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에게는 코뚜레가 있다. 인간이 소를 부리기 위해 발명한 대단한 장치다. 코뚜레가 없는 소는 사납고 저돌적이다. 그러나 코를 한번 뚫어 놓으면 매우 양순해 진다. 동물 가운데 인간과 가장 깊은 관계를 지닌 동물이 소다. 사람 보다 몇 십 배의 힘으로 밭을 갈고 짐을 나른다. 이런 이로운 짐승을 인간은 너무 비정해 농사일이 끝나면 잡거나 내다 파는 것이 상례였다. 몇 년전 소와 노인의 운명적인 삶을 그린 워낭소리가 영화팬들의 심금을 자극했다. 소는 말은 못하지만 주인과의 이별 앞에서는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은 죽음을 알고 버둥대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국인들이 돼지고기보다는 쇠고기를 좋아했다. 유가에서 큰 제향 때는 대부분 소를 잡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기 돼지고기는 쉽게 상해 식중독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고위관리들은 돼지고기를 즐기는 중국인들의 식성에 구역질이 나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려 시대 청주 명문가였던 문신 곽예는 연꽃을 매우 사랑해 아호를 연담(蓮潭)이라고 자호했다. 인품이 훌륭해 당시 장원급제자 가운데 오만한 자들을 가리켜 성자(聖者)라고 불렀으나 연담은 이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연담이 비오는 날이면 개경 왕궁 옆에 있던 용화지에 나가 신을 벗고 이를 완상했는데 후대 문사들은 이 풍모를 가리켜 주염계(周濂溪·중국 송나라 때 연꽃을 사랑한 학자)의 풍류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연담이 소와 말의 도살을 금지하자는 우마도살금재법을 건의 한 것은 고려사 열전에 나온다. 인간에게 은혜를 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이 법이 시행됐을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도 쇠고기에 대한 선호의식은 식지 않았다. 불가에 십우도(十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빗댄 10단계의 그림이다. 즉 불도(佛道)를 터득하는 불자의 수양의 과정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보다는 중국에서 유행해 황실이나 귀족들이 도자기에 그리거나 걸개용으로 만들어 소장하는 것을 즐겨했다. 청주 우암산을 와우산, 목우산 혹은 목암산이라고도 부른다. 소 우(牛)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목암산이라고 한 것은 청주감옥에서 석방돼 일시 이 산에 은거했던 고려 삼은(三隱) 중의 한분인 목은 이색(李穡)과의 연관설화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우암산에는 많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불교유적 유물이 남아있다. 불가의 목우도(牧牛圖)는 동자가 소를 길들이는 과정의 그림으로, 소에 코뚜레가 있다. 인간은 세파에 찌들어 본성을 찾는 것이 힘들다. 목우도는 욕심이 없는 무심한 상태에서 심법(心法)을 공부하는 첫 단계라고 한다. 목우산이란 명칭의 연기가 목우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권력에 대한 야욕과 음모, 부정, 불공정, 법의 유린은 모두 없어져야 할 과제들이다. 지난해는 이런 가치의 혼돈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민들마저 어렵게 보낸 한해 였다. 새해 들어서도 분노의 여진이 식지 않고 있다. '착한 본성의 회복'이야 말로 소띠의 해를 시작하면서 한번 음미해 볼 '심법'이 아닌가 싶다.
한해가 저물고 있다. 2020 경자년도 며칠 있으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코로나 19가 가져다준 금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국가와 사회, 가정의 질서가 깨지고 많은 국민들이 통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손님이 오지 않아 극도의 생활고를 겪어야 했던 소상공인들, 사람구경을 못하는 여행사, 관광지 모두가 힘든 현장이다. 직장을 잃고 극도의 생활고를 겪었던 가장들이 잇달아 가족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가난한 가정에서는 분쟁이 잦아지는 법이다. 모두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들을 죽이려고 한 아버지가 구속되기도 했다. 인륜부재의 참극이 오늘처럼 많이 일어나는 때도 없던 것 같다. 옛날에는 이 같은 범죄가 발생하면 고을 사또는 패륜의 집을 허물고 연못을 만들었다. 백성을 가르치지 못한 죄를 반성하고 사직한다. 왕까지 나서 팻말을 붙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사건이 너무 자주 발생하니 대통령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내년에는 더 어렵다고 벌써부터 두렵기만 하다. 기업은 자금사정이 나빠진다고 현금 모으기에 여념이 없어 시중에 5만권이 동났다. 기업마다 구조조정이다, 긴축이다 하여 하루아침에 많은 직원들을 해고하고 있다. 엄동설한 길거리에 내 몰리는 가장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가 긴급 생활 자금을 지원 한다고 해도 실직 가정의 생계를 보장키는 턱도 없다 그런데 정치는 길을 잃고 있다. 국민들의 삶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누가 내년 서울,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이기느냐를 가지고 이전투구 하는 형국이다. 여야 힘겨운 대치에 가난한 국민들의 삶을 위한 고민은 없는 것 같다. 1년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첨예한 대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무장관은 오로지 검찰총장 하나를 잡겠다고 탈법을 감수하면서 까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가장 헌법과 법률을 지켜야 할 법무장관의 일탈 된 행동은 국민들에게 극도의 피로감을 주었다. 50% 국민들이 잘 못된 처사라고 해도 듣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자신들의 처사가 검찰개혁이라는 반론이다. 거리에 등장한 구세군 자선냄비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다. 그 만큼 주머니가 말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구세군본부에 따르면 12월 11일 기준 거리 모금액이 전년 대비 20%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로 불우시설을 찾는 위문행렬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서 인정마저 앗아간 것도 역시 코로나19가 장기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 시대가 지속되다 보니 젊은이들 사이에 점을 보는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타로나 관상, 사주 관련 게시물은 1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한 관상 테스트 앱이 20대 인기 검색어에 들기도 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시대의 풍속도지만 씁쓸하다. '하늘엔 영광 땅엔 코로나 종식을'.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 국민들의 염원은 역시 코로나의 종식일 게다. 국가나 가정의 삶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반드시 이 질병을 퇴치해야 한다. 한해를 보내면서 새해 2021 신축년의 희망을 버려서도 안 된다.
