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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조석윤 한시 '고객행'

한시로 17세기 충주 목계사람 생활상 정밀하게 표현
출항전 반드시 점으로 날짜 택일하고 뱃전에서 고사
갑판에는 햇빛·비를 피할 수 있는 '봉옥' 구조물 존재
"쌀값·소금값 얼마나 올랐나요" 스치는 배에서 대화

  • 웹출고시간2015.08.25 09:01:24
  • 최종수정2015.08.25 09:04:58
[충북일보] 서쪽에서 올라오는 배 구면의 동무를 만나면
가끔가다 서로 노를 멈추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요즈음 산골짝 고을에 소금값이 많이 올랐던 걸
서울에선 쌀값이 근래 얼마나 하던가?-<'고객행' 제 21~24구>

과거 목계포구가 있는 곳의 모습. 과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충주의 목계를 한시의 주제로 쓴 문인으로 조석윤(趙錫胤·1605∼1654)이 있다. 그는 1640년(인조 18) '賈客行'(고객행)이라는 칠언고시를 썼고, 이 작품은 그의 유고 문집인 '樂靜集'(낙정집) 제5권에 실려 있다.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낙정집》은 14권 7책의 비교적 방대한 분량으로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썼다. 우암은 서문에서 조석윤의 인품을 '공은 성품이 매우 조용한 데다 아무런 탐욕이 없었기 때문에 애써 수양한 것도 없이 저절로 도(道)에 가까워졌다'라고 적었다.

◇지명 목계 1636년 해사록에 처음 등장

한시 '고객행'은 전체 30구로 구성돼 있고, 이 가운데 1·5·9·13·17구의 운자(韻字)가 다르다. 운자는 시를 지을 때 정해진 자리에 쓰도록 규정한 글자를 말한다. 이는 '고객행'이 5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목계 입구에 서있는 나루터 관련 조형물.

지명 목계(木溪)가 문헌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36년(인조 14) 김세렴(金世濂·1593∼1646)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왕래하면서 쓴 『해사록(海木+差錄)』에서 였다. 그는 이 일기에서 충주 일대의 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고개를 넘어 목계(木溪)에 있는 지평 조공숙의 집에 이르렀다. 제천현감 한필구가 와서 기다리고, 찰방 심작, 진사 심담율이 함께 와서 만났다. 첨지 유대화, 생원 이심이 가흥(可興)에서 글을 보내 왔다. 한낮에 강상(江上)에서 판서 김시양을 찾아보았는데, 눈병이 더욱 심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석양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직하고 나왔다,'-<해사록 1636년 8월 19일자>

그로부터 4년 후 쓰여진 '고객행'은 조선시대 한시 가운데 목계나루를 중심으로 생활했던 17세기 중반의 남한강 강상(江商)들의 생활상 등을 가장 적확하면서 상세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제 1~4구에는 '호미 쟁기 내던지고 이문을 좇아'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목계가 최소한 17세기 중반부터 도강(渡江)을 위한 단순한 나룻터(津)가 아닌, 상업적 포구(浦口)로 기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시 제목 가운데 '賈客' 역시 '상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목계나루 강가에 집들이 대체 몇몇 戶인고· / 집집이 배를 타고 장사치가 생애가 되었구나. / 호미 쟁기 내던지고 돛달고 노 젓기 일삼아서 / 해마다 이문을 좇아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돌아다니네.'-<고객행 제 1~4구>

제 5~8구에 의하면 당시 목계 강상들은 길(吉)한 날을 택해 출항을 했고, 그 직전에는 뱃머리에서 남한강 강신에게 고사를 지냈다.

최영준 교수가 촌로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작성한 1900년경 목계지도.

'동쪽 집 서쪽 집 어울려 동시에 발행하니 / 너나없이 말들 하길 "오늘이 가장 길한 날이지." / 뱃머리에 술 걸러서 강신께 고사를 드리는데 / 비는 말씀 한결같이 "몸 평안히 재물이 가득히."-<〃 제 5~8구>


제 9~12구에는 목계 상선의 외형을 알 수 있는 '봉옥'(蓬屋)이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봉옥은 사전상 초가집 또는 보잘 것 없는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당시 목계 상선에는 풀로 엮은 간이 지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가다가 비가 오면 蓬屋에 들어 피하고 / 가다가 바람이 불면 돛을 올려 펼치고 / 다만 근심 한 가지 있는 건 수심은 얕고 물살 사나워 / 자갈 모래 울퉁불퉁 장애가 적지 않구나.'-<〃제 9~12구>

제 13~16구에서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의 여행기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에서와 같이 남한강의 여울 극복 광경이 등장한다. 조석윤이 본 충주 목계의 상선도 '끌어 당기고 밀어 붙이는' 방법으로 여울의 장애를 극복했다.

