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어느 날 모바일로 아름다움 가곡을 보내줬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명곡 '내 마음속에 울리는 노래 (In mir klingt ein Lied)'였다. 오스트리아 미모의 소프라노 가수 미루시아의 미성으로 부른 이 노래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 곡을 저장했다가 가끔 들으며 때로는 친구, 지인들과 공유도 한다. 가사가 아름다워 가슴을 울린다. 나의 깊은 마음 /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 이 내 마음을 받으소서 /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네 / 당신만을 위한 수줍은 사랑의 꿈이 / 피어나는 아주 작은 노래 / 이 노래를 그대에게 오직 그대에게 / 이것을 원하는 내 마음 / 행복한 꿈을 꿉니다 / 그대가 없어 슬프네요. 한동안 잊고 살았던 클래식을 접하게 된 것도 모바일 덕이다. 극장가기가 어렵고 연주회가 열리지 않아 관현악을 직접들은 것이 언제인가 가물가물하다. 또 TV에서 떠나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더 그렇다. 최근에는 우리 소리를 좋아하여 모바일로 명창들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마음먹은 대로 곡을 골라 들을 수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먼 옛 날의 소리꾼 목소리도 듣는다. 과거에 듣지 못했던 유명한 명창들의 소리도 감상 할 수 있다. 참 고마운 세상임을 자주 느낀다. 요즈음 활발하게 활동하는 명창들의 소리도 감상한다. 몇 해 전 화면이지만 방송에 나온 국악인들의 서바이벌 광대전 공연도 재생하여 들을 수 있다. 아름다운 소리에 빠져 열성 팬이 되기도 한다. 지금 세상은 모바일을 통해 하루 종일 문자 안부를 보내주는 시대다. 한 친구는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문자로 안부를 전해온다. 짧은 문구이지만 멋진 시도 있다. 인터넷을 뒤져 노력한 흔적이 보여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지인은 인터넷을 뒤져 건강에 대한 조언을 보내 준다. 아름다운 꽃, 또는 향기로운 커피사진을 보내주는 친구도 있다. 편지가 없는 세상 이제는 모바일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승객들이 모두 전화기만 붙들고 있는 것 같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 까지 모바일에 푹 빠져 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문자 중독에 빠진 풍속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지나친 풍속은 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가족 간, 친구간의 대화나 그룹간의 대화를 단절 시켰다.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단절시대 풍속도이기도 하지만 집안에서도 모두 모바일만 붙들고 사는 시대가 된 듯 싶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한 지인은 아예 모바일 카드 문자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읽은 후 답장을 안 하면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어떤 글은 정치적이라서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조직을 매도하는 글들은 그냥 지워버린다고 했다. 바쁘게 살고 있는 현 시대 모바일은 고마운 이기(利器)이기도 하다.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문자나 문화적 향훈을 공유하는 대화는 바람직하다. 문화적 이기를 잘 활용하여 보람 있는 삶을 충족시키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오늘은 아름다운 우리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연다. 마음이 평온해 지고 세상이 더 따뜻해지는 것만 같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이다. 어머니는 죽음을 앞둔 아들을 면회하지 않았다.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런 비장한 말을 했다. 안의사는 조국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향해 정정당당하게 총을 쐈고,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의롭게 죽음을 맞아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안의사를 생각할 때 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랑스러운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다. 인간으로서 자식의 죽음을 반길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는 변호사를 통해서 "네가 국가를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아들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안의사는 형이 집행되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의사는 가톨릭신자로서 서양문화와 학문을 받아들였지만 전통 학문 수양에도 게을리 않았다. 옥중에서 남긴 많은 유묵(遺墨)을 접하면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보여준다. 이런 의연한 자세에 여순감옥의 일본인 간수들도 감동받았다. 안의사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은 다음의 글이었다. '불의를 보거든 정의를 생각해 보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의협심을 갖도록 하라.(見利思義 見危授命)',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말라(貧而無諂 富而無驕)' 안의사가 옥중에서 쓴 이 유묵은 간수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가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최근 조국 전 장관을 안중근 의사에 빗대며 조 전 장관 부부에 대한 검찰 수사와 사법부를 강하게 비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추 전장관은 한 통신사와 인터뷰에서 사법부를 향해 "개혁 저항 세력의 의도와 셈법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모두 개혁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여당 대선 후보 경쟁에도 나선 추 전장관의 이런 언론을 통한 인터뷰에는 말문이 막힌다. 과연 조국 전장관이 안의사 처럼 불의를 보았을 때 먼저 정의를 생각한 인물이었을까.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죽음도 불사 할 수 있을까. 정의와 불의마저 구분하지 못한 이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 역사를 왜곡하며 안의사를 욕되게 하고 있다.
