복을 얻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인재를 기용하는데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세종은 정승 황희를 80세 되도록 임면을 거듭했다. 정조는 8년간 은둔생활을 한 68세의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발탁하여 재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의정에 임명, 영의정 없는 독상(獨相)의 지위를 주기도 했다. 채제공이 영의정으로 기용된 것은 73세였다. 현군 영조는 나이보다 경륜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을 보면 나이든 정치인들의 정치참여를 가리켜, '올드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노 정치인가운데는 이제 은퇴하거나 출마를 접어야 할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모두를 노욕으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나이는 많다고 해도 젊은이 못지않은 이상과 건강을 지닌 존경받는 이들도 많다. 이들이 지닌 경륜을 국가 사회는 요구하고 있다. 우리처럼 나이를 타부시하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90세가 넘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있다. 재계에서도 80세 CEO들이 활발히 경영에 참여한다. 미국 재계에서 투자의 귀재로 알려 지고 있는 워렌버핏의 나이는 올해 89세다. 버핏과 오찬을 같이하며 좋은 얘기를 들으려면 이십억 이상을 내야 하는 경매에 참가해야 한다. 유태인 격언에는 '늙은 사람은 자기가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늙으며 생의 법칙이다. 인재 영입을 서두르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당의 원료격인 올드보이들의 정치 재개에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다.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옥석을 구분해야 한다.
임진강 하류는 고대 삼국 쟁패의 중심이었다. 백제는 왕도(서울)로 올라오는 관문 같은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성을 구축하고 군사력을 주둔시켰다. 삼국시대 초기 흙과 잡석을 다져 쌓은 백제 식 토성이 많이 찾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곳을 답사하면 무수한 백제 토기 조각을 수습 할 수 있다. 회색이며 연질(軟質)이라서 쉽게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상징과도 같은 적색기와편도 산란한다. 중국 지안 평양에서 수습된 기와의 등 무늬가 같다. 또 경주 반월성등 주요 유적에서 발견되는 신라 기와와 똑 같은 유물도 발견 된다. 성을 점령한 신라군이 건물을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처절하게 쟁패하던 역사의 대강을 살펴 볼 수 있다. 백제 개로왕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정절을 지킨 도미부인이 위례성을 탈출, 눈먼 남편을 찾은 곳도 이곳이다. 파주 통일 전망대에서 손에 잡힐 듯 바라보이는 섬 천성도(泉城島)가 바로 도미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장소로 비정된다. 천성도는 안개가 자욱한 날은 잘 안 보이 지만 맑은 날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 같은 섬이 되었다. 쓸쓸한 갈대밭에 날아오는 무심한 철새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 고구려군은 5만대군으로 이 길을 선택, 임진강 유역을 모두 휩쓸었다. 엄청난 기병들의 남하로 백제 전방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중국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당시 정복한 여러 성들이 기록 된다. 당시 고구려군은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해군은 요즈음 논쟁이 되고 있는 NLL 함박도와 강화도를 차례로 정복한 후 한강 유역으로 진입했다. 서울 지금의 송파 몽촌토성일대와 장한평 아차성을 수중에 넣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라는 진흥왕대 부터 이 일대를 모두 장악하여 고구려세력과 대치했다. 충주~한강~임진강~ 천성도(파주)~강화도를 모두 신라 영역으로 만들어 대당(對唐) 교류 루트로 삼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가 후반 이 지역은 당나라와 신라의 전장으로 변했다. 당은 신라마저 정벌할 야욕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당시 신라 조정은 당에 사대하는 입장이어서 선전포고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강 하류를 지키고 있던 신라군 단위부대들은 당나라군을 공격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칠중성(七重城)에서는 패전하였지만 도미부인의 설화가 어린 임진강 하류 천성(泉城)에서는 크게 승리했다. 신라 성주들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당나라군에 대적하여 이들의 한강 진입을 저지 시켰다. 한강이 뚫리면 신라는 망한다는 결사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 국회국방위 감사에서 이승도해병대사령관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敵)은 북한이며 2017년 북한 선박이 서해 북방한계선 근처에 위치한 함박도에 접안 당시 유사시를 대비해 초토화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함박도는 등기부등본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이라는 주소로 등록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남북 관계는 미.북 간 핵협상이 교착상태를 이루면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과 배치되는 해병대 사령관의 대응책은 서해 안보를 우려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그나마 신뢰를 주고 있다. 군은 평화 시에도 국가수호를 위해 철통같은 대비책을 구축해야 한다. 임진강 하류를 사수했던 신라군의 임전무퇴 결의가 지금도 살아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