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는 고구려 재상 왕산악이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고대 악기 칠현금(七絃琴)을 개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냘픈 가야금 소리에 비해 우아하며 둔중한 소리가 특색이다. 문인들의 반려로 가객들의 풍류 음악을 대표해 왔다. 가야금은 12줄인데 반해 거문고는 여섯 줄이다. 오른손에 쥔 술대로 줄을 쳐서 연주를 한다. 거문고를 또 '현학금(玄鶴琴)'이라 부르는 데 왕산악이 거문고곡을 작곡하여 왕에게 바칠 때 검은 학이 날아들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만들었으나 명인은 신라에서 나왔다. 서라벌의 가난한 예인 백결 선생은 명절이 되어 떡을 만들지 못하자 아내에게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상심을 위로했다. 거문고 방아타령은 천여년 역사를 지녀온 음악이다. 많은 문인 사대부들이 거문고를 사랑했으나 이를 정작 악보로 정리하여 남긴 이가 바로 조선 인조 때 청주 옥화대의 주인이었던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다. 서계는 거문고 음악을 올바르게 계승시키기 위해 혜안을 가졌던 인물이다. 서계는 괴산군수를 역임했으나 농사장려를 주장한 실학자였다. 역학자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청주서원(신항서원)에 배향 된 인물이다. 필자는 서계 문집을 뒤지다 거문고 시 한수를 찾았다. 문집 권지1 '시 칠언절구' 첫 머리에 있는 시는 '고금(鼓琴.거문고를 타다)' 이었다. 세상은 봄 여름 가을 변화가 있지만 / 거문고 소리는 약속이나 한 듯 그대로 이네 / 광풍헌에 깃든 세속 얼마나 될까 / 오직 옛 것을 그리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舒則爲陽會則陰 / 一張深契兩依音 / 光風軒上塵幾少 / 只有無爲太古心) (필자 의역) 옥화대 누대에서 친구들을 만나 거문고를 탄주하며 풍류를 즐긴 서계. 그 소리에 취해 사시 사철변화는 세상에도 옛 음을 간직한 거문고소리를 예찬한 절구라고 하겠다. 청주 미원 '옥화구곡'도 서계의 작품이다. 행장을 보면, 서계는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본받아 '서계육가(西溪六歌)'와 '옥화육가(玉華六歌)'를 지은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옥화동에 춘풍당(春風堂), 추월헌(秋月軒) 등을 짓고 학문과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거문고를 공부하는 학도들이나 국악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서계를 잘 안다. 이 분도 우륵이나 박연과 더불어 충북의 악성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대학에서 서계문집의 번역과 인물에 대한 연구를 해 줘야만 한다. 우리 국악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정평을 얻고 있다. 외국의 명문대학 졸업 여성들이 무작정 한국에 입국하여 판소리를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한복을 입고 공연을 한다. 유트뷰를 보면 한국의 젋은 소리꾼들이 파리, 런던 등 거리에서 즉석 공연을 하여 관심을 끌기도 한다. 이러한 국악인들의 도전이 한국음악에 대한 열기를 북돋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인 난계 박연선생의 고향 영동군이 올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를 추진한다고 한다. 충북지사와 영동군수도 앞장서 뛰고 현 정부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소식이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우륵의 가야금 성지 탄금대, 난계 박연의 심천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주장해 왔다. 지정이 된다면 옥화대도 함께 등재 돼야 할 것이다. 난계의 종묘제례악이 이미 등재 된 만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충북도가 국악 전문가들로 구성 된 TF 팀을 꾸려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번 '영동 세계국악엑스포' 실현에 도민들의 결집 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지난 봄 부터 백제 가요와 신라 향가 등 내력을 찾으러 충북 영동, 전라도 정읍, 충남 부여등지를 다녀왔다. 지난주에는 헌화가의 무대인 동해바다 삼척을 답사했다. 폭우가 내리는 먼 길이지만 아름다운 향가의 고장을 간다는 설레 임으로 한껏 들뜨기도 했다. 철쭉꽃이 만발한 봄, 부군을 따라 강릉을 가는 길에 신라 수로 부인은 벼랑에 핀 꽃을 보고 갖고 싶었다. 부군이 시종들에게 꺾어올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으나 높은 벼랑을 올라갈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곳을 지나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부끄럽지 않으시다면 자신이 꺾어다 드리겠다'고 노래하며 나선다. 멋진 노인의 아리아에 수로부인이 매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는 용이 수로부인의 미모에 반해 용궁으로 납치하여 3일이나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수로부인이 노인을 따라 아름다운 곳으로 잠행했다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헌화가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신라 남자들은 향가를 매우 잘 불렀던 것 같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월명사가 부른 향가는 귀신을 감동시킬만했다고 했다. 얼마나 감동적인 아리아였기에 일연 스님이 이렇게 찬탄했을까. 영동 양산면에 전해 내려오는 양산가는 화랑 김흠운의 순국을 애도한 신라 향가였다. 화랑을 잃은 경주왕경 사람들이 슬피 불렀다고 한다. 김흠운은 무열왕의 사위로 요석공주의 남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자녀 둘을 두고 젊은 화랑은 영동 양산에서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 부여 외성 밖에 있는 능사에서 백제의 노래 숙세가(宿世歌)를 기록한 목간이 발견되었다. '숙세'라는 말은 바로 전생의 인연을 말한다. 유일한 백제 가요 정읍사에 이은 또 하나의 백제 노래라고 국문학계가 흥분했다. '우리의 만남은 전생의 인연인데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서로 공경한 약속은 허망해진다'는 것이 노래의 요지다. 따지고 불화하는 것을 싫어 한 백제여인들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가슴에 와 닿는다. 백제 가요나 신라 향가의 곡은 어떠했을까. 필자는 남도민요 가운데 불가(佛家)의 소리인 '보렴(報念)'을 주목해 왔다. 보렴은 흥타령조로서 애조를 띤 가락이다. 국태민안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소리이지만 이 속에 백제의 혼이 살아있는 것 같아 감동을 받는다. 가사 가운데 '서쪽엔 백지귀신', '북쪽엔 흑지귀신'이 등장한다. 혹 백지는 '백제', 흑지는 '흑치'가 아닐까. 백제 왕도는 서해와 닿는 부여 백마강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으로는 흑치상지 장군이 나당 연합군과 싸우던 불패의 성지 임존성(예산)이 있다. 백제인들은 '흑지귀신'이란 용어로 복국의 의지를 위장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1980년대 충북도문화재위원 당시 백제 멸망이후 3년간 항쟁한 복국전쟁을 심층 연구한 적이 있다. 홍성, 부여, 청양, 서천, 보령, 논산, 전북 부안 등지 고대성을 답사하며 3년 전쟁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필자는 지금의 청양 칠갑산 정상에 쌓은 자비성이 백제 마지막 항전지 주류성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충청지역 대학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 한데 지금은 고대사에 대한 열기가 식어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불가의 소리 '보렴'이 잃어버린 백제 가요 가락이나 향가의 잔영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악계에서 한번 연구해 봄직하다.