단양의 아름다운 산수 역사를 담은 건축물은 아무래도 구 단양 관아에 있던 '이요루'일 것이다. 이요루(二樂樓). 일만 가지 즐거움을 나타내지 않고 왜 두 가지 즐거움만을 얘기 한 것일까. 알고 보면 유명한 글에서 따온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 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명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상들은 경치 그윽한 곳에는 이런 이름을 딴 정자를 짓고 산수를 즐겼다. 당대 저명한 명필을 불러 편액을 써 붙인 곳도 있는 데 안평대군, 추사의 글씨가 유명하다. 겸재 정선은 단양 봉서정도(鳳棲亭圖)를 그렸다. 이 그림은 18세기 초반 단양관아(丹陽官衙)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그림 중앙에 이층 누각의 이요루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조선 성종 때 대쪽 같았던 사관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에 넣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유했다. 이 사실이 탄로나 극형을 받았지만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直筆) 정신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단양군 편에 김일손이 이요루에 올라 단양산수를 감탄한 글이 있다. '…(전략)… 죽령을 향하노라면 그 사이에 즐길 만한 산수가 하나가 아니다.… 청풍(淸風)의 경계를 다 가서 한 고개를 넘어 단양 경계를 들면 장회원(長會院)에 이르는데, 그 밑에서 말고삐를 잡으면 점차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간다. 별안간 쌓인 바위가 우뚝 일어 높은 봉우리와 푸른 아지랑이가 동서좌우를 아득하게 한다. 벼랑이 열리고 산골짜기가 터지자 한 강물이 가운데로 흐르는데 쪽빛 푸른빛에 잠겨 있다.…'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이요루 시를 지었다. '밤에 누우니 단양 관아는 맑구나 / 꿈에 산을 거니는 시를 지었네 / 새벽에 일어나 탁 트인 개울가 누대에 올라 / 산을 바라보며 옛글을 읊네 …(중략)… / 나는 티끌세상 그리워하는 이가 아니오 / 또한 세상의 모양새에 아첨하지도 않소. / 이요루에서 즐길 것을 얻은 것 같으니 / 이 밖에 내가 뭘 더 알겠는가.' 이요루는 퇴계 이황과 단양기생 두향의 로맨스가 어린 곳이다. 군수와 관기는 풍류(風流)로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많았으므로 이요루에서 시를 화답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향은 총명했을 뿐 아니라 용모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거문고를 잘 타고 소리를 잘하여 퇴계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두향은 이임하는 퇴계에게 정성들여 키운 매화분(梅花盆)을 선물했다. 퇴계는 도학군자로 두향을 가슴에만 묻어두고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다. 고향에서 매화에 대한 시를 1백수 썼는데 그 안에는 두향을 그리는 애틋한 그리움이 숨겨져 있다. 죽을 때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까지 유언하며 두향을 생각했다. 연간 1천만 관광객이 찾아오는 단양팔경이 코로나 시대에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단양군이 민선7기 3년간(2019∼2021년) 관광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며 관광 미래 100년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계제에 퇴계와 두향의 로맨스가 얽힌 기념물이나 국악풍류관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국 국악과 대중음악이 국민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 단양에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아름다운 단양팔경 산수와 전통 국악은 잘 어울리는 장르다. 단양군이 계획 중인 단성면 주거 관광복합단지 학습관을 활용해도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필자는 몇 해 전 전북 익산시에 있는 미륵사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물관이 쉬는 월요일이었다. 박물관을 볼 수 없겠다 생각했을 때 시청 문화재과 학예사 한분이 박물관 문을 열어 주겠다고 나섰다.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학예사는 동행하며 조언을 해 주었다. 미륵사 창건과 출토된 금판경등 유물을 가지고 얘길 나누었는데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에 대한 나의 주장을 곰곰이 경청하기도 했다. 익산시는 다른 자치단체와는 달리 문화재 전담과가 따로 있었다. 문화재 행정 전문가들도 다른 자치단체와는 달리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익산의 문화재 행정이 이렇게 앞서 있구나'하는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20대 후반부터 주말이면 익산 왕궁리 절터와 미륵사지를 답사했다. 왕궁리의 유적과 미륵사지는 백제 말기의 별도(別都)로서 신비로운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황토색 짙은 구릉에 자리 잡은 왕궁리에 가면 백제 와편이 즐비하게 뒹굴었다. 왕궁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적사 절터에는 백제인들이 다루었던 유리구슬까지 출토됐다. 익산시의 유적 답사는 교육사이셨던 고(故) 송상규 선생이었다. 필지가 익산을 가면 송선생은 부인을 건넛방으로 보내고 나와 함께 밤을 새워 백제 와전과 미륵사지에 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내가 익산 유적에 대한 더 없는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송선생의 따듯한 영접이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40년이 가까운 옛 날 얘기지만 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왕궁리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 익산 왕궁리 미륵사지 유적은 눈부실 만큼 정비됐다. 자치단체와 익산 유적을 사랑하는 시민 정신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만든 힘이 된 것이다. 40여 년 전 충북도 문화재 행정은 많이 뒤쳐져 있었다. 문화재계에 연구관 한 명이 문화재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였으므로 지프가 없으면 유적답사가 어려웠다. 필자는 공무원 신분이 아닌 위촉 문화재 위원이었는데 정종택 지사의 배려로 주말이면 항상 지프 한 대를 조사용으로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요청만 하면 비서실장이 공보용 지프를 배차해 줬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이때 금강, 남한강 일대 등 충북도내 각 지역의 유적 조사가 많이 이뤄졌다. 청주에서는 서원학회, 충주에서는 예성동호회 등 민간 학술 활동이 활발해져 빛을 찾지 못하는 문화유산을 조사 공개하기도 했다. 관과 학계 민간학술활동의 노력으로 전국 7대 고도문화권인 중원문화권이 설정되는 계기가 됐다. 정종택 지사의 노력으로 공주보다 먼저 국립청주박물관이 건립됐다. 우리 충북인들은 앞서가는 문화행정에 공이 있는 정종택 지사의 노력을 기억해야만 한다. 최근 충북도의회에서 문화재 전담 부사가 없다는 의원의 쓴 소리가 있었다. 충북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12점, 보물 95점과 등록문화재 30점, 도 지정문화재 529점, 문화재자료 92점 등 모두 835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그런데도 전국 광역도 가운데 문화재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문화유산 관련 분야의 정부정책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조직과 인력, 예산은 전국 최저 수준이라고 했다. 30~40년 전의 낙후된 행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충주 신라 중원경 유적, 영동 악성 난계선생 유적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지역의 여망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역량 있는 독립 문화재과의 신설을 기대해 본다.
