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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여름 - 신들의 고향 앙코르와트

서양위주의 문명사 바로 잡아야
회랑의 부조는 신들의 이야기이자 왕국의 역사

  • 웹출고시간2010.05.18 19:53:5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지구상의 석조 건축물 가운데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보지 않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석조 건축물이라고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캄보디아의 밀림에 묻힌 앙코르와트를 보고 난 후라면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쉽게 인정할 것이다. 동·서 문화를 비교 우위론 적으로 단순히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서구의 여러 건축물보다 앙코르와트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석조 건축물이자 위대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데 이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동·서 문화를 비교하는데 갈등을 겪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세계사의 중심축이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다분히 서구 위주나 서구 우월주의의 시각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기실 인류의 농경문화는 터키, 메소포타미아의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돼 발칸반도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됐음에도 오늘날의 세계문화사는 문명의 시발점을 지중해의 그리스나 로마에 두고 있다. 이런 서구 문명 우월주의나 서구 문명 중독 증세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앙코르와트의 문화를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

우리는 트로이 전쟁사를 엮은 호메로스의 대 서사시, '일리오드' '오디세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어도 힌두신화를 기록한 두 고전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는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앙코르와트 벽면을 빼곡히 장식한 신들의 이야기나 크메르 왕국사에 대해서도 매우 생경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나라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9~14세기에 걸쳐 인도차이나 반도에 거대한 대 제국을 건설했던 캄보디아는 오늘날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주홍글씨로 인해 크메르의 문명자체마저 체감적으로 평가절하 되는 억울한 신세다.

정글 속에 자그만치 400년이나 유기되었던 앙코르 왕국. 일찍이 원(元)나라 때 사신 주달관이 이곳을 둘러보고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라는 견문록을 남겼지만 세인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했다. 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인 앙리 무오에 의해 앙코르의 문명은 발견되었고 차츰 신비의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고 이루 헤일 수 없는 논문과 관련 서적이 발간됐음에도 앙코르와트의 비밀은 커녕, 그 성격조차 확실히 규명하지 못했다. 일설에는 힌두교, 불교의 사원이라고 하며 앙코르 제국의 왕궁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어떤 학자는 역대 왕들의 능묘(陵廟)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하나 궁금증을 푼 확답이 없다. 다만 이 세 가지 기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에는 대체로 합일된 견해를 보인다.

앙코르와트의 그 수많은 사원은 신들의 고향이고 힌두교와 불교의 법당이며 왕들의 제전(祭殿)이었다. 우주의 신 브라만, 창조와 질서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 뱀의 신 나가, 남근의 신 링가 등이 돌방과 첨탑에서 출몰하며, 힌두교와 불교의 법력이 향불을 타고 사바세계와 서방정토를 오간다. 앙코르 제국의 왕들은 이곳에 선조의 위패를 모셨으니 산자의 공간이라기보다 죽은 자의 공간으로서 역할이 더 컸다.

앙코르와트는 도시(앙코르)의 사원(와트)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 일대의 유적 군을 통칭하여 '앙코르와트'라고 부르지만 이를 세분하면 앙코르 왕국의 초기 유적 군과 앙코르와트, 그리고 후기에 해당하는 앙코르 톰(큰 도시, 大王都)으로 나누어 봐야 이해가 쉽다. 처음부터 대뜸 앙코르와트나 앙코르 톰을 보면 기타 유적지가 시시해지기 때문에 초기 유적지부터 관람하는 것이 순서다. 현재 남아있는 사원만 해도 200여개에 달하며 폐사지 까지 합치면 고도 시엠립 일대에 널린 사원은 무려 2천여 개에 달한다. 이를 2~3일에 다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대 유적 군만 보아도 다행이다.


