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사이비 역사학자도 있다. 뜬 구름 같은 소설을 사실인양 여과 없이 입으로 뱉고 나중에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촌극을 벌였다. 이런 사람이 국민의 선량으로 당선 되어 한 지역을 대표하고 입법을 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인가, 붕당의 산물인가, 갈 때 까지 간 나라의 풍속도인가. 그 교수라는 사람이 여러 망언을 한 가운데 우리 충북과 관련 있는 역사적 문제는 바로 조선 명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그는 저서에서 선생을 '성관계 지존'이라고 서술하였다. '성관계 방면의 지존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승된 설화를 보면 퇴계 이황의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가 밤마다 흔들렸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역사학자가 흥미위주로 '카더라' 야담 설화를 인용하며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이렇게 폄하한 것은 사이비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인물을 희화화 하고 인격을 폄하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사람한테 역사를 배운 학생들은 어떤 역사관을 갖게 되었을까. 안동 유교선양회는 '나랏일을 하려는 정치인의 자격 미달'이라고 비난했다. 퇴계를 배향한 도산서원도 '민족정신의 스승이요, 사표인 퇴계 선생을 근거 없이 모독하는 있을 수 없는 언어폭력'이라고 비난했다. 역사를 가르친다는 사람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흥미위주로 접근하면 그는 자격이 없다. 설령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이런 글을 쓰면 바로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자리가 역사학자가 아닌가. 단양에서는 매년 퇴계와 인연이 있었던 기생 두향을 기리는 두향제가 열린다. 평생 선생을 흠모하고 후에 퇴계가 임종하자 강선대에 몸을 던진 여류 시인이며 열녀다. 퇴계와 두향의 만남은 선생이 단양군수로 9개월 남짓 부임할 때다. 가족들을 안동에 두고 단양 관사에서 홀로 있었던 퇴계는 관기였던 두향과 자주 만나게 된다. 시를 좋아했던 두향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퇴계의 인격과 문학을 깊이 존경하게 된다. 두향은 퇴계에게 매화분 하나를 선물했다.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담은 아름다운 매화분을 받은 퇴계는 자신의 머리맡에 놓고 완상했다. 어느 기록에도 퇴계가 두향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정을 나눴다는 기록이 없다. 필자가 생각컨대 두 사람은 아름다운 강선대에 나가 시를 화답하고 스승과 제자로 정을 두텁게 한 것 같다. 그러다 퇴계는 자신의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같은 혈속이 한 지역의 관장을 맡게 되면 안 된다고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 손에는 두향이 선물한 매화분(梅花盆) 하나만 있었다. 대개 조선시대 지방관장들은 부임지에서 기생을 사랑하면 머리를 얹어주고 첩을 삼아 집으로 데려간다. 퇴계가 올바른 유학자가 아니고 섹스의 지존이었다면 두향을 그대로 두고 떠났을까. 퇴계는 학자로서 군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던 것이다. 안동으로 돌아간 퇴계는 매화분을 가까이 하면서 100편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다. 매화를 연인으로 반려로 삼아 선비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 시 속에는 가슴속에 간직했던 두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는지 모른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단양에서 안동까지 내려간 두향은 먼 발치에서 눈물로 스승의 운구를 지켜본다. 그리고 두번 절하고 돌아와 퇴계와 인연이 있었던 강선대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아. 두향은 퇴계의 영혼을 만나 저승길을 인도하려한 때문이었나. 올해는 매화꽃비 내리는 아름다운 단양을 답사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역사를 잘못 배운 사이비학자들이 출몰하여 역사를 폄하하고 성인의 이름을 오욕되게 하여 가슴이 먹먹하다.
고대 진나라를 강력한 제국으로 올려놓은 상앙의 법. 후대의 사가들은 최고의 법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악법이라고 혹평한다. 상앙은 전국시대에서 제국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성공적인 법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악법가로 평가 된다. 사가들은 왜 진나라를 부강 시킨 공로는 깡그리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일까. 상앙은 처음에는 황실에서 최고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의 법은 개혁법으로 그 기반 위에 진 제국이 탄생되었다. 진나라는 상앙법을 시행한 지 10여년 뒤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강대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상앙의 법이 정착되자 진나라의 풍속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백성들은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았으며 시장은 활기를 찾는 듯했고 길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줍지 않았다. 산에 숨어 악행을 저지르는 도둑도 없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자진하여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갔으며 마을 치안 질서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피로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백성들이 새 법의 불편함을 토로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작은 죄를 짓기 마련인데 법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 태자가 법을 어기고 말았다. 태자는 군주의 후계자이므로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시종을 처벌하고, 왕자의 스승 얼굴에 치욕적인 문신을 하여 추방했다. 진 효공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자 상앙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했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상앙은 도망을 치게 된다. 시골의 한 여인숙에 묵으려 했는데 주인은 '상군의 법률에 의하면 여행증명서가 없는 손님을 재우게 되면 똑같은 죄가 된다'면서 거절했다. 이때 상앙은 '내 법의 피해가 급기야 내 몸에까지 미쳤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처벌을 받았다. 우리나라 현재 소상공인은 700개 업종에 7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 백개 점포가 폐업하거나 휴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소상공인들이 받는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자치단체의 행정명령이다. 실례로 모 도시 지역에서 상인들이 새로 간판을 달았는데 규정을 일부 여겼다, 관청에서 불호령이 떨어져 불황에도 불구, 간판을 모두 교체해야 했다. 불만의 팽배는 그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강력히 법을 집행한 후보가 낙선하고 말았다. 국민은 국가의 기본이며 어려운 사정을 보살펴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아무리 좋은 법도 국민에게 피로감을 주는 법은 성공하지 못한다. 작은 범법도 용납하지 않는 지나친 응징은 자칫 '상앙의 악법'이 될 수 있다. 세종도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는데 강력하고 과격한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유시했다. 세종 28년 각 지방 관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한다. '사납게 하는 것을 일삼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독촉하고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니 이 뜻을 알아서 조처하라'. 윤대통령은 강력한 법치를 주장하면서 혹 상앙의 악법은 없는 가 돌이켜봐야 한다. 지금 의료대란의 해결은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의사, 수련의, 환자 모두 우리 국민들이다. 대통령이 자존심에만 매몰되지 말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들을 위하는 길이다.