보라빛 창포꽃이 만발한 산야. 창포 꽃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요즈음의 일이다. 오늘은 연중 최고의 가절이라는 단오날.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이날을 맞아 자유롭게 냇가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여인들의 풍속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네를 뛰는 양반가 사녀들, 아낙네들이 냇가에서 목욕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선비, 조선 유교 사회 금기시 되었던 여인들의 일탈을 과감하게 담고 있다. 옛 여인들은 단오 날 삼단 같은 머릴 풀어 창포물에 감는 풍습이 있었다. 왜 하필 창포물이었을까.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으면 특유의 향기가 나쁜 귀신을 쫓고, 머리에 윤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또한 건강에 좋다고 믿어 창포 삶은 물을 마시기도 했다. 동의보감에 창포 사춘 쯤 되는 석창포라는 약초가 있다. 오래 먹으면 늙지 않고 신선(神仙)이 된다고 전해오는 약초다. 도가(道家)의 경전인 도장(道藏)에는 석창포를 먹고 신선이 된 사람의 애기가 여럿 나온다고 한다. 포박자(抱朴子)에는 '한중이라는 사람이 12년 동안 석창포 뿌리를 먹었는데 온몸에 털이 나고 겨울에 속옷만 입어도 춥지 않았으며 하루에 만 자가 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라고 적혀 있다. 또 선신은서(仙神隱書)라는 책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석창포를 심은 화분을 책상에 두고 밤을 새워 책을 읽어도 등잔에서 나오는 연기를 다 빨아들이므로 눈이 피로하지 않다.' 또 '석창포 화분을 바깥에 두고 아침에 잎 끝에 맺힌 이슬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져서 한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 고 한다. 이러니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좋아진다는 속설이 생겼는지 모른다. 조선전기에 박은(아호釣隱. 朴誾 1479년~1504)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시선 이백(李白)의 유명한 '석여춘부(惜餘春賦)'에 차운하여 청포시를 지었다. 높은 지위에도 냇가에 나가면 청포를 잘라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이 그리 흉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가의 난초를 얻어 허리춤에 매고(汀有蘭兮佩結) / 창포를 잘라서 허리에 띠로 맨다(石有蒲兮帶剪) / 천 길 깊은 연못을 굽어보노니(臨千尺之幽潭兮) / 봄을 보내는 나의 한이 이 못물보다 더 깊으리라 / 恨孰與之深淺 (읍취헌유고 제1권 / 부(賦)). 창포는 현재 멸종위기라고 한다. 외국산 아름다운 꽃들이 밀려들어와 한국의 산야와 들, 정원을 잠식한 때문인가. 현대시인 문인수는 우포늪에 나가 창포가 멸종단계임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창포에 모인 아낙네들을 열거했다. 창포를 보았다 /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하략) 단오절은 일년 중 가장 좋은 가절이다. 고전에서는 대부분 이날 천생배필을 얻는 날로 설정했다. 춘향이 광한루에서 이도령을 만나 일편단심 사랑을 시작한 것도 바로 단오날. 단가 '강상풍월'은 단오풍경을 예찬한 민요다. '강상에 둥둥 배를 띄워 술과 안주 많이 실어 강릉경포대로 구경 가자'는 소리다.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 목을 푸는 단가라고 하지만 이름난 명창들도 곧잘 이 소리를 부른다. 단양 팔경 도담삼봉도 단오 때 강상풍월 풍류하기 좋은 경치가 아닌가. 관광객 유치를 위한 '도담 강상풍월'이란 노래도 하나 만들었으면 한다.
선조 임금이 의주에 피난했을 때 왜군이 평양성을 점령하자 조선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이제 피신 할 곳은 만주밖엔 없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인가. 명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평양성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전의(戰意)가 앞서 일본군을 과소평가 한 것이다. 그 다음 추가로 온 군대는 이여송의 4만 대군이었다. 의기양양한 이여송은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런데 군사들의 대오에 이상한 무기가 발견 됐다. 무기가 성을 향하더니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을 뿜었다. 포신을 날아간 포탄은 단숨에 평양성 누각을 박살냈다. 소총에 의존하여 전투마다 승리한 왜군은 경악한다. 평양성 전투에 나온 무기는 대포 불랑기(佛朗機)였다. 왜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명나라가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최신 무기였다. 조선 중기에 그려진 평양성 탈환도를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무리 명나라군의 무용을 그렸다고는 하나 몇 몇 군사들이 몰려 구경만하는 것이다. 이 전투에도 조선군은 도원수 김명원을 비롯하여 휴정·유정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그런데 조선 군사들은 성안을 향해 이상한 불화살을 날려 보냈다. 이 것이 바로 신기전(神機箭)이었다. 이 무기는 세계 최고(最古)의 로켓으로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다. 신기전은 소, 중, 대, 산화신기전 등 네 종류로 나뉜다. 비행 거리는 200~450m이며 소,중 신기전은 100여 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다. 특히 산화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으로 철가루를 사방에 흩 뿌려 적지를 불태우는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 블랑기와 신기전에 놀란 왜군은 조총으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여송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기로 했다. 왜장 고니시는 원군도 오지 않자 밤중에 남은 군사를 데리고 서울로 후퇴했다. 조선은 7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40년 전 언론사에 있던 필자는 한 젊은 역사학도의 방문을 받는다. 충주출신으로 세종 때 신기전을 연구한다는 청년이었다. 