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진달래부터 온다. 산야에 가면 수목은 황량하지만 반갑게 맞이하는 꽃이 진달래꽃이다. 진달래를 한자어로는 두견화라고 했다. 고대 중국 촉나라 임금 두우가 아내를 빼앗기고 원망하면서 죽어 두견새가 됐다. 두우가 한으로 피를 토하며 울었다고 하며 그 피가 꽃에 물들었다고 한다. 영월 깊은 산골에 유배된 노산군(단종)은 봄날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시로 읊었다. 지금도 청령포에는 유독 진달꽃이 만발한다. 달 밝은 밤 자규 새 슬피 우는데 / 슬픔을 머금고 난간에 기대었더라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로우니 / 네 소리 없다면 내 슬픔도 없으련만 / 세상 괴로운 사람들아, 내 말 들으시오/ 춘 삼월 자규 새 우는 명월루에는 오르지 마소(月白夜蜀魄啾 含愁精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 ) 김소월이 영변 약산에서 부른 진달래도 우수가 어린다. 님을 떠나보내며 가는 길에 진달래 꽃을 뿌린다고 했다. 피를 토하며 울었던 두우의 심상이 아닌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 영변에 약산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어린 시절 필자의 아버지는 산에 나무를 하고 내려오시면 한 아름 진달래 꽃 다발을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진달래꽃은 먹을 수 있는 꽃이었다. 어머니는 진달래꽃를 질박한 항아리에 담아 설탕을 부어 넣었다. 한 여름 묵혀두었다 숟갈로 퍼먹으면 그야말로 진달래 향이 감도는 꿀이다. 한 숟갈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추억이 그립다.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는 명주반열로 남녀 상열의 합환주를 가리킨다. 신방에서 신혼 남녀가 수줍게 얼굴을 돌리고 마시는 술이다. 당진 면천주는 한산 소곡주와 더불어 충남의 대표적 명주로 손꼽힌다. 남도 민속에는 시집 못가고 죽은 총각, 처녀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꽃이라고 했다. 처녀가 죽은 무덤에는 총각들이, 처녀 무덤에는 총각들이 진달래 꽃 무덤을 만들어 주는 기속이 있다. 이 것을 진달래 무덤, 두견총 이라고 불렀다. 꽃 무덤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죽은 처녀 귀신과 총각 귀신이 해꼬지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진달래 꽃 가운데 백합과 비슷한 하얀색의 두견화가 있다. 일명 선녀화라고 불리우는 꽃이다. 세종 때 '양화소록'의 저자 강희안은 백두견을 연분홍두견보다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백두견은 5품, 홍두견은 6품을 매긴 것이다. 충남의 알프스라고 하는 옛 백제 복국군의 마지막 저항지 칠갑산에는 백두견이 만발해 있다는 소식이다. 백합처럼 정결한 하얀 색이다. 나당연합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산화한 백제 전사들을 잊지 못해 피는 상사화인 것만 같다. 선녀화에는 백제 상흔의 슬픈 역사가 어려 애틋한 정이 간다. 단양 소백산 계곡마다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강선대에는 퇴계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어린 기생 두향의 비련이 어린다. 조금 있으면 단양팔경이 모두 철쭉 장관을 이룰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외출을 못했던 국민들이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이제 숨통이 트인 것 같다. 아름다운 충청의 산하를 찾아 마음껏 심호흡을 했으면 한다. 자연처럼 힘든 몸을 치유하는 대상은 없는 것 같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지금 충북에는 여야 후보군이 자천 타천 거론되고 있다. 이미 본격 활동을 하고 있는 나서는 이들도 있다. 당내 경선을 앞두고 여론몰이에 한창인 후보도 있다. 고향이 충북인 인사도 여러 곳에 공천장을 내고 탈락하자 충북지사라도 해볼까 노크하고 있는 인사도 있다. 정치경력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분들이다. 면면이 충북지사를 해도 충분한 역량도 엿 보인다. 그동안 중앙정치에서 큰 몫을 해온 이들도 있다. 필자는 40년 언론에 몸담은 탓에 충북지사를 역임한 분들을 많이 안다. 일부는 이미 고인이 됐거나 건강이 나빠 활동을 못하는 분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한분만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바로 '쌀방게'라는 별명을 받은 정종택 지사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 박대통령이 걸음걸이를 빗대어 붙인 별명이었다고 한다. 정지사를 소개하는 한 인터넷 자료에는 이렇게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기댈 언덕조차 없었던 정종택 전 장관. 고시의 꿈을 접고 내무부 임시직 말단에서 시작해 5부 장관과 3선 국회의원의 대망을 이룬 충북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지사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필자는 국립청주박물관 건립을 빼 놓을 수 없다. 청주약수터 주인이었던 고 곽응종옹의 부지 5만 평을 기증한다고 했을 때 당시 고 최순우 박물관장을 설득해 예산을 받은 이다. 백제 고도 공주에도 국립박물관이 없었는데 30만 규모의 도청 소재지가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만약 정지사가 당시 적극적으로 유치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청주국립박물관 건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게다. 정지사는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충북의 중원문화권 설정에도 첫 삽을 떴다. 30대 중반인 필자를 특별히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 유적 조사 때는 도청 지프를 언제고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어 충북 벽지에 있는 유적을 조사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이때 필자는 단양에서 영동에 이르기까지 숨겨진 유적 지표조사를 할 수 있었다. 쌓이고 쌓인 자료들이 후에 전국 7대 고도문화권역인 중원권설정의 기초자료가 됐다. 신라 제2수부였던 충주 일대의 많은 유적들이 햇빛을 찾았다. 여기에는 고인이 되셨던 고 정영호 박사(단국대 박물관장·한국교원대 부총장), 작고하신 고 이원근 박사(강릉대 교수·고대 성지 연구), 이융조 박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사장), 장준식 박사(국원문화재연구원이사장) 그리고 충북도 많은 학자, 문화재 담당 공무원들의 노고가 있었다. 충북도의 문화재 행정은 타도의 추종을 불허한다. 필자는 지금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의 유적을 답사하고 있으나 충북도의 문화재 행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기초를 만들어 놓으신 분이 바로 정종택 지사다. 새로 지사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우선 충북문화재에 대한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문화를 모르면 충북지사로 자격이 없다. 도민의 오랜 숙원은 바로 국악의 성지 충주와 난계의 고향 영동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다. 새 지사는 1천500년 우륵의 가야금 향기가 어린 중원경 충주, 아악의 선율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영동을 세계 유적으로 만들 자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열정을 가진 이가 나선다면 그는 충북지사로 자격이 있다. 선배 정지사의 문화에 대한 열정과 고향사랑 의지를 배워야 한다.