'철새'라는 용어는 이익을 좇아 당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정치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요즈음 여·야당이 총선을 앞두고 지역 후보를 내면서 일부 탈락한 정치인들이 당적을 옮기고 있다. 오로지 공천을 받기 위해 수십년 쌓아온 정치적 신념이나 동지적 유대도 팽개친다. 철새 정치인은 요즈음만의 풍속도는 아니다. 조선 유교사회에서도 사색당파의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 철새 정치인이 많았다. 선비가 지녀야 할 대쪽 같은 신념이나 절개도 권력을 위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렸다. 지금은 공천을 위해 당적을 바꾸는 철새들이지만 옛날에는 상대 당을 역적으로 몰아 몰락시키는 극단적인 모함행위 까지 벌였다. 사화나 고변등 조선 중기 피의 숙청사를 들여다보면 모두 권력투쟁의 산물이다. 경종(景宗. 재위 1720~1724)대 정권을 잡은 소론은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된 김일경이 앞장섰다. 그는 노론의 인물 중 목호룡이란 사람을 매수했다. 목호룡은 남인 천얼 출신으로 청능군(靑陵君)의 집안 노비였으나, 풍수를 배워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잡아주고 노비에서 양인이 되었다. 이후에 궁궐의 토지와 곡식을 관리하면서 부호가 되었다. 평소 시를 잘 지어 노론 중진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연잉군(후에 영조)을 보호하는 편이었다. 소론의 사주를 받은 후 변심한 그는 1722년 노론을 이탈, 소론으로 당적을 바꾼다. 그는 자신이 노론계의 중진들과 모의해 왕을 시해하고 병조판서를 지낸 이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모함했다. 이게 바로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 이 말을 들은 경종은 크게 노하여 노론 인사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유배 중인 노론 4대신과 권속 및 추종자들이었다. 동궁에서 매를 훈련시켰던 백망(白望.1627∼1722)은 소론과 남인이 왕세자를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신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묵살해버렸다. 백망의 집안에서 갑주와 칼이 발견 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영조 때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는 본래 당적이 소론이었다. 소론의 이념과 당론을 가장 추종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소론의 선봉 이인좌가 영조에게 반기를 들자 왕은 박문수를 시켜 이들의 진압하라고 명한다. 박문수는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 한 이인좌 무리를 소탕했다. 그는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후에 공신 책봉의 예에 따라 녹훈되었으며, 영성군(靈城君)에 봉작되었으나 후대에도 소론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소위 '철새정치인'은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국회의원들은 당을 이적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선거철만 되면 한인사회에 나타나 표를 달라고 구걸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재미교포사회에서는 이들을 '철새'라고 호칭한다. 이들 정치인들은 선거자금의 모금과 표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의 선거일인 11월 첫째 주 화요일 전에 열심히 한인사회에 나타나다가 선거가 끝난 12월부터는 발길을 끊는다는 것이다. 여야가 공천후유증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여당보다는 야당이 심하며 벌써 많은 현역의원들이 탈당, 새로운 정치 연합을 만들고 있다. 야당의 내홍은 공천 심사과정의 투명문제와 비명 친명간의 감정적 대립으로 격화되고 있다. 금강하구둑에는 겨울철 철새 무리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탐조여행은 즐겁지만 자기 이익만을 위해 철새가 되는 정치인들은 아무래도 비호감이다.
옛 부터 단양은 '울고 갔다 울고 나오는 곳'이라는 속설이 있다. 처음 단양관리로 부임하게 되면 길이 멀고 험하여 울고, 임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는 단양 인심을 잊지 못해 운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단양을 답사해온 필자는 두 갈래로 길로 다녔다. 충주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가다 제천 한수 쪽 국도를 이용했다. 한쪽은 충주에서 매포를 지나가는 산업 도로다. 모두 비포장였으며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면 시간도 몇 시간이나 걸렸다. 버스가 구 단양읍 가까이 이르자 차창으로 옥순봉 절경이 들어온다. 남한강 푸른 강물위에 펼쳐진 옥순봉은 절경이었다. 한 폭의 산수화도 이 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조선 정조는 단양팔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마침 도화서 화원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보내면서 특별히 단양팔경을 그림으로 그려오라고 당부한다. 지금 전해지는 보물 지정의 아름다운 단원의 단양팔경 산수화는 이런 연유로 태어난 것이다. 단양과 특별히 인연이 있는 학자 두 분이 있다. 한분은 고인이 되신 전 교원대 호불 정영호 교수였다. 단양 적성산에 있는 국보 적성비는 호불이 발견한 유물이다. 1978년 1월 토요일 필자는 정교수로부터 급히 연락을 받고 단양으로 달려갔다. 여관에는 여러 교수들이 있었는데 모두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아침에 참석자들은 일찍 적성에 올라갔다. 적성 양지바른 곳에 등산객 흙받이로 이용됐던 국보는 1천500여년을 견뎌온 끝에 이렇게 찾아졌다. 그 자리엔 중앙일보 문화재전문기자 이종석씨(삼성박물관장), 단국대 차문섭 교수, 동국대 김상현 교수 등도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 모두 고인이 되셨으니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된다. 충북 문화사에 꼭 기록될 또 분은 전 충북대 박물관장 이융조 교수다. 이 교수는 지금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청원두루봉 구석기 유적을 위시, 충북에서 수많은 선사유적을 찾은 분이다. 단양 수양개 유적은 세계적인 유적으로 부상했다. 이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돌날석기전통을 밝힐 수 있는 돌날몸돌과 다량의 돌날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단양팔경과 더불어 수양개 유적은 우리나라 관광자원의 구심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2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문학자들이 단양에 모여 그 중요성을 확인했다. 단양군이 이 유적에 대해 깊은 이해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단양 국제 세미나에서도 지적됐지만 앞으로 과제는 수양개 유적의 자원화 문제다. 출토된 유물만을 전시하는 평면적인 공간으로는 많은 관광객을 끌 수 없다. 한국의 선사문화가 살아있는 새로운 개념의 문화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지어진 것은 고인이 되신 약수터 곽응종 할아버지가 1970년대 말 자신의 소유 땅 4만 평을 국가에 헌납 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뒤늦게나마 박물관 뜰에는 고인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가 제막되었다. 자린고비로 이름났던 곽옹은 저금하기 위해 쇠똥까지 주어모아 팔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청주시민들이 쉴 역사공간을 만들어주었으니 위공(偉功)이 아닐 수 없다. 국보 적성비를 발견한 고 정영호 교수, 그리고 충북 선사고고학의 선구자인 이융조교수는 충북을 빛낸 얼굴이다. 이 분들의 그동안 공적을 일일이 예거하기는 지면이 부족하다. 계제에 적성에는 고 정영호 박사 공적비를, 수양개에는 이융조교수와 발굴조사단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을 조성하여 그 공을 기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충북의 자랑이기도 한 단양 수양개 유적에도 올해는 생동감 넘치는 문화향기가 가득하길 기원해 본다.
