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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충주지역 나루와 포구

덕원창, 고려 12조창의 하나, 창동 소일마을에 위치
경원창, 세종, 충주 구휼에 창곡 사용… 화재로 소실
가흥창, 주변 사찰의 기왓장 가져다가 세조 때 건축
목계나루, 토사 쌓이면서 대체港… 충북선으로 쇠퇴

  • 웹출고시간2015.09.07 20:40:29
  • 최종수정2015.09.07 20:40:29
[충북일보] 한강은 지리적으로 한강본류·남한강·북한강 등으로 구분되고 조선시대 뱃사공과 뗏사공들은 경기도 양수리를 기준으로 하류를 아랫강, 상류를 윗강으로 불렀다.

 지류 가운데 규모가 큰 것에는 '江'(예 소양강·섬강·주천강), 이보다 작은 것에는 '川'자(예 충주 달천·장호원 청미천)를 붙였다. 江은 육로를 단절시키나 나루[渡津]는 육로 기능을 연결해 주고 있다.

남한강 지도이다. 덕흥창-경원창-가흥창-목계나루 순으로 번창하였다.(추정도)

때문에 나루의 사전적인 의미도 '강이나 내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으로, 그 기본적인 기능은 여객과 물자를 도하시키는데 있었다. 이 나루에 인마(人馬)와 물산의 유통 등 상업적인 기능이 더해지면 포구(浦口)로 발전하게 된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국의 나루는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57곳에 불과하던 것이 18세기 《여지도서》(1757)에 62곳, 19세기 《대동지지》(1865)에 이르러 100곳으로 늘어났다.

조선시대 남한강 수로에도 수십 개의 나루가 존재했고, 《세종실록》 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을 통해 충주목 나루에 대한 세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 덕흥창, 경원창과 일정 기간 공존

전통시대 충주지역 남한강 일대의 나루와 포구에는 덕흥창(德興倉)·경원창(慶原倉)·가흥창(可興倉)·목계나루 등이 존재했다.

 고려 왕조는 전국의 세곡을 저장하기 위해 12개의 조창을 설치했고, 이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소일마을에 존재했던 덕흥창이다. 국초(國初)의 조선 태종은 1411년 덕흥창보다 남쪽인 창동리 금정마을에 경원창을 설치했다.

 현대화된 창고는 건물 1동을 의미하나 전통시대에는 달랐다. 가령 덕흥창의 경우 단순한 창고시설이 아니라 고려 군현체제에서 독자적인 범위를 지닌 하나의 마을이었다. 덕흥창에 사는 창민들은 창 운영에 동원되었고, 이들은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노잡이), 잡인(雜人·잡역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경원창이 설치됐다고 해서 덕흥창이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지리지가 "경원창, 주의 서쪽 10리 연천(淵遷)에 있는데 경상도의 공부(貢賦)를 거두어 받는 곳이다. 덕흥창, 경원창 북쪽에 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 충주 남한강변의 두 창고는 일정기간 공존했다.

 세종대왕은 충주지역 백성들이 흉년으로 굶주리자 경원창의 곡식을 내어 배고품을 달래도록 했다. "충청도 관찰사가, 충주 백성이 굶주리므로 경원창의 곡식을 내어 진휼(賑恤)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3년 5월 11일자>

◇ 금천창은 창고이름 아니다

가흥지역의 전경이다. 일대에 조선시대 가흥창이 존재했다.

경원창이 사라지고 그 대체 창고로 가흥창이 세워진 것은 세조 때 발생한 대형 화재 때문이었다. 《세조실록》 7년 4월 4일자 기사에 "불이라는 것은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고의로 불을 낸 자가 있을 것이니,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추국해서 아뢰게 하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로부터 4년 후 보다 하류인 가흥지역에 가흥창이 신축됐고, 건축재료 일부는 주변 사찰의 기왓장을 사용했다.