윤석열 20대 대통령당선자의 행보가 시작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기 구성되고 본격적인 새 정부 출범 준비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윤 당선자는 첫 인사로 윤핵관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장제원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비서실장을 당선자 마음대로 쓸 수는 있다. 또 새 정부를 출범시키는데 공헌을 한 장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데 대한 이론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실장은 취임 초부터 어떤 인상으로 비쳐졌는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친다'는 언론의 비판을 받고 말았다. 장의원은 국회에서 국민의 힘 의원가운데 제일 강성파로 알려지고 있다. 국정감사 현장이나 인사 청문회 때 야당을 대표하여 사이다 발언을 많이 하여 인기도 높다. 그러나 아들문제로 한때는 당선자 측근에서 멀어지는가 했더니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와의 통합 때 한몫을 하여 당선자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장실장은 이번 선거 기간 중 선거 막바지 부산 유세에서 특유의 웅변조 연설로 당선자를 감동시켰다. 당선자는 장의원에게 제일먼저 손을 내밀었다. 당선자가 측근중의 측근인 비서실장에 임명한 첫 보은 인사다. 윤당선자는 너무 조급하게 장실장을 선택했다. 그동안 당 조직을 위해 헌신한 당대표 등 주요 인사들과 협의해 공통된 합의가 이뤄졌어야했다. 장실장을 윤핵관으로 지목, 제일 껄끄럽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준석 대표다. 왜 이 대표는 윤핵관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있을까. 청년 이대표의 심중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이 당선자 측근에 있으면서 강성기류로 흐를까 우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당의 화합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재단한 때문도 있을 게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매우 어려운 자리다. 비서실장은 대통령 뒤에서 그림자처럼 지내야 한다. 누가 비서실장인지 모를 정도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과거 박근혜정부 때 비서실장을 지낸 이원종 실장(전 충북지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평소 겸손한 이 실장은 청와대는 물론 행정부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도승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임금이 가장 총애하는 엘리트가운데서 임명했다. 장원급제를 하지 않으면 도승지로 발탁되지 못했으며 이들은 장차 조정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도승지들은 항상 튀는 것을 경계했다. 혹여 자신들의 행세가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칠 까 자중한 것이다. 궐 안에서 말조심은 물론 평소 행동이 오만으로 비쳐질까 주의했다. 옛 부터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초기 국민들로부터 80%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캠코더' '내로남불' 인사로 점차 신망을 잃었다. 언론의 질책이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일방통행 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누적된 인사 참패와 실정이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로 나타난 것이다. 국민들은 정권교체를 힘겹게 이룬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부터 잘 꾸려야 한다. 측근들이 자신들과 인과관계가 있는 자파인사 들만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을 도약 시킬 수 있는 훌륭한 전문 인재들을 찾아야 한다. 거대 야당과도 협치의 폭을 넓혀 새로운 진용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결정하고 결단할 책임은 모두 당선자에게 있다.