용은 제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고대 중국 문헌을 보면 재미있게도 사람들이 용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중국 고대 백과사전격인 산해경을 보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괴한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용이 살다 멸종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에서 큰 물줄기 같은 회오리가 하늘로 올라가도 용이 승천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동해에서 여름철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왕의 탄생설화를 보면 용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백제 무왕은 용이 부여 궁남지에 있는 과부와 상관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과부는 백제 왕실의 적통이 아닌 여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이 몰래 출입하여 아들을 낳고 어머니는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익산 금마로 피신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 무왕은 금마를 제2왕도로 삼았다. 고구려 주몽은 다섯 마리가 끄는 용 마차에 타고 하늘에 내려온 것으로 기록된다. 이 마차를 오룡거(五龍車)라고 하는데 충남 천안에도 다섯 마리 용이 등장하는 설화가 있다. 천안은 고려 태조 왕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를 정발한 전진 기지였다.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믿어 음력 1월이면 큰 제사를 지냈다. 왕실에서 나서 해안에 많은 절을 지은 것도 용신을 달래어 뱃길 안정을 기원한 것이다.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군산도 일봉산에 오룡묘가 있는데 그 벽에 오신상을 그려 놓고 선원들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목격담을 적었다. 충남 태안군의 황도붕기풍어제는 용왕제로 음력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에 열린다. 충남무형문화제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각종 고사에서는 돼지머리를 쓰지만 이곳 풍어제에는 소머리 고기를 상에 놓는다. 아무래도 용왕은 다른 용보다 특별식으로 대접받는다. 2024 새해를 청룡의 해라고 한다. 청룡은 사신가운데 동쪽을 방위하는 용이다. 젊고 활력 있는 용으로 그 형체는 고구려 고분인 강서대묘에 그려져 있다. 지관들이 명당을 논할 때 '좌청룡 우백호'라는 말을 쓴다. 동쪽은 해가 솟아나는 곳으로 음양론에서 양(陽)이 되는 방위다. 서쪽의 산세는 백호처럼 비교적 커야 바람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임금을 주산에 비유했을 때 좌우에 훌륭한 신하를 두어야 나라가 잘 됐다. 오늘날 대통령이나 각 당 대표들도 마찬가지다. 좌우에 훌륭한 인재를 포용하고 있어야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존경 받는 임금은 좌우에 훌륭한 정승을 기용하여 덕치를 베풀었다. 성군이라는 칭호를 받는 세종의 인재 기용술은 지금도 벤치마킹할만한 하다. 자신의 왕위를 끝까지 반대했던 황희를 제주도 귀양지에서 불러 특별히 기용하여 재상자리에 앉혔다. 여야가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는 등 분주하다. 국민의 힘은 개혁적 수순으로 전혀 정치와 무관한 젊은 인물들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했다. 노인비하로 문제가 있는 위원이 낙마하기도 했다. 정치경력이 없는 이들이 과연 여당에 새 바람을 일으킬 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올 총선을 앞두고 한국의 정치는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와 있다. 자당의 이익과 집권의식에만 침잠하며 정쟁만 일삼는 행태에 국민들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청룡의 해 한국의 모든 위상이 하늘로 비상하길 기대해 본다.
동지날은 일년 중 가장 밤이 길다. 섣달은 가장 추운달이다. 조선시대 개성 명기 황진이의 '동지섣달 기나긴 밤' 시는 한량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 오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의 시에 감동한 시인이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였다. 문명을 떨쳤던 백호는 살아생전 황진이를 만나 동지섣달 기나긴 밤 화답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황진이는 일설에 1506년생이라고 되어 있어 43년이나 연상이다. 어머니뻘 이라 해도 백호는 시에 감동하여 마음속의 연연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과거에 급제 한 후 백호는 관모를 쓴 멋진 차림으로 개성을 지나는 길에 그녀가 생존한 줄 알고 만나려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진이의 묘소를 찾은 백호는 그냥 엎드려 시를 짓고 술을 부어 곡하고 말았다. 비록 여류지만 당대 최고 시인의 죽음 앞에 통곡한 것이다. 백호는 기생의 무덤에 엎드려 잔을 부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만 파직 당했다. 푸른 풀이 우거진 골짝 내 사랑이 묻혀있네 / 진이여 내 사랑아 앉었느냐 누웠느냐 / 불러봐도 대답이 없고 어여쁜 그 모습은 어디다 두고 / 땅 속에 뼈만 묻혀 아무런 줄 모르네 그려 잔을 들어 술 부어도 잔을 잡지 아니허네 백호가 지은 시는 흥타령으로 불려 져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는 애가로 전승되었다. 그는 다시 풍류가객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지섣달 가슴을 녹여주는 연인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혼자 외롭게 살다 갈잎 위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동지는 사실 옛날에는 명절이었다. 동국세시기에는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고 했다. 당나라의 역법을 받아썼던 고려 시대까지는 동지를 설날로 삼았다고 한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가운데도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즐기리라 /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졀후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루하다…(하략)'라는 대목이 나온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은 악귀를 쫓는 주술 행위였다. 선사시대부터 악귀는 붉은 색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여 이런 풍속이 생겼다. '동짓날 따뜻하면 추위가 음력 3월까지 가고, 동짓날 추우면 이듬해 봄 일찌감치 따뜻해진다(冬至暖, 冷到三月中, 冬至冷, 明春暖得早)'는 말이 있다. 내일이 동지인데 전국에 한파가 몰아지고 있다. 동지 달 독수공방은 가난한 이들에겐 춥고 기나긴 밤. 천재 시인 임제도 추운 밤을 홀로 지내다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세대가 많은 현 세태에도 춥고 견디기 어려운 독거 노,소 세대들이 많다. 노인들은 무료급식소로 몰리고 젊은이들은 라면으로 식사를 때운다. 정부나 지자체도 사후약방문 격으로 사고가 난 후 크게 아쉬워하는 척 말고 독거세대를 잘 파악하여 대응했으면 한다. 22일 동지 날도 가장 추운날씨가 된다니 따뜻한 봄이 일찍 오려나 보다. 무엇보다 경제가 호전되어 용의 해인 갑진년을 맞이했으면 한다.