그는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이 되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후 그가 또 신문사에 연락해 왔다. 미국에 가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나사(NASA)에서 근무하다 돌아왔다는 것이다. 미항공우주국에 근무했으니 그는 로켓 전문가가 된 것이다. 그는 고향 충북에서 교수가 되길 희망했다. 필자는 모 대학 총장과 친밀하게 지낸 관계로 추천을 했다. 그런데 그가 S대 출신이 아니라서 인사위원들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한 인재를 대학에서 이처럼 홀대 할 수 있는가. 한국 대학사회 학연 중시의 관행이 그를 잡지 못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수년 후 나는 대전에서 그가 한국 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으로 발탁됐음을 알았다. 그리고서는 수년 시간이 흘렀다. 그는 항공우주연구원장이 되어 나로 우주센터에서 누리호를 우주에 쏴 올리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초석을 다진 파이오니어가 되었다. 그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을 위해 하늘이 도운 셈인가. 지금은 70대가 된 그의 이름은 채연석 박사(현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장)다. 그를 사람들은 지금도 '신기전 박사'라고 한다. 자랑스러운 충북인이 아닐 수 없다. 신문을 보니 지금도 무엇인가 도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을 고증하여 복원하고 있다고 한다. 우주개발은 이제 '뉴 스페이스(New Space)' 시대라고 한다. 정부 지원과는 별도로 기업이 새로운 우주 비즈니스를 주도하는 세상이 됐다. 한국의 우주항공산업도 이제 기업 간 경쟁 체제로 접어들었다. 한국항공우주시대를 연 퇴직한 영웅들이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기대다,
완당 김정희 선생의 아호는 500여 개에 이른다. 아호를 연구하는 한 학자의 논문을 보니 추사의 새로운 호가 더 찾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일반은 '추사'를 아호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자(子)'다. 당시에 글이나 편지에 이름을 먼저 쓰고 자를 쓰는 예가 있었는데 이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였다. 필자도 율곡 선생의 진묵 동호문답(東湖問答)의 첫 장을 고증했을 때 '이이 숙헌(李珥 叔獻)'이란 표현을 보았다. 숙헌은 바로 이이의 자였던 것이다. 추사는 평소에도 중국 명인들의 시 구절을 적어 친구나 후학들에게 주길 즐거워한 것 같다. 얼마 전 추사의 작품 대련을 고증하면서 특별한 아호를 찾았다. 중국에서 만든 고급 세금지에 종서로 쓴 대련인데 내용은 봄을 맞는 선비의 고고함을 나타낸 글이었다. 그런데 왼쪽에 기명을 보니 아호가 '금당(琴堂)'이었다. 완당이 아호를 금당이라고 썼다니 매우 흥미로웠다. 금(琴)은 사대부의 풍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악기다. 둔탁한 것 같으면서도 웅장한 거문고소리는 선비들의 올곧은 심성을 상징한다. 풍류가객 백호 임제는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명기들과 시주를 경쟁하기도 했다. 청주 미원 옥화대에 은퇴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산 조선 중기 학자 서계 이득윤은 거문고의 달인으로 기록 된다. 거문고에 심취하여 평생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완당이 금당이라고 지은 아호는 풍류의 소산인가. 필자는 이 아호를 완당이 언제 이렇게 썼으며 왜 지은 것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신문의 글에서 한 문인이 '금호(琴湖)'라는 호를 풀이 했는데 눈에 번쩍 들어왔다. 즉 추사는 30대 후반 대사헌등 국가 중요 요직을 지낼 때 지금의 서울 금호동에서 살았으며 이를 계기로 '금호'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완당의 아호를 연구한 한 학자는 경주김씨 일가의 전답이 있던 충남 당진 '거문들'에서 연유를 찾았다. 아호는 지역이름을 인용하여 짓는 경우도 있는데 거문고 '금(琴)'자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두 설이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필자는 금당의 '금(琴)' 자를 다시 생각했다. '琴'은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에 보면 '금(琴)은 금(禁)으로 흉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 되며 '백호통(白虎通) 권1 하 10항'에서는 '나쁜 것을 억지하는 바른 사람의 마음(琴以禁也 以制止淫邪,正人心也)'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금(琴)은 '금(禁)'과 동일 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완당은 정의감에 불타 있었으며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를 절감한 시기였다.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이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완당은 충청도 홍주지방에 암행어사로 나가 세도정치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 김우영을 추상같이 징계하고 봉고 파직했다. 이 사건이 완당을 8년간 제주도에 영어의 몸이 되게 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주도에 위리 안치 된 선생은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마저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했다. 이름과 아호를 숨겨야 했던 것이다. 완당은 스스로 나쁜 것을 배척하고 바른 사람의 마음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아, 조선은 이런 진정한 학자요 스승을 10년간 귀양 보내고 억압하며 고도에 가둬놓고 탄압했다. 부패한 정치, 탐관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국회가 또 김남국의 해괴한 처신으로 모두 도둑놈이란 의혹을 받게 됐다. 국회의 위상은 어디로 사라지고 비호하는 무리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악한 것을 배척하고 바른 마음을 갖는다'는 완당의 '금당(琴堂)' 정신을 정치인들도 되씹어 봐야 할듯하다.