세계의 이목은 지금 러시아 침공으로 나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우크라이나에 쏠려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피신을 거부하고 끝까지 러시아에 항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교민들도 조국의 전쟁을 방관하지 않고 속속 귀국한다고 한다. 러시아군은 수도에 포격을 가해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곧 수도에 진입할 것이라고 하여 시민들은 화염병을 만들어 저항 할 것이라는 뉴스도 들린다. 시민들은 수도를 끝까지 사수할 결의를 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나라는 아니다. 이 나라는 미녀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 가사에 미녀를 언급한 부분이 있다. 'the Ukraine girls really knock me out(우크라이나 소녀들은 정말 나를 기절시킨다)…….' 이 나라를 다녀 온 여행객들 사이에 '한국의 톱스타 김태희도 이 곳에 가면 밭을 갈아야 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우크라이나 미녀들은 현재 한국 연예계에도 많이 진출, 활동하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5천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스키타이, 사르미티아 인들이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기원후 첫 1천 년 동안은 고트, 훈, 불가르, 아바르, 하자르족 등이 영토를 지배해 왔다. 그 후 남부 크림에는 땅이 기름져 그리스, 로마인들 까지 이주해 와 살았다. 중세에는 아르메니아, 슬로박, 제노아, 투르크인들도 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민족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옛날에도 외세의 침략에는 적극 대항할 정도로 민족성이 매우 강하다. 13세기 징기스칸의 몽골대병이 침공하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쉽게 항복 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1223년부터 3차례에 걸쳐 침입했다. 그러다가 17년 후인 1240AD에는 견디지 못하고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몽골침공에 강화도로 피신해 30년을 저항한 우리 고려 역사와 비슷하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무력 저항은 당나라가 통일신라 직후 한반도를 강점하려 하자 끝까지 투쟁한 대당전쟁(對唐戰爭)을 연상시킨다. 675AD 당은 문무왕을 잡아 압송하려고 평양에서 20만 대군을 집결시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신라는 9군을 결집시켜 매초성(연천군) 인근에 진을 치고 당군을 저지했다. 수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신라군은 특유의 전술과 임전무퇴의 결의로 기병위주의 당나라 연합대군을 궤멸시켰다. 삼국사기 기록만 봐도 당나라 연합군은 대패해 살아 돌아간 군사들이 얼마 안 됐다. 이 전쟁은 사실 세계전사에 남을 만한 승전이었다. 매초성 패전이후 당나라는 신라 정복에 대한 야욕을 완전히 접었으며 평양성에 두었던 도호부를 요녕성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푸틴이 겁만 줘도 금방 무너질 것 같았던 우크라이나.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얕잡아 봤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비장한 결의로 저항을 독려하고 있다. 푸틴의 고민도 크겠지만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지탄과 비난을 받으면 입지가 좁아진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어려움을 야당후보의 짧은 정치경력에 빗대 희화한 여당 일각 인사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세계의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으며 비난 받는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우리도 강해야 주변 큰 나라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는 철칙을 새겨야 한다.
이번 대선은 총체적 부실로 비판 받고 있다. 최근 한 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얼굴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엄청난 부정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후보, 세련되지 못한 처신으로 좌충우돌하는 후보, 여러 번 선거를 치렀어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후보, 국가 예산을 조자룡이 헌 칼 쓰듯 국민들에게 퍼 주겠다는 후보, 재미있기는 역대 어느 대선에 비해 특별한지도 모른다. 여야 후보 진영의 치졸한 공방전은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약점을 하나라도 잡으면 여야 선대 본부가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는다. 일부 언론이 부추기고 침소봉대하여 공격하고 있다. 언론마저 진영논리에 빠져 올바른 소리를 못 내고 있다. 후보들의 식견이나 사생활을 검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선거일을 한 달 남짓 남기고는 그 양상이 저질로 치닫고 있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네거티브 양상이 심하다. 최근에는 때 아닌 저주로 후보를 공격하는 일까지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여당의 정신없는 사람이 야당후보를 저주하기 위해 인형에다 바늘로 찌르는 퍼포먼스를 한 사진을 올렸다 내렸다고 한다. 수백 년 전 조선 장희빈 시대로 회귀한 웃지 못 할 일이다. 장희빈은 중전인 인현왕후를 일찍 죽으라고 온갖 저주 퍼포먼스를 벌이다 나중에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 옛날 같으면 임금 후보가 될 대군을 저주했다면 역적으로 몰려 참수형에 처해 질 사안이다. 후보들에 대한 실망이 어느 역대 선거 때보다 크다. 이 나라에 이처럼 인재가 없는 것일까. 있어도 찾지 못하는 것일까. 19대 대선부터 지난 5년 동안 착실히 준비해 온 여당 후보는 막판 턱걸이로 아슬아슬하게 선출됐다. 현 정부의 검찰 총장으로서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대다 미운 오리새끼가 된 야 후보는 공정과 가치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등 떠 밀려온 격이다. 다른 야 인사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식견이 있어도 국민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여당 후보는 대장동 비리의 몸통으로 의혹을 받고 있어 진퇴양난에 처한 듯하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다. 한동안 후보 교체설 까지 계속 등장했다. 여당 후보는 민심이 냉담하지 온갖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이에 뒤쳐질라 야당 후보도 천문학적 예산이 수반 되는 공약으로 맞대응 하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일부는 헛공약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공약(空約)이 될지라도 우선은 상대후보에 지지 않으려는 생각들이다.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인 전라남도 지역에서 민심의 동요가 감지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을 탈당하여 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엑소더스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동서 심화의 지역대결구도가 깨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여당으로서는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의 대선 풍속도는 미래를 짊어질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아니다. 약점 들추기 대회이자, 상대 흠집 내기, 온갖 저주와 악담이 횡행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서로 승복하기 어렵게 됐다. 세계7위의 경제대국이자 BTS로 열광하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대선을 최악으로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 공정과 정의를 잃고 자파의 이익에만 몰두해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과오도 그중 하나다. 민족이 나아가야 할 중대 기로에서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 희곡 '햄릿(Hamlet)'의 독백이 오늘 따라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다.
