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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비숍의 남한강 소강

충주-청풍 사이의 '황공탄' 지날 때는 진땀
단양부근 수계 "남한강에서 가장 아름답다"
도담삼봉·한벽루·석문 등도 생생하게 묘사
착취당하는 조선 民人들 보고는 함께 분개

  • 웹출고시간2015.08.17 18:49:04
  • 최종수정2015.08.17 19:40:50
[충북일보] 여울[riffle]은 하천 바닥이 작은 급경사를 이루어 물의 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여울의 하천바닥은 주로 굵은 조약돌이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 충주를 떠나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비숍의 배도 여울을 만났다.

"밧줄이 끊어지고 배가 돌면서 빠르게 급류의 밑까지 떠내려갔으며 배와 승객 및 장비에 파손을 입혔고 때로는 제멋대로 떠내려가기도 했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신복룡 역, 97쪽>

해동지도의 황공탄(원) 모습으로 남한강 여울중 가장 악명이 높았다.

비숍의 배가 어느 여울을 만났는지 분명치 않으나 충주~청풍 사이에 위치했던 황공탄(惶恐灘)일 가능성이 높다. 황공탄은 이름 그대로 '두렵고 공포스런 여울'이라는 뜻이다.(그림참조)

『여지도서』(1765)는 "성난 물결이 힘차게 내뿜으며 흐르고 매우 위험한 형세가 된다. 본토박이들이 말하기를, 물밑은 모두 너럭바위인데 두서너 곳은 가마솥처럼 돌이 파여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수장됐다.

정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한벽루(우측)와 청풍부 객사의 모습이다.

비숍의 배는 서울을 떠난지 10일만에 지금의 제천시 청풍면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청풍에서는 객사건물(한벽헌)과 한벽루(寒碧樓·보물 제528호)가 유명했다.

"그곳은 그럴듯해 보이는 작은 도시로 거기에는 높고 하얀 의자가 초들이 놓여진 탁자를 향해 있고, 마루 탁자 먼지가 쌓인 의자가 있는 절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관아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왕에 대한 기도와 공물을 정기적으로 올리고 있었다."(〃98쪽·그림 참조)

"한강 위의 높은 절벽 근처에는 왕의 누각이 서있었다. 그 누각은 훌륭한 느릅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몇 그루는 밑동 둘레가 20-23피트(1피트=30.48㎝)에 이르렀다."(〃98쪽·그림 참조)

비숍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조선 민인(民人)들의 불쾌한 행동을 경험해야 했다. 조선 민인들에게 푸른 눈에 코가 큰 이 중년의 여성은 '동물원의 원숭이'와도 같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청풍 강변의 촌인(村人)들은 비숍을 보기위해 물길 위의 배까지 접근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관람(?)하기 위해 달걀을 가지고 와 흥정하기도 했다.

비숍은 앞서 경기도 여주에서의 돌발 상황에 대해 "내 모자를 벗겨 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쭉 펴 보거나 머리핀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으며 나의 장갑을 벗겨 자기들 손에 끼어보며 깔깔거렸다"(〃94쪽)라고 적기도 했다.

비숍은 도담삼봉을 보고 '보초석'이라고 표현했다.

ⓒ 자료제공 = 단양군청
비숍의 배는 청풍을 떠난지 3일만에 단양에 도착했다. 단양의 경치는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중선암, 상선암 등 단양팔경으로 대변된다. 그녀도 단양팔경 가운데 도담삼봉과 석문을 둘러봤고, 이를 예리한 필체로 묘사했다.

그녀는 도담삼봉에 대해 "강변의 입구에는 톱니모양의 피라미드형 바위 3개가 보초를 서듯 버티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많은 개머루가 덮여 있었다. 이 곳이 신성시되는 것은 더할 나위도 없었다. 이 보초석들의 높이는 40-83피트에 이르렀다."(〃104쪽·사진 참조)라고 표현했다.