충주의 역사를 뒤지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있다. 연산군 때 목숨을 걸고 실정을 간언하며 자신의 딸을 궁중에 들이라는 명을 거역하다 죽은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다. 윤비 폐비사건당시 이를 반대하다 귀양을 간 한 홍귀달은 대쪽 같은 마음으로 임금에게 간언을 하다 죽음을 당했다.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관직 보다는 임금의 실정을 간언하는 것이 충신의 길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홍귀달은 특별히 시를 잘 지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그의 시를 많이 접할 수 있는데 모두 주옥같다. 그 중에서도 충주에 대한 여러 시는 백미로 꼽힌다. 누구보다 충주의 아름다운 산하를 사랑했다. '수려한 물 아름다운 산이 명승을 만들어 / 만가의 밥 짓는 연기 성 모퉁이를 덮었다 / 마루와 창은 사람이 신선의 집에 누어있는 듯 / 바람과 비는 하늘이 수묵의 그림을 이루었다 / 꽃 속에 회포를 읊으매 봄새가 화답하고 / 술 옆에서 잠이 들 매 미인이 부른다…(하략') 충주 객관에 있던 청연당에 올라가 감회가 깊었던 그는 기문을 써달라는 목사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중원의 산수를 칭찬한다. '중원은 산수의 뿌리이니 천지의 맑은 기운이 여기에 다 모였다' 충주시의 산수는 '국가 정원급'이다. 남한강, 달천, 정토산, 봉황산, 월악산의 산수가 중원을 에워싸고 있다. 신선이 살던 곳이고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고 했다. 충주 포모대(泡母臺)에는 선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높이가 수십 장으로 속설에 전하기를 옛 적에 장미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스스로 포모라고 하고 항상 그곳에서 놀아 향기가 골에 가득했다' 는 것이다. 포모대는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에 있다. 1982년 충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으며, 당시 이류면 문주리에 거주하는 노인들로부터 채록했다고 한다. 충주시가 지닌 또 하나의 값진 자산은 역사적 고도이다. 신라 부도인 중원경의 땅이고 고구려세력이 남하하여 근거를 삼았던 국원성의 고지이다. 고구려는 한반도에 유일하게 이 일대를 지배하변서 고구려비를 세웠다. 중국 국내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다음의 중요한 국보적 유산이다. 신라는 더욱 중요시하여 가야 세력을 이주시켜 한강 공략의 거점을 삼았다. 달천변은 가야인들이 생거 한 곳이다. 견문산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완성한 역사적 명소다. 경치도 아름답거니와 천수백년 민족의 음악이 흐른 곳이다. 가장 정확한 가야금음악의 성지로서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필자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조사단은 지난 2월 '아리랑 고개'의 실재를 충주시 달천변에서 확인했다. 진도아리랑 가사에 나오는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의 출생지를 찾은 것이다. 그 고개가 바로 충주시 용관동 달천 변에 있다. 아리랑 고개에서 문경새재를 바라보면 가사처럼 너무나 높아 눈물이 나올 지경으로 와 닿는 곳이다. 충북도와 충주시는 국가가 직접 조성하고 운영하는 최초의 국가정원을 조성하겠다며 정부예산 확보에 나섰다. 충주시 금릉동 일원(세계무술공원~용섬 50㏊)에 한반도 중심정원 등 5개 대표 테마정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의 추진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조길형 충주시장이 앞장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름다운 산수, 풍부한 문화유산의 보고, 충주시의 국가 정원 지정을 기대해본다.
프랑스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50년만에 공개했다. 직지는 고려 말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불서로 독일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80여 년이나 앞선다. 프랑스에 있으나 사실 한국의 우수한 역사문화 위상을 세계에 알려주는 문화 사절이 아닌가 싶다. 40년 전 성역 흥덕사를 찾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당시 서원학회 회원들은 고인이 되신 강릉대학교 교수 이원근 박사를 중심으로 일요일이면 청주 근교 절터를 답사하는 것이 중요 일과였다. 청주 청원군 일대의 절터는 모두 답사했다. 덕분에 방치된 중요 유물과 유적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흥덕사라고 찍한 와편이나 증거물은 찾지 못했다. 청주 운천동 택지개발현장에서 포크레인에 찍힌 '금구(禁口.청동 북)'가 청주시에 신고 됐다. 북 모서리에 '흥덕사 금구'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흥덕사의 위치가 운천동 절터로 확인 된 순간이었다. 이 금구를 발견한 이는 이 일대에서 고물을 수거해온 시민이었다고 한다. 그가 택지 공사장에서 팽개쳐진 유물을 청주시에 신고함으로서 그토록 갈망했던 흥덕사를 찾은 것이다. 그 후 고물상으로 흘러갈 위기에서 구한 시민은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정말 표창을 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시민이다. 흥덕사터가 찾아진 이후 청주시는 이를 개발 소재로 삼아 여러 사업을 기획하고 펼치고 있다. 국제공예비엔날레가 가장 대표적인 행사이며 음악회, 오페라 등도 공연한다. 그런데 가장 선행했어야 한 출판단지를 유치하지 못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출판단지는 지금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청주시 의회가 몇 년 전에 뒤늦게 파주출판단지를 견학하기도 했지만 지지부진한 모양이다. 대전시가 최근 발 빠르게 출판단지 조성 타당성조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이를 산업에 접목시키지 못했다. 미국의 모 대학에서는 우수한 기술을 발명했으면서 이를 응용하지 못한 실패의 예로 한국을 들고 있다고 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훌륭한 두뇌와 기술을 창안했으면서도 뒤쳐진 것일까.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은 사실 조선시대 초기에 이어져 가장 활발한 출판 사업에 응용되기도 했다. 불경이나 성리서 혹은 각종 관공서의 제도 서식 등을 찍었지만 전 국민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못했다. 책은 사대부나 선비들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난해한 불경은 사암에서 학승들에게만 필요한 지식이었다. 세종임금이 한글을 창제 한 이후 조선은 일대 도약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아마 한문보다 한글을 익히는 것을 국가적 모토로 삼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한문화에 침잠 된 사대부 지식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우리글을 언문이라고 비하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 선비들은 한글을 쓰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비록 엄청난 저항과 반대가 있었겠지만 세종, 세조 두 임금이 일대 혁신하여 어명으로 한글을 사용케 했어야 했다. 한글이 제대로 국가에서 공식 국어로 사용하게 된 것은 400여 년 후 대한제국이 출범한 19세기 후반에서 이루어 졌다. 이 시기에도 우리글은 언문이라고 외면당했다. 조선은 근대화에 뒤져 주변 강국의 밥이 되었으며 결국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혹 금속활자 발명 같은 역사를 반추하고 있지는 않는지. 과학자, 두뇌들을 존중하고 이들이 마음껏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국가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단원 김홍도에 대한 역사기록을 찾다 문득 그가 연풍현감으로 있을 때 일화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단원을 각별히 총애한 정조가 금강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명하면서 단양. 청풍, 영춘, 제천의 산수도 그리라고 한 것이다. 