요즈음 창극(唱劇)이 인기가 고공행진이다. 국립극장의 창극공연은 코로나 19에도 일찍부터 매진 사례다. 그만큼 수도 서울에 창극 인구가 많다는 증거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여성 국극에 매료되어 공연이 있는 날은 학교도 가지 않고 구경을 했다가 정학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극장 앞에만 가면 기도를 보는 아저씨가 꼬마 손님이 왔다고 무료로 입장시켜 제일 앞자리에 앉혀주곤 했다. 특별히 아쟁의 선율이 좋았다. 가슴을 후벼 파는 비감의 음악이다. 막이 올라갈 때 울려 퍼지는 징소리, 고막을 찢는 태평소. 비록 어리지만 이 소리가 들려오면 극장으로 달려갔다. 몰래 숨어들어가 보기도 했다. 또 공연자들의 슬픈 아리아가 가슴에 닿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노동요로 부른 육자배기의 여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악인이 안 된 것이 이상하다. 지난 11월 중순 국립극장에서 공연 된 '아비방연'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배경으로 권력의 야욕에 무너지는 한 가정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필자는 이 공연을 보고 막이 내리는 순간 까지 비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공연이 있을까. 방탄 소년단이 세계의 1억 명이 넘는 열광적 팬들 앞에서 불렀던 아리랑의 감동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 필자만의 감회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옆자리에서 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훔치는 여성관객도 있었다. 창극은 대사를 창으로 부른다. 판소리, 단가, 육자배기, 흥타령 등 많은 소리 가락이 어울린다. 우리 소리의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북은 두 분의 악성을 배출한 국악의 고장이다. 충주는 가야금을 일으킨 악성 우륵이 산 곳이고 영동은 아악을 정리한 박연 선생을 배출한 고장이다. 망국의 한을 안고 가야금 하나만을 들고 충주에 온 우륵, 치열한 전장 속에서 젊은 진흥왕을 만나 특별히 비호를 받았다. 심천강변에서 퉁소를 불며 만년을 보낸 박연선생의 사연도 창극의 소재로 삼을 만하다. 어디 그뿐인가. 선조 때 낭만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사연이 있는 곳이다. 그가 풍류를 쫓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때 은거한 이 바로 보은 종곡. 훌륭한 인품을 지닌 학자 성운(成運)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숱한 기생들과 염문을 뿌렸던 장안의 호남 임제가 성운의 제자가 된 것은 학문을 하고 싶었기 때문 이었을까. 이 시인은 풍류행로를 그만두고 마음을 잡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를 너무나 사랑했던 평양기생 한우(寒雨)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한우가 처음 임제를 만났을 때 은밀히 유혹한 시에 답한 절구가 처연하게 와 닿는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단양 관기 두향은 퇴계 이황이 군수로 부임해 오자 그만 사랑에 빠진다. 퇴계도 그녀가 선물한 매화를 소중히 간직한 채 임종하는 순간에도 화분에 물을 주라고 유언했다. 끝내 두향을 향한 애틋한 정을 숨기지 못했다. 두향도 퇴계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가를 알고 있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강선대에서 몸을 날려 저승길에서 임을 따라갔다. 충북은 창극 소재가 될 만한 아름답고 슬픈 역사적 사연들이 많다. 전국의 창극 팬들을 불러오는 국악의 본 고장 다운 사업을 구상할 시기다.
조선 숙종 대 유명한 '회니논쟁(懷尼論爭)'을 불러일으킨 두 거유는 화양동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이성(尼城. 논산)의 명재 윤증(明齋 尹拯)이었다. 우암의 사가가 회덕에 있고, 윤증의 집이 이성에 있던 것을 지칭하여 붙인 것이다. 두 분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나 평생 반목하고 살았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 '노소당쟁(노론 소론의 싸움)'사의 중심인물로 기록되었다. 우암은 노론의 영수였으며 윤증은 소론의 대표였다. 왜 이들이 반목하고 물과 불처럼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윤증의 부친 윤선거는 우암의 친구였다. 일설에는 윤증이 스승인 우암에게 부친의 묘갈(생애를 기록한 비석 글)을 부탁했는데 우암을 비판을 한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윤증은 아버지를 욕되게 했다고 생각하여 우암에게 몇 차례 고쳐달라고 요청했으나 스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묘갈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긴 것일까. 병자호란 때 윤선거는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혼자만 성을 탈출했다. 나중에 묘갈에 대한 윤증의 반감이 커지자 우암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이용하여 사실을 적은 것 뿐'이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숙종 당시 두 학자의 명성은 최고의 위치였으며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소 양당을 골고루 기용하려 했던 숙종은 우암을 영의정으로 발탁하고 윤증에게는 우의정을 제수했다. 그런데 윤증은 벼슬을 고사했다. 몇 번이고 임금이 불렀으나 사양했다. 윤증이 우암과 같이 정사를 거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윤선거도 생전에 아들에게 우암의 성품을 말했다.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단점이라고 알려 준 것이다. 윤증이 스승과 반목하면서 율곡 이이가 젊은 시절 불가에 귀의한 것을 문제 삼자 노론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학문을 어지럽히는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그 후 '회니논쟁'은 노,소 당파의 사생결단식의 싸움으로 치닫게 되었다. 노소가 죽기 살기로 공격하는 명분은 있었으나 화합과 관용이 없었다. 부친의 생전 사실을 적은 글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윤증과 송시열은 학문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우암은 '성리학 외에는 다른 학문을 절대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반면, 윤증은 그와 반대 되는 양명학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윤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용후생의 실학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대권주자 1위로 치솟은 윤석열 검찰총장은 바로 윤증의 후손이다. 어떻게 보면 외곬과 뱃심, 원칙에 대한 단호함이 빼닮은 데가 있다. 흐트러진 공정의 가치와 법 확립을 갈망하는 국민들이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다만 앞으로 윤총장이 정치를 하게 되면 선조의 기개는 살리되, 때로는 타협하고 융통성 있는 역량도 길러야 한다는 점을 주문하고 싶다. 정치란 외곬과 원칙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 하지 않고 영의정에 까지 오른 인물이 바로 세조때 한명회였다. 조상의 벼슬 덕에 얻은 음직(陰職)은 태조의 개성 집이었던 경덕궁을 지키는 궁직(宮直)이었다. 나중에는 관직의 최고자리인 영의정에 올랐으며 두 임금의 장인이 되어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그러나 한명회는 평생 음직으로 출세했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으며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였다. 음직은 주변에서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장원급제로 벼슬길에 오른 이들은 음직을 받은 자들을 대우하지 않았다. 