지난 1971년 우연히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공주 무령왕릉. 1천500년 잠자고 있던 백제의 역사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벽돌로 쌓은 이 왕릉에서는 수많은 금빛 찬란한 백제시기 유물이 쏟아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라고 확인 된 것은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무덤에서는 중국 남북조 시기 청자 등이 출토돼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임진년작(士壬辰年作)' 등 글씨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됐는데 학자들은 축조시기를 무령왕 12년인 기원후 512년으로 추측했다. 이 해로 축조시기를 잡는다면 왕이 세상을 떠나기 전 11년 전 일이다. 무령왕은 미리 자신의 무덤을 호화롭게 만들어 놓았던 것일까. 아름다운 연화문을 소재로 한 벽돌은 공주. 부여시기 절터나 왕궁지등에서 출토된 와당을 닮았다. 학자들은 연화문의 형태를 보아 백제와 유대가 깊었던 양(梁)나라 양식을 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제의 전형적인 와당의 효시는 공주 왕도시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고운 태토로 흡사 빅스킷 같이 기와를 구어 냈다. 만져보면 감촉이 부드럽다. 모래가 많이 섞인 신라기와나 고구려기와보다 감촉이 좋다. 공주시내에 있던 대통사지나 인근의 절터 혹은 이른 시기 부여 인근의 절터에서 찾아지는 와당들이 그렇다. 와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백제 와당을 제일로 친다. 고구려의 강인한 사람의 얼굴 모양이나 용면(龍面, 혹은 鬼面)에 비해 나약한 것 같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특징을 지녔다. 백제인들의 심성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공주천도기 와당은 백제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한 남조 양(梁)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양나라의 수도는 지금의 남경(南京)으로 옛 지명은 건업(建業 혹은 建康)이다.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리었던 무제(武帝)는 공주 대통사를 지을 때도 기와박사와 건축 장인들을 보내 백제 건축기술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양나라의 와박사와 모시박사의 도래를 기록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조(기원후 541)이다. 무령왕대 보다 더 많은 기술이 새 왕도 부여로 이전되게 된 것이다. 백제인들은 양나라 기술을 받아 더 좋은 제품을 완성하고 양산했다. 그리고 이 기술을 일본에 전수해 아스카 문화를 이루게 했다. 양나라는 불행하게도 일찍 망했으며 불교에 깊이 빠졌던 무제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나라가 망한 후 이를 모르고 찾아온 백제 사신들이 잿더미가 된 수도 건업의 비극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무제와 가장 친밀하게 지낸 성왕도 삼년산성에서 출진한 신라군 고간 도도에게 참수당하는 비운을 당하게 된다. 최근 무령왕릉에 있는 벽돌에서 역사적 기록을 입증하는 명문이 확인돼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무덤 입구를 폐쇄하는데 사용한 벽돌에서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새롭게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인이다'로 해석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입증하는 중요한 발견이며, 고대 백제와 교류했던 건업 와장들의 한반도 진출을 알려주는 사료라서 감흥이 더하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앞으로 50여 일 남았다. 여야의 치고받는 양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양당 선대본부는 상대 후보의 비리만을 캐는 듯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올바른 인물을 검증해 차기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부인 선거가 된 듯하다. 후보에게 하자를 찾지 못하니 흠결이 많은 듯한 부인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정식 언론인도 아닌 한 유튜버가 야당후보 부인의 통화녹음을 공개한 공중파 방송의 처사는 앞으로 시비 쟁점이 될 것이다. 정치 경력이 많지 않은 부인들은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유튜버들에게 호의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소가지고 있는 속마음과 행태를 솔직하게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신뢰를 생명으로 해야 할 공중파 방송이 여당 후보 편들기 위한 음모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없다. 언론의 윤리강령을 위반했으며 금도를 넘었다. 이런 일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이 공중파 방송을 사유화하듯 장악한 것인가. 이번 사건은 앞으로 한국 방송의 암울한 지평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우려스럽다. 앞으로도 이런 방송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지도 모른다, 자사 노조에서만 이를 항변했지, 다른 언론사들은 구경만 하고 침묵으로 지켜봤다. 대박이다, 시청률이 얼마나 오를까를 은근히 기대했는가 하면 어떤 드라마가 나올지 흥미를 가지고 관전한 모양새다. 정치권력과 밀착한 정의롭지 못한 언론의 행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일깨워준 사건이다. 그래도 언론인의 윤리를 지키려고 애쓴 동료 언론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오늘날처럼 언론이 금도를 잃은 시대를 필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군부 독재시대에도 언론은 윤리강령을 지키려 했으며 자정을 위해 노력했다. 야당도 여당 후보의 막말 녹음을 공개하라는 항변이 잇따르고 있다. 공정한 방송을 지향한다면 이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지금 대통령 선거는 사상 최악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올바른 정책을 견주고 토론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잘못, 흠집 캐기 식 경쟁이다. 아님 말고 식 저질의 폭로전도 연일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후퇴하고 있다. 정치는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행복과 미래를 위해 봉사는 하는 직업이 정치인이다. 바로 '위민(爲民)'이 정치인의 임무이자 존재이유다. 지금 대선 현장에서 여당은 '당선 안 되면 모두 죽는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일각에서 부정선거를 우려하는 국민들이 많다. 미래로 가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 반민주적 행위가 자행된다면 국민저항을 받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야한다. 선택은 신성한 주권을 가진 국민들의 몫이다. 그리고 선거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대통령 선거는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을 선출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영부인을 선발하는 대회도 아니다. 미래를 맡겨도 될 신뢰할만한 지도자를 가리는 축제여야 한다. 여야 후보가 손잡고 페어플레이를 약속해야 한다. 세계 7위 선진국다운 정치문화를 보여라.