금강산 그림은 겸재 정선 그림과 더불어 너무나 유명하지만 충북 북부 3군을 그려달라고 어명한 것은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원이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단양을 찾아 상선암, 사인암을 그려 남긴 것은 단편적인 그림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그림들은 리움에 소장 된 보물 '병진년화첩'안에 실려 있다. 김홍도가 51세 때인 정조 20년(1796)에 그린 작품들이다. 유홍준의 글 '국보순례'에도 언급 된 이 화첩은 총 20면으로 되어있으며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36.6㎝, 세로 26.7㎝ 정도이다. 그림은 종이에 먹으로 그린 후 담채 했다. 한지에 그린 그림을 두껍고 빳빳한 양지에 붙여 10면을 1첩으로 하여 2첩을 한 갑에 넣어 1면씩 열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단원의 단양 산수화는 신필(神筆)로 대우받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그 가운데 조선 선조 때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을 생각하며 지은 화제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 도담 삼봉엔 저녁노을 드리웠네 /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 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도화서 화원 출신이면서 양반들만이 출사할 수 있었던 연풍현감에 임명됐던 단원. 이렇듯 놀라운 시재가 가슴 속에 숨어있었던 것인가. 단원이 현감으로 나간 것은 정조의 어진(御眞)을 제작한 공으로 받은 벼슬이었다. 단원은 화가였지 목민관은 벅찬 직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연풍현감으로 있을 당시 충청감사는 '연풍의 행적이 해괴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직무 감사 후에 파직했다. 정조시기 기록인 '일성록(日省錄)'에는 '단원은 천한 재주로 현감까지 되었으면 더욱 열심히 일했어야 했는데 동네 과부 중매나 일삼고 토끼 사냥을 간다고 병력을 동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원을 시기하는 인물들이 지어낸 것이지만 생각해 보면 단원의 시정에서 인정(仁政)을 엿 볼 수 있다. 과부 중매란 홀로 사는 환과고독의 어려운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겨울이면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을 위했던 일일 수도 있다. 백성을 사랑했던 단원에겐 이 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었을까. 단원은 연풍현감에서 물러나와 풍류를 사랑하는 자유인이 된다. 서가에서 비파를 연주하는 그림을 그린 '포의풍류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넣었다. 흙벽에 아름다운 창을 내고 / 여생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 서울 양천구(조선 시대 양천현)는 겸재 정선이 잠시 현감으로 있었던 곳이다. '개화사(開花寺)'라는 그림을 화첩에 남겨 놓았는데 구청에서 겸재정선미술관도 만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단양에도 단원 김홍도 미술관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일부학자들이 도화서 화원을 괴산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단양에 단원을 주제로 한 미술관이나 테마파크가 있다면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4월의 아름다운 단양은 어디를 가거나 도화 만발한 무릉도원이다. 김영환 충북지사는 관광시정을 표방하고 있는데 총론 보다는 각론 실천력이 앞서야 한다. 이제는 충북산수를 화폭에 담은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를 명예 충북예인으로 소환해야 한다.
며칠 전 가정교육문제를 다룬 모 TV를 눈물겹게 시청했다. 삼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는 30대의 엄마는 시종 얼굴에 눈물과 좌절감이 짙게 느껴졌다. 집이라도 장만하려고 입을 악물고 저축하는 가장, 돈이 없어 아이들을 아이답게 키우지 못하는 상심으로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오늘날 한명의 자녀도 키우기 힘든 세상, 삼남매를 키우려면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다. 남편은 이런 상심도 모르고 항상 퉁명스럽게 아내를 나무라며 가사일도 돕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안타깝게 시청자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엄마는 집에서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이 엄마의 옷을 잡으며 '엄마 죽지마'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까만 아들의 눈을 보고 극단적인 생각을 접었다. 매일 같이 울며 산 탓인지 엄마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TV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이 가정은 정신치료에 나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사연은 끝을 맺는다. 눈물이 마르지 않던 엄마는 그제서야 활짝 웃었다. 삼남매 천진난만한 얼굴에도 행복이 가득 찼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 큰 고민은 가정마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유모차에 유아를 싣고 다니는 엄마들의 모습도 구경하기 어렵다. 대신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보일뿐이다. 서울지하철을 타면 승객의 절반이 노인들이다. 일본처럼 노령화 되어가는 한국, 이렇게 가다가는 대한민국이 절멸할 것이라는 위기감도 느껴진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첫째 이유는 육아가 힘들다는 데 있다. 맞벌이로 살아가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 육아한다는 것은 괴로운 삶이다. 국가의 육아수당 등 지원 제도도 일시적이다. 자녀를 낳아 대학까지 공부시키려면 부모의 등뼈는 휘어진다.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들이 혼인을 미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이 맞으면 동거하는 것을 선호한다. 결혼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서구의 동거 문화가 사회에 깊게 자리 잡히고 있다. 인구절벽(人口絶壁)이란 용어가 생소하지 않다. 미국의 경제학자 해리 덴트(Harry Dent)가 주장했던 이론이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한 국가나 구성원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인구 분포가 마치 절벽이 깎인 것처럼 역삼각형 분포가 된다는 내용이다. 일론 머스크는 한국을 인구붕괴 위험군 국가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한국의 인구 절벽은 심각한 수준으로 40만의 벽이 이미 무너졌다. 지난 2018년도 출생아가 32만6천822명밖에 되지 않는다. 40만 명의 10~15세 청소년들이 성장하고 사회에 나와서 가장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해야 할 20년 뒤에 대학에 입학을 할 18세~19세가 되는 인구수는 단 32만 명이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지방의 많은 대학들이 구조조정에다 통폐합을 서두르고 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대학들 가운데 학생부족으로 이미 폐교 된 캠퍼스가 많다. 인천에서 사업에 실패한 40대 가장이 부인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 두 명을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어린 자녀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부모는 인륜을 어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런 비극이 일어나도 정치권은 관심이 없다. 인구절벽시대 자녀를 세 명 낳은 가정은 진정한 애국 가정이다. 정부는 인구절벽 해소책과 아울러 자녀를 많이 둔 가정을 특별히 지원 할 수 있는 체계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야당도 시간만 있으면 거리에 나가 정부를 성토하지만 말고 인구절벽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들을 위한다하면서 지금 과거사에만 매달려 있을 때인가.