한명회도 개성에서는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당시 개성에 '송도계'(松都契)라는 서울출신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한명회도 친교를 위해 가입을 희망했으나 거절당했다. '경덕궁직도 벼슬이냐·'라며 면전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일화 가 전한다. 과거시험으로 일생을 보낸 선비가운데는 죽어도 음직은 나가지 않는 자존심파도 있었다. 당장 호구가 어려운 경우가 아니면 초야의 선비로 늙었다. 실학자 이익(星湖 李瀷)은 40대 후반에 감역이란 벼슬에 임명 됐으나 부임을 않고 책만을 읽었다. 당시 시정에 '대가(代加)'라는 풍속이 있었다. 음서로 관직에 임명된 젊은이들이 고관대작의 서녀를 첩으로 맞이하면 장인의 벼슬 가자((加資)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자(加資)를 물려받으면 더 많은 녹봉을 받고 사회적 지위도 달라졌던 것이다. 조선 선조 때 조원(趙瑗)은 과거에 오르기 전 종실(宗室) 가문 서녀인 옥봉을 첩으로 삼는다. 옥봉이 할아버지를 졸라 조원의 첩이되길 자청하자 받아들인 것이다. 옥봉은 비록 서녀였지만 글재주가 있어 당시 사류사회에서도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략결혼은 나중에 비극으로 끝났다. 조원이 과거에 오른 후에는 옥봉이 사대부 사이를 겁 없이 간여하며 기탄없이 시를 짓는 바람에 남편은 겁을 먹고 소박하고 말았다. 음직으로 벼슬에 나간 사람가운데 지사로 칭송을 받는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한말 홍범식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음직(蔭職)으로 금산군수(錦山郡守)까지 올랐는데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는 자결했다. 최근 5년간 '민주화운동 관련자' 98명이 의예과·치의예과를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현대판 음서제(蔭敍制)', '민주화 운동 특수계급'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최근 국회 교육위원회 야당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민주화운동 관련 전형 합격자는 연세대 30명, 고려대 3명, 아주대 3명, 전남대 21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민심은 싸늘하다. '민주화운동이 벼슬이고 계급이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들은 '부모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게 자녀의 대학 입시에서까지 중요한 스펙처럼 활용되어서야 되겠는가. 자녀들 혜택 주려고 민주화 운동한 것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왜 우리부모님은 데모를 안했느냐'는 젊은이들의 자조 섞인 한탄도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의료계의 진료거부 파동도 특정지역에 의대를 설립하고 일부 계층의 자녀들에 대한 입학혜택제도가 문제가 된 것이다. '아빠 찬스, 엄마찬스' 이런 말이 나올수록 우리 사회의 공정 가치는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 시대 어렵게 청년기를 보내는 젊은이들의 좌절감이 크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와 같이 언젠가는 음서처럼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 왕따 당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70년대 후반으로 기억된다. 청주시 청원구 영하리 옛 절터에서 발견 된 고려초 석조여래불좌상은 미소가 일품이었다. 불상이 찾아진 절터는 비하리에서 초정약수로 가는 중간 왼편 언덕이다. 처음에는 몸체만 있는 파불(破佛)로 발견되었으나 인근 무당이 장독대에 안치하고 있던 불두(佛頭)를 찾음으로써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불상은 지금은 작고하신 서원학회 고(故) 이원근회장(강릉대 교수)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찍은 흥덕사지를 찾는다고 청주시와 청원군 일대의 절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얻은 쾌거였다. 필자도 이 불상을 구조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는데 당시를 기억하면 지금도 짜릿하다. 현재 불상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불상의 생명은 '미소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시대가 올라갈수록 아름다운 상호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백제시대 불상이다. 백제 불상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를 전해 준 1천 5백년전 중국의 북위, 북제나 남조인 양(梁) 나라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북위시대 불상은 대부분 돌로 만든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조각 솜씨와 미소는 단연 최고다. 무려 4만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남조 양나라 수도 남경에서 찾아진 석제 불상의 미소도 그에 못지않다. 중국학자들은 불상 뒤에 광배가 있는 것을 배병식(背屛式)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새겨진 여러 구의 보살상을 보면 미소가 모두 아름답다. 백제는 양나라와 매우 가까웠다. 양나라 무제(武帝)와 백제 성왕(聖王)은 독실한 불성으로 얽힌 관계였다. 무제는 백제의 요청으로 와(瓦)박사를 비롯한 건축 장인과 지식인들을 보내 백제의 문화력 제고를 지원했다. 양나라가 있던 남경 사찰 유적에서 발견된 배병식 불상들은 여성적인 모양의 보살상이 많다. 손에는 동그란 모양의 보주(寶珠)를 가슴아래 위치에서 두 손으로 잡고 있다. 백제 성왕이 일본 긴메이 천왕(欽明)에게 불상과 경전을 보내면서 특별히 당부한 것은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상의 신비로운 효험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석가상을 보냈다고 되었는데 이때 금동보살상도 함께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부여 절터에서 발굴되어 일제강점기 일본에 건너갔던 금동보살입상을 소장자가 너무 높은 값을 달라고 하여 사들이지 못한 사실이 또 언론에 보도 됐다. 발굴 후 일본 책임자들이 몰래 빼돌린 것으로 따져보면 도난당한 유물이다. 본래 주인에게 장물 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달라는 것도 화가 나지만, 해외에서 유전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사들일 수 없는 당국의 경제적 취약도 문제가 있다. 이 불상은 그동안 '백제미소불상'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필자는 이 금동불상이 백제의 것이 아니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상호는 아름답지만 의문(衣紋), 몸의 뒤틀린 자세, 주조방식이 당나라 불교유물이 본격 유입 된 7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비슷한 양식의 금동보살상이 경북 선산에서 찾아진 경우도 있다. 백제 구토에서 출토 됐다고 무조건 '백제의 미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빼어난 상호를 지닌 청주 영하리 좌불상은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제작시기를 단대(斷代)할 때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여러 불상의 양식을 정밀하게 비교, 분석해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불상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소위 '백제 미소불상'에 대해 학계의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 역사에서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한 선조처럼 비난 받는 왕도 없을 것이다. 선조는 외침을 당하여 백성들을 지키지 못한 왕으로 기록 된다.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친 도순변사 신입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파천의 길을 떠났다. 