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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6.04.28 15:07:46
  • 최종수정2016.04.28 15:07:46

신록으로 감싼 비각의 봄 정취.

깊숙한 산골 보련산 자락에 자리한 보탑사는 지금 봄꽃 잔치 중이다. 이곳은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도 꽃을 보고자 다녀갈 정도로 잘 가꿔져 있다. 이 모두가 사찰 비구니 스님들의 바지런함 덕분이다. 수행 중 짬을 내 꽃과 나무를 손수 가꿔 나그네 지친 심신을 한결같이 살피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들꽃과 희귀한 꽃들이 수두룩하다.

오늘은 울긋불긋 피고 지는 한련화가 눈길을 끈다. 전각 앞 순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는 안개꽃도 보기 좋다. 화사한 꽃들에 매혹되어 걷다가도 마지막으로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모른 척 스칠 수도 있는데 그곳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자력이 있는 것 같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정원 한 쪽에 자리한 비각으로 향한다.

신록으로 감싼 비각의 봄 정취.

비각으로 다가갈수록 심장 박동은 거세지고 발걸음 또한 빨라진다. 무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신의 생애를 살펴보라는 소리인가. 비가 만들어진 시기는 여러 가지 정황상 고려 초기라 추측하니 천 년을 묵은 이름 없는 비석이 아닌가. 후인은 비의 주인을 알 수 없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차라리 예전처럼 땅속에 묻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리라.

단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여백의 화강암으로 조각된 진천연곡리석비. 비에 관한 정확한 근거를 모르니 더욱 그 사연이 궁금하다. 그러니 백비를 보는 사람마다 상상을 초월한 생각과 말들이 떠돌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짧은 추측성 기록만을 읽고 상상할 뿐이다. 우리 고장에 많은 문화재 중 백비가 나를 사로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면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여백, 그 여백의 미에 이끌려 기억의 한 자리를 깊게 자리하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나는 누구보다 여백을 좋아했던 것 같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넓은 창공과 스케치하기 전 하얀 도화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흐뭇했다. 백지를 앞에 두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에 은근히 흥분도 되었던 것도 같다. 또 하나, 유년시절 싸리비로 깔끔하게 빗질된 너른 마당이다. 티끌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연갈색 흙 마당이 한글을 깨치던 거친 백로지 같이 여겨져 좋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공허'라는 어둑한 충만, 여백을 좋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만의 무언가를 적을 수 있다는 것에 설렌다. 백지는 식구가 많은 집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이자 치유의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여백을 채울 대상과 이야기 거리를 고민하는 자체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백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내로라하는 시인의 시(詩)를 암송하여 옮기고, 누군가에게 말 못할 비밀도 풀어 놓으며 나의 생활을 진솔히 담았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행복한 작가로 성장한 것도 여백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의 생애를 돌아보면, 여백은 사람의 인생도 바꿔 놓을 수 있는 신기한 마력이 있다. 여하튼 여백의 역할은 자신의 업(業)이나, 취미생활 그 활용에 따라 다르리라 본다. 여하튼 연곡리 백비는 할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한자도 적지 않고 상상에 맡겼으랴. 그게 아니라면, 전남의 박수량 백비처럼 청백리에 누가 될지 모른다고 글자 한자도 적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으리라.

비석은 대부분 누군가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다. 세월은 흘러 선인은 가고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남아 그의 정신을 기리라는 이치일 것이다. 그러니 비석의 비문에는 그 사람의 생애나 업적이 적히리라. 연곡리석비는 명문이 적히지 않아 궁금증을 유발하여 유명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또한 백비라서 더욱 흥미로워 자꾸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보물 404호 진천연곡리석비가 대표성을 띠는 것은 백비 때문만이 아니다. 석비의 전신을 톺아보면, 석공이 대단히 공을 들인 것이 역력하다. 전남 장성의 박수량 비석은 단조로운데 비하여 연곡리석비는 조형미와 예사롭지 않은 솜씨에 탄복하리라. 여기저기 파손된 부분이 있어 아쉽다. 수백 년 땅속에 묻혀 있다가 깨어났으니 기존의 상태로 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농부에게 발견되어 비의 형상을 갖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한 아홉마리의 용의 비머리.

백비의 비머리는 아홉 마리의 용(반결구룡蟠結九龍)이 여의주를 서로 물고자 서로 엉켜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는 듯 사실적인 형상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지금껏 용들의 승부수가 나지 않아 여의주를 물지 않았기에 후인이 백비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무생물의 돌로 용트림하는 듯 섬세히 표현한 예인의 솜씨에 감탄할 뿐이다.

백비의 받침돌-미소짓는 말머리 형상.

비석의 받침돌 또한 정교하다. 받침돌은 등 거죽을 봐선 거북등 문양의 조각인데, 그의 얼굴은 말의 형상을 닮았다. 오랜 세월을 걸쳐 마멸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얼굴 부분이 자른 듯 밋밋하여 얼굴과 몸이 다르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앞발톱은 아쉽게 떨어져 나갔고, 날카로운 뒤 발톱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조형미가 우수한 연곡리석비가 우리 고장 문화유산으로 남아 자랑스럽다. 솜씨가 뛰어난 백비를 세울 정도면 만고에 기릴 공덕을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하루빨리 역사적 문화적 사료를 찾아 백비의 한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말머리 입술이 꼭 봄꽃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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