 '호조에서 5도 경차관 김순명의 계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주 금천(金遷·)신창(新倉)의 조세를 수납하는 곳을, 청컨대 가흥역리(可興驛里)에 옮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11년 1월 13일자>

 인용문에 등장한 '금천'은 특정 조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충주 창동~남한강 일대의 탄금대 건너편 수변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가흥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번창 안 해

조선시대 가흥창이 있던 곳에 세워진 정자

가흥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번창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420년(세종 2) 송희경(宋希璟)이라는 인물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가흥역을 지나면서 '한적한 세 집이 산모퉁이 옆에 있어 / 이름은 가흥인데 흥하지 아니했네 / 잠깐 가는 말 멈추고 아전의 말 들으니 / 백성 편케 하는 일 많은데 내 무능 부끄럽네'(《일본행록》)라고 읊었다.

 목계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 것은 1636년(인조 14)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고 오면서 쓴 『해사록(海·錄)』에서 이다. "인조 14년 8월 12일 한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8월 17일 원주에 머물렀다. 19일 고개를 넘어 목계(木溪)의 지평 조공숙(趙公淑)의 집에 닿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포구로서의 가흥과 목계는 일정 기간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사월 십오일에 백씨를 모시고 고기잡이하는 집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충주로 향해 가면서 전기의 강행 절구시를 본받아 짓다'라는 긴 제목의 시에서 가흥(전자)과 목계 주변(후자)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몹시도 급한 돈어 여울에서는 / 바가지로 물 푸는 소리가 나는데 / 역참 배는 대숲처럼 빽빽이 떠 있고 / 사당 아래서는 희생을 잡는구려.'-<다산시문집 제7권>

 역참의 배가 대숲처럼 빽빽하게 떠 있다는 것은 가흥의 번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은 목계 부근의 풍광에 대해서도 '백회칠한 담장', '감청색 기와' 등 번창하는 모습으로 기록했다.

 '백회칠한 담장은 띠처럼 둘러 있고 / 감청색 기와는 용마루에 보이는데 / 막희라는 이름의 여울이 있어 / 이곳을 향해 가기가 어렵구려.'-<다산시문집 제7권>

◇ 화전으로 인해 토사 급속히 증가

조선후기 가흥일대에 토사가 쌓이면서 포구 기능이 목계나루로 옮겨갔다. 지금도 가흥일대는 수심이 깊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남한강 상류지역의 벌채와 화전으로 인해 토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면서 가흥나루가 지녔던 포구 기능이 목계로 옮겨졌다.

 영조조의 조명신(趙命臣·1684~?)은 "관동의 화전은 경작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숲을 잇따라 연소시키고, 그리고 천택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뱃길이 통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산허리 이상에다 기병(起耕)하는 것은 금지시킴이 마땅합니다"(《영조실록》 13년 2월 3일자)라고 화전 금지를 건의하였다. 비슷한 시기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몇십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서로 잇닿아 있는 산에는 한 치 긁기의 나무까지 없어졌다. 이로 미뤄보면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 장마 때마다 산이 무너져 모래가 한강으로 흘러드니 한강물이 차츰 얕아지고 있다." -<팔도총론, 강원도>

◇ 1910년도에도 소금배 올라와

목계나루는 '산계진'(山溪津)으로도 불렸다. '여지도'

목계나루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윤식이 '목계진을 건너'〔渡木溪津〕라는 시에서 "동으로 목계를 보니 쪽빛 같은 물 / 옅은 안개 낀 응봉은 깎은 듯 뾰족하네 / 젊은 아낙들 앞다퉈 곡식 항아리 가지고 와 / 강 따라 내려온 뱃전에서 소금과 바꾸네"(《운양집》)라고 적은 것을 보면 적어도 1910년대까지만 해도 충주·제천·음성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목계나루를 통해 소금을 구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계나루의 쇠퇴를 결정적으로 불러온 것은 신작로와 1928년의 충북선 조치원∼충주 구간의 개통이었다. 충북선 개통으로 인해 충주에 집산되는 곡물·담배·재목·광산물 중에 상당량이 남한강수로가 아닌 경부선으로 수송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부강에 하역된 금강소금이 충북선을 타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충주 일대는 물론 영서지역까지 공급되었다. 이로써 내륙하항 목계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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