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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의 '결' - 전통의 결, 잇다

충북도무형문화재 4호 청주 신선주

  • 웹출고시간2017.02.02 18:05:00
  • 최종수정2017.02.02 18:05:00

무형문화재 박남희씨와 이수자 박준미씨가 한약재 선별 작업을 하고 있다.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평소에 술 익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빨리 닿을 줄 몰랐다. 체험의 장을 만들기까지 시(詩)의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순 없다.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 시인에게 보낸 시 '완화삼'에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란 시구와 박목월의 화답시 '나그네'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란 시구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주 재료인 12가지 한약재와 찹쌀 누룩.

참으로 낭만이 넘치는 감각적 시어이다. '술 익는 강마을'과 '타는 저녁놀' 그저 상상만 해도 시각과 청각, 미각과 후각, 촉각 오감을 자극하고 남는다. 시인은 일제 치하라는 비극적 현실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 가락을 잊지 않고, 어쩌지 못하는 애수(哀愁)를 시(詩)로 토해낸 것은 아닌가 싶다. 손수 빚은 전통주와 감성적 사유는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박준미씨가 고두밥을 식히고 있다.

정초에 술 익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에 이수자와 날짜를 못 박는다. 그리고 은사님의 조언으로 인문학 특강을 겸비한 신선주 체험으로 거듭난다. 체험 장소는 부모산 아래 아담한 한옥으로 자리한 현암재는 무형문화재 제4호 청주 신선주 연구소다. 요즘 인문학 수업이 인기라고 하지만, "인문학과 전통주, 삶의 결을 만나다"란 주제는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생소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술을 빚는 이도 글을 짓는 이도 사람이다. 그 사람만의 결에 따라 술맛도, 글맛도 달라지리라 본다. 이번 체험으로 전통주와 인문학이 생활 속 깊이 파고 들리라 믿는다.
신선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성과 인내의 결과물이다. 전통주 이수자인 그녀는 기계 문명 편리주의에 의탁한 우리의 삶과는 다르게 불편한 환경을 온몸으로 고수한다. 바닥에 물이 조금만 떨어져도 얼어붙는 동장군이 납신 날, 사람들의 시선은 맨손으로 쌀을 씻는 이수자의 붉게 언 손에 집중된다. 찬물에 찹쌀을 투명한 빛의 물이 나올 정도로 백번 이상을 씻어야 한단다. 쌀을 깨끗이 씻는 작업은 술맛을 좌우하는 일이라 손수 작업한단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일은 남다른 정신이 없으면 어려운 작업이다.

박준미씨가 신선주 증류 소주를 내리고 있다.

전통주는 시공간을 넘어 그리움을 낳는다. 쌀을 안친 항아리에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다. 이어 이수자는 밀가루를 손으로 돌돌 길게 말아 항아리의 틈새에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루번을 입힌다. 이 과정을 지켜본 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과거의 전설을 불러낸다. 말없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는 이도 있고, 삼삼오오 엇비슷한 추억을 불러내 이야기꽃을 피운다. 장작불 앞에서 고두밥이 익을 동안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기다림을 배우고, 군것질이 없던 시절 시루번으로 형제들과 나눔의 정을 돈독히 쌓던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번진다.

지난해 문의문화재단지 문산관에서 열린 16개국 외국인 대상 신선주 체험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술을 빚고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성을 낳고, 전통주로는 감성을 낳는다. 여느 집이나 지난하여 쌀밥이 귀하던 시절이 아닌가. 명절 밑이나 집안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집안에 내놓을 것이 변변치 않다. 그러니 집집이 집안 분위기를 화하게 바꿀 술이 필요했으리라. 인정으로, 맛으로, 향기로 스며드는 옛 선인은 낭만을 즐기는 감성 시인이자, 전통주를 빚는 장인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문명을 탐하는 도시인은 쉽게 잊히지만, 전통을 이어가는 장인은 예술가로 남는다.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나날이 솟구치는 현대에선 옛것을 익히고 고수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때론 거친 세파에 설움으로, 외면으로 가슴에 진한 통증으로 다가오리라. 위대한 문화유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환경과 고난을 감내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이수자 박준미 선생이 있기에 가능하다. 잊히고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을 불러 모으는 열정과 정성이 그 맥을 이어간다.

빚은 술을 숙성하고 있는 모습.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4호 청주 신선주는 오랜 역사와 기록이 있는 전통주이다. 함양 박씨 집안에 400년 동안 이어온 가양주로 기능보유자 박남희께서 맥을 잇고 기능 이수자 딸 박준미에게 전해진다. 신선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신 강장제로 쓰이던 각종 생약재가 부재료로 사용된다. 장기간 복용하면, 연연수명(年年壽命)하여 장수한다는 약용주로 손님이 많은 종갓집에서 접대 및 보양주로 전해진다.

신선주의 유래는 신라 초기 최치원 선생이 이곳 주산의 신선봉에 올라 글을 쓰며 속리산을 바라보며 신선주를 빚어 즐겨 마셨단다. 그 자리에 후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설화이다. 신선주의 비법은 '동의보감 감기록'에 수록된 '신선고본주'를 바탕으로 자가 제조한 약주로 이수자 박준미의 박래순 고조부님께서 기록해 놓은 가전 비망록『현암시문합집』에서 신선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준미 집안의 신선주는 약주와 소주로 구분된다. 덧술을 만들지 않아 제조과정이 단순할 것 같지만, 각 부재료의 비율과 온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술 빚기 과정이 예상과는 달리 복잡하다.
전통주는 느림의 미학 산실이다. 술에 관하여 문외한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꿈꾼 것이다. 술 익는 소리는 '빠름'을 외치는 도시인에겐 가당치도 않은 체험이다. 고두밥과 누룩 및 여러 가지 한약재를 넣고, 손으로 수없이 치대어 항아리에 담아, 적어도 하루나 이틀을 기다려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쌀을 불리고 술이 익기까지 과정이 중노동에 가까운데 다시 기다림이란다. 전통의 결을 맛보기 체험으로 그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소리인 것 같다.

술 익는 현암재에서 사나흘 묵고 싶다. 불타는 저녁놀도 하염없이 바라보고, 술 익는 소리도 한유히 즐기고 싶다. 지인은 술 익는 소리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같단다. 다른 이는 수백 년 묵은 노송의 솔바람 소리처럼 들린다고도 한다. 어서 투박한 항아리 안에서 술 익어가는 향과 보글거리는 발효 소리를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 그러면 무뎌진 온 감각이 생기 얻어 삶의 신산함도 잊고, 더불어 삶의 결도 풍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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