선조가 궁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성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우리는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임진강 도강기록에 보이는 참상은 차마 읽기조차 민망하다. 누가 귀빈인지 누가 왕인지도 모르고 모두 살려고 앞을 다퉈 배를 타려고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한양을 접수하고 약탈을 시작했으며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했다. 민초들의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순박한 백성들은 우리 임금을 지키겠다며 격문을 돌리고 군사들을 모았다. 시골 선비, 평민, 양반집 가노(家奴)들이 의병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한번도 전쟁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중봉 조헌(重峯 趙憲)이 제일 먼저 기의(起義) 횃불을 들었다. 옥천 안내 밤티에 은거했던 중봉은 근왕을 위해 의병들을 규합했다. 의병들은 옥천 근교에서 공부하러 다닌 제자들이었다. 부친이 의병이 되면 큰 아들은 종사와 모친을 봉양 위해 빠진다. 둘째 아들부터 노복에 이르기 까지 이름을 올리고 무기를 들고 부친을 따랐다. 중봉 의병이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마침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이끄는 승병들이 합세한 때문이다. 의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볐으니 일본군도 성을 버리고 도주 했다. 그러나 이들 중봉 의병들은 금산 싸움에서 모두 전사한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는 적수가 안됐다. 그러나 7백명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거의(擧義) 동기가 됐다. 순국의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이 옥천, 보은, 영동 민초들이었다. 우리는 왜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외면하고 있을까. 충북 어디에도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순절비가 없다. 의병들은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히고 또 관군을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훗날 임진전쟁에 참가했던 한 일본군 장군은 조선전쟁에서 패퇴한 것은 의병들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지난 추석 연휴 때 '2020 대한민국 어게인'을 캐치프레이즈로 KBS 단독 콘서트에 출연한 가황 나훈아씨가 나라를 걱정하는 코멘트를 하여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그는 KBS가 거듭 날 것을 주문했는가 하면, 우리 역사에서 보면 왕이나 대통령 가운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이 없다고 했다. 그가 역사에서 예를 든 애국 민초들은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의사였다. 또 국민이 힘이 있으면 가식정치 즉 위정자(僞政者)가 나올 수 없다고도 했다. 코 끗이 찡했던 것은 코로나 19 고난 속에 밤낮으로 헌신한 의사, 간호사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호칭하며 고난을 이긴 저력으로 국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대한민국 공직자 하나가 북한군의 총을 맞고 사살되어 시신이 불태워 졌다. 군과 대통령은 그가 절재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파악하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지금 대통령이나 각부 장관, 집권당 정치인들 모두 국민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가 반문하고 싶다. 후일 역사에서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비겁한 대통령이나 정부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가황, 예인의 충정어린 쓴 소리가 무기력한 위정자들의 가슴을 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수 진성이 오래전에 부른 트롯 '보릿고개'가 요즈음 국민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중학 1년 가수 정동원이 부른 노래는 현제 1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가난의 아픔을 절규하듯 소년의 애잔한 가락에 원곡 가수 진성도 흐르는 눈물을 억제 못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보릿고개 시절, 엄마는 아이가 뛰는 것을 말린다. 배가 꺼져 다시 밥을 달라고 할까 봐 겁이 난 것이다. 왜 이 가요가 지금 국민들을 마음을 울리는 것일까. 얼마 전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린 형제가 라면을 끓이다 화재가 발생해 중태에 빠져 있다. 아빠 없이 어린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엄마는 생활비를 벌려고 자주 집을 비우고 장애가 있는 열 살 먹은 형이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런 어려운 형편 속에 사는 이들이 비단 소년가정뿐일까. 오늘도 다산 정약용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지금 나라 돌아가는 형편이 흡사 조선 후기 실정을 방불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백성들의 삶은 참담했다. 다산이 지방 관리로 부임하면서 적성(積城.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 있던 현)의 가난한 농가를 보고 적은 것이 있다. 태풍이 할퀴고 간 요즈음 수해지역의 모습이 연상된다. 시냇가 찌그러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누나/ 아궁이는 묵은 재에 눈이 덮여 차기만 하고/ 숭숭 뚫린 벽에서는 별빛이 비쳐드네/ 집안에 물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다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된다오. (봉지염찰도 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 積城村舍作) 다산은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피폐한 경기지방을 순시했다. 그때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삭녕군수 강모와 연천 전 현감 김모의 부정을 적발했다. 그런데 두 관리는 임금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강은 정조의 어머니 병환을 보살피는 태의(太醫)였고, 김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이장할 때 지사(地師)였다. 임금의 신임을 믿고 비리를 저질렀다. 다산의 고발이 있자 정조도 처음에는 처벌을 주저했다. 당시 영의정마저 다산에게 상소를 취하하라고 권유했다. 다산은 재차 상소를 올려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간청한다. '임금님께서 무엇 때문에 저를 어사로 보내셨습니까. 이들을 총애하고 비호함을 방자해 이와 같이 방자했습니다. 이미 탄로돼 어사의 보고서에 올랐는데도 끝내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장차 날개를 펴고 꼬리를 치며 양양해 다시는 자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형벌을 내리게 해, 민생을 소중히 여기소서… (하략)' 다산은 '나라의 주인은 백성들이며 부정과 비리는 척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의 극간을 받은 정조도 결국은 총애하는 관리들을 처벌한다. 장기간 코로나19로 과거 보릿고개 같은 생활고를 겪는 국민이 늘고 있다. 태풍 피해를 입은 수해지역주민의 경우 복구는 지연되고 실의에 빠져 있다고 한다. 복고적 진성의 가요가 다시 히트를 친다는 것은 국민의 삶이 그만큼 어려운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시기 집권 여당이 정권 창출에 공이 있다고 특정인의 반칙을 감싸고 비리를 옹호하면 민심이 폭발한다. 추법무장관의 아들 병가 특혜 시비에 청년들의 지지도가 무너지고 있다. 대통령이 말로만 병무비리 척결을 외치지 말고 다산의 추상같은 간언을 음미할 때가 아닌가 싶다.