고전 춘향전에서 가장 신나는 대목은 암행어사 출도다. 남원에 비밀리 잠행한 어사 이몽룡은 변사또 생일잔치에 가서 시를 써 놀려 주더니 곧장 쳐들어간다. 그리고는 탐관 변학도를 체포, 객사에서 부복케 하고 죄상을 물었다. 이때 부(府)의 고(庫, 창고)를 봉(封)하고 비축 대동미를 확인했다. 혹 부사가 부정으로 빼 돌린 곡식은 없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전략) 이때 어사또 거동 보소 동원에 좌기한 후 이방 불러 관안(官案)드려 점고한 후 읍폐 묻고, 도서원(都書員) 불러 전결(田結) 묻고 대동색(大同色) 불러 세미 납봉한다 하고… 어사또, 본관은 봉고 파직하여 지경을 넘기고 본관 아낙에게 전갈하되 '남원 지경서는 잠시라도 머물지 말라' 하고… (하략) 탐관 변학도는 옥에 갇히지는 않고 파직되어 남원 땅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관곡을 빼돌려 생일잔치에 충당하고 유부녀를 강제 구인하여 겁탈하려는 죄가 문제가 되었던 것인가. 탐관은 탐욕스런 관리를 지칭한 것이다. 조선 유교사회에서 뇌물을 받거나 사사로이 나라의 관곡을 축내거나 하는 죄가 가장 컸다. 판소리 서곡이기도 한 사철가의 마지막 대목에 "국곡토식(國穀偸食)하는 놈, 불효하는 놈은 저 멀리 먼저 보내버리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나라의 재물을 몰래 빼 돌리는 자를 지칭한 것이다. 멀리 보내버리라고 하는 것은 축출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나라가 절망에 빠졌던 것은 임금의 외척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국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매관매직으로 부정이 판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현감은 천량, 관찰사(도백)는 수만량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큰 돈으로 직을 산 탐관은 돈을 회수하려 백성들을 수탈하기 마련이었다. 부정한 관리들은 민초들을 겁박하여 재물을 수탈했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아름다운 땅을 빼앗고 심지어 유부녀들을 유린했다. 현감 부사 관찰사를 역임한 관리들은 부임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수를 골라 정자를 짓고 별업(別業, 별장)을 짓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당대의 유명한 문사들을 초청하여 시를 지어 현판을 붙이고 풍류를 즐겼다. 전국의 유명한 별업가운데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탐관의 소유로 포장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이를 논하는 양심적인 선비들을 잡아가두고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 서울에서 천리 길이나 절해고도에 귀양을 보냈다. 관리들의 부정행위를 가장 신랄하게 규탄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19년을 살아야 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 추사 김정희는 부정한 권력에 대항하다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됐다. 썩을 대로 썩은 조선은 몰락하는 대 참사를 겪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거야 민주당은 야당 탄압을 구실로 야당대표의 성남시장 시절 비리혐의를 옹호하는 방탄 국회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며칠 전 구속영장에 대한 국회동의 표결에 찬성표가 더 나왔다. 구속은 면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야당침몰이라는 우려가 반영 된 것이다. 지금 검찰이 중점 수사하는 것은 이대표의 성남시장 시절 업자에게 천문학적 이익을 몰아주고 국가에 큰 손실을 끼친 배임혐의다. 이 대표가 떳떳하다면 대표직을 내놓고 수사에 적극 참여하여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시장 군수 직은 민원허가의 결정권자로서 뇌물 유혹이 많은 자리다. 신문을 보면 지금도 춘향전의 변학도처럼 봉고파직 혹은 구속되는 단체장들이 많다. 나라가 잘 되려면 도덕성 있는 올바른 지자체장들이 많이 나와야만 한다. 탐관은 반드시 축출돼야만 한다.
지난 일요일자 본지에 실린 영동군 SNS 서포터즈가 쓴 황강면 월류봉 글이 눈길을 끈다. 월류봉은 경치가 아름다워 달도 머물다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언제인가 서울의 한 등산객이 백화산 반야사에서 월류봉 풍경을 내려다보고 '세상에 이런 경치도 있구나'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월류봉은 정말 아름다운 곳인가. 이곳 지리를 보면 초강천과 석천 두 개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머리다. 초강천을 거슬러 오르면 황간면 소재지가 나오고, 석천 물줄기를 따라가면 고찰 반야사를 만난다. 여지승람을 찾아보니 재미난 기록이 있다. 바로 월류봉은 '심묘사(深妙寺) 팔경'의 하나로 기록된다. 심묘사는 바로 월유봉 아래에 있던 통일 신라 때 고찰이다. 절은 폐사 되었고 지금은 기와편 만이 뒹굴고 있다. 심묘사 팔경은 사군봉, 월류봉, 산양벽, 용연동, 냉천정, 화헌악, 청학굴, 법존암이다. 이곳을 자주 찾았던 필자도 생소한 이름이 있다. 바로 '한천팔경'의 별칭으로 영동군 홍보자료에도 '심묘사 팔경'이란 설명도 붙였으면 한다. 심묘사는 매우 유명한 절이었다. 서라벌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 AD)가 있던 사찰이었다. 무염은 보령 성주산문을 개창한 고승으로 서라벌에 자주 불려 다닌 탓에 왕실에서 심묘사를 지어 머물게 했던 것이다. 기록을 보니 신라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다고 되어 있다. 무염국사가 서라벌에 초청을 받아 법문할 때는 왕실 가족들은 물론 왕경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 고승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보령 성주사에 있는 무염국사비는 신라 말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심묘사 절터를 처음 찾아 조사한 분은 전 단국대 박물관장 고(故) 정영호 박사였다. 심묘사터가 경상도 땅에 있는 절터로만 알고 있었으나 이 유적을 황간에서 찾고 기뻐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황간은 본래 경상도 경산부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태종 때 충청도에 예속되었다. 필자도 70년대 후반 이 절을 답사하여 월간지 공간(空間) '한국의 페사' 시리즈에 글을 썼다. 당시 이 절터에서 찾은 와당은 아름다운 통일신라 보상화문이었는데 무염국사 시기 왕찰(王刹)임을 증명하는 유물이었다. 고려 인종 때 이곳을 지났던 재상 이지명(李知命. 1127~?)은 멋진 시를 남겼다. 여지승람 황간현 제영조에 있는 한 구절은 바로 '월류봉'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의 원문을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여러 봉우리 구름 받쳐 솟아있고 / 맑은 냇물 돌에 부딪쳐 흐르네…' 더 이상의 췌사(贅辭)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화양동에 은거했던 우암 송시열도 이 경치를 사랑하여 별당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우암이 지은 별당이름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세우고 담론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심묘사 팔경이 이 시기에 한천팔경으로 바뀐 것인가. 지금은 이름마저 잃어버린 통일 신라고찰 '심묘사' 유적도 문화재당국의 관심이 따라야 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국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 지고 있다. 난방비 폭탄에다 은행 금리 인상, 물가 폭등의 회오리가 태풍처럼 서민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여당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으로 책임을 돌리고, 야당은 현 정부가 무능하다고 조롱한다. 어려운 경제 현상은 지방에 갈수록 심각하다. 