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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의 결 - 철당간에서 만나자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

  • 웹출고시간2016.08.04 20:03:06
  • 최종수정2016.08.04 20:03:06
[충북일보] 청주에 모항은 바다가 없다. 그렇다고 표류하는 배가 아니다. 천 년의 혼을 실은 돛대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잖은가. 돛대의 상징인 용두사지철당간은 무심천이 해자로 지형상 주성(舟城)처럼 청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전란에 난파선처럼 파괴되었다는 설과 돛대에 잦은 홍수 피해를 줄이고자 염원을 담았다는 설도 있다. 당간이 나에게 배의 돛대로 인지된 것이 언제인가.

예전에 미처 모르고 지냈던 물상이다. 아니 당간은 이미 생활 속 깊이 자리하여 일상처럼 여겨져서인가. 내가 당간을 인지한 시점은 인생의 전환점과 맞물린다. 클럽 회원 세 명이 영화를 보고자 했으나, 한 친구가 약속 시각이 다 되어 참석을 못 한다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삐삐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연락을 취할 방법은 약속장소로 직접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단둘이 영화를 보고 극장 밖을 나서니 보기 드문 신세계가 펼쳐진다. 우중충한 주위 건물과 지붕, 거친 바닥을 눈으로 뒤덮어 오점 없는 세계, 설국이다. 무릎까지 쌓인 폭설이 내린 것이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물상은 설원 위 치솟은 깃대. 하늘을 찌르는 듯 깃대에 하얀 깃발이 나부끼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 순간 온몸에 느껴졌던 신기한 기운을 어찌 잊으랴. 그 잊히지 않는 몸의 기억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

철당간은 그와 함께 내 삶에 불쑥 들어온 것이다. 그날 극장에서 단둘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나의 동반자가 되어 있을까. 천 년이 넘도록 한자리에 묵묵히 자리한 철당간. 청춘 시절 으레 만남의 장소로 정하고, 지인과 영화도 보고 떡볶이기도 나누며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중심 상권이 낡고 시들해져 예전의 멋과 맛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목적지가 시내라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철당간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나의 운명적 만남이 당간 앞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곳엔 문명의 무수한 흔적과 앞서간 이들의 향기가 배여 있으리라.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어떤 생각으로 철당간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 당간을 만들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세 번째 철통에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건립연대가 쓰인 당간이다. 이 기록은 철통의 주조와 양각으로 글자를 넣은 솜씨는 그 당시의 주조 수준과 선인의 지혜를 알게 한다. 당간은 대부분 돌로 조각되었는데, 철로 주조된 것은 우리 지역이 철의 주산지라는 걸 단적으로 알린다. 무엇보다 청주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直指)'가 탄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시사한다. 여러모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용두사지철당간은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고인쇄박물관 구름다리에 위치한 복원된 용두사지철당간.

철통에 주조된 기록을 통하여 10세기경의 지역 문화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고 그릇된 생각을 깨뜨려 바른 도리를 드러낼 목적으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기구이다. 962년 학림 학생 김원이 짓고 손석이 새겼다는 용두사 철당간기 일부이다. "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며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청주는 교육의 도시다. 우리 지역에 교육기관이 많은 점도 있지만, 더불어 입증할 자료가 바로 '당간기'라는 설도 있다. 당간을 세울 당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교육과 관련된 '학원경(學院卿)이나 학원랑중(學院郞中)' 그 직책이다. 청주지역에는 문헌 기록보다 앞서서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으로 중앙에 뒤지지 않는 지방 문화의 중심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거선(巨船) '청주호'의 무쇠 돛대는 청주를 찾는 사람들에겐 영원한 등대지기다. 현재 용두사지철당간은 아쉽게도 '용두'가 사라지고 없다. 애초 높이는 30단에 18m가 되었으나 10단이 없어져 키가 13m로 줄어든 상태다. 그러나 당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그 삶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수호신처럼 머물리라. 철당간은 국보 이전에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들의 이정표가 되거나 약속장소가 되어 마음 속 깊이 남아 존재가치를 더하리라. 우리의 존재가 흔적 없이 스러지고 역사 속에 잠들더라도 철당간은 새로운 천년의 세월을 후인과 함께 역사를 증언하리라.

철당간 당간기.

용두사지철당간은 청주의 대표적인 조형물이다. 또한, 청주 시민에 삶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거란의 침입과 몽골의 항쟁,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병들의 청주 읍성 탈환 승리를 똑똑히 보았으리라. 철당간이 바로 청주의 산증인이 아니겠는가. 이제 당간에 걸어야 할 깃발에 선인의 정신과 문화의 심혼을 담아야 한다. 무엇보다 청주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하리라.

오늘은 모처럼 철당간 앞에서 만나자고 지인을 부르리라. 지금의 철당간은 낡고 끝이 닳아 모지라졌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힘찬 깃발과 성했던 읍성을 상상하며 그 둘레를 느리게 걸어보련다.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한가로이 용두사지철당간을 바라보며 천 년의 웅숭깊은 기운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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