신라향가 가운데 '풍요'라는 노래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영묘사 조각가 양지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양지의 작품으로는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벽돌이 있는데 정교하고 미려하다. 삼국유사에는 양지는 '지귀'로 기록된다. 영묘사 불사를 하면서 여왕도 사찰에 자주 들렀던 모양이다. 그는 아름다운 선덕여왕을 실지 본 이후 짝사랑을 하다 상사병에 걸렸다. 지귀가 병으로 앓아 죽어간다는 말을 전해들은 여왕은 영묘사에 직접 출행했다. 그리고는 자리에 누운 지귀를 보고 자신의 팔찌를 빼 가슴에 놓아준다. 젊은 예술가가 자신을 상사하다 병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감동한 것인지. 아니면 영묘사에 자주 들르면서 지귀를 대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청년을 가슴에 넣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여왕이 상징과도 같았던 금제 팔찌를 빼 지귀의 가슴에 놓아준 것은 백성을 사랑한 이상이다. 초췌한 청년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지귀의 쾌차를 염원했을지 모른다. 이날 지귀의 가슴에선 불이 일어나 영묘사를 태우고 말았다. 지귀가 여왕을 위해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았으니 더 바랄 소망이 없었던 것인가. 소신공양은 묘법연화경에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데서 유래한다. 경전은 이를 찬양하여, '참다운 법으로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라고 했다. 선덕여왕은 속전에 본래 남자였는데 불법을 위해 여성으로 태어나 스스로 '여래'라고 했다. 향가 풍요는 '여래가 오시네. 여래가 오시네. 슬픈 눈물을 거두고 함께 공덕을 비세'라는 가사로 되어 있다. 선덕여왕도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유언으로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다. 왕실에서는 이 유언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도리천이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왕의 능은 사천왕사가 내려다보이는 경주 낭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여왕은 양지가 만든 사천왕사 양지의 수호를 받으며 다음 생을 염원한 것인가. 차생에서는 양지를 만나 자유로운 사랑을 하고 싶은 소망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한국불교 지도자 자승스님이 소신공양으로 입적했다. 스님은 지난 2010년 소신공양으로 입적한 문수스님을 추모하는 행사에서 참석, 의미심장한 법어를 했다. '내 한 몸 희생하여 다른 생명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이 육신을 태워 불보살님과 법계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불자의 길'임을 피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악습을 버리고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자승스님은 친필로 '생사가 없다 하니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라는 유서를 남겼다. 자승은 두 번이나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한국불교계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파정치를 지지하면서 반대세력의 비판을 받아왔고, 조계사를 나와서는 머리를 조금 길게 하고 다닌 것을 고발한 단체도 있다. 나날이 신도가 줄고 있는 것을 걱정한 자승은 소신 직전에도 불교중흥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할 것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답답하고 암흑과도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다. 할일이 산적한데 일찍 목숨을 끊고 영면을 선택한 자승스님은 자신에 대한 비난과 불교계의 현실에 절망한 것은 아닌지. 스님의 쓸쓸한 영정을 보며 고개 숙여지는 겨울 아침이다.
'도처에 도둑만 들끓는 나라' 지난 2021년 교수들이 추천한 당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였다. 즉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으로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된 경우를 의미한다. 당시 추천한 교수는 '각처에서 또는 여야 간에 입법, 사법, 행정의 잣대를 의심하며 불공정하다는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며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시행하는 데 감시할 사람들이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지난 2021년에 비해 나아졌는가. 아니면 아직도 구태의연한 상태인가. '비리 공화국'이란 말이 다시 무색하고 있다. 지금 전남 광주에서는 브로커와 광주 경찰간부를 둘러싼 부패 고리가 드러났다. 검찰의 수사망에 올랐던 전 경찰 고위직 간부가 극단선택까지 했다. 검찰은 브로커로부터 금품을 받고 수사 청탁을 한 혐의로 전직 경무관을 구속하고, 지난 월초에는 경찰청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감사관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 광주시교육청이 도마 위에 올랐다. 감사원은 교육감의 고교 동창이 감사관으로 채용되는 과정에서 면접시험 점수 순위가 바뀐 사실을 확인하고, 인사담당자를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도 의혹사건이 터졌다. 시가 추진하는 1조 원대 '민간공원 개발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전·현직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모 방송 취재결과 경찰청은 시청 전직 공무원 김 모 씨와 현직인 곽 모 씨를 각각 뇌물 수뢰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쌍령공원 민간개발사업'은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산 일대 51만여㎡를 주거지 등으로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 1조 원 규모 사업이다. 사업자로 선정되면 아파트를 건설해 분양하는 이권을 얻을 수 있다. 성남시 대장동의 재판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나라 안이 온통 매관매직이다, 금품 살포다, 압수수색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지경 아닌가. 이번엔 명문대학 교수가 입시비리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고 있다. 숙명여대 유명 성악가 출신 교수와 입시생 불법과외를 도운 브로커가 경찰에 입건되었다. 경찰은 현재 입시 브로커가 빌린 공연장 대관 내역을 조사 중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용히 생각해보건대 나라 전체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뿐이다(一毛一髮 無非病耳 及今不改 其必亡國而後已)'라고 썩어가는 조선을 비판했다. 다산은 이어 '임진왜란 이후로 온갖 법제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해졌다. (중략) 재물이 생산되는 근원은 힘껏 막아버리고 재물이 소비되는 길은 마음대로 터놓았다… 모든 관직까지 정비되지 않아 정규 관원조차 녹봉이 없고 탐학 질 하고 더러운 짓 하는 풍습만 크게 일어나 백성들은 초췌해져버린 상태다'라고 개탄했다. 200여년전 다산은 이미 포퓰리즘과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경고했다. 공직자가 썩으면 나라의 기둥이 썩는 것과 같다. 국민들이 부정부패 썩은 정치인들을 옹호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6·25 전쟁 참화를 딛고 세계에서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그러나 도둑과 고양이가 함께 공존하는 '묘서동처'로는 결국 주저앉고 만다.