조선 왕조사회에서 왕세자가 되는 경우나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치는 절차가 있었다. 세 번을 사양하는 '삼읍일사(三揖一辭)'의 예가 그것이다. 이런 겸양자세는 사대부가 벼슬을 받으면서 직을 고사하는 전통이 되기도 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창 여름에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군부는 공민왕 정비인 왕대비의 교지를 받아 공양왕을 폐하고 그해 수창궁에서 이성계의 왕위에 즉위를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왕대비가 옥새를 넘겨주었는데도 이성계는 '나는 덕이 없는 사람'이라며 굳이 왕위를 세 번 거절한다. 나이 많은 신하와 시위 군사들이 이성계를 부축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권고했다. 태조가 마지못해 수창궁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들이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으며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짜여 진 각본이었지만 임금의 직은 함부로 받을 수 없으며 겸양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고사다. 세종은 부왕이 생존해 있을 때 왕위를 받았다. 그런데 세종은 옥새(大寶)를 받고 나서도 통곡하면서 왕위를 세 번 사양했다는 기록이 있다. 옥새의 이양은 태종(上王)이 승정원에 전교해 '대보를 들이라'는 순서로 진행 됐다. 그 다음 내신을 시켜 세자를 불렀다. 백관이 따라가 통곡하면서 태종에게 복위 (復位)할 것을 간청했다. 옥새를 거의 강제로 전달받은 세자는 이를 받들고는 태종이 있는 곳으로 나가 부복하며 옥새를 올리면서 사양할 것을 청했다고 한다. 폭군 연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이 진성대군(중종)을 찾아갔다. 그런데 진성대군도 세 번을 사양했다.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했다. 임금에 즉위한 진성대군은 교서를 내려 일대 서정을 쇄신했다. 연산군의 학정으로 죄 없이 귀양을 간 자를 다 소환하고 억울하게 형을 당한 자들을 가려 방면, 표창했으며 백성을 해치는 악정을 폐하도록 폈다. 자천타천 차기 대권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궁웅할거 시대라고 해도 될까. 조금이라도 국민들의 이목을 받은 정치인들이 대통령직을 바라는 것 같다. 야당보다는 여당인사들이 대거 몰리는 현상이다. 국민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일부자치단체장도 대권 경쟁 선언을 했다. 일부 선언한 단체장 가운데는 지역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비호감 인물도 있다. 일국의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자리라고 한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 거명이 돼도 본인이 몇 번 사양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대권후보로 거명되는 인사가운데는 언론이 따라다니면서 부추기고 곧 중대결심을 한다느니 중계방송을 한다. 내년 6월부터 한국을 이끌어 갈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 돼야 할까.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의를 보면 경제회복, 무너진 법질서, 공정의 가치를 회복시킬 엄정한 성품을 가진 인물을 선호하는 것 같다. 20대 젊은이들이 지목하는 차기 대통령의 덕목이다. 미래지향적이고 문화예술에도 폭 넓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잘 뽑아보자는 것이 국민들 대부분의 생각인 것 같다. 지지도를 높이려면 우선은 겸손한 인품을 지녀야 한다.
한국 제일의 여름 휴양지로 회자되는 단양. 청정한 옥수, 팔경의 그윽한 경치를 따를 곳은 전국을 다녀 봐도 없는 것 같다. 언제고 가보고 싶은 곳이 단양팔경이다. 그런데 단양을 소개한 한 인터넷 블로그를 보니 조금은 황당하다. 단양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다섯 군데를 꼽고 있는데 고수동굴, 도담삼봉, 다누리 아쿠아리움, 단양호 유람선, 구경시장 등이다. 유튜버의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볼거리만 치중하고 단양의 역사적 향기가 어린 문화 유적들이 빠져 아쉽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명소 수양개 유적이다. 단양군청 홈피에 접속해 보니 수양개 유적을 홀대하고 있어 더욱 실망했다. '수양개 역사문화길'이라고 하여 간단히 소개 하고 있다. 그러니 타지에서 단양을 찾는 이들이 알 턱이 없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있는 연천군 홈페이지와는 대조적이다. 연천군은 홈페이지에서 톱으로 연천구석기 축제와 연천유네스코 지질공원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수양개 유적은 40년 전 충북대 박물관 이융조 교수팀에 의해 찾아졌다. 그는 유적 발견의 비화를 교수신문(2016년 6월 28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1980년 7월 20일부터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남한강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그는 내심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허기에 지친 학생들이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강을 건너 수몰 예정 지역인 수양개로 앞장섰다. 급류 속에서 배를 움직이던 노인 분이 '이런 날씨에 강을 건너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역성을 냈지만, 학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지금은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는 우종윤 원장이 당시 학생대표였는데, 그를 불러 나루터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했다. 다음날 주변을 돌아보니 고추밭, 마늘밭, 감자밭 곳곳에서 '까만돌'이 보였다. 모두 석기였다. 수양개 선사 유적은 그렇게 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사선을 넘는 용기와 의지로 찾은 유적이다. 이 곳에서 수습 된 주먹도끼는 프랑스·알제리에서 출토된 유물과 형태와 수법이 비슷해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한국에는 청동기문화 마저 없다고 비하했던 과거 식민지 교육의 장막을 거둔 쾌거였다. 수양개 유적은 1983~1996년 7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10만 점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중기 구석기층에서는 자갈돌을 주된 재질로 해 모루, 망치떼기 등 직접떼기로 만든 찍개, 긁개, 찌르개 등이 발굴됐다. 그리고 1997년도에 사적 제398호로 지정됐다. 지난 2016년 7월 26일부터 엿새 동안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열린 21회 학술대회 포스터에는 큼지막하게 한글로 '수양개와 그 이웃들 : 수양개와 헬갭'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수양개 유적을 바라보는 국제적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수양개 주먹도끼는 현재 런던박물관에 전시 돼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박물관 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단양의 구석기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오는 7월이면 수양개 유적 발견 41주년이 된다. 