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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 - 오사카박물관과 나니와 궁적

코토쿠 천황, 소가씨 피해 大版에 나니와궁
일본 최초의 가나 목간도 이곳에서 출토돼
나니아궁, 對한반도와 교역의 '관문' 역할
나니와 출입 외교사절 통해 국제정보 독점

  • 웹출고시간2015.09.17 19:59:13
  • 최종수정2015.11.30 18:50:43
[충북일보] 7세기의 한반도의 정세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을 둘러싼 격동의 세기였고, 왜국도 또 그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640년대 제국은 모두 쿠테타나 정변에 의해 권력의 집중이 꾀해지고 있었다. 백제의 후예인 소가씨도 645년 나카노오에노미코(中大兄皇子)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 등에 의해 쫓겨났다.

오사카성

나카노오에는 고토쿠(孝德)를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자가 되어 긴박한 한반도 정세를 배경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행하였다. 나카노오에는 수군을 주력으로 하여 바다를 건너갔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많은 백제의 유민과 함께 퇴각했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국제적 분쟁을 배경으로 중앙집권국가 건설을 모색했다. 이를 계기로 '천황'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였고 '왜'라는 칭호 대신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ㆍ이키ㆍ큐슈의 북부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667년에는 수도를 오미(近江) 지역의 오쯔(大津)으로 옮겼다.

나니와와 요도가와(淀川), 야마토가와(大和川) 수계(水系)와 일본고대의 수도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이카 개신이 있던 645년을 시점으로 759년까지 115년간의 시기는 정치사회사적으로 일본이 고대국가, 즉 율령국가가 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율령국가란 당나라 및 우리나라의 율령을 규범으로 제정한 법전에 의한 절대적 권력을 가진 황실에 지배되는 국가라는 의미다.

곧, 일본에서 덴지(天智)·덴무(天武)·쇼무(聖武)로 이어지는 강력한 천황이 나타나는 시기이고, 수도로 말하자면 아스카(飛鳥), 나니와(難波), 오미(近江), 후지와라경(藤原京), 나라(奈良)로 기반이 고정되어 가는 시기이다. 이 가운데 나니와에는 다이카개신 직후인 645년에 나니와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652년에 완성한다.

나니와, 즉 '나니와즈(難波津)' 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의 옛 지명으로 글자 그대로 '험난 파도의 항구'라는 뜻이다.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바로 오사카 항, 즉 나니와에 닿는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를 확립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도성인데, 야마토정권은 처음에는 나라 남부의 '먼 아스카'에 도성을 세웠다.

7세기에서 9세기의 일본은 '먼 아스카'를 중심으로 한 '중앙교역권'과 규슈와 오사카항에 이르는 '세토내해교역권'이 있었는데, 이 2대교역권을 연결하는 중계항이자 물류센터가 바로 나니와이었다. 그래서 나니와에는 물류저장창고인 거대한 고상창고가 수십 채 건설되었다.

코토쿠(孝德)가 야마토의 도읍을 떠나 바다에 면한 항구이기도 한 나니와에 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궁(難波長炳豊·宮)을 세우고 그곳으로 거쳐를 옮긴 것은 아마도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계의 소가씨를 피한 천도였을 것이다.

나니와궁에서 출토된 무신년(戊申年)목간

그 나니와 궁은 어디에 있을까. 그 해답을 일본의 고고학자가 심혈을 기울려 찾아냈다. 바로 오사카성의 바로 옆이었다. 사료로만 전해지던 나니와궁의 실체는 1950년대 이래 수십년간의 발굴을 통해 오사카성 남쪽 일대에 두 시기에 걸쳐 조성된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나니와 궁터와 오사카성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졌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맨 위층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게 만들었는데, 첫 번째 10층의 테마가 '나니와시대'이다. 10층에서는 스크린을 통해 음악과 설명이 곁들려진 '나니와시대'의 의례가 연출된다.

10층전시실에 본 나니와 궁적유적

'나니와시대'에 대한 연출이 끝나면 스크린이 올라가고 스크린의 창문을 통해 나니와궁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문을 통해 나니와궁의 유적지를 전시실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흡사 멀리 바라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경관 구성 재료의 일부로 이용하는 차경이라는 일본의 정원양식을 보는 것 같다. 전시실에는 전기 나니와궁유적지에서 출토된 목간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신년(戊申年)'목간으로 나니와궁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던 648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가나목간도 주목된다. 가나의 기원과 관련하여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목간이다. 이 목간을 보니 한국에서도 최근 백제목간을 이용하여 국어사연구에 큰 성과를 보이고 있는 성균관대학교의 권인한교수가 생각이 났다. 백제목간이 국어사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듯이 가나문자목간을 비롯하여 방대한 일본의 출토목간은 일본의 가나사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 최초의 가나문자목간

이밖에도 많은 목간이 전시된 것은 아니지만, 관리인사평가 내용을 담은 인사평가목간, 주술을 행할 때 사용하는 주부목간(呪符木簡) 등이 보인다. 일본에서는 나라의 헤이죠코를 비롯하여 40만간이상의 목간이 발굴되어 일본의 고대사연구의 실증적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한국에서 목간은 매우 적은 수량이 출토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60년대에 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였고 70년대 이후에는 고고학자들의 거친 발굴이 거듭되면서 목간이 나올만한 유적지들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된 이유가 크지 않을까 싶다. 목간은 습지나 혹은 역으로 아주 건조한 지대라는 조건에서 보존될 수 있다. 청주주변에 그러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는 청주 상당산성의 저수지를 꼽을 수 있다.

물론 단지 가능성만 가지고 발굴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청주에서 의미를 부여할만한 목간이 출토된다면 직지와 함께 문화도시 청주의 위상을 한 층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유물이 될 것이 틀림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니와는 나라의 야마토정권의 해외창구, 즉 주로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는 문화ㆍ정보유입의 창구였다. 나니와는 요도가와(淀川)ㆍ야마토가와(大和川) 수계(水系)에 의해 기나이(畿內) 중앙부와 연결이 되는 관문에 해당한다.

왜왕은 나니와를 출입하는 외교사절을 통해 국제정세의 정보를 독점하고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는 것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고대 나니와에 외교시설이 설치되고 나니와궁이 건설된 것은 이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소위 전기나니와시대의 궁은 652년에 완공되고 후기나니와 궁은 726년에 건설되어 744년에 완성된다. 전기 나니와궁의 건물은 모두 나무지붕이고 또한 귀족의 거주공간에 세워진 조당은 기단부나 초석 없이 기둥을 세웠다. 그에 비하여 후기 나니와궁은 기와지붕으로 변모하고 후기 조당 건물은 기단부와 초석을 설치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천황권의 확립과 율령체제의 정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니와궁 아래층 유구에서는 6세기 전반의 신라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나니와궁이 바로 한반도로부터 각종 선진문물과 교역품을 수입할 수 있는 항구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유물이다.

/ 임병덕(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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