옛날 첩에서 낳은 자식들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면전에서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부모 또한 자식으로 대접하지 못했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서자출신인 실제 친구 유희경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고 한다. 천재 이단아 허균은 이런 제도에 대한 저항을 하다 미움을 받고 끝내는 저자거리에 참수됐다. 유희경은 당대 천재 시인으로 부안기 매창의 연인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시는 지금도 현대인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유희경은 서울에서, 연인 매창은 부안에서 인편에 시를 주고받았다. 오지 않는 연인을 매양 기다리는 매창의 한과 슬픔이 묻어있는 명작이다. 아들이 없는 재상들은 대를 끊길 것을 염려하여 첩을 들여서라도 아기를 낳았다. 종손은 아우의 아들을 입적시켜 양자를 삼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월성위(月城尉.영조의 사위) 가문의 종손이 됐다. 조선시대 한 대감이 아들이 없자 80세에 노비를 첩으로 삼아 득남했다. 고을의 여러 유지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앞을 다퉈 찾아오며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시를 헌정 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대가 끊어질 위기에서 소망을 이뤘으니 첩의 자식일지라도 매우 기뻤던 모양이다. 아들을 바라는 기자(祈子) 풍속은 선사시대부터 있어 왔다. 7000년전 중국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남자 심벌 모양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여인들이 목에 걸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자풍속도 뿌리가 깊다. 선사시대 바위에 구멍(穴)을 만들어 둥글게 가는 풍속도 다산과 기자신앙의 양태다. 남근석을 숭배하고 선돌에 새끼를 둘러 치성하기도 했다. 근세까지도 새댁들이 특정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은밀한 장소에 숨겨 두기도 했다. 부적을 베개 속에 두기도 하고, 도끼를 만들어 몸에 지녔다고 한다. 또한 돌부처의 코를 갈아 먹는 기속(奇俗)도 있었다. 절터를 답사하다 보면 코가 많이 훼손 된 부처들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수난을 당한 것이다. 아들이 귀한 집 할머니는 매일 밤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 놓고 삼신할미에게 점지를 빈다. 지금도 이 같은 풍속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집착은 나이든 할머니들에게서 더욱 간절하다. 요즈음 세태는 '아들을 낳으면 기차여행을 하고,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탄다'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아들을 낳으면 며느리와 사돈댁에 빼앗긴다는 유행어도 있다. 자녀들이 혼기를 훨씬 넘었어도 결혼하지 않는 것을 고민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얼마 전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아들의 도박과 관련 '대통령 아들은 사실상 남'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국민들에게 장성한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을 사과하면 될 것을 아들은 남이라고 하며 비난 화살을 피하려 한 것이다. 자식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도 하는 한국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 답변은 아닌 것 같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 아닌가. 30을 넘은 미혼의 나이는 보호해야 할 피붙이다. 비뚤어질 때 부모에게 무한 책임도 따른다. 문제를 일으킨 아들이 선거에 영향을 준다고 해 내 자식이 아니라는 논리를 편다는 것은 자기만의 합리화이며 위선이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게 한 조선시대 서자 폐속(弊俗)이 생각나 적어본 것이다.
조선시대 명인들이 외가에서 많이 출생한 것은 당시 사녀가 임신하면 일정기간 친정으로 돌려보냈던 습속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임신으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 친 어머니의 상관을 받도록 배려한 것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파주가 고향이면서 모친의 친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도 회덕이 고향이면서 외가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청주 낭성이 고향이었으나 대전 회덕에서 태어났다. 지자체 들이 위인 명인들의 고향을 아전인수 격으로 주장한다. 심하게 다투는 진풍경도 연출한다. 강릉 오죽헌엘 가면 관광객들에게 율곡이 강릉 출신임을 각인 시키고 있다. 파주시도 현창 사업을 하느라 율곡이름을 딴 습지공원도 만들고 야단법석이다. 우암의 경우도 충북과 대전이 서로 자기네 지역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류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보다는 처향을 선택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부인이 편하기 때문이다. 조선 명종 대 학자 대곡 성운(大谷 成運)은 낙향하여 부인 김씨의 고향인 보은 종곡에서 숨어 살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대곡이 은거한 종곡은 속리산이 가까운 곳으로 처향을 떠나지 않은 것은 바로 산세의 아름다움이다. 우거진 나무 둘러싸니 한낮에도 어둑하고 / 조용한 가운데 물소리와 새소리가 서로 다투네 / 길이 막혀 올 사람 없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 어여쁜 산 구름이 길 가는 나들목을 가로막았네 대곡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사암(斯庵)'이라고 지었다. 처가에서 모두 학당을 지어주고 공부에만 전념토록 했다. 금슬이 좋았던 부인 김씨의 내조가 없었으면 이루어 질수 없는 일이었다. 존경 받은 학자가 시골로 낙향을 하였으나 대곡에는 당대 석학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학자로 숭앙받는 남명 조식(曺植)은 지리산에서 일주일을 걸어 종곡에 왔으며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개성에서 수 십일 걸어 종곡에 왔다. 여름 휴가철에는 많은 조정 대신들이 성운에게 달려가 조정이 텅 비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황진이를 사랑하여 무덤에 잔을 부운 풍류 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는 달랑 거문고 하나만을 어깨에 메고 찾아와 대곡의 제자가 되었다. 대곡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고 이준경(李浚慶. 당시 영의정)은 '별은 종곡에 떨어졌다'고 탄식했다. 조선 유학사 산림학맥을 이룬 종곡,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기념비라고 하나 세울 만한데 이런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국민의 힘 윤석렬 대선 후보가 지난 주 외가인 강원도를 방문했다. 많은 인파가 윤후보를 환영했으며 시장 건어물 가게 앞에서는 구순이 넘은 이모할머니와 재회하는 모습도 보였다. 윤후보는 '강릉은 제가 어릴 적 방학 때마다 와서 지낸 곳이고 가장 추억, 애정이 깃든 곳'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고향 외가는 누구에게나 추억이고 그리운 곳. 모처럼 활짝 웃는 윤후보의 얼굴에서 정치를 잠시 잊은 듯한 동심이 엿보인다.