국민들은 정치인에게 일반인과는 다른 '도량(度量)'을 주문한다. 도량이란 무슨 말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사물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다른 뜻을 보면 '사물의 양을 헤아린다'고 했으며 '길이를 재는 자와 양을 재는 되'를 말하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보살이 도를 이루는 장소'라고 했다. 흔히 사찰을 '도량(道場)' 혹은 도량처라고 하는데 '場'을 '량'으로 읽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상세계를 지칭하는 만다라도 도량처라 불린다. 도량에는 헤아릴 수 없는 빛 '무량광(無量光)'이 비추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임진전쟁 때 의병을 일으켜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즐겨 휘호한 것이 '무량광'이었다. 부처의 심오한 경지까지 추구한 완당 김정희도 아끼던 스님 초의선사에게 곧잘 이 휘호를 써 보냈다. 일반에서 바라 본 도량은 혹 불가의 '도량'에서 나온 생각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하는 자는 하늘같이 넓고 바다 같이 깊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고대 중국에서는 도량과 아량(雅量)을 같이 썼다. 세설신어(世說新語)란 고서는 고대 송나라 때 유의경(劉義慶)이 편찬한 책이다. 이 안에 있는 아량 편에는 위진, 시대 정치인이나 선비들의 도량을 기술하고 있다. 가장 특출했던 사람이 바로 사안(謝安)이었다고 한다. 4세기 초 사람으로 정치가,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평온하고 두려움 없는 성품으로 겉으로도 놀란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다. 벗들과 함께 바다에 배를 띄워 유람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몰아쳤다. 배가 곧 뒤집힐 듯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자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사안은 동요 없이 태연하게 노래를 불렀다. 뱃사공도 풍류를 아는 사람이었는지 온힘을 다해 계속 노를 저었다. 풍랑을 견딘 배가 육지에 닿자 사람들은 사안의 대범함에 찬탄했다고 한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도 태풍에도 끄떡없는 자세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도량과 아량을 군자의 덕목으로 삼았다. 도량이 큰 인재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커야 민심을 얻고 도움을 받는다고 가르친 분이 바로 맹자. '어질지 않으면 친척도 배반한다(寡助之至 親戚畔之)'고 일갈했다. 속 좁은 정치인을 어느 국민이 신뢰하겠는가. 청년 정치인의 우상이었던 이준석 전 국민의 힘 대표가 또 속 좁은 행태를 벌여 국민들로부터 실망을 주고 있다. 이번에는 인요한 당 혁신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줄곧 우리말이 아닌 영어를 쓴 것과 관련해 예일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직격한 것이다. 나종호 교수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전대표가 인요한 위원장에게 'Mr. Linton'이라고 하며 영어로 응대한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하고 '만약 한국계 미국인 2세에게 미국의 유력 정치인이 공개석상에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그것도 비아냥대면서 했다면 그 사람은 인종차별로 그날로 퇴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뽑은 자당의 대통령을 누워서 침 뱉기 식으로 비난을 일삼으며 당의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이 전대표의 정치적 리더십과 역량은 의심스럽다. 이번에는 또 여권 내 반윤 세력을 규합하여 신당을 만든다고 한다. 총선을 앞둔 여당에 재를 뿌리겠다는 심사라는 비판이 거세다. 여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어느 누가 환영하겠는가. 이런 속 좁은 도량을 가지고 장차 국가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인가. '어질지 않으면 친척도 배반 한다'는 맹자님의 가르침 정도는 알고 지냈으면 한다.
지금 중동 가자 지구에는 비인도적 참상이 계속되고 있다. 연일 폭탄을 맞은 도시 건축물은 하나도 성한 곳이 없다. 생존자들이 무너진 건물 콩크리트 더미에서 시신을 찾아 나서지만 장비가 없어 손을 놓고 만다.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올 듯 음산한 폐 건물 위에 섬광이 번뜩일 때 마다 미사일이 연이어 작렬한다. 지금 가자지구 생존자들은 피신 할 곳이 없다. 이스라엘군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이들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마지막 통고를 했다. 그러나 이들의 피난길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곱게 자라야 할 천사와 같은 영유아들마저 목숨을 잃고 있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중동에 눈물어린 탄식과 증오만 가득하다. 가자 지역이 어디인가. 구약성경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억압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켜 엑소더스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2천 년 조국을 떠나 유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우자 그동안 자리 잡고 살던 팔레스타인과 영토전쟁으로 비극은 시작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피의 강이 되고 전쟁이 반복되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먼저 문제를 일으킨 측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다. 유대교 안식일인 지난 7일 새벽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음악 축제장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엄연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행위로 국제사회로부터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마스는 로켓을 발사한 후 무장대원 300명을 침투시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축제에 참가한 사람가운데는 이스라엘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태국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남녀들도 있었다. 하마스 대원들은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화장실로 피신한 사람들에게도 조준 사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더 끔찍한 것은 어린아이들을 참수한 영상이 전 세계에 송출됐다.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은 악마의 모습으로 변했다. 가자지구의 한 기독교인은 '인도주의는 사라졌다. 궁핍하고 비참한 도시를 볼 때면 비록 천국의 문이 닫힌 것처럼 보였다. 살기 위해서 세금처럼 지불하는 피 흘림만 있을 뿐이다'라고 절망했다.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방공망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도 이번 하마스의 기습적인 침공을 막지 못한 원인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 전쟁을 위해 하마스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 해 왔는가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500㎞에 달하는 땅굴을 파 놓았다. 하마스의 침공을 계기로 한반도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땅굴을 주 무기로 하고 있는 북한이 드론과 장사포로 남측을 공격할 경우 대비책이 있느냐는 것이다. 한·미 연합 공조와 정부의 확고한 대비책이 있어야 겠다. 세계의 여론은 가자지구 전쟁의 확전을 반대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중동전쟁으로 치달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등이 더 이상의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중재를 나서고 있지만 이스라엘 국민들의 분노를 억지시킬지는 미지수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보복은 또 보복을 불러일으킨다.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는 가자지구의 반복돼온 비극적 역사는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다. 이번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이들이 입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아 하늘은 정녕 가자지구를 구해주지 못하시는가.