석문에 대해서는 "도담 바로 위쪽에는 강둑에 또 하나의 석회석 변종이 있는데 그것은 높이 127피트, 너비 30피트의 자연 교량이었고, 그 밑에는 깨끗한 잔디가 언덕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 교량의 버팀대는 완벽했다."(〃104쪽·사진 참조)이라고 적었다.

비숍은 이밖에 고수동굴도 3백15피트(약 96m) 가량 탐사했지만 등유가 부족하여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단양 부근의 남한강은 그녀를 매료시켰다. 비숍은 "이 구간이 남한강에서 가장 아름답다"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강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접어들었다. 환상적인 계곡 사이로 거대한 석회 절벽이 갈라져, 멀리 선경의 푸른 베일 속에 가린 채 부분적으로는 삼림에 가린 산봉우리와 산맥이 찬란히 시야 속으로 들러왔다. 이 강은 종종 거대한 절벽에 눌려 세찬 거품 속에 격정을 토하기도 하고 20∼30피트의 펑퍼짐한 수역으로 넓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곳에서는 에메랄드빛 물결이 찔레나 인동덩굴로 뒤덮인 바위나 혹은 자갈변이나 흰 모랫벌을 조용히 부딪히고 있었다. 공기도 마냥 상쾌하였다."-<〃103쪽>

비숍은 석문을 보고 '자연교량'이라고 적었다.

비숍의 배는 단양서 상류로 더 거슬러 올라가 충북의 마지막 수계인 영춘에 도착했다. 그녀는 영춘에 대해 썩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양반의 수탈을 목격하고 이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영춘만이 아닌 망국 직전의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많은 수의 비특권계층 사람들이 무거운 조세를 부담하며 양반들에게 억압당하고 있으며, 양반은 그들의 노동을 댓가 없이 이용함은 물론 도조(賭租)라는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수탈해 가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양반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돈을 꾸어주었다고 억지를 쓰는 방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금이나 이자같은 것은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106쪽>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은 사적 제264호로, 비교적 완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숍이 찾았던 구한말의 온달산성은 대체로 그런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달산성을 '요새'로 표현하였다. 이는 온달산성이 강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고, 또 성벽의 견고함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온달산성을 사실과 다르게 성돌이 아닌 벽돌로 쌓은 것으로 봤다.

"영춘의 급류 위쪽에는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의 급경사면에 매우 오래된 요새의 잔해가 절벽에 떠받친 채로 걸려 있었다. (…) 벽에는 회반죽을 전혀 쓰지 않았고, 6인치 이하의 두께를 가진 벽돌로 훌륭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남산이나 북한산 요새를 잘 알고 있는 밀러 씨의 얘기에 따르면 이 요새는 그 두 요새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108∼109쪽>

밀러는 비숍의 통역자로, 후에 청주시 탑동의 양관(洋館)을 건축한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식 이름은 민노아(閔老雅)이다. 온달산성은 삼국시대 때 축성됐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여행기에는 맹수인 호랑이 이야기가 간혹 등장한다. 그녀는 단양 '참수기' 마을의 성황당을 설명하면서 "그 혼령을 위하여 돌제단 위에는 떡, 술 및 돼지와 같은 음식물을 차려 놓았는데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남자의 혼령이 살고 있는 나무에는 돼지 대신에 개고기를 제공한다"(〃100쪽)고 서술했다.

그녀는 충북 오지인 영춘에 도착하자마자 나룻터 사공으로부터 전날 영춘에 호랑이가 내려왔다는 소리를 듣고,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사공은 우리에게 전날 영춘에서 호랑이가 돼지를 채어 갔으며, 손전등이 없이 숲속을 지나 나룻터까지 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공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횃불을 가지고 우리를 찾았고, 빛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108쪽>

『고종실록』 16년(1879) 7월 29일자에도 "영춘현의 호환을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베풀어 주었다"(給永春縣口+監死人恤典)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口+監死人'(남사인)은 '잡아 먹히어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땅의 호랑이는 비숍 여사가 남한강을 여행할 때만 해도 비교적 출몰이 잦았다. 비숍은 영춘을 끝으로 남한강 하강을 시작했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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