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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햇살이 곱다. 공기도 한결 보드랍다. 살갗에 이는 바람에도, 물기를 머금은 나목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불현듯 기억 너머에 머문 흙냄새 풀냄새 바람 냄새 햇살 냄새 같은 소싯적 봄 내음이 스치며 지나간다.

고향이 시골인 때문인지 이맘때면 어릴 적 뛰놀던 산과 들이 개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어린 내게 봄을 알려주던 달래 냉이 씀바귀 벼룩나물 꽃다지… 아득히 먼 시간 속에 어머니와 봄나물을 캐던 추억이 말을 걸어온다. 봄 내음이 그리워 친구에게 냉이 캐러 가자고 전화를 했다. 친구는 단번에 알겠다며 "봄 향기 맡으러 가자는 거지?" 하며 혼쾌히 승낙을 한다. 그사이 호미 두 개 목장갑 가방을 챙겨 그녀를 기다렸다.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 동무와 봄을 마중 가는 길은 아이처럼 정답고 설렌다.

시내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려간다. 봄을 준비하는 들길이 부산해 보인다. 매섭던 추위는 저만치 물러가고 포근히 흐르는 봄볕은 언덕을 녹이고 있다. 들길을 달려 미원 못미처에 묵은 밭을 발견하고 차에서 내렸다. 파릇파릇한 봄풀들이 밭둑과 고랑에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다. 겨울을 이겨낸 봄풀들이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허리를 굽히고 나물을 찾아다닌다. 마침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냉이를 발견했다. 마음은 노다지를 캘 듯이 고조되어 간다. 소복이 모여있는 냉이는 봄을 노래하듯 도란거린다. 아직 이른 봄이건만 벌써 좁쌀만 한 꽃을 피운 냉이도 보인다. 한뿌리 두 뿌리 또 한 뿌리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억을 캔다. 어떤 것은 뿌리가 깊게 박혀 도무지 딸려 나오질 않았다. 엄동설한에 어떻게 뿌리를 그토록 깊이 내렸던 걸까, 뿌리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아기처럼 달래고 얼른 후에야 튼실한 냉이를 캐냈다. 곧고 흰 뿌리는 유독 진한 향을 풍기며 한참 동안 코끝에 머물렀다.

초근목피라 했던가, 보릿고개를 살아내신 어머니의 봄은 처절했다. 이른 봄 어머니를 따라 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기억이 뭉클하다. 어머니는 추위가 가시기 전 이른 봄에 들로 나가셨다. 논두렁을 다니며 씀바귀를 캐고 바람이 차가운 들녘에서 종일 나물을 뜯었다. 어머니의 손은 언 땅처럼 다 터져있었다. 어린 나는 묵은 덤불 아래 돋아난 냉이를 캐서 어머니 앞치마에 담아드리던 풍경이 봄바람 사이로 흘러간다. 뜯어온 나물을 마루 끝에 펼쳐 놓고 나물 이름을 가르쳐 주시던 어머니, 어느새 그 이름들도 흐릿해 간다.

한 움큼 캐온 나물을 씻는 동안에 따사로운 봄볕과 이따금 들려주던 종달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잘 다듬어 씻어 소쿠리에 바쳐 놓고 보니 곧고 하얀 냉이 뿌리에서 어머니의 삶이 보이는 듯하다. 어둡고 시린 들판에서 올곧은 심성으로 묵묵히 추위를 견뎌낸 어머니라는 사랑의 덕목이 봄의 서사가 아닌가, 조물조물 추억을 무쳐 식탁에 올리니 한가득 봄 내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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