올 25회 국제학술대회는 수양개 유적이 있는 단양과 전곡리 유적 연천에서 열린다. 세계적인 학자들이 대거 단양을 방문하게 된다. 국제적 이목을 끌고 있는 차제에 수양개 유물전시관의 열악한 환경이 우선 개선돼야 함을 지적하고 싶다. 국립박물관 규모로 격상해야 한다. 단양군수와 의회, 충북도가 주도적으로 나서 중앙에 예산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단양,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을 보유한 단양의 자존심을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암 극복의 서광 명의 유의태는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충남 논산 가야곡 사람이었다. 민간에서 명의로 회자돼 온 인물을 소설가는 허준의 스승으로 둔갑시켰다. 어쨌거나 유의태에 대한 일화는 많이 전해 온다. 유의태의 여동생이 간경화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평소 여동생에게 간에 좋다는 앵두를 약으로 썼다. 과연 간이 어떤 형태로 남아있을까. 유의태는 예리한 칼로 동생의 가슴을 열고 간을 관찰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간의 일부가 빨갛게 소생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에는 허준이 심하통(心下痛)으로 죽자 유의태의 위를 수술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심하통은 바로 위의 통증이다. 유의태는 적취(위암)를 앓고 있었다. 제자는 스승을 위해 번행초를 채취하여 치료약으로 썼다. 갯상추로 불리는 번행초는 민간에서 위암 특효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승의 배를 가르고 그린 것이 신형장부도라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양정적자제(養正積自除)'라는 글이 나온다. 바로 정기(正氣)를 기르면 적(積)을 포함한 종양이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바로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 암 치료에 좋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지난 70년대 말 암 전문의 김사달(金思達)박사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박사는 괴산 출신으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독학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한 입지적 인물이었다. 김 박사는 아호를 서봉(西逢)이라고 했으며 서도에 정진, 국전에서 국무총리상 까지 받기도 했다. 김박사는 암 치료로 명성을 날렸으나 정작 자신도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깝게 조서한 것이었다. 자주 고향에 내려와 언론인들과 술자리 가진 김박사의 별세는 당시에 큰 충격이었다. 매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도 스크린이나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모았던 몇몇 여배우들이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위암, 간암, 폐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전립선암, 갑상선암 등 주요 7개 암의 총 환자 수가 지난 2017년 말 88만 315명에서 지난해 말 103만 6054명으로 3년 간 17.69%(15만 5739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암 사망 원인 1위는 폐암으로 한 시간당 2명씩 사망하고 있을 정도다. 폐암으로 인한 사망자는 인구 10만명당 2009년 30.0명이었으나 2019년 36.2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암 극복은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다. 언제 그런 날이 올까. 그런데 충북대 약학대학 홍진태, 이희범 교수 연구팀이 합성에 성공한 항암 신물질(MMPP)에 대한 네 번째 특허가 지난 26일 한국과 미국에 이어 중국에서도 최종 등록됐다고 밝혔다. 항암·항염증 치료제 상용화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 온 것이다. 홍진태 교수는 '최근 공인시험기관을 통한 MMPP의 비임상시험 결과가 안전한 것으로 평가 완료된 만큼 MMPP기술이 기업으로 이전돼 조만간 치료제로 개발되면 인류 암 치료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 된다'고 말했다. 항암신물질이 인류의 암 고통을 줄이는 서광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암으로 천수를 다하지 못한 충청도 출신 조선 명의 유의태와 고(故) 김사달 박사가 생각 나 적어본 것이다.
이팝나무 전설은 참꽃을 따 허기를 달래던 보릿고개 사연이라 가슴이 뭉클해진다. 옛날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이 굶어죽자 땅에다 묻고는 이팝나무를 심었다. 저승에 가서라도 하얀 쌀밥을 실컷 먹으라는 염원에서다. 어머니의 정성이 통했던지 이팝나무가 커서 하얀 쌀밥을 연상 시킬 정도로 무성하게 피어났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팝나무를 보면서 얼마나 불쌍한 아들을 가여워했을까. 필자도 어린 시절 농토가 좀 있다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보리 고개에는 쌀밥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밥그릇이나 도시락에 얹어줄 쌀만을 조금 씻어 밥을 짓곤 했다. 하얀 눈이 내리면 이것이 모두 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탄식을 들었다. 어머니들은 동네 입구에 피어나는 이팝나무를 보고도 쌀밥을 연상했다. 이팝나무는 모내기가 한창인 5월에 활짝 핀다. 농부들은 이팝나무를 보고 논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초여름에 핀다고 하여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렀고, '입하' '이파'에서 지금의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시인 김광규(1941~)는 이팝나무를 보고 자비로운 공양을 생각한 모양이다, 꽃 밥을 혼자 먹기 아까워 사람들을 부르는 시를 정감 나게 썼다. (전략)......이팝나무 가지에 흰쌀 한 가마쯤 안쳐놓았어요 / 아침 햇살부터 저녁 햇살까지 며칠을 맛있게 끓여놓았으니 / 새와 벌과 구름과 밥상에 둘러앉아 / 이팝나무 꽃밥을 나누어 먹으며 밥 정이 들고 싶은 분 /오월 이팝나무 꽃그늘 공양간으로 오세요 / 저 수북한 꽃밥을 혼자 먹을 수도 없지요. 이팝나무를 영어로 'Snow flower'라고 한다. 꽃이 피면 하얀 설화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이팝나무를 사월설(四月雪)이라고 호칭하며, 최고의 관상수로 여기고 있다. 나뭇잎은 말려 차로 마시기도 한다. 과실은 기름이 풍부하여 짜서 여러 용도로 쓴다고 하니 버릴 것이 없는 나무다. 청주 소로리볍씨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김선영 위원이 청주시 상징 나무와 꽃을 쌀밥(이팝)나무와 쌀밥 꽃으로 지정해 줄 것을 시당국과 문화계에 제안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인류의 기원 벼인 청주 소로리 씨를 더욱 국내외에 알려 청주시를 쌀의 종주도시라는 위상을 각인 시키자는 뜻이다. 