초기 유적군은 9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해당한다. 쁘레야 꼬(신성한 소), 바꽁, 로레이, 반테이 스라이(여성의 성체) 등을 묶어 '롤로오스 유적 군'이라 부른다. 고대 크메르 문명의 중신지로 역대 왕과 왕비가 봉안되어 있고 시바 신 등을 모시고 있다. 초기의 사원은 사암과 라테라이트(홍토석) 라 불리는 벽돌로 지어졌고 건물의 겉에 석회반죽을 바른 다음 조각을 하였는데 이를 스토커 양식이라 한다. 조각은 거의가 돋을새김(부조)방식이다. 사원의 벽에서는 힌두신이 눈을 부릅뜨고, 부처가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압사라(힌두의 여신 또는 보살)가 관능적인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1천여 년의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한 조각의 주인공들을 보면 앙코르 유적은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정교한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반테이 스라이 사원의 벽에 새겨진 '테바다 여신상'의 미소는 '동양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런 조각예술에 경탄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사원의 벽면 곳곳에 신라나 백제의 연꽃무늬 와당(기와지붕 끝 마구리 부분의 막새 기와)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연꽃잎이 여덟이고 자방(씨방)까지 선명하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우리나라의 와당이 어째 캄보디아의 절집에 새겨져 있는 것일까. 혜초 스님이 인도에 가던 도중 잠간 들른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당시 불교문화가 교류한 '불교의 실크로드'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풀 수 없는 숙제다. 바꽁 사원의 입구에서 7개의 머리가 달린 나가 신(뱀) 조각이 금방 관광객을 물을 듯하다.

그러나 이런 초기 유적 군은 앙코르 문명의 서곡에 불과하다. 8세기까지 이어진 푸난, 첸라 왕국은 9세기 초 작별을 고하고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앙코르 시대가 열리면서 크메르 문명은 첫 번째로 꽃을 피웠다. 그 문명을 이어받은 수리아바르만 2세는 12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인 앙코르와트를 지으며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를 열었다. 크메르 문명의 절정은 역시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찾게 된다. 고도 시엠립에서 북쪽 6.5km에 위치한 앙코르와트를 보면 인간의 힘에 대한 어떤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수많은 돌을 일일이 다듬어서 쌓고, 그 건축물 기둥마다 창틀마다 빼곡히 조각의 옷을 입힌 것을 보면 신의 솜씨인지, 인간의 솜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동서 길이 1.5km, 남북으로 1.3k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사원은 우선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되지만 힌두의 여러 신상(神像), 부처상, 그리고 크메르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정교한 부조를 보면 또 한 번 입을 벌리게 된다.


정문은 서쪽에 있다. 정문 입구에는 나가(뱀)신상 등이 거대한 연못을 건너는 출입자를 감시한다. 연못은 외적을 방어하는 시설로 우리나라로 치면 성 밖의 해자(垓字)에 해당한다. 연못은 방어기능과 함께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연못 위의 다리는 분리된 두 세계를 다시 이어준다. 앙코르와트의 첨탑은 5개의 봉우리로 히말라야 산맥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의 메루산, 불교의 수미산을 상징한다. 곧 세계의 중심이 여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정면에서 보면 3개의 첨탑이 보이나 측면에서 보면 5개다. 태양은 중앙첨탑위로 떠오르고 낙조 또한 첨탑을 붉게 물들이며 진다. 그 장엄한 광경을 보려면 매우 부지런을 떨거나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회랑 가운데 방을 들여다보니 거대한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가만히 그 석불의 모습을 보면 몸은 힌두신상이고 머리는 부처다. 힌두신상의 머리 부분이 없어지자 후대에 석불 두상을 만들어 이어 붙였다. 앙코르와트의 조각상들은 이처럼 힌두교와 불교가 접합하며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힌두교 콘셉트로 지어졌으나 후대로 오면서 힌두교의 계급적인 요소가 불교의 평등적 요소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쉬엄쉬엄 구경해야지 그 진면목을 다 볼 수 있다. 너무 서두르다보면 찜통더위에 탈진이 될 수도 있다. 사원 한쪽 편으로는 연못이 있고 야자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제공한다. 그 야자수 그늘아래서 행상이 파는 코코넛이나 망고로 목을 축이는 것도 남국의 별난 정취다.


참배의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회랑에 엄청난 규모의 부조를 만나게 된다. 크메르 왕국의 일대기와 신들의 이야기가 조각되어 뭔가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 왕권의 다툼 장면, 타이(태국)와 전투장면, 코끼리 부대 등 크메르의 역사와 생활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권선징악의 장면도 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도끼로 남근을 자른다든지, 온 몸에 못을 박고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뼈마디를 부러뜨려 불에 던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우유바다 젖기도 유명한 부조로 꼽힌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앙코르와트 사원, 그러나 사원 곳곳엔 총탄 자국이 벌집처럼 전쟁의 흔적을 남겼다. 정부군과 크메르 루즈 반군 간의 교전 흔적이다. 크메르 루즈에 쫓긴 정부군이 급한 나머지 이곳으로 숨어든 것이다. 이곳은 신전이자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폭격은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맨몸에 노란색의 법의를 걸친 사미승이 관광객 사이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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