'때로는 배 밑이 땅에 닿아서 배가 나가질 못하는데 / 어영차 끌어 당기고 밀어 붙이고. / 배가 서서히 가는 건 느려도 오히려 무방하거니 / 빨리 가다 뒤뚱하면 몹시도 겁나기 마련이라.'-<〃제 13~16구>

◇나무 주워다가 선상에서 밥짓고 닻내려 숙박

'목계의 당시 강상들은 어떻게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제 17~20구에 그 답이 있다. 의외로 뭍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배 위에서 모두 해결했다.

목계나루터는 조선시대 때 '산계진'으로 불리기도 했다.

ⓒ 여지도.
'험한 물길 지날 땐 평지가 좋다 생각 들지만 /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선 이내 다시 웃고 장난치고 / 배에서 내려 나무를 주워다 선상에서 불 피워 밥을 짓고 / 날이 저물면 닻줄을 묶고 물결 위에서 잠을 자네.'-<〃제 17~20구>

제 21-24구는 남한강을 소강(거슬러 올라감)과 하강하는 배와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배가 스쳐 지나갈 때 당시 사람들이 뱃전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소금값과 쌀값이 최고의 관심사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서쪽에서 올라오는 배 구면의 동무를 만나면 / 가끔가다 서로 노를 멈추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 요즈음 산골짝 고을에 소금값이 많이 올랐던 걸 / 서울에선 쌀값이 근래 얼마나 하던가?'-<〃제 21~24구>

제 25-28구에 의하면 목계 상인들의 활동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강물이 넘쳐 흘러도, 가물어도 걱정이었다. 조석윤은 이를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라고 표현했고, 이런 때는 괘한 헛고생만 했다.

'지난해엔 물이 흔해서 넘쳐흘러 걱정이더니만 / 올해는 너무도 가물어 물이 얕아 곤란이로군. / 어허 참, 하느님도 음양이 왜 고르지 못할까! / 우리 장삿길 나서봤자 이익은 별로 없이 고생만 막심하네.'-<〃제 25~28구>

제 29~30구는 남한강 목계 상인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것이 아닌, 조석윤 자신이 상인들에게 주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여보오 상인들이여! 당신네 탄식 그만하오 / 바야흐로 천하가 대란에 빠져 군자는 지금 이를 근심하는 판이라오'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낙정집에 실려 있는 조석윤의 시 '고객행'.

'고객행'이 지어진 시기는 병자호란(1636년·인조 14)이 끝난지 4년째 되는 해였다. 따라서 조석윤의 주문은 '지금 나라가 너무 어려우니, 불평은 삼가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용문의 군자는 인조 임금을 가리키고 있다.

◇목계 생활상 복원하는데 심층적인 정보

이상에서 보듯 조석윤의 시 고객행은 비록 한시지만 △출항전 의식 △여울 극복 방법 △선상에서의 숙식 해결 △당시 사람들의 경제적 관심사 △선상 구조물 △날씨 영향 정도 등 조선중기 목계 상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다양하면서도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목계 포구는 1900년대 들어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고, 1913년부터 충주지역에도 신작로 개설공사가 시작됐다. 더불어 같은 해 충주에도 자동차가 첫 선을 보였고, 1928년에는 충북선이 충주까지 연장·개통됐다.

그러나 그 직전까지 남한강 충주 수계에는 풍범선이 운항되고 있었다. 일부를 현대문으로 고친 <매일신문> 1912년 6월 5일자 3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거월십칠일에, 조선인 량흥실(梁興實)의 소유 풍범션 한쳑은 츙쥬군 소태면 부근 강안(忠州郡蘇台面附近江岸)에셔, 파션되얏는데, 배를 탓던 사람은, 무사하얏스나, 손해는 이백칠십원에, 달얏하다더라.'

/ 조혁연 대기자

조석윤은 누구

본관은 배천(白川). 호는 낙정재(樂靜齋)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조정호(趙廷虎)이고, 어머니는 심은(沈山+言)의 딸이다. 장유와 김상헌의 문인(제자)으로 볼 수 있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에는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했고, 대시간과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냈다.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저서로 『낙정집』이 있다.

왜 충주 목계를 소재로 했을까

조석윤은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났고, 주로 한양에서 관료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충주 목계의 상인을 소재로 생생한 칠언고시를 남긴 것은 남한강을 많이 오르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부인은 민기(閔機)의 딸이다. 민기는 제주목사와 경주 부윤을 지낸 인물로 현재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에 잠들어 있다. 즉 제천 백운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 목계나루에서 북동진을 하면 동량면 말흘산((末訖山)을 지나 제천 백운이나 원주 방면으로 향할 수 있다. 조석윤은 남한강―목계나루―제천 백운 여로를 자주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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