문화의 달을 맞아 필자는 서울 원서동 창덕궁 앞을 자주 지나가게 된다. 전시회가 열리는 인사동을 찾는 시간에 국악로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간혹 있다. 그러나 창덕궁 정문을 바라보면 문득 참담한 역사를 지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128년전 1895년 10월 8일. 창덕궁 안에서 국모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우리 역사에 이처럼 왕비가 외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일은 없었다. 기록을 보면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만행에 민비의 정적 세력들인 조선군 훈련대도 참여했다는 것이다. 주도 세력은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를 중심으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일본인 낭인들이다. 신라 말 후백제 군이 신라도성을 기습 침공하여 경애왕을 자살케 했을 때도 왕비는 살해되지 않았다. 일본 낭인들은 궁녀 속에 있는 민비를 찾아 내 칼로 난도질을 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시신을 불 태웠다. 어떻게 대한제국의 국모인 왕비가 이처럼 무참히 살해 될 수 있었을까. 총과 창검을 쥐고 창덕궁을 지켰던 무장 시위 군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당시 고종은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위기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기록한다. 근세사 가운데 가장 수치스런 황제의 비굴한 도망이다. 궁을 지키던 군사들도, 황제도, 대신들도 자기들 살 궁리만 했던 것인가. 어떻게 국모 한 분을 지키지 못했던 것일까. 일본이 얼마나 조선을 깔 봤으면 폭도들을 시켜 한 밤중에 궁으로 쳐들어가 국모를 찾아내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수문장은 할복자결이라도 했어야 옳았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숨어 떨고 있지만 말고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성토하고 선전포고라도 했어야 했다. 무능한 황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가정이지만 고종이 강한 결기만 보였어도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민비시해의 역사를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비극이 알려지자 제일먼저 일어난 대일 항쟁이 바로 제천 유인석의 거의 였다, 충남 청양에서는 분노한 최익현과 선비들이 거사했으며 충주의병들은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싸웠다. 70년대 후반에 충주에서 찾은 의병일기를 보면 분노한 의병들이 일본군을 사로잡아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국모의 원혼을 위로하는 천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만약 고종이 분노하여 일본에 항쟁했다면 의병들의 기세도 더욱 확산되었을 게다. 조선 관군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군과 합세하여 의병을 진압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은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가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 선비들의 기개가 이랬는데 국록을 먹었던 황실과 벼슬아치, 관군은 일본에 아첨하여 목숨을 구걸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을미사변은 약한 나라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가를 입증한다. 한나라를 책임진 정치지도자가 나약하고 결기가 없으면 열강에 치욕을 당하고 먹힌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주 서울도심에서는 국군의 날을 맞아 우리 군의 늠름한 행렬이 있었다. 군이 보유한 최신 무기도 국민들에게 선을 보였으며 윤대통령도 나와 비를 맞으며 강군(强軍)을 박수로 격려 했다. 이날 장거리 지대공유도무기(L-SAM), 패트리엇 미사일, 국산 중거리 지대공유도무기 천궁, 천무 다연장 로켓등이 나왔다. 그리고 해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K-9 자주포와 지대지 현무 미사일도 국민들에게 공개됐다. 각종 미사일을 쏘며 핵무기로 한반도를 겁박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다. 어떤 격변에도 국치의 역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문화의 달 10월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민비시해역사를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 정벌전쟁에 승리를 한 문무왕은 귀로에 지금의 충주에서 하루 묵는다. 왕은 욕돌역(褥突驛)에서 행궁을 마련하고 군사들을 위로 했다. 욕돌역은 지금의 충주시 변두리인 주덕인가. 이날 저녁 중원경 우두머리 대아찬(大阿飡) 용장(龍長)은 문무왕 앞에 미소년 능안(能晏)을 내세워 춤을 추게 했다. 소년이 추는 춤은 바로 가야무(伽倻舞)였다. 아름다운 춤이었을까. 감동을 받은 왕은 소년의 춤이 끝나자 친히 불러 가까이 하고 금잔에 술을 주며 치하한다. 용장은 왜 왕 앞에서 가야무를 추게 한 것일까. 따져보면 문무왕의 몸 속에는 가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친 무열왕의 부인은 바로 가야계 김유신장군의 동생 문희였다. 어린 시절 궁중에서 어머니의 춤을 보고 자란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주덕은 철 산지로 가야인들이 많이 살았다. 동국여지승람 비고에 보면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 있는데 충주가 바로 '임나국(任那國)'의 고지였다는 것이다. '임나국'. 이 이름은 70여 년 동안 한, 일간 역사학자들의 논쟁거리가 아니었나. 일본 일부 학자들은 지금도 계속 한반도내의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도대체 임나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여지승람은 충주를 왜 '임나국'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일본서기에는 임나국을 기록하면서 '백제 신라 땅과 인접하여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린다'고 했다. 자고 나면 신라 땅이 되고 그 다음날은 백제 땅이 되어 전쟁이 계속되는 접경임을 적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충주 주덕 땅이 가장 유력하다. 충주에 가야인들이 이주하여 산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이 시기 신라군의 주력부대는 경주 군대와 신라에 복속된 가야군사들이었다. 철기를 잘 다루는 가야인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상정 된다. 왜 진흥왕은 가야 집단을 중원경으로 이주 시켰을까. 바로 주덕일대에 산재한 철산지 때문이다. 주덕일대에 노지를 만들고 가야 철기장인들을 시켜 무구를 생산했다고 본다. 지금도 주덕일대 들판에서는 곳곳에서 야철 잔해인 슬러지들을 찾을 수 있다. 가야 악인 우륵은 가야금을 잘 탔다. 우륵도 가야이주 집단에 섞여 중원경으로 왔을 게다. 진흥왕은 새로운 정복지 충주를 순행 할 때 달천 하림궁에서 특별히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뜯게 한다. 