그리고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조성하여 매년 5월 달에 '이팝 꽃 축제'도 개최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한국 선사고고학을 이끌어 온 이융조 전 충북대 교수가 찾은 소로리 볍씨는 세계학계에서 공인 된 가장 오래 된 농경 유물이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의 다층위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최고의 볍씨로 알려졌던 중국 후난성의 11,000년 전 볍씨보다 수천 년 더 오래된 것으로 공인 되었다. 국가적 차원의 볍씨 박물관이나 국민 관광지로서의 정비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청주시와 도당국의 의지는 물론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청주 옥산면 소로리를 위시한 미호강 변은 구석기 유적의 보고이자 인류 최고의 농경문화발상지이다. 미래의 청주 발전 축이 될 미호강의 기적을 만들자는 식자층의 여론이 대두되고 있다. 청주의 상징으로 명명된 이팝나무 꽃길이 미호강변에 아름답게 조성되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동백과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도심공원에는 초여름 철쭉이 만발해 있다. 날씨가 더워진 탓에 꽃 소식도 이르게 온다. 그러나 고구려 산성을 조사하러 충북의 북부와 강원도를 갔더니 기온차가 심해 아직도 벚꽃이 만발한 곳이 더러 보인다. 복사꽃이 한창인 제천 청풍은 문자 그대로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옛 설화 속에 등장하는 꽃은 진달래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일 게다. 해변에서 아낙네들이 몰려다니며 따는 동백은 총각들의 마음도 함께 따 주길 바라던 꽃 아닌가. 민요 동백타령은 언제 들어도 신명 난다. 저 멀리 바다에는 아낙네들이 조개를 줍고 / 우리고장 뭍에서는 큰 애기들이 동백을 따네 /.. (중략)..가세 가세 어서 가세 동백을 따러가 / 동백 따는 큰 애기야 동백만 따지 말고 이 총각 마음도 살짝 꿍 따거라 신라향가 헌화가에 나오는 꽃은 무슨 꽃이었을까. 동해 까마득한 벼랑에 매달려 요염하게 핀 꽃은 아무래도 진달래가 아니었나 싶다. 미인이었던 수로부인은 그 꽃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이를 따다 줄 사람이 없었다. 부군인 강릉태수 순정공(純貞公) 역시 마찬가지. 그때 기사도를 자처하고 등장한 것이 이곳을 지나던 한 노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노인은 수로부인이 꽃을 갖고 싶다고 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벼랑에 올라가 꽃을 꺾어다 바친다. 붉은 바위 가에 /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용왕에 납치되어 한동안 소식을 모르게 잠적했던 수로부인. 열정적인 노인을 따라가 비밀스런 사랑의 행로를 다녀 온 것은 아니었을까. 꽃 설화가운데 선덕여왕의 지혜를 상징하는 모란꽃 얘기도 재미있다. 신라 제27대 왕에 오르자 당나라 황제 태종이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내왔다. 그때 선덕 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씨앗을 궁전 뜰에 심었다. 얼마 후 꽃이 피었는데 선덕 여왕의 말대로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신하들은 여왕에게 어떻게 향기가 없는 꽃인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다. 그건 향기가 없다는 뜻 아니겠느냐· 이는 당나라의 황제가 나에게 남편이 없는 것을 놀린 것이다." 5월을 장미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꽃말은 '행복한 사랑' '애정' '열정' 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꽃을 주고 싶어 섬에 씨앗을 뿌렸는데 장미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의 표현으로 바치는 꽃이 장미다. 그래서 결혼식 때 부케나 여성에게 최고의 꽃 선물로 자리 잡았다. 서양풍속이 우리의 습속이 된 것이다. 코로나19로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충북화훼업계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해 5월 대비, 매출이 30% 증가했다고 한다. 필자가 서울의 화원에 확인 한 바에 따르면 충북 청주, 진천 등지의 화훼단지에서 출시 된 장미꽃이 인기가 높다. 어려운 시기를 겪는 충북 화훼농가들이 기지개를 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종대왕이 두 번에 걸친 행행(行幸) 역사가 있는 청주 초정약수터에 세계적인 '훈민정음탑'을 조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미 이 제안에 앞장 선 나기정 전 청주시장이 수 만평의 부지를 기증하고, 신방웅 전 충북대 총장, 이융조 전 충북대교수 등 원로 재청 학계, 문화계 인사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초정에서 한글창제 과업이 마무리 되어 반포되었다는 훈민정음 역사는 학계의 굳어진 학설이 되고 있다. 세종은 안질 치료를 목적으로 초정 행궁에 와서 2개월여 있었다. 일국의 왕이 지방 행궁에서 이렇게 많은 날을 지냈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기간 동안 초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세종은 이렇게 많은 날짜를 초정행궁에서 떠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훗날 세조는 초정을 찾는 길에 특별히 속리산 복천암에 들려 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 조력한 신미대사를 만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해답을 숨겨 놓았다. 초정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이다. 최만리는 반대상소에서 '이번 청주 초수리 거둥 때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꼭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닌데, 어찌 이것을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옥체 조섭을 번거롭게 만드시나이까?'라고 했다. 바로 이 상소문 안에 세종의 초정행궁 체재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세종은 한양 정궁으로 신미대사를 불러올리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중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중이 궁을 출입한다고 성토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총신들을 시켜 안질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초정행행의 명분을 얻으려고 묘안을 짰다. 처음에는 지방을 행차하면 백성들이 괴롭다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금 편인 비서실장도승지가 충청도는 풍년이 들어 강행해야 한다고 주청하자 못이기는 척 허락했다. 세종의 초정 나들이는 바로 한글 창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대 비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한양에서부터 초정리까지의 거리는 280리. 세종대왕은 한양~죽산~진천~초정의 노선을 5일에 걸쳐 당도했다. 어가는 단출하였으며 첫 날은 100여리나 나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흘 째 되는 날(3월 1일)에는 속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숙영지인 충청도 진천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3박). 