벽지 농촌은 빈집이 늘어나고,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치닫고 있다. 유학의 고장 안동의 한 전통마을은 동네 전체가 빈집이 되어 퇴색되고 있는 것을 어느 유튜버가 소개했다. 조선시대 건축한 사당과 재실, 초가집이 어울린 이 마을은 겨울이 되니 더욱 황량하다. 그동안 마을 지키고 있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자 농가는 적막공간이 되고 있다. 얼마 쓰지 않은 농기구들이 쓸쓸히 빈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은 직장에 매여 농촌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부모가 살던 집들을 팔려고 내 놓아도 살 사람이 없다. 전국적으로 이런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인구가 적은 군은 이제 폐군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도시의 소상점 식당들도 불황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민들이 외식비를 줄이기 때문이다. 지방에 갈수록 하루에도 수천 개의 자영업자들이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 얼마 전 모 TV에서 특종 보도한 초등학생들의 40대 집단 폭행 사건은 너무나 충격을 준다. 어른처럼 성장한 초등학생들이 원조교제로 유인한 남자를 가두고 집단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어른을 구석으로 몰고 기절할 때까지 폭행하라고 하는 잔인한 어린아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초등학생들은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가 아닌가. 그런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잔인한 폭력배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청소년들의 일탈에 대해 국가는 아직도 언급이 없다. 교육부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지금 어느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인가. 우리 사회의 이런 참담한 현실을 책임지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재명 민주당대표의 대장동 비리 혐의에 따른 잇단 검찰 부름에 야당의 탈법적 저항 행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때는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겠다고 언명했다, 대통령이나 야당대표라도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검찰소환 조사에 성실히 응하고 범죄 혐의에 대해 소명해야 한다. 최근 이대표는 대장동 비리를 유동규가 업자들과 짜고 저지른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유동규는 성남도시개발 본부장으로 대장동프로젝트를 결재하고 책임질 위치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다. 대장동 개발 비리사건은 너무 오래 끌고 있다. 국민들은 빨리 이 사건을 공명하게 처리하여 피로감에서 벗어나길 희망하고 있다. 야당은 이번 주말 부터는 윤석열정부 퇴진 장외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한다. 여야의 대화 창구는 단절되고 서로 비방과 삿대질만 한다. 국회는 민의의 집단으로 국민들의 고정을 반영하고 대화를 통해 방안을 찾아야 하는 대의기관이다. 야당은 방탄정당이 되어 이재명 구하기에 올인 하는 인상이다. 충북의 현안을 대통령에 건의하며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옥 갈 작정으로 공항에 드러눕겠다는 김영환 충북지사의 각오가 눈길을 끈다. 지방정부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규제개혁의 긴급성을 호소한 것이다. 대통령과 정치권은 충북지사의 이련 결연한 의지를 목도하고 해결해야 한다. 정치가 정상을 회복해야 국민들의 삶도 정상을 찾는다. 대통령은 대통령 답게 여당은 여당답게 야당도 야당답게 대의를 찾아야 한다.
가인 송강 정철은 유학을 공부했으면서 산사(山寺)를 자주 찾았다. 풍류로 생을 산 송강이 절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번뇌, 번잡하고 혼탁한 세태를 잊기 위함이었을까. 송강의 시 가운데 '산사야음(山寺夜吟)'은 그 중 백미로 손꼽힌다.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에 / 가랑비라고 생각했네 / 스님 불러 문을 나가 보게 했더니 / 달이 시내 남쪽 나무에 걸려있다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 月卦溪南樹) 다산 정약용은 차를 좋아했던 초의선사와 친했다. 나이가 25년 아래이면서도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망년지교로 초의와 마주 앉아 선문답을 들으며 차를 즐겼다. 유학자 다산도 어느새 불가의 경지에 들어선다. 다산은 이보다 앞서 백련사에 들렀다가 나이가 10년 아래인 혜장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뒤 일이었다. 일설에는 다산이 백련사 주변에 야생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혜장 등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이때 다산과 혜장은 시주(詩酒)로도 친했다. 그러나 곡차를 좋아한 혜장이 40세에 술 때문에 입적하자 다산이 이례적으로 승려에 대한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차와 문화 2007년 여름호) 충남 예산 수덕사 인근 추사 고택 뒤에는 화암사라는 절이 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향화가 올려져온 사찰이었는데 추사 집안에서 원찰로 삼아 관리해 온 곳이다. 어린 시절 추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화암사를 드나들었다. 추사가 성장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이듬해 회암사가 중창되었다. 사찰에서는 주인인 추사의 글씨로 현판을 달고 싶어 했다. 제주도로 사람을 보내 현판을 지어달라고 했다. 귀양지에서 시름에 잠겨 살던 추사는 현판 이름을 달아준다. 어떤 이름을 지어 보냈을까. 추사는 그 이름을 '시경루(詩境樓)'라고 지었다. 자신이 중국에서 스승 옹방강 선생으로부터 얻어 온 송나라 육우의 친필 '시경(詩境)'을 화암사 암벽에 새긴 추억을 떠올린 때문인가. 그리고는 글씨 맨 오른쪽 상단에 의미심장한 두인(頭印)을 거꾸로 찍었다. 도장은 '낙화수면개문장(洛花水面皆文章)'으로 '물 위에 꽃이 떨어지니 모두가 시로다'라는 절구를 인용한 것이다. 추사가 존경했던 원나라 시인 조맹견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시경루' 글씨는 추사의 예서를 대표하는 최고의 품격을 지녔다. 가늘면서 힘이 있고 예기가 넘친다. 서예를 하는 이들이 한번은 꼭 친견하고 싶은 유묵이었다. 수덕사 성보박물관에는 이 글씨를 모각한 현판이 남아있다. 최근에 추사가 쓴 시경루 진묵이 발견되어 필자가 고증했다. 아직도 진묵을 찾은 사연과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 산사(山寺)는 문인들보다는 정치인들이 찾는 피안으로 몫을 한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몸과 마음의 쉼터를 찾기 위함인가. 역대 많은 정치인들이 전국의 유명 사암을 찾았다. 잠행을 이어오던 나경원 전 의원이 지난주 천태종 본산 단양 구인사를 찾아 총무원장 무원 스님과 담소를 나눈 사진이 언론에 보도됐다. 무원스님은 '무소의 뿔처럼 고고하게 부처님 진리를 새겨 고요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라고 법어를 주었다고 한다. 구인사는 관음을 주존으로 모시며 인(仁)을 찾는 도량이다. 오늘날 정치의 큰 목적도 결국 '인'을 구하는 데 있지 않을까. 폭풍우 속에 들어선 나 전 의원이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구랍 필자는 시간을 내어 화제가 되고 있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을 감상했다. 뮤지컬에 가까운 영화이지만 2시간 가까이 숨을 죽이고 본 것 같다. 안의사가 사형집행을 당하는 장면보다 영화 초반부 독립군 참모장이었던 안중근 의사의 화령전투 씬을 보고 가슴이 먹먹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섬광과 함께 포탄이 작렬하는 전투장에서 독립군은 처절하게 싸우고 죽어갔다. 