망국의 음악이라고 반대하는 측근들의 간언을 외면하고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면서 가야음악을 장려하는 특단의 대책을 지시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가야금 선율이 1500년 연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은 진흥왕의 공로다. 문무왕도 진흥왕을 계승하여 김유신장군을 포함한 가야세력을 특별히 우대했다. 고도 충주 중원경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가야계 신라 유적이 어느 지역보다 많다.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이자 왕도 서라벌 다음가는 부도(副都)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경북 고령 지역등 가야유적이 최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남의 5개 가야고분군을 포함한 경북 1개, 전북 1개 등 7개 가야 고분군도 포함이 됐다. 기쁜 소식이지만 실지 우리역사에서 가야인의 삶과 문화 흔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유적은 충주지역이다. 중원문화권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힘차게 추진해 볼일이다. 필자는 수년전 충북고위공직자에게 이 문제를 제안했다가 무안을 당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힘쓴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해 보지도 않고 먼저 포기하는 자세야 말로 무기력증 아닌가. 진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돼야 할 지역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문화권역이다. 가야금 음악 하나만 가지고도 세계적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다. 잘못하면 이마저도 다른 지역에 빼앗길지 모른다.
조선시대 '벽서(壁書)'라는 것이 있었다. 벽에 대자보를 붙여 임금을 비방하거나 특정인을 모함하는 표현방법이다. 상소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벽서는 엄중하게 다스렸다. 명종 때 양재 벽서사건, 영조 때 나주 벽서사건은 가짜로 음모적 상황이 짙다. 자신들을 비난하는 세력을 모함하여 제거하기 위한 모함극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나뭇잎에다 꿀을 발라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를 임금에게 역모로 고변한 사건은 중종 때의 일이 아닌가. 정직한 선비들이 참화를 입었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 파는 행태는 과거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조보(朝報)는 '기별'이라고도 불렸으며 지금의 소식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신문이 없던 시대 기별은 지금의 언론기능 일부를 담당했다. 우리말에 '오늘은 좋은 기별(소식)이 올라나'하는 말은 모두 여기서 유래 된 것이다. 조선 중종 연간에는 기별이 인기가 많아 서울의 육전 거리 상인들에게도 배포됐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선비들은 기별을 제작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가짜 기별이 나돌아 관가가 골탕을 먹는 일도 있었다. 암행어사 박문수 일화에 나오는 '가짜어사 기별'은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었다. 기별을 많이 팔리게 하기 위해 나라의 기밀이나 가짜 뉴스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윤음(綸音)이란 '가짜뉴스'를 지칭한다. 포도청은 이 가짜 소문으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정조가 즉위한 직후에는 '과거제도를 개선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사형에 처 한다' '양인도 옛글에 능통하면 가려 쓴다' '술은 망국의 폐가 있으니 절대 금 한다' 등의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포도청이 수사에 나섰으나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했다. 정조는 이를 진화하기 위해 사실이 아니라는 역 윤음을 내리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심은 희대의 사기꾼 얘기에 열광하는 속성이 있는 모양이다. 한국의 민담설화 가운데서 단연 인기는 봉이 김선달이다. 춘향전, 심청전과 더불어 이 해학적 사기극은 지금도 회자된다. 미국에서도 코믹한 사기꾼 영화는 흥행한다는 공식이 있다. 청교도 사회라는 미국이 사기꾼 얘기에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이율배반이다.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은 세계적 미남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다. 가짜 뉴스가 오늘날처럼 많이 나도는 시대가 우리 현대사에 있었던가. 일부 반 언론적 인사들이 돈에 매수되어 기본 윤리를 팔고 있다. 마지막 양심의 보루라는 언론이 이렇게 정치에 편향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할 말을 잊게 한다. 사기 언론으로 입는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다. 검찰은 옛 언론노조 위원장이 화천대유자산관리의 대주주인 김씨의 제안에 따라 '조작 인터뷰'를 진행하는 대가로 억대의 금품을 받아 가짜 뉴스를 퍼뜨린 혐의를 잡고 압수수색을 했다. 이날 둘의 조작된 대화가 담긴 음성 파일은 6개월 간 남아 있다가 대선 직전 인터넷 매체 인터뷰 기사로 보도됐다. 이 매체의 기사를 친 야당 성향의 제도권 매체들이 확인이나 반론 절차조차 없이 줄줄이 받아썼다고 한다. 특정 후보를 낙선 시킬 목적으로 사기 언론 대열에 앞장 선 것이다. '가짜 뉴스'는 언론의 정도에 위배되는 '현대판 벽서'가 아닌가. 이를 이용하고 조작하는 정치집단도 결국 국민들에게 외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0여 년 고향을 떠나 사는 필자가 최근 느끼는 감정은 청주가 통일신라 '서원소경'을 잊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40여 년 전 청주에서 역사연구 모임인 서원학회를 만들어 성지연구가 고(故) 이원근교수를 모시고 청주일대의 고적을 수년간 조사했다. 당시 회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신문왕 때(685AD)에 청주에 설치 된 서원소경 치지(治址)였다. 이교수와 회원들은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청주 인근의 절터, 성터를 답사했다. 그런데 우리 답사반이 청주 상당산성 남문 아래를 조사할 때 고졸한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를 찾았다. 글씨는 '사탁부속 장지일(長池馹)'이었다. 통일신라의 나뭇가지 문양의 얇은 기와였는데 해서로 양각된 명문은 조선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사탁부라면 바로 신라 6부의 하나가 아닌가. '장지일'은 또 무슨 뜻인가. 당시 서원학보에 논문을 쓰면서 필자는 이 내용이 신라 '장지역(長池驛)'이라는 적시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기와는 신라 사탁부에 속한 장지역으로 규명됐다. 여지승람 청주 역원조에 나오는 장지역이 본래는 상당산성 남문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통일직후 신라 사탁부민 일부는 경주에서 이주하여 장지역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임을 알려주는 중요 자료다. 그렇다면 초기 서원소경 치지는 상당산성이란 해답이 나온다. 이때 청주여상에 근무하는 미술교사 정찬경 화백을 만나게 된다. 