나흘째 되는 3월 2일, 세종 일행은 다시 60여 리를 더 내려가 드디어 초정에 도착했다. 왕, 왕비, 세자는 물론 수행한 신료들도 모두 고단해 바로 취침에 들어갔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세종의 초정행차 역사는 이같이 힘든 노정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에게 승려로서는 전무후무한 시호를 내리라고 유언한다. 혜각존자(慧覺尊者) 앞에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는 우국이세(祐國利世)란 칭호를 붙이라고 한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문종은 부왕의 유명을 실천했다.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라는 불서 말미에는 1438년 세종 20년 명(明) 정통(正統) 3년 천불사(天佛寺)에서 정음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한글창제 반포 5년 전의 일이다. 이 불서를 보아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주역은 신미대사가 분명한 것이다. 이 불서의 진위에 관한 논란도 있지만 보다 연구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글은 이제 세계 언어학자들로 부터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글을 문자로 쓰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글창제가 마무리 된 초정에 '훈민정음 탑'이 세워져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 미래를 기대해 본다. 이 대업이 이 시대 우리들이 해야 할 '국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옛 민화에 효제도(孝悌圖)라는 것이 있다. 한 눈에는 금방 알아 볼 수 없는 동식물을 글자로 표현한 것인데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그린 것이다. 사람들이 실천해야하는 8가지 덕목을 피카소 그림처럼 재미있게 형상화 했다. 효(孝) 그림에는 잉어, 죽순, 부채, 거문고가 등장한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부모가 병을 앓자 한 겨울 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잉어와 죽순을 구해 봉양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효행록이나 전국에 산재한 정려(旌閭)의 내력을 살피면 이런 얘기가 제일 많다.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효촌리에 있는 '효자경연지리'의 주인공 경연(慶延)은 세조때 인물이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봉양했다. 경연이 살고 있었던 마을에 양수척(楊水尺)이란 유기장이 있었다. 양수척은 배우지 못하여 성질이 포악했는데 경연의 효에 감동되어 효자가 되었다. 효자가 된 양수척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가 지금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비선마을 입구에 서있다. 효제도의 '제(悌)'자는 비둘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먹을 것을 서로 양보하는 형제간 우애를 나타낸 것이다. 필자도 잘 그려진 '효제도'를 한 점 구하려 골동가게를 돌아다녔지만 값이 비싸 연대가 짧은 작품 하나를 구해 소장하고 있다. 유교사회에서는 효제를 제일 우선해야 할 덕목으로 삼았다. 소리꾼들이 즐겨 부르는 단가 사철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효제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부모 불효하는 놈, 형제 화목 못 허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라고 목청을 높인다. 고전 흥보전을 보면 옛날에도 형제간 우애를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놀부인 형은 집에서 무위도식하던 동생 흥보를 매몰차게 내 쫓는다. 놀부는 본성이 본래 패악하였는데 판소리 흥보가 대사에 이런 표현이 있다. ..(전략)..사주병 비상넣고 새 망건 편자 끊고 / 새갓 보며는 땀띠 떼고 앉은뱅이는 태껸 / 곱사둥이 되집아 놓고 봉사는 똥칠허고 / 애밴 부인 배를 차고 길가에 허방놓고 / 옹기전에다 말 달리기 / 비단전에 물총 놓고... 이 놈의 심사가 이래노니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이런 모질고 독한 놈이 세상 천지 어디가 있드란 말이냐...(하략) 18년 동안 땅 끝 마을 강진에 유배되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아비 없이 큰 두 아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과 형제들의 우애를 강조한 '효제'였다. 다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것을 당부했다. '효제를 실천해야 학문에 뜻을 둘 수 있고, 그 다음 독서를 할 수 있으며, 글을 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서울 양천구 한강변 공암에는 '투금탄(投金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형제가 한강에서 금덩이를 주워갖고 배를 탔다. 그런데 강 가운데 와서 동생이 금덩이를 물에 버린 것이다. '그동안 형님을 사랑했는데 금덩이를 나누다 보니 형님이 미워졌습니다. 금덩이를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도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지고 말았다. 금덩이 보다 형제간의 우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설화다. 인기 방송인 박수홍씨가 친형 부부에게 거액의 횡령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30년 동안 매니저 역할을 한 친형과 형수가 박수홍의 모든 출연료를 제대로 정산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부터 '효국', '효제향'으로 불린 한국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이 되다 보니 재산이나 돈 앞에서는 형제간의 의리마저 사라진지 오래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의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재삼 절실한 때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감흥을 주는 것은 당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혜원은 사대부들의 풍류나 기생들의 숨겨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많은 그림들이 비록 정지되었지만 조선사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속도를 보여준다. 조선 정조임금을 감탄 시킨 도화서 화원은 단원 김홍도다. 지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풍속화는 어명으로 그려진 것 들이다. 성문 밖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정조는 단원에게 특별한 당부를 한다.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소상히 그려 바치라고 했다. 단원의 그림가운데 풍속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기가 없었던 조선 후기 단원의 풍속화는 서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혹은 해학적으로 담아 따뜻한 감흥을 준다. 단원의 그림도 조선 사회 영화스틸 같은 맛을 준다. 