'세한삼우(歲寒三友)'는 매화(梅), 소나무(松, 대나무(竹)를 지칭한 것이다. 찬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아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었다. 논어 자한(子罕) 편에도 '추운 겨울이 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게 시드는 것을 깨닫는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고 절의를 비유했다. 조선의 여류들도 세한삼우를 사랑했다. 부안명기 매창(梅窓)은 이름대로 매화를 가까이했으며, 옥천이 고향인 여류시인 옥봉(玉峯)은 대나무와 매화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옥봉은 잘생겼던 부군 조원(趙瑗)을 대나무에 비유했다. 자신은 한 떨기 작은 매화라고 했다. 작은 매화꽃 더욱 빛나고(小白梅逾耿) / 푸르른 대나무는 한창 곱구나(深靑竹更姸) / 난간에 기대어 홀연히 내려오지 못하니(憑欄未忽下 ) / 달 떠올라 둥글어 질 때까지 기다리노라(爲待月華圓) 부군과 더불어 누각에 올라 시가(詩歌)를 화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오늘만이라도 부군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문학소녀 옥봉. 동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애틋함을 더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부안 명기 매창의 문학에는 매화가 많이 등장한다. 불우한 생을 살다간 그녀의 시 가운데도 임을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한번 마음 준 방랑객 유희경(劉希慶)에게 절개를 지킨 매창의 일편단심 상사곡이다. 봄 바람 불고 비오는 밤(東風一夜雨) /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柳與梅爭春) / 이럴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對此最難堪) / 술잔 놓고 임 이별하던 아쉬움이네(樽前惜別人) 그림을 많이 남기지 않은 추사 김정희는 귀양지인 제주도에서 특별한 이유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이 그림 속에는 쓸쓸한 초가집 옆에 고목이 된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가 등장한다. 중국과 제주를 오가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보답의 의미로 그려 준 것이다. 아무리 제자라고해도 수 천리를 오가며 책 심부름을 하고 편지를 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추사는 이상적을 변하지 소나무, 세한 울타리로 화답한 것이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이 그림을 연경에 가지고 가 추사와 인연을 맺은 청나라 대학자와 명사 들의 휘호를 받았다. 20세의 청년 추사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청나라 지식인들은 앞을 다퉈 세한도에 소회를 적었다. 조선의 문사가 이처럼 청나라 학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사례가 없었다. 추사 세한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필자는 한국의 한 재력가가 매입하여 수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장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세한도는 현재 국보 제180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국민을 감동시킨 소식이 들려왔다. 세한도 소장자는 고서화 수장가로 알려진 손창근옹(91)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임시로 기탁했던 것을 아예 기증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지난 2018년에는 대를 이어 소장해온 컬렉션 304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수백억 가치가 되는 국보를 아낌없이 국가에 내 놓기란 어려운 일이다. 손옹의 자녀들도 기증에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코로나 19가 창궐하는 국가적 비상시국, 경제 불황, 철 지난 이념으로 국론이 분열된 시기에 모처럼 가슴에 와 닿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
조선 말엽 가혹한 세금 징수는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초였다. 세금을 제때 못낸 백성들은 관의 형벌이 두려워 전답이나 집을 팔았고 심지어는 자식들까지 노비로 주었다. 관아의 독촉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떠나거나 산속으로 숨는 백성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홍경래 난'이나 동학혁명 등은 국가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지속된 백성들의 저항으로 조선은 5백년 사직을 열강에 내 주는 가장 참담한 처지로 전락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국토의 끝 땅 강진에서 귀양을 살며 가렴주구를 개탄한다. '옛날에도 이른바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각박하지 않았으며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 마땅히 본받을 일이다. 어리석고 우둔한 수령들은 나라에 이바지하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마구잡이식으로 빼앗는다.' 다산은 또 '세금 징수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어루만지고 돌보는 것이다. 형벌은 착오 없이 내려야 하지만, 교화하는 것이다. 봄에 구휼하기를 자식처럼 하고, 가을에 거두기를 원수처럼 해야 한다. 위엄은 청렴에서 생기고, 정사는 부지런함에서 이루어진다.'고 목민관들을 훈계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올바른 관리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정조 때 소완정 이서구(素玩亭 李書九)는 시대의 양심 관료였다. 그는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기 전에 먼저 창고를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살렸다. 전라감사가 되어 백성들을 살필 기회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들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했다.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서구는 세도가들이 양전(量田. 논 밭을 측량하는 일)에 까지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쌍수를 들고 반대한다. '양전은 백성들을 구휼함이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빈궁한 백성이 아직 소생되지 않았는데 세금을 다시 매길 수 없다.' (순조실록 1820년 8월 2일) 이서구의 항변은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양전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세금이 무거우면 국가를 무너뜨린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재정파탄을 과중한 세금으로 메꾸려고 한데서 발단이 됐다. 거기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는 혁명에 기름을 붙는 격이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흉년이 거듭되어 국고가 텅 비게 되었다. 대폭 인상 된 세금을 부과하자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치솟았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했던 평민들은 결국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혁명이 성공한 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인가. 주택 보유자들에 대한 세금 폭탄으로 주말에는 종로, 을지로 강남 거리가 온통 시위 인파로 가득차고 있다. 