정화백은 홍익대를 졸업한 서양화 비구상 화가로 현재는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이다. 정화백은 우암산에서 아름다운 보상화문 와당을 수습했다고 제보해 왔다. 우리는 급히 정화백과 함께 우암산으로 갔다. 바로 목암사 자리였는데 우암산성 안의 주거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출토 된 와당은 고려 초 보상화문, 연화문 와당이었다. 일부는 통일신라 와당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것도 있었다. 서원소경 치지를 찾고 있는 우리들은 우암산성이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적임을 확인했다. 정화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귀중한 유적을 조사 할 수 있어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서원소경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과거 청주목이 있던 청주읍성자리일까. 필자는 이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신라는 통일 후 처음 상당산성에 서원소경 치소를 둔 것으로 해석했다. 백제가 멸망한지 25년이 지났으나 민심을 걱정해야 할 시기였다. 8세기 초 서원소경 치지는 지금의 청주중심가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는 평지에 도읍을 세우고 일단 유사시 읍민을 보호할 방위성을 가까운 산에 쌓았다. 경주 남산성, 충주(중원경) 남산에 석성을 구축한 예가 그것이다. 서원소경은 바로 백제 때부터 지역방어성으로 이용하였던 우암산 토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원소경은 신라 서라벌 왕성의 축소판으로 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이었다. 그 문화력이 고려 초 광종 때 세워진 용두사지 철당간의 '학원경' 이라는 명문으로 가늠 된다. 청주시가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성안동 일원에 대한 대규모 개발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시가 성안동 일원에 구상하고 있는 개발 사업방식은 국보 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을 중심으로 동심원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문화회복 프로젝트, 상권회복 프로젝트, 재난재해 대응 프로젝트 등 3가지 분야 사업이 계획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서원소경이란 이름이 빠진 것이 자못 서운하다. 앞으로 청주시의 고문화 복원 사업에 신라 5소경의 하나였던 '서원소경'이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역사탐구와 문화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서원소경과 국보 용두사 철당간지주 - 최초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도 모두 연원은 '서원소경 문화'에서 나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성종과 숙종은 자주 서울 장안을 미행하여 숨은 인재를 찾았다. 성종은 장안의 기생 소춘풍집을 몰래 다니며 민심까지 살폈으며, 숙종은 가난한 선비들이 몰려 사는 남산골을 배회하기도 했다. 조정 대신들이 세습적으로 추천하는 인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종은 남산골에서 올바른 인재를 찾아 시험을 직접 주재하고 과거에 급제 시킨다. 촉한의 유비는 재상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 이를 고사에 '삼고초려'라고 하지 않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위업을 함께 이루자고 제안했다. 이 고사는 나라의 인재를 얻기 위한 통치자의 고심을 알려준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려면 올바른 인재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윤정부의 인재풀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아니면 인사를 관장하는 보좌역들이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인지. '인사가 만사'라고 했는데 요즈음 대통령이 정부의 주요 보직을 임명할 때 느끼는 점은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는 것이다. 윤정부는 갈 길이 먼데 사사건건 야당의 태클에 걸려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이번 방송통신위원장 인사만 해도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논란이 많았던 이동관 대통령 특보를 임명했다. 청문회도 열리기 전에 부인의 현금봉투 수수설이 나와 야당이 의사당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등 반대에 나섰다. 야당이야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 상처를 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에 언론인 출신이 이동관 밖에 없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통령이 그렇다면 과거 '내로 남불'로 자파인사만을 고집했던 과거 정부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견해도 있다. 용산 대통령실이 이명박 정부 당시 인사만 기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뒤에 대통령을 움직이는 숨은 그림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어느 인사의 제안을 참고하는지 그가 현 정부의 핵심이라면 대통령 인사는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방송통신위원장 자리는 집권당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임명했다. 오늘날 공영방송이 편파방송으로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이런 과오가 빚은 결과다. 공영방송을 듣거나 보지 않는다는 국민들이 의외로 많다. 보지 않는 공영방송 시청료가 아깝다는 이들도 많다. 방송을 친여 조직으로 만들어 정권 옹호나 연장의 하수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이 같은 편파방송이 국민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했다. 왜 바른 방송, 올바른 보도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공영 방송문화를 정립하려면 불편부당의 인사가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돼야 한다. 정권의 하수인이 아닌 올바른 공영방송으로 재정립할 수 있는 인물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한다. 이동관은 과연 이런 일을 감당할 도덕성과 책임이 있는 인물인가. 윤대통령 정부는 계제에 방송문화 혁신을 이뤄야만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당에게 유리한 보도만을 요구하는 언론 장악을 획책한다면 이는 실책으로 가는 길이다. 방송이나 언론은 시대의 거울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현대판 춘추관이다. 특수한 정치집단의 이용물이 돼서도 안 되고,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도 입버릇처럼 언명했듯이 언론도 국민만을 보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리규정을 준수하고 불편부당의 자세로 진실만을 보도해야한다. 훌륭한 언론인 이라면 방송통신위원장 자리에 자신이 합당한 인물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