우리 충청을 '선비(士)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양반의 고장이라는 별칭보다는 이 이름이 더 호감이 간다. 역사상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선비'의 정의는 무엇이며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까. 유가에서는 '모름지기 선비는 학문에 정진하고 의리(義理)를 실천하며 표리가 부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의리'란 사전적 용어는 바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다. 선비(士)가 지향해야 할 가장 큰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공자는 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했다. 자장(子張)도 '선비는 의를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생명까지 바쳐야 한다.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 한다'고 가르쳤다. 거유이자 대정치가였던 송시열은 한 때 실각해 괴산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여기서 노학자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반동인 대명의리(對明義理)를 선언한다. 명나라는 망했지만 조선은 임진전쟁 때 나라를 구해 준 은혜를 버리지 않는다는 의리론의 표방이었다. 청나라의 정치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내면으로는 야만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저항이기도 했다. 자칫 청나라에 끌려가 죽을지도 모르는 반청(反淸)의 기치였다. 유가에서 '예(禮)'는 '의리'와 더불어 선비들이 지켜야 할 덕목의 하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예학을 실천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분이다. 한 때 단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청렴과 고매한 인격으로 백성들에게 선망이 높았다. 퇴계는 9개월 남짓 단양군수로 재직하다 고향 안동으로 은퇴했다. 자신의 친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한 고을에 형제가 직책을 맡으면 안 된다고 사직소를 올린 것이다. 선조가 굳이 말려도 퇴계는 황소고집으로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대부로서 스스로 정실을 경계한 것이다. 퇴계의 선비관은 대쪽 같은 것이었다. '세력과 지위에 굴하지 않는 존재'를 강조했다.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라고 대응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사류이며 공인이다. 최고의 학벌, 지성인들이 집합한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진정한 선비정신을 찾을 수 있을까. 한창 열이 달아오르는 대선 현장을 보자. 여야 간 비난과 성토만 있지 진정한 선비정신이 실종됐다. 여야 양편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이합집산 하고 있어도 생산 되는 것은 험담, 과거 행적 들추기다. 어떻게든 표를 얻고 집권하면 된다는 식이다. 표리부동하고 주장을 뒤집기도 한다. 이런 모순 된 인격으로 국민 지지를 얻겠다는 발생이 한심하다. 이는 정치인의 덕목을 외면한 것이며 예의도 아니다.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염증이나 혐오로 각인될 수 있다.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의연한 선비정신 일게다. 우암의 대쪽 같은 정신, 퇴계의 욕심 없는 공인정신을 지녀야 한다.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고 때로는 의(義)를 위해서는 희생 할 수 있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선 후보부터 선비정신을 배워야 한다.
조선 태종 때 춘추관 사관(史官) 중에 민인생(閔麟生)이란 사람이 있었다. 태종이 편전에서 공신들과 비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고 붓을 들고 들어와 구석에 앉았다. 임금이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라고 했다. 그때 민인생은 '편전이라 해도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경연이 열리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제대로 기록한단 말입니까' 태종은 '편전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다.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다. 그리고 사필은 곧게 써야 하는 것인데 비록 편전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이때 민인생이 결연하게 한마디 한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민인생은 당시 정5품의 벼슬이었던 것 같다. 임금 앞에 감히 이런 당돌한 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목이 잘릴지언정 올바르게 역사를 기록해야한다는 대쪽 같았던 춘추정신의 발로였던 것이었다. 바로 사관의식(史官意識)이다. '춘추'는 공자가 기록한 노나라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 이 역사서는 242년간의 기록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대 말기였다. 공자는 이 역사서를 쓰며 우리에게 위대한 역사 기록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즉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노나라 역사를 기년체로 간결하게 적고, 선악을 논하며 대의명분을 밝혔다. 후세 존경받는 치자(治者)의 길을 가르쳐 국가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했으며 판단은 후세에 맡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은 공자의 춘추필법 정신을 철저하게 따르려 했다. 즉 '기술은 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그가 지은 연려실기술은 이런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기사의 끝에는 근거 사료나 출전(出典)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 되어 여야 후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포탈의 인기 검색어 순위도 대통령 후보들의 언행에 맞춰지고 있다. 홍수처럼 쏟아내는 후보들의 정책이나 말을 따라가는 포털 화면도 이들의 기사만 도배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이나 포털의 행태를 보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 후보의 말이나 합리화를 위해 평형감각을 잃고 있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경우도 있고, 세상의 뜬소문을 침소봉대하여 무책임하게 기사화한다. '춘추필법정신'을 살려 사실을 기록하는 언론인이 얼마나 될까.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언론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언론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자만 있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자가 없다면 멸망이 임박한 것이다'. (성호사설 직언극간) 악을 옹호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야유구용(阿諛苟容 : 힘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구차하게 아부하다) 하는 언론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명저 '동호문답(東湖問答)'에 요즈음 음미해 볼 문장이 있다. '안민(安民)은 임금이나 사대부들이 정명(正名)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정명'이란 무슨 뜻일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를 뜻한다. 