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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비숍과 충주 가흥

양평 두물머리 거쳐 8일째 되는 날 충주 가흥 도착
당시 주막의 추녀 밑에는 상호 대신 酒燈 달려있어
강변 사람들 술 너무 마시나 그것이 불명예는 아녀
쓰러질 듯한 중앙탑에 깊은 관심 여기가 조선중심

  • 웹출고시간2015.08.10 15:05:25
  • 최종수정2015.08.10 15:05:25
[충북일보] 비숍이 탄 배는 서울 마포나루를 떠난지 3일째 되는 날 경기도 마재[馬峴]라는 곳에 도착했다. 마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대로, 지금은 다산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각선 방향으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가 위치하고 있다.(지도 참조) 비숍도 이 사실을 기록했다.

비숍이 탄 배는 3일째 되는 날 경기도 마재에 도착했다. 바로 위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우리는 마재라는 마을 앞의 분기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북쪽 지류가 내려왔고 남쪽 지류는 남으로부터 흘러오고 있었다.(…) 두 지류 사이에는 진달래꽃으로 핑크빛이 된, 숲이 우거진 예쁜 섬이 하나 있었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신복룡 역, 91쪽>

비숍은 섬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정황상 두물머리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뱀섬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팔당댐 건설로 미니 섬이 됐으나 당시에는 숲이 존재할 정도로 제법 면적이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숍은 마포를 출발한지 닷새째되는 1894년 4월 19일 경기도 여주에 도착했다. 그녀는 관련 자료를 사전에 숙지한 듯 여주를 '전 왕후(명성황후 지칭)가 태어난 곳'이라고 서술했다.

비숍이 명성황후에 대해 왜 '전 왕후'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충북 감곡과 노은으로 피신한 바 있고, 이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행방불명을 핑계로 국상을 선포한 바 있다.

남한강 여주 구간은 다른 곳에 비해 강폭이 샹대적으로 넓은 편으로 유량이 많다. 이와 관련해 비숍은 하루에 많게는 75척의 배를 봤다고 적었다.

이는 하루에 10시간 정도 배 위에 머문다고 가정할 때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1시간에 7~8척을 본 셈이 된다.

기행문에 의하면 남한강 물길을 통해 상류에서 생산된 콩·쌀·담배 등이 한양으로 송출됐고 반면 소금과 생필품이 상류로 운송됐다.

조선 4월의 공기 속에는 기쁨의 흔적이

한반도의 4월은 낮 동안은 따스하지만 밤에는 쌀쌀함이 옷소매를 파고드는 등 일교차가 심한 편이다. 비숍도 뱃전에서 그같은 날씨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으나, 생동하는 남한강 주변의 경치가 그것을 상쇄시켜 주었다. 그녀는 이같은 풍광에 대해 공기 속에서 기쁨의 흔적이 있다고 느꼈다.

비숍이 1894년 남한강 소강중에 본 충주 중앙탑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1917년 해체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다.

'화창한 계절이었는데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쌀쌀했다. 낮에는 밝은 햇빝이 비추었는데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햇빛을 받은 구름들, 싱싱한 꽃들, 선율처럼 낭낭하게 우는 새들, 풀밭과 물위를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들, 뛰노는 물고기들 등 모든 자연이 생동감있고 활기차 있었다. 바위의 갈라진 틈과 휘거나 곧게 뻗은 소나무와 이제야 잎이 생겨나는 개머루의 장밋빛이 아름다움을 주었다. 공기 속에서 기쁨의 흔적이 보였다.'-<〃>

비숍은 서울을 떠난지 8일째 되는 날 충주 중앙탑 주변에 도달했다. 일제가 1917년 해체·재조립하기 전의 중앙탑은 한쪽으로 기울고 기단 일부가 잡석으로 메워져 있는 등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사진 참조)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충청북도 충주군 중앙탑 실측도'가 5매, 관련 수선공사기초변경도가 1매, 수선공사설계도가 2매 등 총 8개의 관련 도면이 존재하고 있다. 비숍에게도 중앙탑은 강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서울에서 8일쯤 내려가면 강의 좌안에 다듬어진 돌로 쓰러져가는 탑이 한강의 굴곡에 의해 형성된 평평한 평원 한가운데 홀로 서있다. 그것에 관하여 질문하자 언제인지 모를 옛날에 이곳이 조선의 중심이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중원이라고 부른다.'-<〃>