집 두 채를 가지고 임대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시민은 1년 치 임대료를 다 모아도 보유세를 충당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대출마저 막혀 집을 팔아야 겨우 세금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주 문대통령의 지지도가 처음 40%대 이하로 추락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이후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4대강과 태양광을 둘러싼 피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폭우로 대들보가 무너진 집에서 형제들이 고칠 생각은 않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느라 삿대질 하는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라감사 이서구 같은 양심적 인물이 나와 부당한 정책에 대해선 쓴 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의 지탄을 받지 않고 나라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만학'이란 늦은 나이에도 공부한다는 뜻이다. 이는 조선 유학사회 선비들의 전통적인 학문 습관으로 일생 책을 벗 삼고 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겼다. 공자도 논어 첫 머리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독서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쳤다. 조선 중종 때 설옹 양연(雪翁 梁淵)은 젊은 시절에는 놀다가 40세에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했다. 당시 이 나이면 만학이었는데 그가 장인에게 문방사우를 보내달라고 한 시가 재미있다. '책상의 불빛은 어둡고 물빛은 깨끗하네. 관성(管城, 붓)은 내가 바라는 바요, 더불어 저선생(楮先生)을 기다리네' 조선 효종 때 증평출신으로 임금한테도 칭찬받았던 백곡 김득신(栢谷 金得臣). 회갑이 가까운 59세에 과거에 급제한 노력파다. 그가 죽을 때 까지 읽은 책은 기록적이다. 사기(史記) 백이전만 1억3천번이나 읽었다니 혀를 내두를 만하다. 백곡은 늦은 나이에도 책을 사랑하여 80세까지 살았다. 증평군은 백곡 문학관을 지어 불굴의 만학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조선 최고의 독서광'이란 별칭을 부여하고 있다. 한국 언론계의 거물이셨던 고(故) 홍종인 회장은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칼럼을 썼다. 주변의 지인들이게도 직접 편지를 써 보냈다. 역사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인은 청주 플라타나스 숲에 대한 추억이 있어 간혹 청주에 내려오곤 했다. 필자가 국장시절 쓴 칼럼을 읽고는 반드시 소감을 써 보내주었다. 80년대 중반 필자는 건축가 고 김수근 박사가 운영하는 '공간'이란 잡지에 약 3년간 '한국의 폐사'를 연재 중이었는데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홍회장은 당시에도 역사 고고학에 대한 책을 자주 읽는다고 들려주었다. 특히 한국의 구석기 문화에 대해선 평소의 지론을 펴기도 했다. 생전에 충북대 이융조박사가 발견하여 세계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충북의 여러 유적을 한번 봤으면 했는데 이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불교미술 최고 권위자였던 고 황수영박사도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특강을 나가고 학술지에 논문을 썼다. 황박사의 제자였던 정영호박사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한국문화사학회를 이끌고 대마도는 물론 전국의 유적을 조사하고 다녔다. 새로 찾아지는 불교 유물이 있으면 논문을 써 학계에 보고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주도(主都) 팔레르모에 사는 주세페 파테르노(96)씨가 최근 팔레르모대에서 역사학·철학 전공으로 최우등 학사 졸업장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역대로 가장 늦은 나이에 학사모를 쓴 사람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96세의 노인이 대학에 입학,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장수하고 싶으면 학교를 더 오래 다녀라'. 의학 전문가들은 오래 사는 요인으로 '교육'을 꼽는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제임스 스미스박사는 '더 많이 배울수록 미래를 계획하고, 건강을 해치는 쾌락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도 만학으로 제2모작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 '삶의 최고 보약은 바로 공부'라는 것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고대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 군이 가장 강했을까. 혹자는 고구려 군이었다고 말한다. 광개토대왕 때 기병 5만 대군으로 요동 대륙과 한반도를 파죽지세로 석권했다. 신라, 백제는 무릎을 꿇고 치욕적인 부용국이 됐다. 그러나 6세기 중반에 들어서 신라 군대는 갑자기 강성해 졌다. 신라군은 소백산 일대에서 철옹성을 쌓고 주둔했던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한강으로 진입하였으며, 백제의 중요한 거점마저 정복해 버린다. 자신에게 어여쁜 딸까지 시집을 보낸 장인 격인 성왕을 옥천에서 잡아 목을 베는 극단적인 사태마저 감수했던 것이다. 20세 안팎의 젊은 나이인 진흥왕은 전쟁터를 돌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신 정복지를 순수했다. 백제와 고구려 세력에 눌려 소백산 아래서 겨우 기지개를 켰던 신라가 왜 이처럼 강한 군대로 태어난 것일까. 진흥왕에게는 수 만명의 결사부대가 있었다. 전쟁에 나가면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 삼은 젊은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청소년 집단 화랑들이 나오기 전에도 신라군은 이런 결사정신으로 무장했다. 무사들은 전쟁에 나가 장렬하게 죽는 것을 생의 가장 큰 영예로 삼은 것이다. 화랑들은 세속오계의 하나인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제일 중요시 했다. 진평왕대 찬덕은 가잠성 성주로 성을 지키다 군사들과 함께 모두 전사한다. 그런데 찬덕의 아들 해론도 지금의 한강인 한산을 지키다 아버지처럼 전사했다. 사람들이 이들 부자의 죽음을 애도한 향가를 지었는데 바로 장한가(長恨歌)였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쟁은 675AD 매초성 전투였다.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왕도마다 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마저 지배하려 했다. 신라는 처절한 항쟁으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다. 당은 말갈 연합군을 앞세워 20만 대군으로 쳐내려 왔다. 신라군은 지금의 연천 매초성 계곡에서 대군을 막아섰다. 이곳을 잃으면 한강이 무너지게 되고 서라벌로 내려가는 것은 쉬운 죽 먹기였다. 신라군은 결사로 각오한 낭당(郎幢)을 앞세워 당나라군과 격전을 벌인다. 당나라 20만 연합군도 결사항전의 장벽을 허물지 못했다. 패전 당군은 그 이후 신라정복의 야욕을 접고 말았다. 중국 후세 사가들이 '가장 강한 군대가 신라군(조선군)이라'고 기록한 것은 이 전쟁의 참혹한 패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6.25 당시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장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임전무퇴의 각오로 싸워 북한군을 격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백장군의 결사의지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던 자유대한민국을 살린 것이다. 연천 매초성에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신라군의 감동어린 역사가 연상된다. 영웅 백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영면, 지난 15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우리 군 관계자들 보다 전직 미군 장성들이 앞을 다투어 고인의 위대한 군인정신을 추모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은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교재에도 등장한다. 백장군이 우리민족에게 총을 쐈다고 현충원 안장마저 반대하는 이들이 활보하는 세상이다.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누린 자유와 행복을 생각지 못하는 것 같다. 지난 주 백장군의 빈소가 마련되었던 광화문광장에는 빗속에도 수많은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는 유독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있어도 아직 우리 사회는 건강하다. 그리고 미래도 '자유한국'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있다.
