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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 - 가까운 아스카

기원전 3세기 벼농사·도기제작술 등 일본의 청동기 '야요이시대' 시작
쓰시마·규슈 등서 출토된 '세형동검' 변한·진한 유적지 유물과 동일
야요이 문화는 죠몬문화 압도하며 성장… 한반도 토대로 기원

  • 웹출고시간2015.08.27 19:11:28
  • 최종수정2015.08.27 19:11:28
[충북일보]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매주 충북대 사학과 임병덕 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를 연재한다. 내용은 '가까운 아스카'(1-2주), '나니와 궁적, 오사카성'(3-4주), '우지(宇治) 뵤도인(平等院)'(5-6주), '도후쿠지와 후시미이나리진자'(7-8주), '아라야시마(嵐山)'(9-10주) 등이다.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번 시리즈는 일본문화의 뿌리가 상당수 한반도에서 시작됐거나 관련이 있음을 심층적으로 전할 예정이다. 임교수는 고대 중국 법률과 죽간 연구의 권위자로,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 전문위원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법류사상사』,『유골의 증언-고대중국의 형벌』, 『중국고대문명의 기원과 전개』,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고대문화사』, 『동양사1』, 『구조율고』 등 다수가 있다.

일본 골목에서 갑자기 만난 마이코상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위치한 '가까운 아스카'를 이야기하자면 이보다 앞서 성립한 야요이(彌生)시대와 야마타이국을 잠깐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일본열도는 기원전 3세기에 벼농사, 도기제작술, 관개기술 등이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농경생활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가 야요이시대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일본의 청동기시대인데, 일본인들의 자국의 시대사구분 명칭은 독특하여 이렇게 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죠몬시대에도 한반도와의 교류는 있었고 특히 한반도와 규슈북부지역에는 유사한 유물이 발되고 있지만, 죠몬문화의 담당자가 크게 바뀐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 야요이 문화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문화와 인골 등이 크게 바뀐다. 벼농사와 금속기가 특징인 야요이 문화는 기원전 4세기 규슈 북부에서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일본 서부에서 동부로 퍼져나가 홋카이도와 서남제도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쓰시마나 규슈의 요시노가리에서 출토된 세형동검은 경상도의 변한, 진한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일하다.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전국 평균으로 죠몬계 30%, 도래계 70%의 비율로 나타나며, 서부에서는 도래계의 비율이 이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안 초기에 정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기나이(畿內)의 1,182개의 성씨 가운데 명확하게 도래계로 분류되는 성씨가 324개에 이르고 있다.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도래계통의 씨족만으로도 이 정도의 숫자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야요이 문화는 죠몬문화를 압도하면서 주변으로 내쫓았다는 것은 명확하다. 7세기 후반에 명확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러한 야요이 문화가 만들어낸 토대 위에 성립되었다.

즉 '일본인'과 '일본문화'가 일찍부터 독창적인 형태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2세기말에는 30여개의 소국이 야마타이국의 히미코(卑彌呼)를 맹주로 하는 소국 연합체가 형성되었으며 왕으로 추대된 히미코는 239년 중국의 위(魏)에 사신을 보냈고 위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동경·견직물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사서에 나온다.

쓰시마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4세기경에는 농경문화의 발달로 생겨난 약 100여개의 작은 부족국가들이 긴키지방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천황을 모시는 야마토정권이 성립된다. 권력을 잡은 왕과 귀족들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분묘(墳墓)를 경쟁적으로 축조하기 때문에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이 시기를 흔히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한다.

고분시대에는 분구의 길이가 100m이상에 달하는 것이 모두 326기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모두 긴키지방의 대수장(大王)을 중심으로 수장연합을 구성했던 각지의 수장들이 그 신분질서에 따라 대소의 여러 규모의 고분을 만든 것이다. 일본 최고의 전방후원묘인 하시하카(箸墓)고분은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소재하는 길이 280미터에 달하는 전방후원묘로 3세기 중엽에 출현하였다.