가흥의 주막, 김종직 시에도 등장

조선시대 가흥은 역(驛)과 파발인 참(站)이 위치하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상선(商船)이 접안하는 등 목계시대 이전의 내륙 최고의 하항(河港)이었고, 때문에 주막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헌상의 기록은 조선중기로 올라가 중종대 인물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가흥참(可興站)'이라는 한시를 이렇게 읊었다.

남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충주 가흥마을 모습이다. 상전이 벽해돼 멀리 동서고속도로(평택-제천)가 지나가고 있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嵯峨鷄立嶺) / 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終古限北南) /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北人鬪豪華) / 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감식하네(南人脂血甘) / 우마차로 험난한 산 길을 통해라(牛車歷鳥道) /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農野無丁男) /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江干夜枕藉) /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학한고(吏胥何OO) /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小市魚欲縷) /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茅店酒如O) / 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醵錢喚遊女) / 머리 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翠翹凝紅藍)'-<접필재집>

이 한시는 조선시대 경상도 세곡을 계립령을 거쳐 경강(서울)으로 운반하던 과정 중의 충주 가흥 포구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종직의 이 한시를 통해 △강변에 이미 시장이 섰고 △일대 사람들은 민물고기 회를 즐겼으며 △막걸리를 파는 주막에서 돈으로 계집도 부를 수 있는 등 당시 가흥지역의 생활상을 비교적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비숍도 가흥지역 주막에서 파는 술 종류에 주막의 외형을 묘사했다. 그녀에게 가흥 막걸리의 특유한 냄새는 다소 생소했다.

비숍은 '외형상 버터 밀크를 닮은 매우 감칠맛이 도는 하얀 음료에서부터 매우 순하고 물로 희석된 강한 냄새와 타는 듯 독한 맛의 화주까지 다양하다. 이 중간에 보통이 곡주가 있는데 약간 노란 듯한 일본의 정종과 중국의 삼수(samshu)와 유사한 것으로 다소 역겨운 냄새와 맛을 지닌다'(97쪽)라고 적었다.

술고래인 이유는 차를 마시지 않기 때문

비숍이 표현한 가흥지역 주막의 외형은 상호(商號)가 없는 대신 추녀 밑에 '이곳이 주막이다'를 알리는 주등(酒燈)이 달려 있었다.

'술을 파는 사람은 긴 장대 위에 달린 실린더 모양의 등불을 추녀 밑에 다는데 그것은 옛날 영국에서 술집의 표시로 담장이 넝쿨(bush)을 키우는 것과 닮았다.'-<97쪽>

김홍도가 그린 <모당 홍이상평생도> 중 '정승 행차도'이다. 주막의 주둥(원)이 보인다. 홍이상은 충주 하담 인물이다.

주막의 주등은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 잘 묘현돼 있다. 그림을 보면 △홍이상의 가마가 주막 앞을 행차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주모인 듯한 여성이 대문을 열고 이를 빼꼼히 보고 있으며 △그 위로 주막을 알리는 주등이 내걸려 있다.(그림 참조)

김홍도가 그림의 대상으로 삼은 홍이상(洪履祥·1549∼1615))도 우연하게 충주의 인물이다. 그의 위패를 봉안한 하강서원(荷江書院)과 정자 모현정(慕賢亭)이 가흥 상류의 남한강변인 충주 금가면의 하담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눈에 비춰진 충주 가흥 사람들은 술을 너무 즐겼다.

'돌탑 근처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과음하는 습관이 드러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정박하여 밤이 되자 강가에 운집한 군중들은 보통은 한 명 혹은 더 많은 술 취한 사람들의 익살맞은 행동을 바라보며 활기를 띠었다. 한강 여행과 그후의 여행을 통해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음은 조선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것이 불명예는 아니다.'-<〃96쪽>

비숍은 이처럼 조선 사람들이 술고래인 이유를 차를 거의 마시지 않고 청량음료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름 분석했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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