삼국시대 불상의 상호는 시대가 올라 갈수록 아름답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두 점의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은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서산 운산면 백제 마애삼존불상도 최고의 미소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삼국시대 금동불이나 석불 혹은 마애불에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 할 수 있다. 경주 장창곡 석조삼존불상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본존인 의좌상은 미륵여래로 불린다. 장륙불을 닮은 진천 사자산 마애여래입상도 화랑처럼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미륵신앙은 4~6세기 중국 대륙에서 먼저 유행했다. 한나라 붕괴 이후 여러 나라로 갈라져 전쟁을 하던 남북조시기에 전성을 이룬 것이다. 2012년 중국 허베이성 업성시에서 무려 3천여점의 불상등 유물이 한 구덩이 안에서 찾아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반도의 미륵신앙과 관련한 매우 주목되는 불상이 있었다. 용화수로 만든 감실 안에 북제(北齊) 시기의 반가사유상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 15년(528AD)이었다. 이에 앞서 법흥왕은 남조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그 사실이 사신 기록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타난다. 당시 양나라는 백제와 끈끈한 관계여서 신라 사신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백제의 여러 부용국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 10년 양나라 무제는 사신과 유학 승 신라 각덕(覺德)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냈다. 진흥왕은 백관들을 데리고 흥륜사에 나가 사리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양나라는 이 해 멸망하고 말았다. 북쪽에서는 새로 북제(北齊)가 등장했다. 진흥왕은 더 이상 대륙과의 교류를 지연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때부터 군대를 이끌고 소백산을 넘어 충북 땅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고구려가 진주했던 적성(단양) 공략에 이어 달천을 통해 괴산, 음성을 장악하고 드디어 국원성(충주)을 점령한 것이었다. 낭성에서 악성 우륵을 만난 것도 이 시기다. 이때 진흥왕의 나이는 18세의 열혈 청년이었다. 중국으로 통하는 직로인 이천-당항포를 확보하여 한산(漢山. 지금의 아차산)에 주력부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당시 한강은 전장터가 돼 신라가 북제와 남제에 사신을 보낸 시기는 이로부터 10여년 후였다. 진흥왕은 과거 양나라에서 돌아 온 각덕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까. 서라벌을 양나라 황도를 닮은 불교정토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흥왕은 서라벌에 여러 개의 절을 건축하고 이어 대역사인 황룡사를 시작했다. 신라의 삼보(三寶)의 하나인 금동 장육상을 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위대한 왕이자 불법의 수호신인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자처했다. 화랑도를 미륵의 화신으로 삼아 이들을 민중의 영웅으로 끌어올렸다. 화랑들이 결국 삼국을 통일하고 민중의 고통인 전쟁을 종식시켰다. 충주는 진흥왕이 서라벌 다음의 제2수부로 경영했던 국원경(國原京) 땅이다. 가야 악성 우륵을 살게 하여 민족음악을 중흥시킨 예도(藝都)이기도 했다. 지난 주 충북문화재연구원에서는 도내의 4개 학술조사기관이 발굴한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필자는 삼국시대 신라 금동불상의 신례를 통해 북제와 진나라와의 교류로 나타난 복합적 양식에 관해 소견을 발표했다. 삼국시대 신라 금동불상의 미소는 특별하다. 앞으로도 충주박물관의 국립박물관 승격에 발맞추어 더 많은 삼국시대 불교유적, 유물이 찾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크다.