병사들 가운데는 어린 소년도 있었다. 감독은 전투 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왜 필자는 이 장면에서 뜨거운 눈물이 나왔을까. 독립군은 나라를 잃고 떠돌며 일본군에 대항하는 유격전쟁을 했다. 일본군대를 이길 수 있는 조직력이나 무기체제도 갖추지 못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아픔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진 장면이었다. 일본이 아니었으면 인자한 부모 밑에서 공부를 해야 될 나이의 소년들이었다. 젊은 청년 안중근도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두고 독립군에 가담한 것이다. 독립군이 안됐으면 유학을 공부한 안의사는 아마 평범한 교육자나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 법정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이유를 묻는 재판관의 질문에 안의사가 제일 먼저 꺼낸 답은 민비의 시해였다. 일국의 국모를 무참하게 살해 한 일본제국주의의 죄를 물은 것이다. 당시 민비시해는 조선 지식인들의 전국적 봉기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안의사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가정을 버리고 독립군에 참가한 것이다. 나약했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중전인 민비를 지켜주지 못했다. 국권마저 지킬 힘이 없었으니 연약한 중전이 창덕궁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칼로 난자를 당해도 숨을 죽이고 자신이 살길만 찾아 헤맸다. 일본 제국주의를 압도할 군대가 있었다면 이런 굴욕을 당했을까. 나라를 잃은 수만 명의 힘없는 국민들이 만주로 연해주로 떠돌며 살았을까. 일본제국주의 군대들에게 무참히 살해 되고 가족들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을까. 안의사는 동양평화를 해치고 조선을 강제 합방하려는 이등박문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유를 분명이 천명하고 있다. 일본침략을 당한 당시 중국 의사들도 이런 거사를 생각지 못했다. 독립군 참모장이었던 자랑스러웠던 대한제국 청년 안중근의사 만이 할 수 있었던 거의였다. 안의사를 생각하면서 필자는 임진전쟁당시 충남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700 의사와 같이 산화한 중봉 조헌선생, 영규대사, 고경명의병장을 떠 올리게 된다. 마침 세 분의 진귀한 유묵을 발견하여 이를 고증하는 중이었는데 영화 '영웅'을 본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세 분의 의사와 700명의 의병들도 일본군과 싸우다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전직 관료와 선비, 그리고 선방에서 불도를 수학하는 승려들이었다. 의사가운데는 주인을 따라 참전한 노비신분도 있었다. 일본군을 피했으면 이들은 살았을 게다. 그러나 조헌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과 맞섰다. 700여 의사들도 같은 마음으로 창검을 잡았다. 일본군은 청주성에서의 패전을 앙갚음 하려는 듯 의병들을 모두 도륙하고 말았다. 이 같은 피어린 역사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들이 고난에 빠진 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북한이 신년 1월 1일에도 탄도미사일을 쐈다. 윤대통령도 언급했듯이 침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영화 '영웅'은 안의사를 소환하여 국민들에게 이런 경각심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를 꼽았다고 한다. 전국의 교수 935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0.9%(476명)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이 글을 선정했다는 것이다. '과이불개(過而不改)'는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온다.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고 했다. 얼굴이 두껍게 살아가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주는 고언처럼 들리는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한나라의 제왕도 정치를 하다보면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지 않고 쌓이기만 하면 백성들의 원망을 산다. 진나라 영공 이고(夷皐)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장성하자 사치하고 난폭해져 마구 사람을 죽였다. 어느 날 아침상에 곰 발톱이 익지 않아 성질을 부리고 그 요리를 만든 요리사를 죽였다. 영공은 후에 살해되는 비극을 초래한다. 성군이라는 세종도 10여 차례나 잘못을 시인했다고 한다. 관리를 잘못 임명하여 외교적 망신을 당했을 때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것을 심히 후회 한다'라고 말했다. 나랏일에 몰두하느라 자신과 신하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고 했다. 재위 11년인 1429년 8월 8일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하는 교시를 내렸다. 당시 중국 사신 숙소인 태평관을 고쳐지으려 할 때 한 장군이 '경회루 공사가 이미 진행 중인데 태평관까지 시작하면, 백성들이 너무 힘들 것'이라고 반대했다. 세종은 '승려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도첩(圖帖)을 발급해 준다면 태평관 공사도 이뤄지고, 백성들도 괴롭히지 않게 되어, 두 가지 일이 다 잘 되지 않겠느냐'며 강행했다. 그러나 공사는 차질을 빚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죽고 다치는 것으로 끝났다. 중종 때 강직했던 홍문관 부제학 구수담(具壽聃)은 상소로 임금의 잘못을 고치려 했다. '간언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간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고, 잘못을 알기는 어렵지 않으나 잘못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간언을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는 곧 간언을 물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는 곧 잘못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중종실록 38년 12월 1일). 부처의 제자 중 앙굴리 말라는 희대의 살인마였다. 99명의 사람을 살해하여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다. 그는 부처를 죽여 100번째의 손가락을 모으려고 하다가 감화되어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하여 부처의 제자가 된다. 훗날 앙굴리말라는 악당 시절의 피해자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는데 피하거나 맞서지 않고 죽었다. 앙굴리말라가 죽은 뒤 승려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다. 부처는 그가 지옥에 빠지지 않고 열반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는데 놀란 승려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석가모니는 '많은 악을 행한 이후에도 회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악인도 개과천선한 삶을 살면 업보를 씻는다는 불가의 가르침이다. 법화경은 '회개하고자 하거든 똑바로 앉아 진리를 읽으라. 이것이 진리이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신의 본성을 볼 때까지 그것을 정말로 읽으면 모든 죄업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치 않는 것이 잘못이다' 2023 새해를 얼마 앞두고 한국의 정치, 정치인들이 곰곰이 되새겨야할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