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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여름 - 킬링필드의 악몽

원혼 달래는 왓트마이 사원의 염불소리

  • 웹출고시간2010.05.02 18:45: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본보논설위원 겸 프리랜서로 활동중인 임병무씨가 지난 4월, 캄보디아의 문화현장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시엠립의 앙코르와트 사원을 비롯한 여러 문화현장과 현대사의 가장 잔혹한 역사 현장인 킬링필드 등 캄보디아의 이모저모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계절은 3계절뿐이다. 우리나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게 아니라 더운 계절, 아주 더운 계절, 미치도록 더운 계절만이 존재한다. 4월은 미치도록 더운 계절에 속한다. 한반도에서는 진달래꽃에 이어 철쭉이 봄의 한 중간을 달리고 있는데 인도차이나 반도는 펄펄 끓는 가마 솥 더위는 지구상의 생명체를 무차별로 구어내고 있다. 그곳 여름의 보통 기온은 섭씨 36~38도를 기록하는 데, 체감온도는 42도쯤 된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곳곳을 여행하자면 하루에 생수 4~5병은 준비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했다간 탈진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모자나 양산은 필수장비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속칭 '뚝뚝이'를 타면 자연의 바람으로 염제(炎帝)를 어느 정도 쫒을 수 있다. 5~6월, 우기로 접어들면 고온 다습하여 여행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섭씨 40도가 넘으면 일상사를 멈추고 휴식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겨울에 해당하는 1월의 기온도 섭씨 18~20도에 달하는데 이때는 더러 동사자도 발생한다. 더위에 익숙한 현지인들이라 그런지 36도쯤의 폭염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왓트마이 사원에 킬링필드 당시에 학살된 사람의 두개골과 사지뼈를 모아 위령탑을 세웠다.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 왕국의 영화를 접어두고 가장 먼저 '킬링필드(Killing fields)'라는 부정적인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롤랑 조페 감독에 의해 1980년도 중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엄청난 충격을 준 바 있다. 뉴욕타임스의 시드니 샌버그 기자(샘 워터스톤 분)는 1973년, 캄보디아 내 미군의 오폭으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특파된다. 그는 현지에서 통역관으로 디스 프란(하잉S. 응고르 분)을 채용하게 된다.

1978년 8월, 공산반군인 크메르 루즈에 프놈펜이 함락되기 직전 시드니 샌버그는 프놈펜에 도착한다. 미군의 오폭을 취재하기 위해 찾은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루즈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된다. 시체더미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처형장을 헤치며 태국으로 탈출하는 디스 프란의 여정이 처절하게 앵글 속으로 녹아든다. '붉은 군대'라는 뜻을 가진 크메르 루즈는 부르조아적 요소가 있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지식인, 유학생, 부유층, 구 정권의 관계자, 베트남의 협조자, 심지어 안경을 쓴 사람까지 마구 학살했다. 안경을 썼으면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으로 몰았다. 그런 악몽으로 인해 캄보디아 내에는 50세 이상 장년층에서 안경을 쓴 사람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처형의 방법도 아주 잔인했다.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 비닐봉투를 씌워 죽였고, 죽창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전기 드릴로 두개골을 뚫어 죽이기기도 했다. 심지어 임신한 여인의 젖꼭지를 칼로 도려냈다는 증언도 있으며 이들을 처형하기 전, 생체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폴 포트가 이끄는 급진적 공산주의자들의 집합체인 크메르 루즈는 천인공노 할 대학살과 더불어 학교와 화폐를 폐지하고 도시인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 동안 캄보디아 전체인구 700만 명 중 무려 3분의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살하였다. 공산주의의 이상향을 꿈꾸던 크메르 루즈 정권도 1979년, 베트남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고 폴 포트는 타이 국경의 밀림지대에 숨어 게릴라전을 펴다가 1997년 6월, 체포되어 얼마 전에 사망하였으니 인생사 부질없는 것이고 악(惡)의 말로 또한 사필귀정의 범주 안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셀로스 사르 라고도 불린 폴 포트는 파리에 유학하여 여러 번 낙제했다. 급진적 공산주의에 심취한 그는 차츰 세력을 불렸다. 처음에는 론놀 우파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갔다. 국민들은 그 후에 닥칠 대학살 극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폴 포트는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혁명의 대열에 앞장서듯 학살의 첨병으로 청년들을 내세워 이상적 공산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이는 인간 지옥만 연출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희생된 영령의 명복을 빌고 있는 왓트마이 사원의 불상.

프랑스의 지배와 베트남의 침략, 그리고 시아누크 공이 이끄는 왕당좌파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 장군의 우파 정권, 크메르 루즈 급진좌파 정권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경험한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즈의 무차별 살육에 또다시 몇 년을 떨며 지냈다. 지금도 전 국토의 25% 정도 되는 지역에는 내전의 흔적인 지뢰가 매설돼 있어 민간인의 접근을 막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지뢰 등 전화(戰禍)를 입은 장애인들이 관광지에 즐비했으나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킬링필드는 돌이키기조차 싫은 악몽이다. 그로 인한 사망자도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고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를 오간다. 여기에는 미군의 오폭에 의한 사망자가 40만 명~50만 명 포함된 것이고 150만 명은 크메르 루즈에 의한 희생자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월맹의 보급로가 되는 캄보디아 국경의 도로를 폭격했는데 이때 오폭으로 인해 상당수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현지에서는 미군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 사망을 1차 킬링필드라 부르고 크메르 루즈에 의한 학살을 2차 킬링필드라 부른다.

위령탑 옆으로는 당시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자료가 전시돼 있다.

전국에 이 같은 킬링필드는 수십 군데에 산재해 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고도 시엠립에서 교외로 조금 나가면 작은 킬링필드라고 부르는 왓트마이 사원이 있다. 현지에는 킬링필드 당시에 죽은 사람의 두개골과 정강이 뼈 등을 모아 탑을 세우고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킬링필드 위령탑은 밖에서도 잘 보이도록 유리함으로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 해골 탑조차 관광지로 변하는 기이한 세상이다. 그 옆으로는 크메르 루즈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인근의 사원에서는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는 염불과 목탁소리가 조용히 사바세계로 울려 퍼진다.

그런 암울한 역사로 인해 캄보디아 사회가 주름질 만도 한데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별로 없다. 치가 떨리는 인류사의 비극이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 혹독한 역사의 얼룩을 빼내며 새 삶을 일구고 있다. 국민소득 600달러의 가난한 나라임에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친다. 아마도 힌두신이나 불타의 법력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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