사쿠라이시는 나라분지 동남부에 위치하며 초기 야마도 왕국의 발상지로 히미코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만으로도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타이국이 긴키지방에 성립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야마타이국이 긴키지방에 성립되었다는 기나이설을 따르면 야마타이국이 야마토 조정의 전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것은 만국의 대종인 황국 일본이 중국에 조공해서 신하의 예를 차렸다는 것이 된다.

근대에 이르러 규슈설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일본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고자 중국 황제에게 신종한 히미코를 야마토조정의 역사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이 주권을 유린한 1910년에 규슈설이 정설로 된 것은 삼한정벌이라는 공적을 쌓은 징구 황후를 히미코에서 명확하게 떼어내려는 의도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사의 서술에서 중국황제에게 신속한 히미코의 존재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여서 히미코를 빼고 일본사를 진공황후라는 신화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규슈의 하카타(博多)는 이미 3세기~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이 대거 거주하였고, 특히 가야를 통하여 청동기와 철기의 교역을 행하는 곳이었다. 즉 규슈 북부는 동아시아의 문명세계에 근접하였는데, 나라분지에 건립된 야마토조정과 그 전신인 야마타이국은 그 체제 유지를 위하여 규슈 북부를 장악하였다.

4세기 후반은 커다란 정치적변동이 발생했던 시기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한다. 백제는 그 남쪽의 가야제국과 왜국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대결하고자 한다. 당시 왜국은 특히 철자원을 한반도의 가야국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고, 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 의해 무너지면 대국 고구려의 다음 차례는 왜국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왜국도 백제에 호응하여 참전한다. 이를 계기로 왜국에 한반도의 기마술이 도입되고 다양한 기술과 학문과 문화가 대거 유입된다. 즉 왜국의 문명화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가까운 아스카(近つ飛鳥)'는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위치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은 규슈를 거쳐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도착하는데, 마치 가야의 김해가 중국, 일본, 인도와의 교역을 주도했던 동아시아의 국제교류거점이었던 것처럼 오사카항은 이 시기에 나라의 '먼 아스카', 즉 야마토조정의 국제교류거점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사카이(堺)시의 시청사에서 찍은 닌토구(仁德)릉. 닌토쿠릉은 가까이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근처 사카이(堺)시청 전망대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사카이(堺)시의 모즈(百舌鳥)고분군의 닌토쿠(仁德, 313~387년)릉은 길이 486m로 일본 제1의 규모로 다이센(大仙)고분으로 불리는데,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대 능묘로 꼽히고 있다. 가까운 후루이치(古市)에는 길이 420m에 달하는 곤다야마(譽田山)고분, 즉 오진료(應神陵)고분이 있다.

사카이시 청사에서 닌토구릉을 설명하는 일본 문화해설사

사카이(堺)시의 닌토구릉은 무덤 주위에 3중으로 해자를 두르고 물을 채웠다. 바닥면적이 40만평에 해당하는데, 무덤의 둥근 부분에 시신을 묻고 앞쪽 네모난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닌토구릉의 해자 주변에는 주분에 부속하는 다양한 소형의 배총(陪塚)이 마치 위성처럼 배치되어 있다.

이 배총은 기본적으로 군사나 제사라는 특정한 직무로 주분의 피장자를 모셨던 신하들로 그 직무와 관련된 많은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닌토구릉에는 1만개가 넘는 하니와(埴輪)가 설치되었는데, 무덤을 완성하는데 연 약 20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원래 닌토구릉은 항만에 가까이 접했던 것인데, 간척사업의 결과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은 것처럼 보인다. 바다 앞에 거대한 릉을 건설한 것은 한반도에서 오는 사신이나 교역업자들에게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대의 사카이시는 야마토조정의 국제교류거점이었고 한반도에서 몰려오는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닌토구릉과 같은 거대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 중세 때에도 사카이시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 심지어 이 시기의 서양선교사들은 사카이시를 서양의 베니스와 같은 자치도시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무로마치막부나 센카쿠시대의 다이묘의 주된 경제적 기반은 상업자본이었는데, 상업자본이 가장 번성한 도시가 바로 사카이시였던 것이다.

/임병덕(충북대 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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