필자는 몇 해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경매로 한국에 들여져 온 단원의 풍속화첩을 연구한 적이 있다. 단원이 23세에 그렸다는 묵기가 있는 이 풍속화는 모두 7장으로 기존에 공개 된 풍속화보다 품격이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단원의 풍속화들은 언제 그렸다는 묵기가 없다. 이에 반해 이 화첩은 절대연대가 있어 풍속화를 그린 시기에 대한 편년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림은 다른 풍속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도화서 화원이 되기까지 20대 청년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어린 소년이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고, 말을 탄 한 사대부의 담배 심부름을 하고 있다. 풍채 좋은 사대부가 거문고를 탄주 할 때는 그 옆에 앉아 감흥에 빠져있다. 그리고는 도화서 화원이 되어 출장을 가는 풍경과 투전판 구석에서 비스듬히 누워 졸고 있는 미소년, 화원들의 천렵 풍경, 늦은 밤 한 여인과 같이 길을 가다 다른 여인을 만나 합죽선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의 풍채는 준수하게 그려져 있는데 실지 잘생겼던 김홍도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대부는 바로 단원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 온 시.서.화 삼절로 불리는 스승 강세황이었다. 단원은 스스로 자전적 풍속도를 그려 추억을 남긴 것이었다. 최근 아카데미 상후보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 '미나리'가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1980년대 시골 농장으로 이주한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 가족 이야기를 한국인 2세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윤여정씨가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 가운데 한국인들이 즐기는 화투, 80년대 레슬링 선수 김일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역사기록 처럼 담고 있다. 미국 권위 잡지인 포브스지는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가족 이야기이지만, 이들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며 미국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는 대부분 성공을 거둔다. 미국 영화 '라스트 풀 메저'는 1966년 사상 최악의 전투가 벌어졌던 베트남 전쟁에서 전우들을 구했던 영웅이 전하는 실화를 감동적으로 그린 것이다. 세계인들을 울린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은 모성애를 다룬 아일랜드 실화다. 한국 영화 '파파로티'는 성악천재 가수 김호중씨 실화를 그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화 미나리도 단원의 자전적 그림처럼 이 시대 고난의 삶을 성공시키며 살아가는 이민사의 풍속화로 역사에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기생충에 이어 아카데미 입상을 기대해 본다.
진천을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고 한다. 그 다음 말이 사거용인(死去龍仁)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에 묻혔다'는 옛날 한 아낙네의 설화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진천군 문백면에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두 분의 묘소가 있다. 한 분은 조선 최고의 가사문학가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고 한 분은 시, 서, 화 삼절로 불리는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이다. 필자는 송강의 묘소가 문백에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표암의 묘소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두 명인이 고향에 묻히지 않고 문백 땅에 묻힌 것을 생각할 때 '생거진천이요 사거진천'이란 말을 붙여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본래 송강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공릉천변에 있었다. 그런데 숙종 대 재상 우암 송시열이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했다. 물론 당시 진천 문백에는 연일 정씨 송강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우암의 도움으로 이전을 추진했던 것 같다. 고양시 송강의 묘소가 있던 곳을 가면 한 기녀(妓女)의 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송강이 사랑했던 남원 기생 강아(江娥)의 무덤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송강이 전라감사로 부임해서다. 남원에서 강아를 만난 송강은 그녀의 음악과 아름다움에 머리를 얹혀주었다. 송강은 강아를 사랑하여 시간만 있으면 전주에서 남원으로 달려갔다. 본래 이름은 진옥(眞玉)이었으나 송강이 자신의 아호 강(江)자를 따 강아라고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송강이 강계(江界)에 유배 될 때도 이어진다. 기생이 여장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강아는 남장을 하고 송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로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랑하는 님이 병이 걸리자 여인은 남원에서 머나 먼 고양시 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송강이 임종을 거두자 묘에 쓰러져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었다. 여인이 송강의 무덤 앞에 쓰러져 죽자 유족들은 그 녀가 송강이 사랑했던 강아임을 알고 묘소 옆에 안장했다. 후손들은 그녀를 의기(義妓)라고 예우해 주었다. 우암이 선학 송강의 묘소를 이전하면서 강아의 묘는 그대로 두었다. 생전에 그토록 옆에 묻히고 싶었던 님을 또 잃은 강아. 고양의 강아 무덤은 이렇게 홀로 남게 된 것이다.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은 조선 정조 때 사대부로 본래 경기도 안산에서 살았다. 표암이 유명한 것은 바로 위대 한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점이다. 경기도 안산 처가에서 낙향하여 살던 표암은 어머니 손을 잡고 온 일곱 살 총명한 단원을 만나 스승이 되었다. 스승을 수발하며 수학한 단원은 18세에 표암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단원이 반듯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표암의 영향이다. 단원은 23세에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도화서 화원이 되기까지 성장을 풍속화로 남겼는데, 이 그림에 표암의 유유자적한 모습도 보인다. 만년에 단원은 스승을 모시고 강원도 보은(報恩)유람을 떠난다. 스승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금강산을 사은으로 보답해드리기 위함이다. 단원은 이 여행에서 명작인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70폭을 완성했다. 진천군이 문백 땅에 묻힌 위대한 문인 송강과 강암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행사라도 매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 붙여 의기 강아의 묘소를 송강 곁으로 이장하는 문제도 논의 해봤으면 한다.
