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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2.06 15:13:01
  • 최종수정2019.02.06 15:13:01

윤기윤

작가

허름한 골목길을 돌아서면 이발소 특유의 붉은 등(燈)이 영국왕실의 늙은 경비병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울소리 요란한 나무 문짝을 밀고 들어서면 정장 차림의 노신사를 만날 수 있다. 과잉친절을 하지 않는 그는 그저 가벼운 눈인사로 손님을 맞이할 뿐이다.

카이제르 수염이 잘 어울리는 이발사는 습관처럼 수염을 한 번 쓱 쓰다듬은 뒤, 수건을 툭툭 털어 왼쪽 팔에 걸쳐놓는다. 수건의 쓰임새는 상황에 따라 변신한다. 우선 손님이 앉을 자리의 먼지를 터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면도칼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는 역할도 한다. 손님이 의자에 앉으면 재빠르게 머리를 살피고는 묻는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그 말에 단골들은 의례히 '늘 하던 대로'나 '알아서'를 외친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손님에 대한 기록들을 끌어내며, 투우사가 가볍고 날렵하게 붉은 천을 날리듯 수건을 목에 둘러준다. 소위 '바리깡'이라고 부르는 이발기계로 머리끝에서부터 살짝 밀어올리고는 날렵하게 생긴 은빛가위를 들고 머리를 정리해간다. 이발을 하는 중간에 손님이 들어와 "언제 끝나죠·" 라거나, "한참 기다려야 하나요·"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예의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끝나봐야 알겠소."라고 머리 깎는 일에 열중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몹시 불쾌하기도 하지만, 오래된 단골들은 습관처럼 낡은 벨벳 소파에 앉아 종이신문이나 겉표지가 떨어져 나간 잡지를 뒤적이며 차례를 기다린다.

이발사는 오직 현재 머리를 다듬고 있는 손님에게 집중하고 모든 친절을 베풀기 때문인 것이다. 단골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 모든 권리와 친절을 한꺼번에 누리는 것을 몸소 알기에 무뚝뚝한 답변이 결코 불쾌할리가 없는 것이다. 귓가에 울리는 가위질 소리와 머리칼이 깎여 나가는 소리는 절묘한 화음이 가미된 음악소리처럼 규칙적이면서 리드미컬하다. 세월이 쌓여 만들어낸 숙련된 손길인 것이다.

어느 정도 머리형태가 완성되면 귀밑으로 하얀 분가루를 발라, 머리의 굴곡을 살피고는 마치 꿀벌의 날개짓 같은 가위질로 원을 그리며 정교하게 다듬어 낸다. 마침내 머리손질이 끝나고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찾아오면 습관처럼 몸은 살짝 경직되고 만다. 이발사는 앞발로 의자 밑에 툭 튀어 나온 버튼을 밟아 손님을 그대로 눕히기 때문이다. 영화 '트랜스포머'처럼 의자는 한순간 침대로 변신한다. 목 전체를 얇은 담요로 덮어주면 잠시 노곤하면서도 기분 좋은 잠이 밀려온다.

양철그릇에 담긴 비누는 두꺼운 강철난로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비누거품을 준비하는 동안 뜨거운 물에 담근 수건을 적당히 짠 뒤, 턱수염을 감싼 채 얹어 놓는다. 따뜻한 기운이 얼굴 전체를 감싸 안으면 완고한 수염들은 유순한 양처럼 숨을 죽인다. 더운 기운이 빠져나간 수건을 내리고 수염과 털들 위로 거품을 듬뿍 묻힌 솔이 얼굴 전체를 부드럽게 쓸고 지난다. 손님의 머리와 얼굴에 행해지는 이 경건한 의식은 누구의 이목구비라도 그 미추를 떠나 바쳐지는 예찬과도 같다. 그야말로 손님이 '왕'이 되는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고(故) 노회찬 의원이 타계 며칠 전, 단골 이발소에 들렀다고 한다. 1927년 문을 연 뒤 그 자리에서 3대째 이어오고 있는 서울 만리동 골목길의 '성우 이용원'이다. 56년 된 세면대, 140년 된 면도칼을 쓰고 있는 곳이다. 그가 죽음 직전 이발소를 다녀갔다는 소식은 어쩐지 애잔한 위안을 준다. 남자로서 가장 소박하고도 극진한 시간을 향유하고 갔을 것이기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들이 오리니.

오래된 이발소라면 으레 걸려 있는 푸슈킨의 시다. 지금 '성우 이용원'에도 걸려 있을까. 이 땅 장년의 사내들이라면 이발소를 드나들며 절로 입에 배었을 그 시를 그도 한동안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가 남긴 무언의 유언처럼 가슴이 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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