지도자들이 제 몫을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며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특별히 이 저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율곡이 직접 육필로 쓴 것으로 전해지는 진적(眞籍)을 친견하고 논문을 쓰고 부터다. 임진전쟁으로 문적들이 모두 소실된 탓에 율곡의 유묵은 전해지는 것이 적다. 이 책은 율곡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끝낸 후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아홉 번이나 각종 과거시험에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별명이 붙었던 천재 율곡은 34세(선조 2년. 1569AD) 늦은 나이에 사가독서를 했다. '동호문답'은 손님과 주인이 문답하는 형식을 빌려 쓴 글로 율곡의 정치사상과 식견이 가득하게 담겨 있다. 논군도(論君道)를 보자. 임금에게 냉철한 통치 철학을 주문한다. 임금은 간신과 충신을 가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강조한 것은 바로 군주의 언로(言路) 수용이다. 현명한 군주라면 누구의 말을 막론하고 좋은 의견은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은 사가독서를 한 후 1571년(선조 4)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외직인 청주목사로 부임했다. 임금에게 저술을 통해 쓴 소리를 한 것이 괘씸죄가 된 것은 아닌지. 그러나 율곡은 불후의 업적인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규범을 삼게 했다. 서원이란 청주의 옛 지명으로 신라 서원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곡은 서원향약에서 선행과 악행을 구분했다. 염치와 지조를 잘 지키는 것,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 조세를 잘 바치는 것, 남과 상대할 때 신의가 있는 것, 남을 선으로 인도하는 것, 남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 남의 환난을 구제해 주는 것, 남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등을 선행이라고 정의했다. 반면에 악행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아내를 박대하는 것, 상을 당해 슬퍼하지 않는 것,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는 것, 젊은이가 어른을 깔보는 것, 술에 빠지거나 노름을 즐기는 것,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깔보는 것, 말을 만들고 무고하거나 헐뜯는 것, 조세를 잘 내지 않는 것,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것 등이라고 했다. 대선경쟁 현장에서 여야 후보들은 서로가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대 대선 가운데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가장 높다. 경선 과정에서 정책 대결보다는 상대 흠집 내기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율곡의 지적대로 법을 지키지 않으며 편파와 불화, 무고나 헐뜯는 것은 악행의 하나이다. 귀를 활짝 열어놓고 국민들의 의견을 듣는 후보는 누구일까. 선행을 실천 할 수 있는 지도력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갈기갈기 찢긴 대한민국 민심. '안민(安民)은 정명(正名)에서 비롯 된다'는 율곡의 고언을 실천하는 올바른 후보가 나와야 한다.
요즈음처럼 화가 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분노는 아마 많은 국민들이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 나라에 정치가 있는가. 사법정의가 있는가. 또 미래는 있는가. 성남시 대장동 사건을 주목하면서 많은 국민들은 허탈과 좌절에 빠져 있다. 한통속 같은 검찰 수사를 믿을 국민이 어디 있는가. 검찰의 최고 수장이 성남시 고문 변호사 경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벌써부터 봐주기 수사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전, 현직 법조인들이 직, 간접으로 간여 돼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이 선출한 지방의회마저 검은 커넥션 의혹을 받고 있다. 이들마저 대장동개발 헐값으로 수용당한 원주민들의 눈물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 회계사의 녹취록에 드러난 검은 돈은 천문학적 숫자다. 수천억이나 되는 이익배분을 놓고 서로 다투며 300억, 700억이란 숫자가 드러나고 있다. 부정부패의 거대한 카르텔의 정점은 과연 어느 선까지인가. 필자가 현역에 있을 때 모 지역의 주재기자가 광고비로 100만 원을 받았다고 구속됐다. 지방 사찰에서 공갈로 거금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은 500만 원 뇌물을 받아도 구속됐다. 5천만 원이 넘으면 특가법을 적용해 수년을 교도소에서 살렸다. 지금은 뇌물 액수에 대한 기준이 둔화돼 몇 억을 삼켜도 국민들이 놀라지 않는다. 몇백만 원이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혹은 매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젊은 청년들이 많다.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 눈물겹다. 이 노인은 이혼한 아들의 어린 자녀들을 떠맡을 두려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장기적 코로나 사태로 가정 경제가 붕괴되면서 눈물겨운 비극사가 못물처럼 터지고 있다. 젊은 청년들이 자살사이트를 이용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문의 전화가 늘어나고 있는 참상을 정치인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넷플릭스로 세계적 화제를 모으고 있는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는 외국 시각은 부정적이다. 돈을 향한 군상들의 처절한 생존 게임을 어두운 사회로 인식하는 것이다. 살기 힘든 한국.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나라 모든 정치인들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국민들을 배부르게, 그리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의 궁극적 사명이자 목표가 아닌가.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과 부패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검은 돈과 유착 된 한국의 정치 미래는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깨끗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에게 표를 요구한다. 비겁하고 안하무인이며 가증스러운 자기변명만이 늘고 있다. 정치, 정치인들에 대한 비호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제는 지식인들이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 나면 날수록 냉철한 정신력으로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항해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언론은 시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 대장동 커넥션을 바르게 밝혀야 한다. 