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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임란 탄금대 전투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우리나라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
역사 연구는 물론 문학 소재로도 등장
조선시대 순조·고종때도 甲제사 지내
2012년은 임란 발발 '7甲'이 되는 해

  • 웹출고시간2011.10.05 17:50:2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달천의 한자 표기는 '達川'이다. 여기서 '달래강'이라는 이름도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달천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수달(獺)이 많이 살아서'와 '물맛이 달아서' 등 두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달천수계에 수달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토산조에서 당시 충주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철, 해송자(잣), 송이, 활석(일명 곱돌), 수달 등 5가지를 적었다.

조선시대 달천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달천 물맛이 좋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보인다.

후자에 대한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함께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달천의 물맛에 대해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사진 참조)라고 적었다.

택리지는 충주목 조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달천은 예로부터 물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청정수가 흐르던 달천은 1592년 피로 물들었다. 한국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신립은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나

1592년 4월 13일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병이 부산성을 공격했고, 이튿날에는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열흘 남짓한 4월 24일 백두대간 동쪽 턱밑인 상주까지 올라왔다. 고개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길목을 차단하는 등 전술적인 이점이 있다. 따라서 과거부터 수비와 방어의 요충이 돼 왔다.

그러나 신립(申砬·1546~1592)은 백두대간 요충인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 앞 개활지에 배수진을 치는 전략을 택했다. 신립이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신립이 본래 기마에 능숙한 점과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실록 속의 탄금대 전투

임란 탄금대 전투는 탄금대 산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 앞 개활지(푸른선)에서 벌어졌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했다. 이후 제승방략(일종의 지역방어)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급조된 모집병에 있었다. 훈련을 물론 단합도 안 돼 있고, 여기에 도망병이 속출하는 등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신립(푸른선 오른쪽 가장 아래) 등 임란 탄금대 전투 참가자의 이름이 보인다.

'신립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주성(州城)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선조실록>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탄금대 열두대를 신립장군의 자결 장소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신립은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투를 했고 달천강에 투신했다. 선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도 함께 빠져 죽었다.'-<선조실록> 전투에 참가한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도 함께 희생됐다.

◇탄금대에서 기생끼고 풍악

종사관은 지금으로 치면 참모에 해당한다. 당시 신립의 종사관은 앞서 언급한 김여물(金汝山+勿·1548 ~ 1592)이다. 그에게는 김유(金流+玉·1571∼1648)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숭고하게 희생된 장소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이며 놀다가 적발됐다. 서인들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충·효로 포장된 강상윤리를 강조했다. 실록이 이례적으로 이 사건을 장문으로 다뤘다.

"김유가 충주에 왕래할 적에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탄금대 아래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아비 김여물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이 된 자로서 자기 아비가 전사한 곳에 이르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여 차마 그곳을 지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의 소행이 감히 이와 같았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인륜의 기강을 바루소서."-<선조실록>

이에 김유는 정황상 다른 사람을 사주해 억울하다는 상소문을 올리나 결국 파직당한다.

'괴산에 사는 진사 이정원 등이 상소하기를, "진천에서 충주로 갈 적에 김유가 본 고을에서 충주까지의 거리가 몇 리인가를 묻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충주는 우리 아버지가 전몰한 곳이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은 살아서 오늘까지 그대로 있으니 이는 큰 죄악이다. 어찌 차마 그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이도록 울부짖으면서…'-<〃>

◇문학의 소재도 되다

18세기 제작된 해동지도 모습이다. 야산임에도 탄금대가 강조돼 있다.우측은 충주읍성.

탄금대 전투에서는 대략 8천여명의 조선 군사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읍성내 민간인 희생까지 합치면 당시 충주목이 입었던 인적, 물적 피해는 훨씬 더 참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탄금대는 역사는 물론 종종 문학의 소재가 돼 왔다. 한시는 물론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윤계선 (尹繼善·1577∼1604)이 지은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이 유명하다.

이 소설은 주인공 파담자(波潭子)가 충주 탄금대를 지나다 잠결에 임진왜란 원혼들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제는 그들의 충성과 절개를 기리고 그리고 패전을 반성·극복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에는 모두 3수의 한시가 등장한다.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 등에 수록돼 있다.

'싸움터의 꽃다운 풀은 몇 번이나 새로웠나 / 한도 없는 향규의 꿈속의 몸이로다 / 바람 불어 오는 한식절에 / 이끼 낀 해골들은 또 저문 봄을 맞는구나'-<난중잡록>

두번째 율시에서는 당시의 참상과 함께 반성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율시는 8구로 된 한시를 말하고, 본문중 '금탄강'은 달천내지 남한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갑옷이 물을 메워 금탄강은 오열하고 / 삭은 뼈는 들에 우뚝 쌓여 월악산이 낮도다 / 뉘라서 장군으로 하여금 명예가 이르게 했던고 / 거마로 하여금 헛되이 서쪽을 정벌케 하였음은 뉘우치노라.'-<난중잡록>

세번째 시는 장시 형태로, 신립과 선조임금을 동시에 원망하고 있다.

'동쪽은 죽령, 남쪽은 새재 / 충주가 우리나라의 뛰어난 경치를 독차지하였네 / 누가 평평한 들판에 진을 치게 하였던고 / 들으니 장군이 밤중에 영을 내렸다고 / 배수진도 보람 없이 병사들의 손만 묶이니 / 회음후가 천년 뒷사람을 그르쳤네 / 임금의 수레 파촉으로 간 줄을 모르고 / 말없는 시냇가 백골은 하마 삭았네 /…/'-<난중잡록>

조선후기 최고 지식인 정약용도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를 썼다.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 목숨 바쳐 싸운 군대들 그 얼마나 가련한가 /…/'-<다산시문집 제4권>

조선왕조실록으로, 심순택이 '내년이 탄금대 희생자 甲제사가 돌아오는 해'라고 아뢰는 내용이 보인다.(푸른선 왼쪽 중간)

◇내년 임진왜란 발발 7갑주기

조선 조정은 탄금대 희생자와 관련해 국가차원의 갑(甲·60년 주기) 제사를 지냈다. 실록에 최소한 두번 보이고 있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옛날 순조(純祖) 임진년에 특별히 윤음을 내리시어 /… /고 순변사 신립, 고 종사관 김여물, 고 목사 이종장은 전쟁 터인 충주 달천에 같이 희생된 장사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고…'-<고종실록>(사진 참조)

이 글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이 순조 때 탄금대 희생자에 대한 甲제사가 있었음을 보고하면서 다시 60이 되는 내년에도 이를 올려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순택의 말이 계속된다.

'오래도록 잊지 않는 뜻과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훌륭한 덕에 대해 참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데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이어받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은덕을 갚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모두 순조(純祖) 때에 시행한 전례대로 내년 봄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고종실록>(사진 참조)

내년(2012년)은 임란 탄금대 전투의 7갑이 되는 해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충주문화원,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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