미녀배우 헬런헌트 주연의 영화 '워터댄스'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데 까치가 등장한다. 제비가 부러진 다리를 고쳐 준 보은으로 박씨를 물어다 주어 부자가 됐다는 한국판 흥부전과 비슷한 스토리 구조다. 이 영화는 도마뱀의 공격을 받은 까치를 구해 절망에 빠진 주인공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받는다는 줄거리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까치가 지금은 제일 골치 아픈 새로 전락했지만 우리 민담 속에는 길조였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설날 새벽에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 해에는 운수 대통한다고 믿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귀한 인물이나 손님의 온다는 속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처연한 남도 민요 흥타령 가운데 이런 소리가 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좋은 님이 오신다는데 / 삼경 되면 오시려나 / 고운 마음으로 고운님을 기다렸건만 / 고운님은 오지 않고 베게머리만 적시네 불교 설화에서 까치는 부처의 뜻을 전하는 행운의 상징이었다. 칠월칠석날 까치는 하늘로 올라가 견우직녀의 해후를 돕는 오작교(烏鵲橋)를 놓는다고 생각했다. 강희자전에는 '한자로 작(鵲)이라고 쓰며, 길조라는 희작(喜鵲), 소설 속에서는 신녀(神女), 불교경전에는 추니(비구니)로 이는 범어다(又喜鵲,小說謂之神女. 藏經謂之芻尼. 芻尼,梵語鵲)'라고 나온다. 신라 말 승려 보양(寶壤)이 절을 지으려고 청도군의 한 고개에 올라갔다가 까치가 땅을 쪼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을 파 보았다. 그 곳에서 옛 벽돌이 나왔는데 보양은 벽돌을 모아 절을 세우고 작갑사(鵲岬寺)라 이름 지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지금의 미호천은 예전에는 까치내로 불렸다. 여지도서에는 북강외이면의 남쪽에 '鵲川' 즉 가치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오근진과 작천 둘 모두 관의 북쪽 20리에 있다. 곧 청안 반탄(磻灘)의 하류이다. 한 갈래는 진천과의 경계에서 흘러나오고, 한 갈래는 괴산과의 경계에서 흘러나온다. 한 갈래는 회인과의 경계에서 흘러나와 작천에서 합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까치내가 미호천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근세의 일이다. 이제 미호천을 미호강으로 명명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고 있다. 잘 개발하여 청주의 발전 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강을 어떻게 개발하고 가꾸느냐에 따라 미래 청주의 모습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까치내는 주변은 수 만년전 구석기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산 곳이다. 한국 구석기문화연구의 공로자이며 원로인 전 충북대 이융조 교수가 찾은 세계 최고의 소로리 볍씨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이 볍씨는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의 다층위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최고 볍씨로 알려졌던 중국 후난성의 11,000년 전 볍씨보다 수천 년 더 오래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았으며 서둘러 박물관 건립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미호강 유역에는 이 유적과 더불어 수많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산재해 있다. 공주 석장리 유적에 버금가는 중요 유적이 찾아질지도 모른다. 이런 문화유산을 기초로 하여 미호강 개발을 추진한다면 세계적 명품 도시가 될 것이다. 미호강 시대를 준비하면서 먼저 강 유역의 유적에 대한 지표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북송 제8대 황제 휘종(徽宗.趙佶)은 예술가였다. 글씨, 그림, 시를 짓는데도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국립대만박물관에 소장 된 휘종의 매화도를 보면 그 품격이 대단하다. 너무 예술에 심취한 나머지 그만 국정을 게을리 하여 북방 금나라 군에게 잡혀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휘종이 지었다는 '궁매분담(宫梅粉淡)'이란 시는 궁궐에 핀 봄 매화를 노래한 것이다. 구중궁궐에 갇혀 봄에 핀 매화를 완상한 풍모를 그린 것인데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비유하여 슬픈 구석이 있다. 시제는 봄이 오는 것을 노래하네(声声慢.春)이다. '성성만'은 북송의 여류문인 수옥 이청조(漱玉 李淸照)가 먼저 죽은 남편을 그리며 쓴 서정시다. 휘종이 수옥의 시를 사랑하여 시제를 이렇게 붙인 것인가. 궁궐의 매화나무가 꽃잎을 날리니(宫梅粉淡) / 냇가 버드나무도 고르게 피네(岸柳金匀) / 황궁에도 봄이 잠깐 돌아오는 경사(皇州乍庆春回) /대궐문 끝에(凤阙端门)/높은 대를 세워 봄을 맞네(棚山彩建蓬莱) - 필자 의역 휘종의 이런 매화사랑을 흠모하여 후대에는 도자기에 궁매분담 시구를 각자해 즐기는 풍모가 있었는데 그 중 청나라 건륭황제가 유명하다. 황제가 송나라 명품 여요(汝窯) 자기에 직접 휘종의 시를 새겨 완상한 도자기는 천문학적 가격에 경매되었다고 한다. 매화 사랑이라면 조선 유학의 태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빼 놓을 수 없다. 퇴계문집에 매화를 읊은 것이 107수나 된다. 퇴계는 왜 이렇게 매화에 특별한 집념을 가졌던 것일까. 찬 겨울을 인고하여 요염하게 피는 매화를 선비의 기상으로 여긴 것일까. 단양군수로 재직한 48세, 9개월 남짓 짧은 재직기간 동안 매우 인상적인 로맨스가 있었다. 바로 나이어린 두향이란 관기였다. 지방 수령은 관청에 소속된 관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당시 퇴계는 두 번째 부인마저 사별하고 홀로 임지에 부임하여 외로웠다고 한다. 두향은 소리를 잘하고 악기도 잘 다뤘다. 그런데 이 어린 기생은 애지중지하던 아름다운 분매(盆梅)를 퇴계에게 선물로 주었다. 매화를 좋아한 퇴계가 두향의 분매를 선물 받고 매우 감동했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전략)나는 세상을 비추는 달이려니 / 몇 생애를 살아야 매화가 될까(후략)' 두향을 단양에 두고 냉정하게 고향 안동으로 돌아 온 퇴계는 매일 매화시를 써 그리움을 달랬다. 눈발이 흩어지는 이른 봄날 옥빛으로 피어나는 연한 꽃잎을 두향으로 생각한 것인가. 두향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퇴계는 속 마음을 토로하지 못했다. 멀리 떠나고서야 두향을 생각하는 정이 더했던 모양이다. 퇴계는 임종하는 날 아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유언했다. 가냘프게 피어나는 꽃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 진 두향을 보살펴주라는 속마음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두향은 퇴계가 임종하는 날 강선대에 꽃잎처럼 몸을 날렸다. 임의 저승길을 함께 가기 위한 것이다. 지인의 사무실에서 대한(大寒) 추위에 요염하게 피어나는 분매(盆梅)를 감상했다. 쉽게 보지 못하는 진귀한 분매로 두향과 퇴계의 애틋한 비련이 생각난다. 이른 봄날 코로나가 좀 시들면 단양 강선대에 가서 매화향 부터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