트롯열풍을 불러온 가수 임영웅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를 지지하는 팬 클럽에 참여하는 인원이 10만 명을 넘고 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임영웅 가수의 노래만 듣는다는 중년여성 팬도 있다. 임가수의 어떤 매력이 이처럼 많은 대한민국의 여심을 사로잡은 것인가. 임영웅은 모 방송이 트롯 경연으로 발굴한 신인가수였다. 오래 전 데뷔 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개런티로 살아 온 무명가수 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임영웅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편의점 알바로 일해야 했다. 임영웅은 어려운 처지에서 성장했지만 착한 심성으로 고난을 이겨왔다. 그리고 성공을 위한 확신과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홀로 된 엄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가진 착한 외아들이기도 했다. 방송 경연도중 엄마와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임영웅은 폭풍 눈물을 흘렸다. 임영웅은 트롯 하나만큼은 자신하는 전문가였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한 것도 그가 트롯 전문가로 성공한 힘이다. 트롯 경연 때 한 심사위원이 지적한 대로 어떤 노래 든 그가 부르면 임영웅의 노래로 탄생한다. 첫 소절이 나오는 순간 '역시 임영웅!' 하는 탄성이 나온다고 극찬했다. 한 원곡가수는 임영웅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임영웅은 바로 타인의 노래라도 애상이 깃든 소리로 다듬어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임영웅이 부르면 그 이튿날 포탈의 음원 차트는 1위를 기록했다. 임영웅은 성공신화를 이룩했다. 그의 성장 스토리는 많은 젊은이들의 성공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반듯하게 살면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등식을 입증해 준 것이다. 임영웅은 첫 광고 모델로 받은 수입을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전액 기증했다. 이에 화답하듯 10만명의 대 부대로 이루어진 팬 클럽 '영웅시대'가 코로나19로 어려운 우리 사회에 선행의 등불이 되고 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1억4541만 원을 기부한데 이어 1천620만 원을 포천시 장애인 가족지원센터와 포천시 교육재단 지원에 기탁했다. 또 광주 전남 팬들은 혈액 수급이 어려운 사정 등을 고려해 헌혈증 220여 장을 모아 백혈병 환우회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들 팬클럽의 선행이 행복바이러스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임영웅을 배출한 방송국의 목요일 방영되는 행복 콜센터는 많은 시청자들이 눈 빠지게 기다리는 인기프로가 되고 있다. 어린이부터 청년, 장년에 이르기 까지 목요일을 기다린다고 한다. 신청자와 통화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연들은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한 동안 TV에서 멀어졌던 흘러간 노래 트롯이 이렇게 국민들에게 최고인기를 끌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어려운 삶을 겪어오면서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었던 애한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인생의 역사이고 눈물이었으며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그렇다. 미스터 트롯을 이끌고 있는 7명의 가수들은 모두 무명의 아픔을 이기고 성공한 이들이다. 그러나 얼굴은 모두 선한 마음이 나타나 있다. 이들은 무명 시절부터 서로 돕고 이끌어 주었다고 한다. 옛 말에도 '마음이 착하면 귀하게 된다(心以善爲貴)'는 격언이 있다. 임가수와 팬클럽의 '선행 바이러스'가 한국사회를 가득 채웠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세상은 잔혹했다. 인간들은 다 적이고 늑대다' 우수가 넘치는 흑인영가(黑人靈歌 Negro Spirituals) 속에는 절망과 원한이 가득하다. '깊은 강(Deep river)'은 가장 많이 알려진 영가다. 검은 피부색의 유명 가수들이 불러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노래다. 깊은 강 내 집은 저 강 건너 / 깊은 강 주 나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 / 깊은 강 내 집은 저 강 건너 / 깊은 강 주 나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 복음의 잔치에 그대 가지 않으려오 / 언약의 땅 평화의 그곳 오 깊은 강.. 그들은 수 백년을 노예로 살면서도 모세가 가나안을 그리워했듯이 언약의 땅을 갈망했다. 깊은 강, 절망의 건너에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흑인 소년 쿤타킨테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유가 있는 곳은 바로 '고향'이었다. 쿤타킨테는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 주인공이다. 서아프리카 감비아 만딩카족 마을에서 납치되어 미국에 팔려 멸시를 받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소년은 그리운 고향을 잊지 않으며 수 없이 탈출을 시도 했지만 끝내 비겁하지 않은 용감한 전사로 남는다. 지금도 미국 사회 곳곳에는 흑인들에 대한 백인사회 편견과 멸시의 감정은 상존한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사라지지 않았다. 흑인들이 받았던 불평등을 말해 주는 재미난 일화가 하나 전한다. 1950년대 후반 미국 남부에 살던 어느 흑인이 투표장을 찾았다. 백인 관리들은 흑인에게 투표할만한 지적 능력이 있는지를 검사하겠다고 했다. 관리들은 흑인에게 미국의 역대 대통령을 질문했다. 그리고 역사 지식은 물론 심지어는 과학에 관련된 문제까지 물었다. 그런데 이 흑인은 모든 문제를 다 맞혔다. 백인들은 또 중국어 신문을 내밀면서 '이 신문을 읽을 수 있다면 투표권을 행사하게 해 주겠다'라고 했다. 흑인은 그 신문을 보더니 '내용은 모르겠지만 헤드라인은 읽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한자를 못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관리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헤드라인을 읽을 수 있다고·'라고 반문했다. 흑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신문을 읽었다. '여기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흑인이 있다.' 흑인 폭동은 지난 68년도에 이어 92년도에 가장 컸다. 68년 4월4일 멤피스에서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소요였다. 사망자가 72명이나 발생한 이 폭동에는 1만2천여명의 연방군이 투입되기도 했다. 지난 92년 폭동은 백인 경찰에게 쫓기던 흑인이 4명의 백인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도화선이 됐다. 이번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폭동은 백인경찰이 흑인의 목을 졸라 질식사시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시위 과정에서 1만 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번 사태로 여러 도시의 한국교민 상점이 습격당하거나 털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경찰과 흑인들 사이에 폭력을 자제하자며 허그 하는 풍경이 전해져 다행스럽긴 하다. 지금은 폭동 사태가 수그러졌고, 제도 개혁을 통해 인종 차별을 끝내자는 목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흑인 문제는 미국이 안고 있는 제일의 현안이다. 빈곤의 대물림, 실업, 마약 문제는 심각하다.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나 폭행사건이 일어나면 언제 든 화약고처럼 다시 폭발할 수 있다. '세상은 잔혹하고 인간들은 다 적이며 늑대'라는 노래가 슬럼가에서 안 불려 질 때는 언제인가. 진정 인종 차별이 없는 세상이 돼야 평화가 찾아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