특정세력이나 금권에 양심을 팔면 후대에 역사적 심판을 받는다. 준엄하고 결연한 자세로 진실만을 보도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용서하지 않는 유권의식이 살아나야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스승으로 모시는 무학대사와 마주 앉았다. 경남 함양 용추사에 보관되어 있는 무학대사의 영정을 보면 대사는 몸이 비대했던 모양이다. 태조가 무심결에 무학을 평한다. "과인이 보기에 스님은 마치 돼지처럼 보입니다." 조용히 듣던 무학은 이렇게 응수했다.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마치 부처처럼 보입니다." 태조가 "아니, 스님…. 내가 스님을 돼지라고 했는데 부처라니요?" 무학의 대답이 걸작이다. "돼지의 눈에는 상대방이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두 부처로 보이는 법이지요." 돼지는 탐욕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게는 이롭고 고마운 동물이다. 돼지꿈은 길몽 가운데 길몽으로 풀이 된다. 젊은이가 새해 첫날 돼지꿈을 꾸면 과거에 합격하거나 출세 길이 열리게 될 징조라고 믿었다. 돼지가 집으로 들어오는 꿈은 횡재몽이다. 돼지 색이 흰 색이나 검은 색일 경우 더 큰 재물 운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도교 설화에서 저팔계는 원래 하늘의 강인 은하수를 지키던 신선이었다. 직함은 '천봉원수(天蓬元帥)'. 그래서 중국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저팔계는 비록 우직하지만 용맹한 요괴로 그려진다. 당나라 삼장법사를 호위하며 천축국(天竺國)에서 불경을 구해오는 조력자다. 고대 춘추전국시대 '돼지 울음'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제나라 희공에게는 문강이란 미인 딸이 있었는데 노나라 환공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문강은 이복 오빠인 제양공과 사통한 사이였다. 환공에게 시집온 후로 남매는 서로를 잊지 못해 음모를 꾸민다. 노환공이 부부동반으로 제나라에 방문하자 제양공은 노환공을 청부살해했다. 살인청부 무사는 팽생이란 자였다. 그런데 살해 된 사실이 알려지자 제양공은 팽생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 말았다. 어느 날 제양공이 산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사람처럼 서서 울부짖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제양공은 울부짖는 돼지가 팽생의 얼굴로 보여 그 후 병이 들었으며 내란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대장동 개발 의혹'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에서 돼지 논쟁이 거세다. 야당이 여당 이재명 후보를 향해 '후보직을 사퇴하고 수사를 받으라' 등 공세를 퍼붓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며 응수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야당 인사는 '이 후보를 의심하는 국민들이 모두 돼지라는 것이냐"라며 비판했다. 사람을 돼지에 비유해 비하하는 말은 옳지 않다. 지난 여름 일본 도쿄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담당자가 여성 외모 비하 문제로 사퇴했다. 몸집이 있는 여성 연예인을 돼지로 분장시켜 코믹하게 꾸미려던 안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몇년전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국민은 개돼지'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의 입이 거칠면 안 된다. 자신을 비판하는 야당이나 국민들을 돼지로 반격해서는 안 된다. 죄가 없다면 정정당당히 특검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장동 문제는 이후보가 여당 후보가 되어 본선에 진출한다고 해도 끝까지 괴롭힐 것이다.
조선의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 허씨. 그녀의 가을 시 '감우(感遇)'를 보면 새삼 감상에 젖게 된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 가을바람 잎 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인가. 죽음이 임박했던 비애를 표출한 것만 같다. 문학소녀 난설헌은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다. 요즈음 흔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신의 처지를 들어 줄 사람도 없었다. 뼈대 있는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친정이 역모에 몰린 후 부군 김성립과도 금슬이 좋지 않았다. 호색했던 남편은 이런 부인을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아마 조정을 의식하여 부인으로서 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기방(妓房)에서 매일 밤 외박하며 아내를 멀리 한다. 난설헌은 매일 독수공방에서 고독한 일상을 보낸 것이다. 난초와 같이 청초했던 난설헌은 남편 대신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에 빠져 살았다. 남편보다는 옛 시인들에게서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섞인 마음에서 나온 주옥같았던 시들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난설헌은 26세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선조 때 이옥봉은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 1526~·)의 딸이었다. 종실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서녀이기 때문에 사대부 정실이 되지 못하고 첩으로 살아야 했다. 남편을 자신이 직접 골라 조부에게 떼를 써 시집간 적극적인 여성이기도 했지만 끝내 버림받고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시댁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살며 시를 지었는데 모두 남편을 그리는 우울하고 한 맺힌 상사시(相思詩)다. 옛날에도 심화로 우울증 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조선 현종(顯宗) 때 부강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문사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 마음을 다스리는 시를 썼다. 심하게 성내면 기운 무척 상하고 / 생각이 많으면 정신을 아주 손상 시킨다네 / 정신이 고달프면 마음이 쉽게 부림을 당하고 / 기운이 쇠약하면 그로 인해서 병이 난다네 /슬퍼함과 기뻐함을 극도로 하지 말고 / 마시고 먹는 것은 일정하게 해야 하리 …(중략)… 정신을 편안히 하면 즐거움 생겨나고 / 기운 아끼면 화락하고 순수함이 보전되네…. 최근 3년간 충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환자 수가 매년 증가 추세라는 보도가 있다. 2018년 2만850명이었던 것이 2019년 2만2천999명, 지난해에는 2만3천988명으로 증가세를 이어갔다. 코로나 장기 사태로 경제가 어렵고 가정의 삶이 원활하지 못한 이유일 것으로 분석된다.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다. 어제의 나쁜 일들은 깨끗이 잊는 지혜가 필요하다. 매일 아침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인생사에 도전하는 것이 우울한 삶을 이기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